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주 이따금
  자연이 작은 호의를 베풀 때도 있으니
  세상을 떠난 가까운 이들이
  우리의 꿈속에 찾아오는 것. 1)


미선
‘꿈’이라는 말, 참 넓고 아득하게 느껴지네요. 각자 자기가 꾼 꿈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그림을 보면서 같이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정윤
아, 그거 괜찮네요. 말로 꺼내기 전에 그림으로 표현하면 좀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 같아요.


꿈을 그리는 소리(1분 30초). 조용한 곳에서 들으시면 좋습니다.

미선
다하셨어요? 궁금해요.

정윤
저도 궁금해요. 미선씨가 꾼 꿈 이야기.

미선
며칠 전에 꾼 꿈인데, 딱 한 장면이 떠올라요. 까만 고양이의 뒤통수. 밖에 나갔다가 엄청나게 상처를 입고 돌아온 거예요. 고양이를 보고는 제가 친구한테 ‘야, 쟤 좀 봐, 머리 찢어졌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어요. 되게 상처가 깊고 컸거든요? 그런데도 대수롭지 않고 덤덤하게요. 깨고 나서 꿈속에서의 제 반응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평소 같으면 고양이가 집 밖에 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되게 공포를 느꼈을 텐데, 나가서 상처까지 입고 왔는데도 내가 이렇게 덤덤할 수가 있다니 싶더라고요.

정윤
꿈속 고양이, 미선씨가 실제로 키우는 고양이에요?

미선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지낼 때 반려동물 네 마리를 키웠어요. 그중 고양이 링고가 제 꿈에 나온 거예요. 사실 링고는 존재감이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있는 듯 없는 듯 구는 아이였거든요. 솔직히는 제가 마음을 가장 덜 쓰던 아이라서, 꿈을 꾼 후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아, 내가 링고에게 관심을 별로 주지 않고 있어서 꿈에서도 링고가 다쳤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은 건가?’ 하고요. 좀 들켜버린 기분이 들었어요.

정윤
존재감이 크지 않다고 했지만 꿈 이야기를 들으니까, 미선씨 마음 깊이에는 링고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나봐요.

미선
맞아요, ‘링고가 죽으면 어떡하지?’ 저는 그 불안이 정말 심하거든요. 죽음이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어요. 돌이켜보니 평소에 ‘우리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우리 언니가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제가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정윤
저도 제 주위 사람들이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많이 했는데,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싶어요.

미선
무섭지 않으세요?

정윤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 그런데 죽을 때 느낄 외로움을 상상하면 너무 슬프더라고요.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 순간을 맞이할 텐데 내가 옆에서 뭘 해줄 수가 없다는 것도 슬프고요.

미선의 꿈 드로잉
정윤
꿈을 꾸고 난 후 링고를 이전과는 다르게 느끼실 것 같아요.

미선
‘아, 내가 걱정 안 해도 링고는 씩씩하구나! 링고는 다치고 찢기더라도 살아 돌아왔잖아, 어쨌든 왔잖아.’ 하고 이제 안심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링고가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꿈 덕분에 조금은 물러났다고, 상처가 아물어간다고 해야 할까. 꿈을 드로잉으로 표현하면서 ‘흔적’이란 단어도 생각났고요. 상처는 결국 흔적이 된다는 생각인데요. 꿈속 링고가 입은 상처에도 어떤 모양을 주고 싶었어요. 이를테면 물고기 모양 같은 거요. 그애의 물결 같은 털을 타고 물고기가 흐르는 것처럼 상처를 표현했어요.

정윤
꿈에서 그렇게 보였어요?

미선
꿈에서는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안 보였는데 드로잉 하면서 그렇게 본 거 같아요. 상처에 예쁜 모양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왜인지 겹쳐진 것 같아요.

정윤
고양이한테 그런 선물을 주고 싶었나?(웃음)

미선
그러니까 훈장 같은 거. ‘너 이제 겁 안 내도 돼. 나도 이제 안 무서워할게.’ 그런 느낌.

*

미선
정윤씨가 이야기하고 싶은 꿈은 어떤 꿈인가요?

정윤
2년 전 꿈이에요. 몹시 힘든 일을 겪고 얼마 안 돼서 이 꿈을 꿨죠. 막 소리 지르다가 울면서 일어나고 그랬어요.

미선
꿈속에서도 울었어요?

정윤
꿈속에서 울었는데 깨어보니까 제가 실제로 울고 있더라고요. 인상에 남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여전히 먹먹해요. 너무 외로워 보여서……

미선
누가요?

정윤
그 친구가……

미선
정윤씨 친구가 어떤 모습이었길래 외로워 보였나요?

