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여자
     엄마
     딸
     친구
     시누이
     점원
     가이드
     소녀
     젊은 남자
     남자
     교사


     1장. 백화점
     여행 가방을 파는 상점. 여자가 진열장 앞에 멍하게 서 있다.
     점원이 다가가도 여자는 눈치채지 못한다.
     점원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는 놀라 뒷걸음질하다 휘청거린다.


점원
     (부축하며) 괜찮으세요?
여자
     아, 네.
점원
     죄송해요, 놀라셨죠?
여자
     아니에요.
점원
     아까 전부터 서 계셔서, 뭐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나 했어요.
여자
     그런 건 아니고……
점원
     아까 전부터 서 계셔서, 뭐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나 했어요.
여자
     그런 건 아니고……
점원
     저기…… 괜찮으세요?
여자
     네?
점원
     얼굴이 되게 창백하세요.
여자
     아…… (손으로 얼굴을 만져본다)
점원

     일단 들어오세요.

     점원, 여자를 가게 안으로 안내한다. 작은 의자를 꺼내 여자를 앉게 한다.


점원
     잠시만요.

     점원, 물을 한잔 가져다준다. 여자, 물을 마신다.


여자
     감사합니다.
점원
     천천히 드세요. 물도 갑자기 마시면 체해요. 혹시 전에도 몇 번 오지 않으셨어요? 밖에서 구경하시는 거 봤어요. 제가 사람들 얼굴을 잘 기억하거든요.
여자
     이상하다 왜 기억이 안 나지……
점원
     들어온 적은 없는데 밖에서 계속 보시더라고요.
여자
     아, 이 앞에 버스 정류장 가려면 삥 돌아야 하는데, 여길 통해서 가면 훨씬 빨라서 매일 들어오긴 해요. 회사가 여기 뒤에 있거든요.
점원
     이 뒤에 파란색 빌딩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셨구나. 저는 저 가방이 마음에 드시나보다 생각했어요. (미소 지으며) 입술이 좀 빨개졌어요. 아까는 파랬는데.
여자
     그래요?
점원
     아까 전부터 서 계셔서, 뭐 특별히 찾으시는 게 있나 했어요.
여자
     그런 건 아니고……
점원
     저도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거든요. 백화점이나 지하철처럼 사람 많은 데에서 갑자기 얼굴이 하얘지면서 휘청하다가 그대로 쓰러지는 거예요. 병원에 갔더니 뭐라더라, 미주 신경성 실신? 젊은 여자들이 많이 쓰러지는데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컨디션 안 좋고 스트레스받아서 그런대요. 그럴 땐 그냥 자리에 앉으면 좀 있다 정신이 돌아와요. 그런데 그때를 딱 놓치면 핑그르르 하는 거죠. 넘어지다가 재수 없으면 머리도 다치고 막…… 제 친구가 그랬거든요. 어머, 바쁘신데 제가 너무 떠들었죠.
여자
     아니에요. 아니에요. (일어나려 한다)
직원

     (제지하며) 어, 어, 그렇게 벌떡 일어나면 어지러워요.

     여자, 점원의 제지에 놀라 앉는다.


점원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요, 뭐. 조금 더 앉았다 가세요. 천천히 캐리어도 보시구요. 여행은 어디로 가세요?
여자
      (미소 짓는다)
점원
     어디 좋은 데 가시나보다. 대부분 손님들이 비행기 티켓 끊으면 제일 먼저 가방부터 사러 오시거든요.
여자
     아직 계획은 없어요.
점원
     그럼 가방부터 먼저 사두세요. 저 그런 속담도 들었는데, 드레스가 있으면 파티에 갈 일이 생긴대요.
여자
     그런 속담이 있어요?
점원
      드레스, 파티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까 어디 외국 속담인가 봐요. 물건 팔면서 종종 써요. 가방을 사두시면 여행 갈 일이 생긴다고 하면 솔깃하시더라고요?
여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점원

     그죠? 여행을 가야지만 가방을 사나? 가방 산 김에 여행을 갈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여자, 가방을 둘러본다.


여자
     이걸로 주세요.
점원
     맨날 보시던 그거죠? 그걸로 하실 줄 알았어요. 이 제품은 백인백(Bag in bag)이라서 이게 제일 큰 캐리어고요. 이건 어디 먼 데로 오래 여행가실 때 쓰시면 돼요. 그다음 중간 크기 있고요, 그거 열면 제일 작은 거, 이건 기내반입도 가능하니까 짧게 가볍게 여행가실 때 쓰세요.
여자
     그럼 제일 작은 것 안에는 뭐가 있어요?
점원
     이 안에요? (열어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이게 끝이에요.
여자
     그거 같네요. 러시아 인형. 인형 안에 또 인형 있고 그 안에 또 인형 있고.
점원
     (포장하느라 여자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네?
여자
     마트료시카요.
점원
     거기가 어디예요? (캐리어를 포장하면서) 그런데 어디 좋은 데 갔다 오시나 봐요. 옷도 차려입으시고.
여자
     좋은 데는 아니고, 법원이요. 중요한 결정이 나는 날이어서……
점원
     아…… 결과는 잘 나왔어요?
여자

     네, 그런 것 같아요.

