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프로젝트
4화 길
상인
복순씨에게는 세 번의 대목이 있습니다. 설, 대보름, 추석. 오랜 시간 장사를 하며 살아온 덕에 세 번의 대목이 다가오면 늘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도, 다른 날은 몰라도 추석 대목은 팔아야 된다며, 복순씨는 시장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이번 화는 복순씨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제금1)을 했는데 높은 산 밑에 외따로 (있는) 집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외진 곳이라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살기가 복잡하더군요. 남들은 짚을 사다가 가마니를 짜가지고 광천 독배로 팔러 가더군요. 그래서 나도 같이 다니며 남 하는 대로 팔아가지고 왔지요. 그것을 머리에 이고 높은 산을 올라가서 또 내려가면 다리가 누구도 모르게 막 흔들리더군요. 하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지요. 산지서 해보니까 나는 (물건을) 사서(떼서) 장사하고 딴 사람은 농사를 지어 갖고 와서 파니까 도저히 못 팔겠어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다니기 시작했지요.
5년의 시집살이 끝에 분가하게 된 복순씨는 가정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냥 농사일로만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마니 짜는 일을 시작으로 상인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래도 살려고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잠도 안 자고 했지요. 그러니까 돈이 많이 모아지더군요. 청라에서 대천까지 볏가마니를 머리에 열두 개씩 이고 장날이면 팔러 갔지요. 그런데 한번은 가마니를 이고 가는데 저수지 얼음이 얼어서 거기로 가면 가깝겠다는 생각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들어섰습니다. 중간쯤 가니까 얼음이 흔들리는 것 같더군요. 사람(이 있는지 뒤를) 돌아다봐도 나 혼자더군요. 그래서 ‘죽으면 말지.’ 하고 다행히 잘 건너갔습니다. 그렇게 청라에서 대천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되었던가요. 대천 장까지 가서 정신을 잃었던가봐요. 그래서 그걸 본 (사람들이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놨더군요. 제가 정신 차려서 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겪었습니다.
사람들을 따라 가마니를 짜서 팔던 복순씨가 혼자 독립해서 시작한 장사는 달걀 장사였습니다. 복순씨는 달걀을 갖고 시장으로 팔러 가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 도매를 했습니다. 그렇게 산 달걀을 시내에서 큰 도매업을 하는 상인에게 넘겼습니다. 도매 넘기기가 쉬워서 시작한 장사였는데 이동 중에 알이 깨지는 일이 빈번했고, 생각보다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이내 다른 아이템을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26, 27세 가도록 태기가 없어서 그만 살라고 했던 차에 누가 용한 분이 있다기에 찾아가서 물어보니 자손이 늦게 태어난다고 했어요. 다시 마음을 잡고 장사를 시작했지요. 처음으로 시작한 게 계란 장사였지요. 거리서 시장 가는 아주머니들 (나물) 캐가지고 가는 것을 사가지고 도매상에다 넘겼지요. 그런데 너무 힘들더군요. 그만두고 거리 나가서 잡곡 장사를 해보았지요. 그것도 무거워서 힘이 들더군요. 그래서 또 바꿨지요. 아모레화장품 사업을 해보았지요. 그것도 힘들더군요. 그래서 겨울에 김 장사를 시작했지요. 산지는 하도 장사가 많아서 할 수가 없더군요. 김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서울로 가지고 올라왔지요. 상회를 찾아가서 도매를 내려고 하니 상인들이 너무 하더군요. 다시 갖고 딴 시장 갔더니 상인들이 옆에 못 앉게 하더군요. 너무 많이 고생했지요.
가게를 얻지 않고 거리 장사를 했기 때문에 자리싸움이 치열했습니다. 최대한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품목이 겹치지 않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텃세를 부리는 사람한테는 욕하며 꿋꿋하게 소리쳤습니다. “나도 먹고 살아야 된다고 악썼지. 그래도 옛날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겼으니까.”
화장품 장사는 아는 친구를 통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화장품은 꽤 쏠쏠했습니다. 화장품이 무거워 들고 다니기는 어려웠지만 당시 판매 일등으로 회사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건 많이 들고 탔다고, 여기가 짐차냐고 뭐라고 했지.” 그렇지만 기차 말고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어려웠던 복순씨는 꿋꿋하게 기차를 탔습니다. 자리가 없어 입석으로 탈 경우에는 기차 출입문 귀퉁이에 서서 짐에 기대앉은 채로 서울을 오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다니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서울로 다니니까 차를 늦게 타게 되더군요. 막차를 타고 오면 청소역에 내려서 높은 길마재산을 넘어야 했지요. 막차에서 내려서 그 산을 넘어가려고 하니 마음이 두근두근하더군요. 그래도 마음을 꼭 참고 올라가기 시작했지요. 중간쯤 가다보니 무엇이 서 있더군요. 가도 오도 못하고 그냥 멈춰 있다가 두 손으로 가슴을 부둥켜안고 진땀을 흘리며 갔지요. 가다보니 그게 사람이 아니고 큰 바위더군요. 그래서 마음놓고 갔지요. 집에 가보니 신랑은 술을 많이 먹어서 정신도 못 차리고 주무시더군요.
