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받아 적어라.”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저에게 복순씨가 말했습니다. ‘뭐를?’이라고 묻기도 전에 복순씨는 문장을 뱉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서른아홉에 혼자가 됐다. 자식은 오남매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지만 팔을 걷어붙였다. 노점장사를 했다. 하루하루 벌었다. 오남매를 키웠다.
   스물둘에 시집을 갔다. 시댁 식구에게 혼자 밥해서 댔다. 혼자 노력을 했다. 발 벗고 다녔다. 장장마다 다니며 거리재비를 했다.


    “내가 고생하고 살아온 거,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줄 테니까 꼭 글로 써.”
   그렇게 열한 개의 문장을 불러준 복순씨는 ‘오늘은 여기까지만.’이라고 했습니다. 복순씨가 뱉어낸 문장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습니다.
   “할머니가 나보다 더 문장을 잘 쓰는 것 같아.”
   그다음 문장을 기다리는데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금세 잠이 든 복순씨의 얼굴을 내려다봤습니다. 굵어진 주름,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복순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을 만났던 일화, 사별한 할아버지와의 이야기, 장사하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사건 등 그날그날의 일상 말입니다. 인터뷰를 하듯 질문을 던지면 하나하나 성실히 답해주던 복순씨. 그때는 왜 그걸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복순씨는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습니다. 복순씨의 어머니는 일을 시키느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복순씨는 그런 어머니의 눈을 피해 몰래 수업을 들으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며칠 나가지도 않았는데 몰래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에게 크게 혼이 난 뒤로 복순씨는 학교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습니다.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복순씨는 무언가를 적거나 기록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렇지만 길이나 텔레비전에서 비춰주는 글자를 조그맣게 따라 읽어가는 복순씨를 볼 때면 괜히 마음이 간지러워지곤 했습니다.


   자기소개



   나는 충남 보령시 관창리에 사는 한복순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려서 살기가 어려워 학교를 못 가서 (학교를 다니고 싶은 게) 지금까지 소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글을 못 써서, 쓰지 못합니다. 내 나이가 스무 살이 넘어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를 하고 보니, 신랑이란 (사람은) 맨 술만 먹고, 각시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너무 살기가 어려워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산수도 배우고 공부도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누군가 하면 바로 신랑입니다. 그래서 하도 원이 되어 자손들은 내가 열심히 가르치려고 노력했습니다.



자화상. 복순씨의 생애 첫 그림입니다. 복순씨는 어떻게 그려야 되냐고 묻더니, 거울을 들여다보며 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턱과 이마를 나누고 눈, 코, 입을 그렸습니다. 입술과 머리카락에 색을 입혔습니다.


신랑. “너희 할아버지는 조그마하니 예뻐.” 할아버지 사진을 꺼내드릴까 하는 물음에 복순씨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행복



   한복순입니다. 지금은 너무 팔자가 좋아서 매일 먹고 놀고, 손녀들 덕분에 좋은 연속극만 손녀들이 틀어주면 나는 누워서 거울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너무 행복한 것 같습니다. 너무 행복하지요. 인제 죽기 싫어졌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거 같아요.



거울. “공부는 못 배웠지만 이건 반듯해야 할 거 아녀.” 복순씨는 선을 그으며 말했습니다. 그림은 항상 복순씨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거울입니다. 복순씨는 앉아 있는 게 힘이 들 때면 거울을 이용합니다. 자리에 누운 채로 거울의 각도를 요리조리 틀어가며 텔레비전을 보거나 사방을 비춰보곤 합니다. 거울 그림은 다른 그림과는 다르게 노란 펜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검정 펜으로 덧씌웠습니다.

   고민



   나는 고민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아주 많이 봉숭아꽃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얼굴이 나빠져서 검버섯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다마내기(양파)를 찧어서 붙이면 된다고 하기에 그것을 찧어서 하루 종일 붙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실망하고 있지요.


    요즘 복순씨의 최대 고민은 얼굴에 피어나는 검버섯입니다. 며칠 전에도 이마에 뾰루지가 올라왔는데, 점이 될 것처럼 색이 변했습니다. 복순씨는 봉숭아꽃 같이 예뻤던 얼굴이, 보얗고 고왔던 피부가 세월의 여파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시무룩했습니다. 고민에 대한 일기를 쓴 복순씨가 처음으로 제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실망하고 있지요, 다음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쓸까?”
   그동안 세 편의 일기를 쓰면서 저의 의견을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옆에서 얘기를 하면 정신 사나우니까 떠들지 말라고 했을 뿐, 내용에 대해 의견을 구한 적은 없었습니다.
   “‘실망하고 있지요.’ 이렇게만 적어도 잘 끝맺었는데. 할머니가 덧붙이고 싶으면 이어서 써도 괜찮을 것 같아.”
   복순씨는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됐어, 그럼.” 하고, 공책을 덮었습니다.




인물 그리기 연습. 위는 인물의 몸통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고, 아래는 인물의 표정에 집중했습니다.


슬픈 사람. 복순씨는 눈밑에 선을 그렸습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물었습니다. “뭐긴 뭐야, 눈물이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느냐는 복순씨의 대답에, 복순씨와 저는 서로를 쳐다보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오순도순 고슴도치

할머니와 손녀가 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할머니 한복순씨는 농부, 상인, 엄마, 할머니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손녀 박경서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복순씨의 기록을 기록하기 위해 구성된 팀입니다. 할머니와 손녀가 마주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그림일기를 통해 삶을 기록합니다.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