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무대.
     무대 가운데 탁자에는 한 권의 서류 뭉텅이가 받침대에 누워 있고,
     핀 조명이 서류 뭉텅이를 비추고 있다.
     그 위로 흐르는 무언의 목소리.
     힘차게, 그러나 조금은 슬프게 목소리가 허공에 떠다닌다.


목소리
키스, 속눈썹, 입술, 다리, 하얀, 곱슬거리는, 어깨 위에, 손가락. 눈물, 다리, 다리. 입맞춤, 가슴, 봉긋한, 아름다운, 쳐진, 슬픈, 눈매, 손짓, 웃음, 또다시 키스, 입맞춤, 신음, 찡그린 얼굴. 그리고 더러운 손, 손톱, 해진, 교태. (다시 반복하며) 키스, 속눈썹, 입술, 다리, 하얀, 곱슬거리는, 어깨 위에, 손가락. 눈물, 다리, 다리. 입맞춤, 가슴, 봉긋한, 아름다운, 쳐진, 슬픈, 눈매, 손짓, 웃음, 또다시 키스, 입맞춤, 신음, 찡그린 얼굴. 그리고 더러운 손, 손톱, 해진, 교태.
단어는 돌고 돈다. 문장도 돌고 돈다. 세계가 언어 그 이상으로 뻗어가지 못한다면. 그들이 만들어놓은 단어와 문장에 인간이 갇혀버림을. 고작 이런 문장들로 인간의 전부가 묘사됨을.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오늘, 우리는 무어라고 명명되었는가?


     목소리가 사라지고, 무대 가운데 서류를 비추고 있던 핀 조명이 꺼진다.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커튼 뒤쪽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한 사람이 양손에 신문을 든 채 등장한다.
     괴롭다는 듯,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며 분개해 외친다.


창작가
아아! 또 모든 세상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구나. 그들은 창작자의 윤리를 쉽게 논하며 작품을 마치 감자 껍질을 깎듯 깎아내리지만, 그것은 모든 창작물들에게 실험성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이냐. (사이) 내 작품은 경매되었고, 이제 내가 만들어낸 텍스트들은 내 책상에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손에 경매금을 쥐고, 다음 텍스트를 구상할 시간을 얻었다.
(독백이 끝나고 창작가는 관객 쪽으로 몸을 돌린다) 여러분도 저를 비난하고 싶으십니까. 창작자의 게으름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매우 쉽겠지요. 왜 캐릭터를 더욱 확장하지 못하냐, 왜 더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질 못하냐, 왜 깊이를 확보하지 못하냐.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싼다) 창작자에게 시간은 마치 돈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돈은 더욱 가혹하죠. 자본가와 대중이 텍스트에 치루는 값이 노동자가 쌀알 한 톨을 옮기는 노동의 값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실험의 확장을 이루고, 작품에 대한 깊은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미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 길을 밟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을 버틸 한 조각 빵과 한 모금 물도 없이, 누가 사막의 길을 밟겠으며 산을 오르겠습니까?


     사이.
     창작자는 불현듯 신문을 관객을 향해 펼쳐 보인다.


창작가
여기에 적힌 글을 보십시오. 심지어 이제는 조연에 대한 확장성까지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족쇄와 같습니다. 창작을 하는 우리의 손과 발을 묶어버리는 사슬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저 책상 앞에 앉아서 세 치의 혀만 놀리는 것들…… 마치 욕조에 앉은 혁명가 마라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자신의 앉은 욕조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한심한 비평가들은 우리가 마치 물건을 팔 듯 작품을 팔아치운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우리는 모두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누가 이야기를 보면서까지 골치 아픈 일을 생각하려 하겠습니까? 대중에게 외면당한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겠냔 말입니다. 그저 한낱 불쏘시개로 전락할 뿐……


     사이.


창작가
그리고 어차피, 이것이 완전한 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안에도 현실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작가는 신문을 구겨버린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창작자는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한다.
     이윽고 커튼 뒤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비평가가 등장한다.
     그는 조그만 책상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
     무대로 들어온 비평가는 경매 탁자 옆에 자신의 책상을 내려놓는다.
     그는 반듯하게 앉아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린다.
     창작자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비평가의 눈치를 살핀다.


비평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키스, 속눈썹, 입술, 다리…… 여성을 표현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쏟아낸 단어들이군. (기침을 한다) 특히 창녀, 외국인, 노인, 어린이를 표현하는 단어와 성격들은 어째서인지 한두 가지로 일괄되는데…… (부산스럽게 적으면서) 아이쿠, 여기에 또…… (사이) 피곤하군. 언제까지 이런 묘사를 봐야 하는 건지.


     그때, 비평가가 웅크리고 앉은 창작가를 발견한다.
     고개를 갸웃하고 그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수록, 창작가는 더욱 몸을 웅크린다.
     비평가는 얼굴을 매만지며 그를 보더니, 한가운데에 있는 서류 뭉치를 들고 성큼 다가선다.
     그리고 반색을 하며 창작가를 부른다.