길마재길 지나고, 숲속을 헤치고 갔습니다. (집에) 가서 보니 남자(신랑)는 술이 너무 취해서 세상모르고 자더군요. 그래서 나도 그냥 밥도 안 먹고 잤지요. 그럭저럭 한 세상 살아왔지요. 그런데 부모님들은 (신랑에게) 그래도 잘못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내가 돌아다니며 지극히 모으는 돈이나 많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복순씨가 안 해본 장사는?” 누워 있던 복순씨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옷 장사는 안 해봤지. 물건을 떼다 남으면 또다른 거 떼다 보태고 해야 되니까 구색 맞추기 어려워서 못했지. 서울역에서 하려고 했는데 시작했다가 애들 굶길까봐 못했지.” “그럼 제일 재밌었던 장사는?” “제일 재밌었던 장사가 뭘까. 김 장사. 그래도 제일 오래하고 돈 많이 벌었으니까.”
겨울 되면 김 장사, 봄 되면 나물 장사 많이 했지요. 아빠(신랑)는 일찍 갔고요. (혼자가 된 저는 장사를 해서) 다섯 남매를 키워서 다 여의었습니다. 또다시 손자 둘까지 키워서 대학까지 마쳐줬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할까요. 가끔 시장에 가서 골고루 사다가 거리에 앉아 팔지요. 그런데 너무 억울한 게 있거든요. 왜 그렇게 구청 직원들은 단속을 하는지요. 돈 많은 마트는 암만 많이 늘어놓아도 단속 안 하는데 (앉아 있는 노점상) 여자들만 단속하지요.
이번 화는 복순씨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외따로 새댁
제금1)을 했는데 높은 산 밑에 외따로 (있는) 집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외진 곳이라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살기가 복잡하더군요. 남들은 짚을 사다가 가마니를 짜가지고 광천 독배로 팔러 가더군요. 그래서 나도 같이 다니며 남 하는 대로 팔아가지고 왔지요. 그것을 머리에 이고 높은 산을 올라가서 또 내려가면 다리가 누구도 모르게 막 흔들리더군요. 하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지요. 산지서 해보니까 나는 (물건을) 사서(떼서) 장사하고 딴 사람은 농사를 지어 갖고 와서 파니까 도저히 못 팔겠어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다니기 시작했지요.
5년의 시집살이 끝에 분가하게 된 복순씨는 가정을 이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냥 농사일로만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마니 짜는 일을 시작으로 상인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래도 살려고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잠도 안 자고 했지요. 그러니까 돈이 많이 모아지더군요. 청라에서 대천까지 볏가마니를 머리에 열두 개씩 이고 장날이면 팔러 갔지요. 그런데 한번은 가마니를 이고 가는데 저수지 얼음이 얼어서 거기로 가면 가깝겠다는 생각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들어섰습니다. 중간쯤 가니까 얼음이 흔들리는 것 같더군요. 사람(이 있는지 뒤를) 돌아다봐도 나 혼자더군요. 그래서 ‘죽으면 말지.’ 하고 다행히 잘 건너갔습니다. 그렇게 청라에서 대천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되었던가요. 대천 장까지 가서 정신을 잃었던가봐요. 그래서 그걸 본 (사람들이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놨더군요. 제가 정신 차려서 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겪었습니다.
사람들을 따라 가마니를 짜서 팔던 복순씨가 혼자 독립해서 시작한 장사는 달걀 장사였습니다. 복순씨는 달걀을 갖고 시장으로 팔러 가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 도매를 했습니다. 그렇게 산 달걀을 시내에서 큰 도매업을 하는 상인에게 넘겼습니다. 도매 넘기기가 쉬워서 시작한 장사였는데 이동 중에 알이 깨지는 일이 빈번했고, 생각보다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이내 다른 아이템을 찾았습니다.
