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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누구나 청춘을 거쳐왔잖아요.”
윤형근, 황정한(이하 ‘윤’ ‘황’) : 요즘 무슨 책 읽으시는지?
여름 : 최근에 SNS 계정을 하나 만들어서 읽은 책들을 올리고 있는데, 하다보니 도전 욕구가 생겨서인지 경영 서적부터 에세이까지 다양하게 읽고 있어요.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문유석 판사님이 쓴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이고요. 이 자리에는 기억에 남고 좀더 할 이야기가 많은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 2004)을 들고 왔습니다. 이 책의 출간 10주년을 기념해 나온 『청춘의 문장들+』(마음산책, 2014)도 챙겨왔어요.
윤 : 어떤 책인지 소개 부탁드려요.
여름 : 『청춘의 문장들』은 김연수 작가의 ‘청춘’이 담긴 산문집이에요. 작가의 기억에 남은 문장들과, 그 문장에 얽혀 자기 이야기를 썼어요. 솔직하게 쓴 책이에요. 동네 아는 오빠가 들려주는 이야기 같아요. ‘저 오빠 또 저러네.’ 싶은 오빠 있잖아요. 연애에 실패해서 술 먹고 다니는.(웃음) 근데 글을 진짜 잘 써요. 고전에서 인용한 글들도 좋아요. 사실 ‘저 오빠 또 저러네.’ 하는 것도 비난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나오는 말이죠.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윤 :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 읽어주실 수 있으세요?
여름 :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책의 서문이에요. 좋아서 통째로 사진 찍어뒀어요. 부분만 읽어볼게요.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을 읽었고 절에서 밤새 1,080배를 했으며 매일 해질 무렵이면 열 바퀴씩 운동장을 돌았고 매순간 의미 있게 살지 않으면 그 즉시 자살한다는 내용의 ‘조건부자살동의서’라는 것을 작성해 책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시 쓰는 여학생을 맹목적으로 좋아했고 초콜릿맛이 나는 ‘장미’를 피웠으며 새벽 2시 비둘기호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치는 친구를 배웅하느라 ‘나폴레옹’을 마셨고 가출에서 돌아온 또다른 친구가 들려준, 너무나 예쁘다는 강릉역 앞 창녀촌의 여자를 혼자 상상했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솔직한 부분이 너무 재밌어요. 만약에 자기를 감추려는 사람이었으면 마지막 문장을 살짝 뺐을 거 같거든요.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저는 요즘 이런 글이 참 좋더라고요. “청춘 파이팅!” 하는 글보다는 진솔하고 지질한 듯한 이야기, 읽는 사람도 “그래, 나도 이랬어. 끝.” 할 수 있고 거기서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가고 하는 글이요.
윤 : 좋네요.
여름 :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도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문장도 참 좋고요. 책 읽어보세요. 더 좋아요, 다 좋아요.
윤 : 개인의 아주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게 흥미로운데요. 여름님은 글도 쓰시니까 이런 고민을 해보셨을 것 같아요.
여름 : 제가 어딘가에 공개할만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게 스무살 대학생 때였던 거 같은데요. 교지를 만들며 글도 쓰고 웹진도 운영했어요. 웹진에 책이나 영화 리뷰 코너를 만들어서 일주일에 한 편씩 2, 3년 정도 썼어요. 나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하고 글을 올리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라든가 ‘재밌게 읽었습니다.’라는 댓글이 (가뭄에 콩 나듯) 달렸어요. 그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도, 제가 어떤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다든지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든지를 솔직하게 글로 쓰면,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공감을 해준다는 걸 알았어요. 비슷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더라고요. 사람마다 처해진 상황이나 겪은 사건이 다르고 그에 따라 생각도 다 다르게 갖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고생이라는 키워드만 놓고 봐도, 누구는 여행을 고생이라고 여기고, 누구는 알바를 하느라 고생을 하죠. 상황은 달라도 고생이라는 것에 대해 공감대가 만들어지고요. 그 공감대에 대해 찔러주면 꼭 저랑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니라도 의미 있고 재밌게 글을 읽을 수 있더라고요.