비평가
이게 누구신가! 안녕하시오, 거기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로 합석하시지요. 자, 이리로 오시오 어서…… (요란스럽게 손짓하며) 나의 벗을 만날 걸 예상을 하고 이렇게 좋은 술을 가지고 나왔나봅니다. 자, 어서 와요, 어서!


     그는 탁자를 돌리고, 품에서 작은 잔을 두 개 꺼내 부산스럽게 세팅을 한다.
     창작가는 쭈뼛거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마주보지 않고, 관객 쪽을 향해 앉은 두 사람.


비평가
이번에 경매로 좋은 값을 받고 작품을 팔았다지요? 축하드립니다. 혹시 제가 신문에 기고한 비평글에 마음을 많이 쓰고 계신 것은 아니십니까. 하지만 몇 번을 얘기했듯이, 당신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보편성이라는 말의 그림자에 가려 개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고 있지요. 개성이 없는 인간은 인형과도 같소. 편견으로 점철된 문장들은 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무수히 맴돌 뿐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부여받은 문장의 수가 현저히 적은 조연들에게서 이러한 문제점이 더욱 잘 보인다는 것이죠. 당신이 만들어낸 가혹한 문장들은, 조연들에게서 그 생명력을 완전히 앗아가고 있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창작가가 비평가를 빤히 바라본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유리잔을 들었다가 힘을 주어 내려놓는다.
     유리잔이 책상과 부딪혀 챙 하는 소리를 낸다.


창작가
신문을 읽은 것은 나흘 전이었지만, 그 글을 읽고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인물들에게 그만한 텍스트와 깊이를 부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늘어놓는 말들은 그저 허울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이야기에는 엄연히 주연과 조연이 나눠질 수밖에 없고, 모든 인물이 대등한 비중으로 나올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주와는 달리, 지면은 그 한계가 명확하니까요.
(비평가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그 경계를 넘는 것은 서사의 파괴이며, 그것은 실험극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환영을 받을 수 있으며, 누구의 지갑을 열 수 있단 말입니까? 질서정연한 논리에 우리를 묶어놓으려 하지 마시오. 현실은 그보다 더욱 잔인하니.

비평가
(창작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사이) 그러면 누군가의 지갑을 열기 위해 그저 서사를 위해 도구적으로만 사용되는 인물들을 계속 만들어내겠다는 뜻입니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가들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창작가
(언성이 높아진다) 왜 인물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단지 윤리일 뿐, 현실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한 권의 윤리 교과서를 쓰라는 것과 같군요. 모든 사람들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라! 조연을 주연처럼 만들어라! 라는 말과 같게 들립니다. 그것이 오히려 모순적이며, 작위적인 표현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세상은 평등한 저울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울어져 있고, 폭력적인 그 자체가 곧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움을 가장한 것이야말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 것이며, 처한 현실에서 눈길을 돌리는 것뿐 아니겠습니까.

비평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내가 말하는 것은 이들 모두의 비중을 같게 배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열고, 결정될 수 없는 인간의 비결정성을 적용해보라는 것이 어찌 그런 이야기로 튈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인물에 대한 전형성이지, 비중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물을 단순히 서사를 이끌어가기 위한 도구로만 보지 말고, 실제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성격과 개성, 그리고 가능성을 부여한다면 단 한마디의 말, 한 줄의 묘사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조연이든, 주연이든, 텍스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 부여되어야 할 권한이죠.
조연을 비결정적인 한 인간으로 본다면, 이 조연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요. 주체적인 인간이든, 수동적인 인간이든, 악인이든, 선인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단 말입니다. 주체성을 갖고 있는가, 비중이 적은가의 문제는 완전히 논외의 이야기라는 것을 왜 모른단 말입니까. 그것은 조연의 확장성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을.

창작가
나는 대중서를 만드는 작가로서, 나의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 뿐입니다. 독자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비결정적인 인간이 아닌, 결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가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군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비평가들은 관심이 없겠지요. 단순히 자신이 가진 지식을 떠들고 싶어 안날이 난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그때, 커튼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정장을 입은 한 사람이 커다란 부채꼴 모양의 스피커를 끌고 나타난다.
     그는 말없이 창작가와 비평가의 사이에 스피커를 두고 나가버린다.
     그 옆에는 은접시에 놓인 한 장의 카드가 있다.
     창작가가 카드를 찢는다. 그리고 카드에 쓰여진 글을 읽는다.


창작가
당신의 독자로부터. 스피커를 켜시오.


     창작가가 스피커의 볼륨을 올리자,
     약간의 사이를 두고 하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창작가
나는 독자입니다. 하지만 모든 독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독자들은 매우 많고, 다양한 곳에 포진해 있는, 다시 말해 한가지로 정의내릴 수 없는 존재이지요. 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입니다. 나의 목소리는 허공에 떠다니는 공기와도 같지요. 눈에 보이지 않고 투명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누구나 그렇듯, 많은 감정과 수없이 얽혀진 이야기 타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렇듯 우리도 쓰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비평가가 말하는 새로운 조연의 모습이 우리를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이지요. 급진적인 것이 꼭 혁명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가 꺼진다.