자리 잡기
처음에는 26, 27세 가도록 태기가 없어서 그만 살라고 했던 차에 누가 용한 분이 있다기에 찾아가서 물어보니 자손이 늦게 태어난다고 했어요. 다시 마음을 잡고 장사를 시작했지요. 처음으로 시작한 게 계란 장사였지요. 거리서 시장 가는 아주머니들 (나물) 캐가지고 가는 것을 사가지고 도매상에다 넘겼지요. 그런데 너무 힘들더군요. 그만두고 거리 나가서 잡곡 장사를 해보았지요. 그것도 무거워서 힘이 들더군요. 그래서 또 바꿨지요. 아모레화장품 사업을 해보았지요. 그것도 힘들더군요. 그래서 겨울에 김 장사를 시작했지요. 산지는 하도 장사가 많아서 할 수가 없더군요. 김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서울로 가지고 올라왔지요. 상회를 찾아가서 도매를 내려고 하니 상인들이 너무 하더군요. 다시 갖고 딴 시장 갔더니 상인들이 옆에 못 앉게 하더군요. 너무 많이 고생했지요.
가게를 얻지 않고 거리 장사를 했기 때문에 자리싸움이 치열했습니다. 최대한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품목이 겹치지 않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텃세를 부리는 사람한테는 욕하며 꿋꿋하게 소리쳤습니다. “나도 먹고 살아야 된다고 악썼지. 그래도 옛날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겼으니까.”
화장품 장사는 아는 친구를 통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화장품은 꽤 쏠쏠했습니다. 화장품이 무거워 들고 다니기는 어려웠지만 당시 판매 일등으로 회사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건 많이 들고 탔다고, 여기가 짐차냐고 뭐라고 했지.” 그렇지만 기차 말고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어려웠던 복순씨는 꿋꿋하게 기차를 탔습니다. 자리가 없어 입석으로 탈 경우에는 기차 출입문 귀퉁이에 서서 짐에 기대앉은 채로 서울을 오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길마재길 지나며
그래서 서울로 다니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서울로 다니니까 차를 늦게 타게 되더군요. 막차를 타고 오면 청소역에 내려서 높은 길마재산을 넘어야 했지요. 막차에서 내려서 그 산을 넘어가려고 하니 마음이 두근두근하더군요. 그래도 마음을 꼭 참고 올라가기 시작했지요. 중간쯤 가다보니 무엇이 서 있더군요. 가도 오도 못하고 그냥 멈춰 있다가 두 손으로 가슴을 부둥켜안고 진땀을 흘리며 갔지요. 가다보니 그게 사람이 아니고 큰 바위더군요. 그래서 마음놓고 갔지요. 집에 가보니 신랑은 술을 많이 먹어서 정신도 못 차리고 주무시더군요.
길마재길 지나고, 숲속을 헤치고 갔습니다. (집에) 가서 보니 남자(신랑)는 술이 너무 취해서 세상모르고 자더군요. 그래서 나도 그냥 밥도 안 먹고 잤지요. 그럭저럭 한 세상 살아왔지요. 그런데 부모님들은 (신랑에게) 그래도 잘못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내가 돌아다니며 지극히 모으는 돈이나 많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복순씨가 안 해본 장사는?” 누워 있던 복순씨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옷 장사는 안 해봤지. 물건을 떼다 남으면 또다른 거 떼다 보태고 해야 되니까 구색 맞추기 어려워서 못했지. 서울역에서 하려고 했는데 시작했다가 애들 굶길까봐 못했지.” “그럼 제일 재밌었던 장사는?” “제일 재밌었던 장사가 뭘까. 김 장사. 그래도 제일 오래하고 돈 많이 벌었으니까.”
지금은 무엇을 할까요
겨울 되면 김 장사, 봄 되면 나물 장사 많이 했지요. 아빠(신랑)는 일찍 갔고요. (혼자가 된 저는 장사를 해서) 다섯 남매를 키워서 다 여의었습니다. 또다시 손자 둘까지 키워서 대학까지 마쳐줬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할까요. 가끔 시장에 가서 골고루 사다가 거리에 앉아 팔지요. 그런데 너무 억울한 게 있거든요. 왜 그렇게 구청 직원들은 단속을 하는지요. 돈 많은 마트는 암만 많이 늘어놓아도 단속 안 하는데 (앉아 있는 노점상) 여자들만 단속하지요.
오순도순 고슴도치
할머니와 손녀가 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할머니 한복순씨는 농부, 상인, 엄마, 할머니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오셨습니다. 손녀 박경서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복순씨의 기록을 기록하기 위해 구성된 팀입니다. 할머니와 손녀가 마주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그림일기를 통해 삶을 기록합니다.
2019/01/29
14호
- 1
- 분가. 본래 살던 집에서 떨어져나와 따로 사는 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