     사이


점원
     물 좀 더 드릴까요?
여자
     아니에요. 괜찮아요.
점원
     그럼 잠시만요. (서랍에서 무언가를 뒤져 꺼낸다) 이건 서비스로 드릴게요. 보호 커버인데, (씌우는 시범을 보이며) 이렇게 쓰시면 돼요. 이제 새 여행 가방 사셨잖아요. 뭐 묻거나 찌그러질 때마다 새 걸로 살 수는 없지만, 이렇게 커버를 씌우면 조금 나아요.
여자
     감사합니다.
점원

     가방 사셨으니까 금방 좋은 데로 여행 가실 거예요. 조심히 가세요!

     여자가 가려다가 누군가를 우연히 보고 놀란다.


여자
     어…… 아주버님. 아…… 아니에요. 네. 지금 막 다녀오는 길이에요. 고생은요…… 저기, 잠깐만요.

     여자, 방금 산 캐리어의 포장을 풀어 제일 큰 캐리어를 분리한다.
     그리고 손잡이를 뽑아 시아주버니에게 내민다.


여자
     저기, 그것 좀…… 그이한테 전해주세요. 제가 주기는 좀 그래서요. 부탁 좀 드릴게요. 그리고 가능하면 좀 빨리 전해주세요. (건네준다) ……늘 감사했어요. 들어가세요.

     여자, 나머지 캐리어를 끌고 퇴장한다.



     2장. 여자의 집
     여자, 급박한 표정으로 뭔가를 찾고 있다. 집안을 온통 뒤지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전화를 건다.


여자
     여보세요, 엄마. 혹시 내 시계 못 봤어?
엄마
     갑자기 무슨 시계?
여자
     손목시계 있잖아. 내가 맨날 차고 다니던 거.
엄마
     은색 얄쌍한 거? 그거 없어졌어?
여자
     어어, 어디 있는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
엄마
     세탁기 한번 봐.
여자
     진작에 봤지.
엄마
     애가 갖고 놀다 어디다 둔 거 아냐?
여자
     없어, 없다 그랬잖아.
엄마
     냉장고도 한번 봐.
여자
     그런 데 시계가 왜 있어.
엄마
     얘가 왜 성질이야.
여자
     이거 내 예물시계야.
엄마
     사람이 마음이 급하면 코앞에 있는 것도 안 보여. 좀 가만히 있어 봐.
여자
     어떻게 가만히 있어.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
엄마
     평생 뭐 안 잃어버리던 애가……
여자
     (짜증스럽게) 뭘 안 잃어버려. 내가 잃어버린 게 얼마나 많은데.
엄마
     어디 밖에 두고 온 거 아니고?
여자
     밖에 어디? 밖에 나가서 시계를 왜 풀어. 엄마가 우리집 왔다가 치운 거 아니야?
엄마
     애기 거 말고 네 거 만질 일이 뭐 있어.
여자
     그럼 대체 어디 있는데! 엄마 말고 뭐 만질 사람이 어디 있어? 엄마가 와서 또 치워준다고 죄 흩뜨려놓고 간 거 아니야!
엄마
     (덩달아 소리친다) 그렇게 소리 지르면 찾아져? 어? 야, 내가 너네 집에 놀러 가니? 이래서 애 봐준 공은 없다 하더니만 틀린 말 하나 없네.
여자

     그 말이 아니고, 엄마 맨날 뭐 어질러놓잖아. 나는 항상 제자리에 놓는데.

     사이


엄마
     거기 한번 봐봐. 너 화장대 서랍에 중요한 거 다 거기 놓잖아.
여자

     알았어. 이따 얘기해. (전화 끊는다)

     여자, 다시 시계를 찾기 시작한다. 서랍을 열어본다. 손으로 뒤적거린다.


여자
     이게 여기 있었네. (금색 시계를 꺼내서 본다) 언제 거야, 도대체? 내가 대학 들어갔을 때니까 10년도 넘었네, 가기는 하나? 시간이 맞네. 하긴 아빠가 비싼 걸로 하셨다더니. 좋은 시계라서 그런가.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분까지 딱 맞네. 한 번도 안 멈췄나 봐.

     손목에 시계를 찬 뒤 손을 두어 번 흔들어 본다.
     물끄러미 시계를 보다가 물을 한잔 가져와 마신다.
     아래 서랍장을 열어 살펴보다가 종이 한 장을 발견한다.