비평가
혁명일 필요는 없다! 맞는 말입니다. 혁명일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논의는 혁명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팽창하는 법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요. 그 이야기를 본 사람들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절약하고, 편하다는 이유로 수많은 창작자들은 조연에게 부여하는 텍스트를 보편성에 기대어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보편성이라는 말에 먹혀버린 개인의 감정, 가능성들은 편견과 얄팍한 서사로 대체되어 그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편견어린 텍스트로 대체되는 조연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 사회에서도 조연과 같은 소수자인 경우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누군가가 창조한 텍스트에 기대어 상상하고 있는데, 그럴수록 더욱 창작자의 게으름을 비판하며 더 나은 묘사를 위한 가능성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창작자는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와인잔을 입에 가져가 쭉 마신다.
     창작자는 비틀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서류 뭉치를 들고 말을 이어나간다.


창작가
당신은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군요. 하지만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 현실의 논리에서는 힘을 잃어버리기 마련이지. 당신은 오로지 창작자에게 그 의무와 윤리를 지우는군. 나는 내가 만드는 세상에서는 창조주나 다름없지만, 그 힘은 텍스트를 벗어나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공허와도 같지요. 펜대를 쥔 창조주는, 돈을 쥔 독자 앞에서는 그저 빵을 원하는 배고픈 노인과 다름없소.
아무래도 토론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의 윤리와 논리에 당할 재간이 없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을 내 작품에 어떻게 적용시킬지는, 저의 펜대에 달려 있으니, 어쩌면 이 싸움은 그 누구도 이기거나 질 수 없는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비평가
제가 감히 이렇게 부르는 것을 용서해주신다면, 말해보고 싶습니다. 오, 친구여! 나의 동료여! 완전히 떠나진 마십시오.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하지만 기억해주십시오. 많은 것을 쏟아붓지 않아도,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인간을 인간답게 그리는 것은 아주 작은 한 점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창작가는 커튼 뒤로 사라진다.
     혼자 남은 비평가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흥얼거리다가 와인을 들이킨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그는 스피커의 볼륨을 높인다.
     이내 독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독자
때로 창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사주지 않는 독자들을 미워하지요. 마치 자신의 손에 들린 빵을 빼앗아 갔다는 듯 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코웃음을 치게 됩니다. 우리는 쓰디쓴 것을 두려워하지만, 모험을 그리워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너무나 모순적입니다. 이 감정과 이야기를 잊게 해주는 단순한 것을 보고 싶으면서도, 그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것을 누리며 더 나은 인간임을 자각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좋은 작품은 향기를 품고, 우리는 그 향기를 맡게 되듯이,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것은 독자의 본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서사와 문장에 대한 피로도를, 비평가만 알아보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작품을 읽고 언제나 생각합니다. 소비와 비평을 동시에 하는 셈이지요. 언제나 영웅을 원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물이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작품을 비평가가 아닌, 우리 독자들이 먼저 발견할 때도 있지요. 그것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확성기가 꺼지고, 비평가는 미친 듯이 무언가를 적고 있다.
     그러다 별안간 탄성을 내지른다.


비평가
아, 정말이지 멋진 말입니다! 좋은 작품은 정말이지 향주머니와 같아서, 그 향을 누구나 맡을 수 있지요. (눈물을 잠시 훔치고) 정말이지, 우리는 이런 맑은 눈을 가진 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향주머니를 찬 이야기와, 인물들을 더욱 많은 독자들이 발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지요. 텍스트를 좀더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저자와 독자는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향주머니를 찾는 독자들의 움직임은 결국 저자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향을 계속 맡아보고 무엇이 좋은 향인지 가려내는 코를 가져야겠지요. 익숙하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좋은 향은 아닌 것처럼 말이에요.


     비평가는 다가가서 확성기의 볼륨을 높인다.
     성성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비평가
극의 막은 모두 내려갔습니다. 이 무대를 봐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 커튼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어김없이 우리들의 모습이 담겨 있죠. 우리는 주연이자, 누군가의 조연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장에 한계가 존재하지 않기를, 있는 그대로의 비결정성을 담아낼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원해봅니다.
그럼 질문해볼까요. 우리는 오늘, 무어라고 명명되었나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어라고 명명하나요?


     비평가가 커튼 뒤로 사라진다.
     무대가 어두워진다.


     끝.


비하인드랩연구소

김수현, 김원지, 장은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 속 ‘조연’을 마주한다. 조연을 표현하는 문장과 단어를 아카이빙하고, 조연에게 전사와 후사를 덧입히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이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을 깊이 성찰해나갈 예정이다.

2019/02/26
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