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모두 픽션입니다.

   1.


   “머짧이요?”
   고대표가 반문했다. 박작가가 끄덕이며 대답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나 <엘워드> 쉐인처럼 간지 나는 머짧 부치요. 언제까지 일스레즈만 얘기할 순 없잖아요.”
   “맞는 말인데, 아무래도 대중성이 중요하니까요……”
   고대표는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팔짱 끼고 듣고 있던 이감독이 박작가를 거들었다.
   “하긴. 다 너무 긴 머리 아님 단발이니까. 스타일도 비슷비슷하고. 새로운 걸 합시다, 새로운 거.”
   “대표님, 혹시 본인 취향이 아니라 그러세요? 아님 부치한테 돈 떼인 적 있으신가.”
   박작가 말에 이감독만 웃었다. 고대표 옆으로, 회의록 작성하던 전피디는 소리 낮춰 헛기침만 했다.
   평일 낮, 이 네 여자는 홍대역 어느 카페에 앉아 웹드라마 스토리 회의를 하고 있다. 주조연 모두 여성퀴어인 로맨스물을 만들 예정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고대표가 입을 열었다.
   “생각 좀더 해보시죠. 작가님도 머리 길이에 대한 가능성은 좀 열어두세요, 네? 머리 길이 같은 게 뭐가 중요해요? 스토리텔링이 좋아야죠. 그쵸?”
   “그게 왜 안 중요해요? 그것 자체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하는데.〈엘워드〉만들고 싶다면서요? 거기 벳이랑 티나만 사나요? 쉐인도 있고, 맥스도 있지. 대표님 너무 안전한 길만 가는 거 아니에요?”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고대표의 제스처를 무시하고, 박작가가 속사포를 쏘고 말았다. 내내 말없던 전피디가 한마디 했다.
   “감독님, 음료 나왔다는데요.”



   2.


   음료를 가지고 돌아온 이감독은 자리에 앉자마자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나 있죠. 사실은 다음 작품 스릴러 하고 싶었거든요. 나 계속 로코만 했잖아. 원래 내 취향은 스릴런데.”
   고대표는 화제 전환이 반가웠다.
   “감독님 저랑 취향이 똑같아요. 저도 스릴러 너무 좋아하거든요. <나를 찾아줘> 같은 거, 우리 다음에 꼭 해요.”
   “다음 말고 이번에. 고대표도 지금까지 로맨스만 했잖아요. 이번에 나랑 다른 장르 도전해봅시다. 퀴어여성들이 서로의 비밀을 감추고 막 사건을 파헤치고, 그러다 누구 뒤통수도 치고…… 그러다 드러나는 주인공의 반전! 마지막엔 주인공 홀로 쓸쓸하게 심야식당에서 도쿠리 한 잔을…….”
   “나라 분위기 때문에 왜색은 좀…… 민속주점으로 하시죠.”
   전피디가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감독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래, 동동주나 도쿠리니 전통술이니까.”
   “나 좋은 거 생각났어.”
   듣고만 있던 박작가가 끼어들었다. 그는 홀린 듯이 말을 이었다.
   “노년의 바지씨가 부치 주인공에게 집 한 채를 물려준 거예요. 오래 전에 부모님이 죽었다고 했던, 막내고모가 말이죠. 그곳에 주인공과 주인공 애인, 친구가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스릴러!”
   “사실 주인공 애인이랑 친구는 바람이 났고!”
   “충격에 빠진 주인공에게 더 큰 진실이 드러나는데……”
   “진실? 뭔데?”
   몰입한 이감독이 박작가를 채근했다. 박작가는 한 템포 쉬었다가 방백하듯 말했다.
   “사실 그 집은 늙은 레즈들의 요양원이었던 거죠. 바지씨 고모는 주인공에게 유산을 대가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라고 요구해요. 앞으로 이곳을 너에게 물려주겠다며, 노후대책이 될 거라고……!”
   고대표는 티 나게 한숨 쉬었다. 전피디도 타이핑을 멈춘 지 한참이었다. 이감독이 어떠냐는 듯 둘을 쳐다보았다. 박작가는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야 한다며 휴대폰 메모장 앱을 열었다.



   3.