정윤
그 친구가…… 화장을 원래 정교하게 하는 편이었는데, 되게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목까지 오는 검은색 스웨터, 검정 가죽 재킷, 요즘에 유행하지도 않는 나팔바지를 입고 제 앞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쳐다보지 않고 바닥을 응시한 상태로 싹 지나가버리는 거예요. 내가 무슨 공기인 것처럼. 표정이 없는 친구의 얼굴을 처음 봐서 정말 공포스러웠어요. 뒤돌아봤더니 그애가 차가워 보이는 대리석 바닥에 옆으로 길게 눕더라고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코 있는 데로 한쪽 손을 가져가더라고요. 코가 약간 꺼뭇꺼뭇하게 불 난 집 타들어가듯이 변해 있었고, 철 골조물처럼 결 같은 게 보였어요. 그애가 코를 더 움켜쥐니까 피가 막 쏟아져나왔어요. 저는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미안하다고. 그런데 그애가 아무 말도 없이 괜찮다는 표시처럼 저에게 손을 내젓는 거예요. 그 상황을, 혼자 겪고 있는 걸 보니까 너무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나는 그 친구가 살아있을 때 걔한테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 안 했거든요. 꿈속에서 미안하단 얘기를 계속하다가 사랑한다고 얘길 했어요. 그때 뭔가 죄책감이 많이 들기도 하고……

미선
거기 정윤씨밖에 없었어요?

정윤
없었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더 무섭더라고요. 만약 사람이 있었으면 나는 숨어 있었을 것 같아요.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친구를 지켜봤을 것 같아요. 근데 그 공간에 나랑 걔밖에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을 쳐다봐야 했죠.

미선
정면에서, 되게 가까이에서 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네요.

정윤
다가가서 괜찮냐고 묻지도, 보듬지도 못하고…… 그냥 무서웠어요. 걔의 일인 것처럼, 걔의 몫인 것처럼 내버려두고 저는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정윤의 꿈 드로잉
미선
어떤 장면을 그리신 거예요?

정윤
코예요. 타들어가는 것 같이 까맣게 보이던 코와 검은 선들.

미선
꿈속에서 그 장면이 확대된 것처럼 크고 자세하게 보였나요?

정윤
그애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는데, 코만 매우 크게 보였어요. 아는 사람이 죽어가면서 고통 받는 모습, 그가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상황을 저는 여태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애가 겪은 죽음, 테러 사건으로 인해 어떻게 죽었는지를 상상하고 괴로워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때 그런 꿈을 꾼 것 같아요.

미선
그림은 정윤씨가 상상한 친구의 죽어가는 모습이네요.

정윤
그런 거 같아요. 꿈에서 그애가 몹시 외롭게 죽어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선
꿈꾸고 난 다음에는 어떠셨어요?

정윤
친구 생각이 계속 나서 힘들었어요. 너무 구체적인 상황이 꿈에 나오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꿈에서 걔가 나를 굉장히 주시하고 있고 나한테 바라는 게 있는 거 같은 거예요. 근데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도 없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죄책감을 굉장히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꿈속에서 나 혼자 친구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것처럼, 깨어나서도 그 장면을 계속 혼자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 너무 공포스러웠어요. 2년 전 그 꿈을 꾸고 나서 글로 기록을 해두었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거든요.

미선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받아들여야 할 것 같고, 힘이 안 들 수가 없는데 힘들면 안 될 것 같고…… 그 마음이 느껴지네요. 그런데 저는 정윤씨가 여전히 울컥거리긴 하겠지만, 할 이야기가 떠오르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계속 얘기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복되더라도 계속하고, 힘들면 충분히 힘들어야 된다고 생각도 들고요.

정윤
오늘 그 어려운 첫 걸음을 미선씨와 함께한 것 같네요. 충분히 힘들어하기, 계속해나가기.

미선
처음에 정윤씨의 드로잉을 보면서 물감인 거 알면서도 좀 무섭기도 했거든요. 저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도 실제로 목격한 적은 없어요, 다 상상일 뿐.

정윤
저도 다 상상이에요.

미선
어떤 죽음이든 어떤 공포든 혼자서는 대면하기가 어렵고 힘든 것 같아요. 그걸 이 프로젝트를 통해 같이 들여다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좋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특별히 내가 뭘 안 해도 혹은 정윤씨가 나한테 특별히 뭘 물어주지 않아도, 이 그림에서처럼 피 떨어지는 거 같이 봐주는 것만으로도.

정윤의 영상 <구경꾼 Onlooker> 속 한 장면.




두 개의 목소리

안미선은 그림을 그리고, 안정윤은 영상을 만듭니다. 미선과 정윤은 죽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기록합니다. 마치 산책길을 거니는 사람들처럼, 예쁜 돌을 주우면 보여주고 낯선 소리를 들으면 멈춰 서서 같이 귀 기울였다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2019/02/26
15호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충분하다』,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