여자
     나 진짜 왜 이래, 정말. (전화를 건다)
여자
     안녕하세요? 시계 수리 맡긴 사람인데요. (종이를 확인하며) 일주일 전에요.
점원
     안녕하세요, 고객님. 어떤 증상으로 수리 맡겨 주셨습니까?
여자
     시계가 자꾸 멈췄다 갔다 해서요. 약을 갈아도……
점원
     네. 시계가 자꾸 멈추는 증상으로 접수해주셨고요. 접수번호 한 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여자
     (종이를 보며) 1654번이요.
점원
     네, 고객님. 잠시만요. (사이) 수리 맡겨주신 TX-241 모델 수리 완료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무상 AS 10년 중 현재 구입하신 지 6년 되셔서 아직 보증기간 남아 있으십니다. 세척 서비스해드렸으니까 찾아가시면 되세요.
여자
     혹시 안 찾아가면 어떻게 돼요? 그냥 버려지나요?
점원
     네……?
여자
     고장이 나서 맡겼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냥 이제는 안 찾아가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점원
     ……네?
여자
     아니에요. 곧 찾으러 갈게요.
점원
     접수증 지참하시고 오시면 빠른 처리 가능합니다.
여자

     네. 감사합니다.

     여자, 전화 끊고 다시 엄마에게 전화 건다.


여자
     찾았어.
점원
     어디서?
여자
     고장 나서 수리 맡겨놓은 걸 깜빡했어.
점원

     거 봐.

     잠시 서먹한 분위기.


엄마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다. 애는?
여자
     아빠 집 가는 날이잖아.
엄마
     (우물거리며) 애가 왔다 갔다 복잡하다 안 하니?
여자
     ……뭐 먹어?
엄마
     어, 옆집에서 고구마를 너무 많이 갖다 줘가지고, 종일 먹어도 줄지를 않네. 너 좀 갖고 가라. 이거 빨리 안 먹으면 싹 나.
여자
     옆집에서 고구마를 왜?
엄마
     주말농장인가 뭔가 한다더라. 이게 호박고구마라서 달아. 말랭이 해놓으면 하나씩 먹기도 좋아. 말 나온 김에 건조기 좀 돌려야겠다. 너도 출근하기 전에 이런 거 집어먹고 가면 좋잖아. 아침에 바쁘다고 그렇게 밥 안 먹으면 나중에 속 다 베린다고 내가 계속 얘기했지? 사람이 아침에 입맛이 없어도 이게 약이다, 밥이 보약이다 하면서 억지로라도 챙겨 먹어야 나중에 습관이 딱 붙어가지고, 그때 되면 안 먹으면 허전해.
여자
     아침밥 안 먹은 지 10년도 넘었는데 자꾸 그래.
엄마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먹으라는 말이지, 내 말은.
여자
     엄마는 나한테 할 얘기가 밥밖에 없어? 밥 먹어라, 밥 먹었냐, 이 서방 밥 차려줬냐? 애기 밥 먹였냐?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냥 굶지만 않고 다니면 되지.
엄마
     나 아니면 누가 너 밥 먹었는지 신경도 안 써. 이게 다 내가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 넌 왜 또 그렇게 듣니.
여자
     알겠으니까 밥 얘기 그만해.
엄마
     알았어. 알았어. 고구마는 어떻게 해 그러면. 갖고 가긴 해야 될 거 아니야. 한 상자 빼놔?
여자
     둘이 먹어봤자 뭐 얼마나 먹는다고……
엄마
     다 썰어서 말려? 아님 몇 개 쪄먹을 거 빼?
여자
     ……좀 빼놔.
엄마
     이거 군고구마 해서 먹어도 맛있어. 언제 올래?
여자
     다음에……
엄마
     오기 전에 전화해. 아니면 싸놓을 테니까 너 편할 때 와서 갖고 가든지.
여자
     알았어.
엄마
     김치는?
여자
     김치…… 모르겠는데.
엄마
     냉장고 봐봐, 얼마나 있는지. 없으면 같이 싸놓게.
여자
     알았어요. (끊으려 한다)
엄마
     나도 그거 한 번 해볼까?
여자
     뭐?
엄마
     주말농장. 가서 상추랑 고추랑 깻잎 같은 거 유기농으로 키우면 좋잖아. 바람도 쐴 겸. 느이 아빠는 입맛이 촌놈이라 오이에다가 초장만 내놔도 그렇게 잘 잡순다. 오이랑 방울토마토랑 상추 애호박 이런 거 심으면 채솟값도 안 들고. 그래, 얘, 네가 좀 알아봐. 요즘 그런 거 많다더라.
여자
     알았어요, 나중에.
엄마
     언제쯤 올 건데? 밥은?
여자

     가게 되면 다시 전화할게, 끊어요.



