버스를 타면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바깥 풍경을 여유롭게 볼 수 있으니까요. 좌석에 앉은 저는 많은 사람들을 지나칩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주차하는 사람, 물건을 납품하는 사람…… 그들도, 저도 늘 어딘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헐벗고 있던 나무들은 초록 잎이 무성해졌다가 찬바람을 맞으면서 다시 헐벗습니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존재가 희미해지면서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단단해지는 세계. 너무 단단해서 두드려서는 깰 수 없는 그 견고함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겠고,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럼에도 펜을 놓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액셀을 밟는 기사님의 발끝에 의해 빠르게 지나친 풍경 속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라져버리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도로에 시멘트를 바르는 사람, 나무를 옮겨 심는 사람, 전광판에 글씨를 새겨 넣는 사람,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 내가 지나쳐버리는 무수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세계를 거쳐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업적을 남기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회의 전반을 구성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우리는 주로 선과 악의 잣대에서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곤 합니다. 특별하지 않은, 보편적인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만나게 됩니다. 나와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어쩌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삶. 그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게 ‘문학’이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록을 해야 합니다. 기록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내온 시간들을 각자의 기억으로만 간직하는 건, 슬프잖아요.

   집에 도착했을 때, 종일 텔레비전 채널만 돌렸을 복순씨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내 집에서 고인 채로 귀가할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복순씨. 그 힘없는 뒷모습이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요. 복순씨가 한 겹 한 겹 쌓아올린 생에 대해서 말이에요. 무기력한 뒷모습이 어쩐지 버스에서의 저와 닮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기력해진 복순씨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는 저를 볼 때면, ‘내 이야기도 꼭 써줘야 해!’ 하고 신신당부하던, 팔십 넘는 생을 살아온 복순씨의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요.

   그런 고민 속에서 ‘그림일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일기는 유년 시절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생애 첫 기록입니다. 그림과 짧은 문장으로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글이 서툰, 글과 거리가 먼, 복순씨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림일기를 선택했습니다.

   학교 숙제로 매일매일 작성했던 일기장을 볼 때면,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지곤 합니다. 어떤 땐 숙제를 내기 위해서 억지로 쥐어짜냈던 이야기도 있지만 그날그날의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했던 그 시절의 나를 만나고 올 때면 신기하기도 하고, 새롭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특별함을 잊지 않으려고 일기를 쓰곤 합니다. 일기로 쓴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분명 다르니까요.

   프로젝트 진행 방법은 이렇습니다. 매회 새로운 주제 혹은 질문을 던집니다. 일기지만 작성한 날의 이야기를 적는 게 아니라 생애 전반을 기간으로 삼고 그간 겪었던 일들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일기는 복순씨의 손끝에서 탄생할 것입니다. 손녀인 저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복순씨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기록할 수도 있지만 그런 수동적인 관계가 아닌 자발적 관계에 기반해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기록을 통해서 지난날을 떠올리고,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한 사람의 생을 들여다봅니다.
   복순씨의 글은 맞춤법도 엉망이고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을 수 있지만, 직접 기록하는 생애 첫 기록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무작정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오래전 기억은 흐릿하고, 왜곡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복순씨의 기록을 기록하며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합니다.

   한 편의 일기를 완성하는 데 오가는 소통,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여러분도 지금, 당장, 펜을 드세요.

오순도순 고슴도치

할머니와 손녀가 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할머니 한복순씨는 농부, 상인, 엄마, 할머니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손녀 박경서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복순씨의 기록을 기록하기 위해 구성된 팀입니다. 할머니와 손녀가 마주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그림일기를 통해 삶을 기록합니다.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