윤 : 공감대를 찔러준다는 말, 인상적입니다. 여름님이 쓴 글 중에 「나는 왜 자꾸 할 일을 미룰까?」를 읽으며 많이 공감한적이 있거든요. 저는 회사를 다니거나 글을 주기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언가를 미룬다는 것에 대해 공감대가 있어서 더 와닿았던 거 같아요. 저도 해야 할 것을 미루고 나서 나중에 자책을 많이 했는데 그 글을 읽고서 내가 왜 자꾸 일을 미루는지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게 돼서 좋았어요. 같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여름님 글에서 힌트를 얻은 셈이죠.
여름 : 부끄럽네요.
가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노래를 잘하고 싶다
윤 : 글 쓰시면서 힘드신 점이 있으신가요?
여름 : 문장 퀄리티라는 게 있잖아요. 『청춘의 문장들』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쓰지?’라고 생각했어요. 얼마 전에 같이 글 쓰는 친구가 자기감정을 기쁘다, 슬프다, 좋다 등으로 솔직히 쓰는 것보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생각하게 하는 게 좋은 거 같다고 했는데요. 그게 바로 제가 못하는 거더라고요. 아직 그런 역량이 안 돼요. 제 글의 가장 큰 장점은 제가 진짜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 생각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 그래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친구가 말한 그런 글, 문학적인 글은 좀 어려워요.
윤 : 최근에 자서전 쓰기 수업을 들었는데, 첫 수업이 자기 하루를 묘사하는 거였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드는 상황 자체를 쓰되, ‘나는 게으르다.’라는 식의 평가를 빼고 글을 써야 해요. 저는 쓰면서 ‘이게 뭐야. 아무 의미 없잖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리가 없잖아.’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른 분들과 글을 공유해보니 각자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문장이 달랐고, 그 안에서 그 사람의 성격, 감정을 느낄 수 있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황 : 여름님은 본인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보완하는 글을 써보고 싶으신가요?
여름 : 써보고 싶어요.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것만을 위해서 매진할 만큼 삶에서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가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느낌이랑 비슷해요.
그 시간에 밥을 한 끼 더 먹자
윤 : 혹시 최근에 쓴 글 중에 스스로 만족한 글이 있나요?
여름 : 「내 장점은 단점을 이긴다」2)라는 글을 썼는데, 스스로 만족한다기보다 글을 읽은 분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힘든 상황을 이겨내 한 발짝 더 내딛게 하는 힘은 내가 그 정도 힘든 일쯤은 이겨낼 장점을 가졌다는 걸 아는데서 나온다는 글인데요. 힘든 일이나 장애물 앞에서 ‘어차피 나는 잘 안 될 거야.’라는 식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어서 쓴 글이에요. ‘아니야. 너 문제없어.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사람이 혹은 그 상황이 너와 안 맞는 것뿐이야. 너에겐 잘못이 하나도 없어.’라고요. 저는 모든 사람들이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다 장점이 있고 그걸 스스로 인정하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해요. 자신감을 가지고 살면 좋겠어요.
윤 : 여름님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여름 : 어릴 적 일들과 연관이 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개성이 확실한 사람이었어요. ‘오타쿠’ 기질이 있어서 사춘기 때 애니메이션, 책을 많이 보고 좋아했어요. 좋다고 느끼는 것은 반복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도 했고요. 제 말투를 특이하다고 싫어했던 친구도 있어요. 공부만 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제 ‘개성 있음’을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는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생존하는 방안으로, 제가 가진 모든 것에서 장점을 찾아내는 기술이 생겼어요. 그렇게 안 하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지금은 스스로를 잘 인정할 줄 알아요. 덕분에 ‘장점은 단점을 이긴다’는 제목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윤 : 장점만 보고 사는 것도 쉽지는 않은 거 같아요. 어느 순간 제 삶에 빈틈이 너무 많이 보이더라고요.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던, 비어 있는 부분들이 계속 눈에 보여요.
여름 : 저는 제가 가질 수 없는 건 포기하자,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윤 : 그러다 의욕마저 없어질까봐 걱정이 드네요.
여름 :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이렇게 결론 냈어요. ‘꼭 대단한 사람이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라고요. 장점을 찾자는 말은 효율에 관한 이야기예요. ‘나는 안 될 놈이야.’라고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건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했어요. 아깝잖아요.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이럴 시간에 밥을 한 끼 더 먹자, 기왕이면 에너지를 좀더 좋은 데 쓰자, 당연히 사람이라면 우울할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다, 대신 너무 오래 끌고 가진 말자.’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있다
황 : 뜬금없는 질문인데, 고독을 즐기시나요?