     3장. 친구의 병실
     여자, 한 손에는 무거워 보이는 쇼핑백을, 다른 손에는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다.
     병실에는 친구가 누워 TV를 보고 있다. 여자, 들어오며 문을 두드린다.
     친구는 계속 껌을 씹는다.


친구
     (일어나려 한다) 야!
여자
     일어나지 마.
친구
     (다시 누우며) 어떻게 알고 왔어, 얘기도 많이 안 했는데.
여자
     심심할까 봐. 병원에 있으면 심심하잖아.
친구
     심심하긴 해. 왜 이렇게 누워있으래? 노산이라 그러는 거지?
여자
     요즘에 많이 그렇게들 해. 초반이 제일 위험하니까.
친구
     그런가…… 애기는?
여자
     유치원 갔지.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낸다)
친구
     그거 뭐야?
여자
     이거 청포도랑 케일이랑 갈은 건데, 전에 네가 이거 맛있다고 그랬었잖아.
친구
     아, 너희 집 앞에 있는 그 카페? 나 주려고 사 온 거야?
여자
     아니, 만들었어. 몇 번 마셔 보니까 나도 만들겠더라고.
친구

     안 그래도 상큼한 거 마시고 싶었는데 잘 됐다. 근데 괜찮을까? 나 토할지도 몰라. 이것 봐.

     친구, 껌이 가득한 서랍을 열어 보여준다. 껌이 가득하다.


친구
     하루에 열 개도 넘게 씹어. 이게 주식이야.
여자

     (큰 병을 꺼내다 말고) 많이 싸왔는데. 일단 조금만 먹어봐. (병뚜껑을 연다) 괜찮겠어?

     친구, 휴지를 뽑아 껌을 뱉고는 조심스럽게 주스를 받아 마신다.
     처음에는 냄새를 맡으며 조금씩 마시다가 끝까지 마신다.
     여자, 적당한 컵을 찾아 꽃을 꽂아둔다.


친구
     나 살쪘지?
여자
     아직 찔 때 아닌데?
친구
     왜 이렇게 붓는 것 같지? 나 좀 부었지?
여자
     잘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요즘엔 덜 싸워? 임신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었잖아.
친구
     야, 또 그게 아니야.
여자
     왜 또.
친구
     내가 어제 국수가 먹고 싶었거든. 그랬더니 자기가 금방 사 오겠대. 그렇게 나가더니 국수가 없대. 그 흔한 국수가 왜 없어. 포장마차에서도 파는데! 했더니 포장마차에 다른 건 다 있는데 국수만 없대. 그리고 결국 뭐 사 왔는지 알아? 우동을 사왔어. 내가 국수 사 오랬지 우동 사 오랬냐니까 면의 굵기 차이일 뿐이라는 거야.
여자
     그래도 나름 한다고 했네. 그래서 뭐라 그랬어?
친구
     면의 굵기 같은 소리 하네. 그랬지.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순 없잖아. 그래서 “어, 괜찮아” 하는데 눈물이 줄줄 나는 거야. 이거 왜 이래? 나도 놀랐어. 근데 그거 알아? 안 울려고 코 벌렁거리면 콧물 나오는 거?
여자
     너도 참……
친구
     코 벌렁거리다가 콧물이 우동에 떨어졌는데 또 그게 왜 이렇게 웃겨? 그래서 내가 갑자기 막 웃었다? 그랬더니 표정이 되게 안 좋은 거야. 왜 똥 씹은 표정이야? 했더니 기분이 너무 오락가락해서 무섭대. (남편 목소리 흉내 내며) 자기가 지금 화난 건지 웃긴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어. 하여튼 결국 못 먹었어. 우동에 코 빠뜨려서.
여자
     (웃으며 냉장고 문 연다) 여기 찬 물 있어? 떠들었더니 목마르네.
친구
     아, 야, 근데 나 좀……
여자
     왜, 속 안 좋아?
친구
     좀…… 울렁거려.
여자
     (냉장고 문 닫으며 손을 휘저어 냄새를 없앤다) 냉장고 냄새 때문에 그러나 보다.
친구
     그 안에 롤 케이크 있어?
여자
     (냉장고 문을 빼꼼 열고 보며) 어. 줄까?
친구
     아니, 치워봐. 아, 왜 다 롤 케이크만 사와. 그 냄새 나는 걸.
친구
     치워? 냉장고 밖으로? 어떻게, 버려?
여자

     야, 야, (손으로 입 막는다)

     친구, 바닥에 구토한다. 여자, 엉겁결에 손에 든 롤 케이크 쓰레기통에 버린다.


여자
     괜찮아? (친구에게 휴지를 건네주고 수건을 찾아 바닥을 닦으려 한다)
친구

     괜찮아. 하지 마, 하지 마. 치워달라고 하면 돼.

     친구, 호출 벨을 누른다.


