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더미 탐미
4화 쓰레기
샛별의 쓰레기 : 보물지도
이 지도는 오랫동안 봉쇄된 이야기다. 그러므로 약간 해독이 필요하다. 나는 한때 금은보화를 찾아 떠나던 선원이었다. 빛나고 아름다운 감정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뒤축이 낡은 나의 구두들과 무인도 같은 밤들을 사랑하지 못했다. 눈물이 이야기를 쏟을 때 나는 무수한 파도 위에서 느린 춤을 췄다. 발가벗은 자유의 여신상, 독 묻은 화살을 쏘던 식인종들, 유통기한이 지난 심장…… 실패한 이야기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엮어 장소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 지도가 탄생했다. 선원에게는 예쁜 신부도 금은보화도 없었다. 하지만 낡은 지도를 펼쳤을 때, 이미 빛나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은영의 쓰레기 : 환기, 어떤 시도
뉴욕의 한 아트디렉터는 친구들과 토론을 하다 포장 디자인의 중요함을 보여주고자 가장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쓰레기를 예쁘게 포장하였다고 한다. 깔끔한 투명 유리 큐브 안에 ‘Garbage of New York’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는 길가에 버려진 찌그러진 컵, 누군가 흘린 Metro 카드, 깨진 코카콜라 병, 사탕 껍질 등 ‘뉴욕 표 쓰레기’가 채워져 있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 아이디어를 얻어 집에서부터 작업실까지, 버려진 것들을 모으고 그 위에 드로잉하였다. 자주 있는 공간들에서 버려진 것들은 내게 무엇을 말해줄까.
2019. 1. 1. Garbage of Room.
제때 정리를 잘 못하여 금세 어지럽혀지는 방. 그래서 한꺼번에 마음을 잡고 정리를 시작한다. 1월 1일은 그래서 정리의 날. ‘미련을 갖지 말고 버리세요. 1년 동안 쓰지 않은 것들은 앞으로도 쓸 일이 없습니다.’ 아, 그런데 그 미련을 버리기가 제일 힘들다.
2019. 1. 14. Garbage of Street.
종종 나는 집에서 차로 2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작업실을 1시간 반 넘게 천천히 걷는다. 작업실 가는 길은 차가 많이 다니는 대로변이고, 거리도 지저분하여 최고의 산책 코스는 아니지만 고민이 있을 때 이 길을 더 천천히 오래 걷게 된다. 걸으며 마주치게 되는 풍경들이 심각해진 나의 잡념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가끔은 나의 시간을 이렇게 길 위에 즐겁게 버림으로써 마음의 환기가 된다.
1.5평 작은 작업실 공간에 몇 시간 이상 앉아 있으며 그렸다가 망쳤다가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한다. 생각만 하다가 선 하나 긋지도 못하는 날도 있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신이 나 물감을 섞으며 종이를 펼치는 날도 있다. 이곳에서 버려지고 쌓이는 것들은 절망과 시도, 조금씩 늘고 있다 믿으며 잘 해내고 싶은 나의 마음들.
휘리의 쓰레기 : 분류(categorize)
길에서 명함을 하나 주웠다.
기업 대리의 명함. 떨어진 위치를 보니 일부러 버렸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누군가는 그 사람의 명함을 받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였을텐데,
어쩌다 명함은 길에 버려졌을까.
쓰레기는 나누는 기능을 한다.
쓸모와 쓸모없음.
한 장 한 장 뜯는 일력은 지나면 종이 쓰레기가 된다.
하지만 삶에서 버려지지 않고, 흘러가버리지 않은 채
각인된 기억으로 남아 다시 재생되고 재생되는 며칠이 있다.
수북한 쓰레기 더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드는 날.
쓰레기는 나누는 기능을 한다.
망각 그리고 기억.
어떤 것을 정리하기 위해 카테고리를 아무리 세부적으로 나눠도
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툭 튀어나와 버리곤 한다.
거기서조차 튀어나온 건 분류가 되지 않을 만큼 가치가 없거나
너무 특별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쓰레기가 되거나, 제자리를 찾거나.
쓰레기는 나누는 기능을 한다.
단어 더미 탐미
은영. 일러스트레이터. 마음에 깊이 남아 잊혀지지 않는 것을 담아 기록하고 그립니다.
샛별. 그림책 작가. 건강히 오랜 호흡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휘리. 일러스트레이터. 살아 있는 것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2019/02/26
15호
- 1
-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