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
5화 배터리
소리의 겨를 줍다
장소 : 서울의 한 공항, 국제선
시간 : 전면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신 어느 하루의 어느 때
공항, 올려다보다.
소리의 겨를 살피다
소리를 채집하는 손.
하하하하 예, 알겠습니다.
얼만데요?
아, 아.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히사시부리.
하하하, 안녕하세요.
오또상.
아하!
고레데쓰네.
꿔웨이커 췽쭈이 윙콰이커 윙카이커 칭따오 따화나코 꾸웨카이.
(철컥)
오.
아, 아! 이라짜이마샤.
(쿠구궁)
꺄아아.
으하하하.
……위해 ……주시고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휴대용 배터리나 충전기용 보조 배터리, 라이터는 직접 휴대하고……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셔샬펀배터리스 리챠지펀배터리스 앤펜터 플리즈캔이프스테이인유원모.
게타이어기리와 쥬레이오보조바타리 타이키와기나이오 모치코오구다사이.
쇼지덴슈 줴데따와 이지따궈쥐 쥔쉬젠쉬지.
(쿠그그궁)
콜록.
콜록, 콜록.
아이, 마마.
손잡고 다 잘 갔네.
이께쓰마쓰.
그래, 알았어.
으히히.
공항, 내려다보다. 조금씩 하늘과 가까워지다.
채집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 ‘배터리’, 그리고 웃음소리.
겨로 만든 미니 픽션 : 「배터리」
잤니?
J의 전화.
지금 몇 시야?
새벽이야. 나 떠나.
뭐라고?
떠난다고.
어디.
어디겠어. 한 군데밖에 더 있어?
J는 휴가 때마다 교토에 갔다. 스무 살 무렵의 첫 여행이 쿄토였고, 그다음 홍콩, 타이베이, 발리와 뭄바이를 거쳐 이십대의 마지막 겨울에는 시드니의 바다가 보이는 한 호텔에서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서른셋 생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에 가서 성스러운 세수(J의 표현)를 했고, 루체른의 알프스 설경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여행을 꿈꿨다.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픽업트럭을 타고 횡단할까, 아마존이나 마추픽추에 가는 건 어떨까. 세렝게티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얼룩말이 있는 초원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겠지. 인생은 한 번뿐이고,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으니. 그러나 어쩐 일인지 J는 서른일곱이 된 이후에는 이틀이나 삼일의 짧은 휴가를 받아 교토로 갔다. 빛과 색이 아름다운 도시. 가모가와 강을 바라보며 야외 스케치를 나온 흰머리의 노인들 옆에 앉아 한가하게 맥주를 마시다 오는 것.
충전이 필요해. 내 마음의 백혈구가 균에 맞서 싸울 능력을 상실했어.
뭐라고?
백혈구.
무슨 말이야.
희망이 사라졌다고.
J는 그런 비유를 즐겨했다. 내 마음의 십이음계라느니, 맥주는 마음의 컬러리스트라느니, 마음의 돌층계를 하나씩 밟고 올라갔다느니. 이번에는 백혈구였다.
너, 그거 알아? 사람들은 되게 즐겁다. 공항에서 질질 짜고 이별하는 거, 그거 다 뻥이야.
휴대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J가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다. 소리 내서 웃어본 적이 얼마나 됐더라. 난 이제 웃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아. 누가 날 좀 웃게 해줬으면.
나 배터리 없다. 끊었다 다시 전화할게.
그냥 해.
어?
그냥 하자고. 끊길 때까지.
방전되어가는 휴대폰을 얼굴과 어깨 사이에 끼우고 나는 침대 프레임에 기대어 앉았다.
언제 오는데.
올 때 되면 오겠지. 야, 내가 그동안 교토에 몇 번 갔는지 알아?
백 번?
열한 번. 그동안 내가 몇 번 이사했게?
두 번?
빵 번. 빵이야. 교토에 열한 번 갈 동안 이사도 안 가고 직장도 안 옮겼어. 내 인생은 이대로 끝일까.
뭘 바라는데.
희망. 나도 저 사람들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 어떤 여자가 캐리어 끌고 가는데 너무 행복해 보여.
나는 지겨워졌다. 카페나 식당이었다면 앞에 있는 컵이라도 만지작거렸겠지만 지금은 새벽이었고 나는 몇 시간 후 교토의 강가가 아닌 서울의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어야 했다.
어제 내가 택시에서 무슨 얘기 들었는지 알아?
휴대폰이 꺼졌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았다. 택시에서 들은 얘기야 뻔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거나 차가 덜 밀린다거나 아침부터 여자 손님을 태워 기분이 좋다거나 혹은 그 반대라는 이야기.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보며 고민했다. 다시 걸어야 하나. 지금쯤 비행기에 탑승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면세점을 구경하고 있거나. 또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을지도. 희망이라니. 나는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모조리 지우고 싶었다.
비행기 탔어?
어, 이제 타.
도착하면 전화해. 조심히 다니고.
야, 근데 너 폰 좀 바꿔라. 어떻게 맨날 꺼지냐.
그러게.
내가 어제 택시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
멜라겨해나
소설가 김멜라와 배우이면서 영상을 만드는 이해나.
둘 다 ‘겨’울에 태어났으며 냉면을 좋아합니다.
2019/02/26
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