여자
     아니, 여기 너 슬리퍼에도 튀어가지고 이것만…… 미끄러지면 큰일 나. (계속 닦는다)
친구
     그만해. 너 비위 약하잖아. 너 다른 사람 토하는 거 보면 같이 토할 것 같다며.
여자
     아니…… (헛구역질한다)
친구
     (제지하러 침대에서 내려오려 한다)
여자
     내려오지 마. 미끄러워.
간호사
     무슨 일이세요?
친구
     제가 여기다……
간호사
     그냥 두세요, 청소해주시는 분들 계세요.
여자

     (토할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한다)

     여자, 못 참고 화장실로 달려간다.


간호사
     (밖에서 외친다) 괜찮으세요?

     토하는 소리 들린다.


친구
     야, 괜찮아?

     계속 토하는 소리 들린다.


친구
     저 또 토할 것 같아요. (입을 막는다)

     간호사, 친구와 바닥을 번갈아 쳐다본다. 간호사도 입을 막는다.



     4장. 딸의 소풍날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딸이 훌쩍이고 있고, 여자는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다.


여자
     비가 와서 못 간대. 많이는 안 오는 것 같은데……
     나 소풍 가고 싶어.
여자

     그러게. 엄마도 오늘 모처럼 월차도 내고 김밥도 쌌는데.

     사이
     빗소리가 들린다.
     딸이 훌쩍이다가 멈춘다.


여자
     우리 금붕어 보러 갈까?
     마트 갈 거야?
여자
     대신 사달라고 조르기 없기.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한다)

     딸과 여자, 마트 수족관 코너.


     우와, 엄마, 이것 봐봐. 코이래, 코이.

     주위를 지나가던 점원이 다가온다.


점원
     이 물고기는 되게 특이해요. 어항에다 기르면 작은데, 바다에서 살면 엄청 커져요. 얘는 자기가 사는 곳에 맞춰서 성장을 조절하거든요.
     우와.
점원
     신기하지?
     (사달라는 눈빛으로) 엄마.
여자
     (고개 젓는다)
     한 마리만.
여자
     우리 약속했는데.
     딱 한 마리만 사면 되잖아.
점원
     그럼 우리 친구가 밥도 주고 청소도 해주고 똥도 치우고 다 할 거야?
     네, 네!
여자
     이제 집에 가자.
     아~ 엄마~ 딱 한 마리만. 코이 너무 신기하단 말이야~ 아아아~
여자
     집에 꼬북이도 있잖아. 코이가 오면 거북이는 어떡해?
     친구가 생기니까 좋지!
여자
     너는 방에 갑자기 다른 친구가 같이 와서 살면 좋겠어?
     아니?
여자
     그럼 꼬북이는?
     ……
여자
     꼬북이는 꼬북이네 집에서, 코이는 코이네 집에서 살게 냅두자.

     (삐죽이며) 엄마는 엄마네 집에서, 아빠는 아빠네 집에서 사는 것처럼?

     여자, 못 들은 척 앞서 걸어간다.
     딸, 엄마 뒤를 따라가며 칭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여자
     (딸의 손을 잡으며) 이따 수영장 갈까?
     (입 삐죽인다)
여자
     수영하고 나서는 뭐할까?
     (삐진 듯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
     바나나 우유 먹을까?
     ……뚱빠?
여자
     응.
     그러면 코이 아빠 사주자. 아빠네 집엔 거북이 없잖아. 아빠 혼자 있잖아. 아빠네 집 가면 나도 구경하구.
여자
     아빠가 물고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내가 가서 밥 주면 되지!

     여자, 다시 수족관 코너로 간다.


점원
     코이로 드릴까요?
여자
     이거, 키우기 힘들어요?
점원

     얘는 좀 예민한 물고기라 신경을 좀 써주셔야 돼요.

     딸, 어항을 보느라 잠시 정신이 팔렸다.


점원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사실 이거 엄청 민감해요. 조금만 관리 못 해주면 금방 죽어서 가끔 애기들 몰래 다시 사러 오시는 분도 있어요. (목소리를 더 낮추며) 그냥 비슷하게 생긴 거 다른 물고기로 드릴까요? 신경 쓸 게 엄청 많대요. 어항 청소도 자주 해야 하고 먹이도 그렇고. 사실 그래서 이거 사면 어항같이 드리는 행사 중이거든요. 관리가 까다로워서 빨리 다 재고 소진시킨 다음에 다른 물고기 들여온대요.
여자
     ……그걸로 주세요.
점원
     코이로 그냥 드려요? 애기들이 돌본다고 그래도 어머니도 신경 쓰실 일이 많으실 텐데.
여자

     제가 키울 건 아니라서…… 여튼 괜찮아요.

     점원, 어항 안에 산소 공급기와 이끼 등을 설치한다.
     점원, 어항과 비닐 주머니에 든 물고기 건넨다.