여름 : 어떤 류의 고독인가요?
황 : 진공 상태, 쓸쓸한 기운을 그냥 느끼는.
여름 : 저는 사람을 엄청 가려서 만나요. 저랑 안 맞는 사람들이 많은 걸 아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혼자서 많이 걸어 다녀요.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글을 쓰는 건 저를 보여주는 거잖아요. 저를 내보내고 소진하는 것이라서, 시끄러운 고독이든 조용한 고독이든 혼자 있는 시간은 진짜 필요한 거 같아요. 중요하죠.
황 : 저는 고독까지는 아니어도 밤이 무서워서.
여름 : 어떤 밤일까요?
황 : 다 들리고 예민해지는 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제 머릿속을 헤집어놔요.
여름 : 제가 학교 다닐 때 3, 4년간 고시원에 살았어요. 처음 1년은 창문 없는 데, 나중에는 창문 있는 데로 옮겼어요. 잠이 안와서 넬 노래 듣고 혼자 땅굴 파고 그랬을 때가 있었는데, 그러다가 새벽 3, 4시까지 잠을 못 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만 하고 시간을 보냈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외로운 거예요. 그때 밖에서 쓰레기차 소리가 엄청 시끄럽게 났어요. 새벽 3, 4시면 다들 자고 있잖아요. 그런 순간에도 누군가가 있다는 게 저한테 너무 위안이 됐어요. 사람이 있다, 깨어 있다,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시간에 어떤 외로움을 보내든 누군가는 있다. 그걸 생각하니까 좀 괜찮아졌어요.
누구나 청춘을 거쳐왔잖아요
윤 : 여름님에게 청춘은 언제인가요?
여름 : 얼마 전에 좋아하는 인디밴드 멤버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청춘은 정해져 있는 거 같다고, 스물셋, 넷 정도였던 거 같다고 대답을 했어요. 그때 그럼 나는 청춘이 아닌 건가 하는 생각에 당황하면서도 뼈를 맞은 느낌이 들었는데,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정하기는 싫지만, 내 청춘은 갔다.
윤 : 청춘이 나이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여름 : 나이로 규정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청춘의 기준인 거 같아요. 제가 인생에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고등학교 때 읽은 거였는데, 그 책에 대한 기억이 굉장히 좋게 남아 있어요.
윤 : 그때가 아니라 지금 그 책을 읽었다면 달랐을까요?
여름 : 달랐을 거예요. 그때 그 책을 읽으며 받았던 느낌, 그 무언가에 공감할 수 있는 게 청춘이라면 내 청춘은 지났다고 인정을 하게 되더라고요. 저의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가동시켜보면, 제가 아직도 청춘이라면 『청춘의 문장들』 같은 책은 절대로 못 쓸 거예요.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의 순간을 사는 사람들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오히려 청춘을 거쳐온 사람들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청춘을 거쳐왔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거 같아요. 김연수 작가는 「스무 살」이라는 소설에서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 스물두 살이 되는 게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말해요. 청춘이 갔어도 그걸로 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청춘이 가기는 했으니까 인정해주자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였어요.
윤 : 통과해온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 있나요?
여름 : 돌이켜보면 청춘이라 불리는 스무 살에는, 그때는 시간을 아깝지 않게 썼잖아요. 내가 나이가 들 거라고 생각을 안 하고 살았으니까요. 그 시절의 여유가 부럽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모든 순간을 정말 미친 듯이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때 다르게 살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 같아요. 하지만 그때 그렇게 살아온 건 그럴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지요. 그때는 그때의 당위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2018년 2월 10일. 이때의 시간들을 나는 잘 보내주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B&M friend
윤형근, 김다영, 황정한. 전혀 다른 세 삶을 살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잠시 비슷한 삶을 살았다. 각자 먹고 사는 문제로 다시 세 갈래의 삶을 살고 있으나, 이 프로젝트를 빌미로 또다른 삶의 접점 하나가 발견되기를 기대한다.
2019/02/26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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