   고대표는 쿠키를 사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여성퀴어 스릴러…… 확 땡기지 않아요?”
   “나도 스릴러 나쁘지 않아요. 작가로선 더 좋지. 아, 근데 고대표님은 머짧 부칠 왜 그렇게 싫어해? 진짜 돈 떼였어?”
   이감독과 박작가가 한마디씩 했다.
   전피디는 안경을 고쳐 썼다. 이제 자신이 나설 타이밍이었다.
   “작가님.”
   “응, 피디님.”
   “말씀하신 머짧 캐릭터가 현실감도 있고, 좋은데요. 제작 여건상 좀…… 일단 숏컷 배우가 흔하지 않은 거 아시죠? 그렇다고 출연료도 얼마 못 주는데, 머리 자르라고 할 수도 없구요. 여자 배우들한테 머리 길이 진짜 중요하잖아요. 저도 머짧 스타일 정말 좋아는 하는데요.”
   박작가는 알아들었다는 듯 똥 씹은 얼굴로 딴 곳을 보았다. 전피디는 이감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감독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솔직히 대표님, 전피디 말 잘 듣잖아요. 얘기 좀 잘 해봐요. 우리도 도전 한번 해보자. 새로운 거 해보자.”
   “한 장소에서만 벌어지는 얘기고, 배우 적게 나오고, 러닝타임 짧게 보장된다면 가능은 한데요.”
   “한데요, 가 뭐예요? 하면 하는 거고, 아님 아닌 거지.”
   “감독님, 우리가 이번 작품으로 인지도 올려서 투자 받고, 그러고 우리 전용 플랫폼 만들면 그때 장르별로 쫙 걸어놓을 거거든요. 근데 아직까지는, 가장 시장성 있는 장르가 로맨스예요. 스릴러 보는 사람도 로맨스 보지만, 로맨스만 보는 사람은 스릴러 안 본단 말이죠.”
   “하아…… 상업물이 주는 딜레마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들이 보고 싶은 장르는 다르다는 거.”
   전피디의 호소 어린 설득에 박작가도 말을 보탰다.
   이감독이 말했다.
   “그럼 결국 로맨스란 거네요?”


   4.


   고대표가 자리로 돌아왔다. 트레이에는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난, 민트초코칩 쿠키뿐이었다. 민트초코를 싫어하는 박작가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이 감독은 누구보다 먼저 쿠키를 집어 들었다.
   “이야기에 진전이 좀 있나요?”
   고대표가 물었다. 전피디는 감독과 작가의 얼굴을 빠르게 스캔한 후, 대답했다.
   “로맨스물로 계속 진행하구요. 배우 머리 길이는 제작 실정에 맞게 플렉시블하게 가기로 했습니다.”
   “나 고민되는 게 있는데.”
   박작가가 말했다. 고대표는 그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음료수 마시면서 표정을 감췄다.
   “이렇게 성애에만 집중하는 게 좀…… 조심스럽달까? 시대는 성애와 젠더를 넘어선 담론이 나오는데, 우린 왜 아직도 성애에 매달려서 로코 아니면 멜로, 아니면 벽장 안에 갇힌 얘기…… 상업물이라 해도, 이젠 좀 다른 비전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하하…… 우리 작가님, 스트레스 많으신가부다. 현타 오셨나봐요.”
   고대표가 자본주의 웃음으로 말하며 이감독을 쳐다보았다. 이감독이 헛소리라도 해서 화제를 바꿔주길 기대했다.
   “하긴. 조심스럽지. 내 동기 하나도 여성영화 하고 싶대. 근데 용기가 안 난대. 왜냐…… 대사 하나만 빻아도 득달같이 악플 쏟아져, 디엠 날라와…… 남들이 그러는 건 상관없는데, 같은 여자들…… 같은 퀴어들한테 욕 먹을까봐 노이로제 걸릴 거 같대요.”
   고대표의 기대와 달리 이감독은 푸념만 늘어놓았다. 박작가의 현타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전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감독 말을 받았다.
   “사람들은 실수할 틈을 주지 않아요. 근데 또 여자들도 실패할 권리가 있어야 한대.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건지……”
   전피디마저 맞장구를 치자 고대표는 전의를 상실했다. 전피디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전 성공하려구요. 우리 이게 마지막 작품이 아니잖아요? 이걸로 우리 인지도 올리고, 다음 작품은 제가 어떻게든 쌔끈한 투자사 잡아서 우리 감독님이랑 작가님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드릴게요. 우리 진짜 돈쭐나게 살아봐요.”
   “피디님……”
   이감독이 벅찬 얼굴로 끄덕였다. 박작가도 울컥한지 코끝이 빨갰다.


   5.


   “일단 이번주 주말까지 스토리라인 보낼게요.”
   “난 아는 배우들한테 연락 돌릴게요. 피디님, 이번엔 배우 페이 좀 신경 써주세요.”
   “당연히 그래야죠. 감독님, 일단 배우분들 연락처 저랑 공유해주세요.”
   “작가님, 대본 잘 좀 부탁드리고요. 감독님. 촬감한텐 제가 연락할게요.”
   카페 앞에 선 네 여자 사이로 11월의 싸늘한 바람이 쌩하니 지나갔다.
   전피디와 고대표는 카페 앞 주차장으로 향했다. 곧 주차장을 나서는 고대표의 볼보 SUV가 보였다. 이감독과 박작가는 커피숍 앞에 잠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다 박작가가 먼저 운을 뗐다.
   “맥주나 한잔 할까요?”
   둘은 카페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끝.


무지개책갈피(박쓸)

모든 퀴어 독자들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를 소재로 한국내외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퀴어의 시각을 담은 비판적 리뷰를 공유하며, 한국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3화를 집필한 박쓸은 여성이자 퀴어로서 험난한 세상 즐겁게 사는 작가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2019/12/31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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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모두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