     아빠가 엄청 좋아하겠다, 그치?
여자
     ……글쎄.
점원
     잘 키우세요. 혹시 문제 있으면 다시 오시고요.
여자
     여기 말고 다른 지점으로 가도 되나요?
점원
     그럼요.
여자

     감사합니다.



     5장. 파리의 한 광장
     해가 질 무렵. 여자,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있다.
     오늘 현지 투어를 해주었던 한국인 가이드가 지나간다.


여자
     가이드님!
가이드
     어, 안녕하세요?
여자
     퇴근하시는 거예요?
가이드
     네, 산책 나오셨나 봐요. 여기 광장 좋죠?
여자
     노을이 예뻐서 한참 보고 있었네요.
가이드
     혼자 나오셨어요? 친구분은요?
여자
     체력이 워낙 약해가지고, 투어 끝나자마자 자러 갔어요.
가이드
     어머님은 괜찮으세요? 오늘 많이 걸었는데.
여자
     원래 걷는 거 좋아해서 괜찮아요.
가이드
     조금 더 산책하실 거예요?
여자
     그냥 조금 앉아있다 가려고요. 아 참, 여기 커피 한잔할 만한 데 있어요?
가이드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잘 가는 카페 안내해 드릴게요.

      카페로 들어간다. 가이드, 창가 자리에 앉는다.
     여자, 따라 앉는다. 점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가이드
     뭐 드실래요?
여자
     여기는 뭐가 맛있어요?
가이드
     (잠시 생각하다가) 여기 아페리티프가 괜찮아요. 가볍게 마시기 좋아요.
여자

     (못 알아들었다) 예, 그럼 그걸로 할게요.

      가이드, 식전주 두 잔을 주문한다. 곧 점원이 와인잔을 들고 돌아온다.


여자
     어?
가이드
     파리 오신 김에 와인 한번 드셔보시고 가세요.
여자
     술은 잘 못 하는데……
가이드

     여기는 와인이 진짜 괜찮아요.

     가이드, 여자에게 잔을 건네고 자신도 잔을 든다. 둘, 건배한다.
     가이드, 담배를 꺼낸다.


가이드
     담배 피우는 거 괜찮으세요?
여자

     아, 네. (담배를 꺼내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예쁘게도 싸놨네.

     여자가 담배를 구경하자 점원이 와 라이터로 불을 붙여준다.
     가이드,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보고 웃는다.


가이드
     여행 오신 김에.
여자
     (한 손에 든 술을 마저 마신다) 그럴까요? (담배를 한 모금 피운다) 안 되는데, 끊었는데.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다시 다른 손의 담배를 피운다) 어, 이거 괜찮네.
가이드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여자
     몇 살 같아 보여요?
가이드
     40대 중반?
여자
     어머, 고맙네. 내년이면 50인데.
가이드
     친구분도요?
여자
     동갑이에요. 중학교 때 짝꿍.
가이드
     사장님은……? 원래 50대분들은 이제 자녀 키워놓고 부부끼리 많이 오시거든요.
여자
     뭐 알아서 잘살고 있겠죠.
가이드
     친구분이랑 오붓하게 오셨구나. 자녀분은요?
여자
     우리 애는 이번에 수능 봤고요. 그 친구는 애기 없어요. 결혼을 안 해서.
가이드
     아, 독신이세요?
여자
     걔가 나는 지 오빠 소개해줘서 결혼시켜놓고, 막상 자기는 결혼을 안 하더라구요.
가이드
     그럼 시누이분이세요?
여자
     남편 없으니까 이제는 시누이 빼버리고 다시 그냥 친구. 우리가 좀 복잡한 관계예요. 그나저나 가이드님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젊어 보이는데.
가이드
     전 스물여덟이요.
여자
     우리 딸하고 얼마 차이도 안 나네. 우리 애는 아직도 애긴데. 그런데 참 씩씩하네요. 이역만리 타국에서 야무지게 사는 거 보니.
가이드
     저 안 야무져요. 허당이에요.
여자
     아까 설명할 때 보니까 모르는 게 없던데요? 건축이면 건축, 미술, 역사, 불어도 잘하고.
가이드
     이 일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요.
여자
     그건 또 그렇지. 그런데 이거 진짜 괜찮네.

     가이드, 손을 들어 한잔을 더 주문한다.
     여자는 가이드의 담배를 하나 더 꺼내 피운다.
     이 상황은 몇 번 반복된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여자는 점점 취한다.


가이드
     어머님은 자유여행으로 오신 거예요? 다음엔 어디로 가세요?
여자
     몰라요. 다음에 어디로 갈지.
가이드
     안 정하고 오셨어요?
여자
     그 친구가 티켓만 끊어서 가자고 가자고 하도 그래서 정말 티켓만 딱 끊어서 왔어요. 내가 원래는 별명이 로봇이거든요. 계획대로 산다고. 그런데 또 친구 말 들어보니까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게 여행이라 그러데요? 그래서 그럼 너만 믿고 간다, 하고 따라 왔어요. 대책은 없는데 재미는 있더라고요.
가이드
     그래도 유럽 몇 번 와보셨나 봐요.
여자
     처음이에요, 처음. 온다, 온다 해도 올 시간이 나야지요. 애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시간이 안 나데요. 이번엔 연휴가 모처럼 길어서 마음먹고 왔어요.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가이드
     딱 1년이요.
여자
     어떻게, 할 만해요?
가이드
     네, 좋아요. 여기 엄청 예쁘잖아요.
여자
     그쵸. 이런 다리 하나도 그냥 세우질 않았네, 다 조각을 해가지고서……
가이드
     확실히 사람들도 한국보다는 여유가 있어요. 눈만 마주쳐도 인사하고.
여자
     한국이 팍팍하지, 다들 힘드니까. 원래 이런 쪽으로 관심이 있었어요?
가이드
     아뇨. 전혀 없었는데, 사실은 우연히 여행 왔다가 이 천사의 다리가 너무 예뻐서 뒤에 일정을 다 취소하고 여기에만 일주일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때 투어 해주셨던 가이드분이 너 나이대 여자가 유럽 여행을 오면 실업자거나 실연당한 사람인데 둘 중 뭐냐고 하시더라고요. 전 둘 다 아니라 했죠. 아, 남자 친구랑 직장 둘 다 없으니 둘 다 맞는 건가? 그랬더니 여기 관심 있으면 일하러 오라고. 몇 년 살면서 매일 투어 나오니까 다리야 지겨울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해서 한국 들어가자마자 가이드 시험 치고 나왔어요.
여자
     용감하시네!
가이드
     여기 와서 살면서부터는 뭐가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안 해요.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그 생각만 해요.
여자
     다음엔 어디로 갈 거예요?
가이드
     아직 몰라요. 일단 지금은 여기 있고, 어디 갈지는 그때 봐서 정하려고요.

     여자, 손을 들어 점원 부른다.


여자
     (살짝 혀가 풀렸다) 픽쳐 투게더. 메르씨.

     점원이 사진을 찍어주려 한다.


여자
     (건배하는 포즈 취하며) 이렇게.

     가이드도 같은 포즈를 취한다.
     점원, 여자와 가이드의 건배 장면을 찍어준다.



     6장. 시아주버니의 장례식장
     검은 옷을 입은 여자와 딸. 여자는 식장에 들어가기 전 봉투에 돈을 넣는다. 들어가려다가, 지갑에 있는 돈을 더 꺼내서 넣는다.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조의금을 넣고 영정 앞에서 두 번 절한다. 유족과 맞절한다. 여자, 시누이의 손을 잡아준다. 시누이, 여자를 식당으로 안내한다.


시누이
     작은 오빠 잠깐 나갔어. 금방 올 거야. (딸에게) 잘 있었어?
여자
     너 보러 온 거야.
시누이
     그래도 보고 가. 못 본 지 좀 되지 않았어?
여자
     뭐 꼭…… 알았어.
시누이
     (살짝 웃는다) 밥은?
여자
     됐어.
시누이
     그럼 술이라도 마시고 가.
여자
     그래. 너도 한잔 하자.
시누이

     (딸에게) 너도 한잔해. 오랜만이네. 어떻게, 여행은 잘 다녀왔니?

     잘생긴 젊은 남자가 맥주와 소주를 들고 와 상에 놓는다.


시누이
     고마워요.

     젊은 남자, 딸을 힐끗 보고 떠난다. 딸도 힐끗 남자를 본다.
     여자, 시누이의 잔에 맥주 따라준다. 시누이, 한잔 마신다.
     시누이, 여자와 딸의 잔에 맥주 따라준다. 여자, 딸 한잔씩 마신다.


여자
     누구야?
시누이
     큰오빠 아들 친구. 훤칠하지?
여자
     친구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도와주러 온 거야?
시누이
     애가 착하더라.
여자
     그러게, 바쁠 텐데. 요즘 애들 같지 않네.

     딸이 기침 소리를 낸다.


시누이
     답답하지? 저쪽 나가면 벤치 있어. 바람 쐬다 와. 아까 일 도와주던 친구도 거기 있을 거야. 얘기 좀 하든지. 애가 아주 괜찮더라.
여자
     좀 괜찮아?
시누이
     큰오빠 아팠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애들도 다행히 다 컸고…… 나야 뭐…… 새언니가 걱정이지. 언니가 병수발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어.
여자
     그래. 그랬을 거야. (술 따라준다)
시누이
     얼마 전에 큰오빠가 무슨 여행 가방 얘기를 하더라구.
여자
     여행 가방?
시누이
     캐리어 있잖아. 바퀴 달린 거. 그리고 네 얘기를 하더라고. 네가 작은 오빠랑 이혼하고 큰오빠한테 캐리어를 주면서 좀 전해달라고 그랬댔나.
여자
     그걸 아직 기억하셔?
시누이

     어, 뭐라 뭐라 얘기를 더 했는데 잘 못 들었어. (남자를 발견한다) 어, 작은 오빠. 여기야. 난 화장실 좀.

     시누이 퇴장한다. 남자 등장한다.


여자
     고생 많았네.
남자
      
여자
     건강 잘 챙겨. 형님도 심장 안 좋으셨다며.
남자
      
여자
     요즘도 운동하지?
남자
      
여자
     나이 들어서는 건강해야 돼. 그래야 자식한테 폐를 안 끼치지.
남자
      
여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남자
      
여자
     (술 따라 준다)
남자
      
여자
     응, 똑같지 뭐. 지 멋대로 살아.
남자

      
여자
     그게 남는 거지.
남자
      
여자
     사진 못 봤어?

     여자, 핸드폰을 꺼내 딸의 여행 사진을 보여준다.


여자
     여기, 이게 오로라래.
남자
      
여자
     가봐, 찾네.
남자

      
여자
     난 얼굴 보고 갈게.
남자
      
여자
     고생해요.

     여자, 남아있는 맥주를 마신다. 시누이, 돌아온다.


시누이
     벌써 얘기 끝났어?
여자
     여기 안에서 담배 피워도 되니?
시누이
     이쪽으로 와.
여자
     불 있어?

     여자와 시누이, 구석진 곳으로 이동한다.



     7장. 초등학교 교실
     빈 교실. 교사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 한 소녀가 문을 열다가 교사와 눈이 마주친다.


소녀
     안녕하세요.
교수
     왜 다시 왔어?
소녀
     뭐 놓고 가서요.

     소녀, 자기 자리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교사
     뭘 놓고 갔는데?

     소녀, 작은 찰흙 덩어리를 만지작거린다.


교사
     아까 미술 시간에 만들고 남은 거야?
소녀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 네.
교사
     선생님이 가방에 넣어줄까?
소녀
     ……
교사
     찰흙이 조금밖에 안 남았네.
소녀
     ……
교사
     아까 속상했어요?
소녀
     ……네.
교사
     왜 속상했어?
소녀
     제가, 찰흙을 갖고 왔는데, 짝꿍이랑 같이 만드는 줄 알고, 그래서 같이 만들었는데, 다 만들고 나니까 선생님이 네 것은 어딨어? 해서요.
교사
     친구를 도와서 같이 만드는 줄 알았구나.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소녀
     내 게 없으니까……
교사
    다른 사람을 도와주다 보니까 자기 것이 없어서 속상했구나. 그럼 선생님이랑 지금 하나 만들까?
소녀
     나 찰흙 없는데……
교사
     선생님 걸로 만들자.

     교사, 찰흙을 가지고 온다. 소녀의 옷소매를 접어준다.


교사
     우리 오늘 찰흙으로 가족 만들기 했었지. 누구 만들어 볼래?
소녀
     엄마요.
교사
     가족 중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
소녀
     네. 선생님은요?
교사
     선생님은…… 엄마도 좋고 애기도 좋아.
소녀
     그럼 선생님은 둘 다 만들어요.
교사
     그럴까.

     소녀와 교사, 만들기를 시작한다.


소녀
     그런데 선생님 애기는 몇 살이에요?
교사
     선생님 애기는 아직 애기야. 네 살.
소녀
     그럼 우유 먹어요?
교사
     아니, 이제 밥 먹지.
소녀
     선생님이 학교 올 땐 누가 밥 줘요?
교사
     선생님네 엄마가 주시지.
소녀
     나도 우리 엄마 회사 가면 할머니가 밥 주는데.
교사
     그런데 늦게 가면 할머니가 걱정하지 않으실까? 선생님이 집에 전화해줄까?
소녀
     맨날 놀이터 갔다 가니까 괜찮아요. 선생님도 괜찮아요?
교사
     응?
소녀
     선생님도 이거 만드느라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요?
교사
     (웃는다) 응, 선생님도 괜찮아. 거의 다 만들었네. (찰흙을 잘 싸서 손에 들려준다) 얼른 가.

     표정이 밝아진 소녀, 손을 흔들며 퇴장한다.
     교사, 창밖을 바라보다가 가방을 싸 퇴근 준비를 한다.
     줄여둔 라디오 소리를 다시 높인다.
     교사, 교실 불을 끄고 퇴장한다. 암전.





정지현

이 극은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하나의 가능성이 삭제된 후에도 남아있는 삶의 여집합을 바라보는 시도를 통해 그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 일곱 장면들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희망합니다.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