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더미 탐미’는 인화된 사진1)을 활용해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작업을 했다. 간직하고 있는 사진을 다시 꺼내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샛별의 사진 : 방



   서랍에서 꺼낸 사진첩은 낡고 뒤표지가 찢겨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사진첩을 펼쳤다. 놀랍게도 사진첩에는 수백 개의 방이 있었다. 기억만큼의 방과 열쇠였다. 나는 며칠 동안 수백 개의 열쇠 뭉치를 허리춤에 매고 컴컴한 복도를 걸었다. 손전등으로 방 번호를 비춰보며, 같은 호수가 적힌 열쇠를 더듬더듬 찾았다. 어떤 방은 온종일 눈보라였고, 또다른 방은 갈기갈기 찢긴 모자이크의 방이었다. 어느 방에서 만난 늙은 신사는 기억은 잠깐 문을 닫고 있을 뿐이라는 아리송한 말을 했다. 나는 사진첩 속 방들의 풍경을 그림으로 담았다. 투숙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몇 개의 방을 잠깐 공개한다.

#2046호. 연인의 궁전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영원한 젖과 꿀이 흐른다.

#1990호. 내가 태어나기 전 나는 나의 행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왕국에서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을 바라봤다. 지구는 용의 눈동자처럼 아름다웠지만, 가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지구가 슬플 때, 나는 분홍빛 은하수로 만든 이불을 지구에게 덮어줬다.


   은영의 사진 : 두 개의 시간


   사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나의 첫 카메라였던 ‘폴라로이드 폴라원’이다.
   대학생이던 그때 SX-70, 롤라이, 로모 같은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가 유행이었고, 폴라로이드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처음 번 돈으로 샀던 카메라다. 세상에 단 한 장뿐인 사진, 셔터를 누르면 쓰윽 하고 빠져나오는 필름, 어두웠던 검은 화면에서 서서히 이미지가 드러날 때의 설렘, 그리고 독특한 색감.
   내 마음대로 세팅을 할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 달리 찍는 장소와 그날의 온도에 따라서 매번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고, 필름의 유효기간이 지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색이 나오거나, 현상액이 흘러서 예상치 않은 패턴이 생기는 등 폴라로이드의 이런 우연함과 불완전함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바로 찍고 확인하는 디지털카메라와는 예측 불가능함에서 나오는 기대감과 함께 훨씬 더 생각하면서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게 된다.
   그래서 순간을 여러 장 복제하는 것이 아닌 정성 들여 하나의 오리지널을 만드는 느낌이다.
   얼마 전 그 무렵 한참 찍었던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을 늘어놓고, 그때의 시간을 추억했다. 어떤 사진들은 그 장면만 보면 그때의 장소, 날씨나 기분, 누구와 함께 하였는지가 바로 생각나지만 가끔은 도무지 이게 언제였는지, 무엇을 찍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건지, 어떤 곳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에 나지 않는 사진들도 있다.
   어떤 기억을 불러오지 못하는 사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의 시간이 아닌 게 돼버리는 걸까? 기억에서 사라진 그날의 순간들, 그 낯선 사진들 위에 요즘의 내가 바라본 풍경들을 드로잉하여 두 개의 시간을 담아보는건 어떨까?
   서로 다른 두 가지 상이 동시에 재현하는 오버랩(overlap) 상태로 두 개의 시간을 담아본다.

빛과 그림자의 시간

같이 걷는 달


대화하기 위해 영혼이 있지


속초의 시간


   휘리의 사진 : 산책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다시 봄이 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아이의 울음. “이다음에 커서……”라는 말이 얼마나 멀고 긴 기다림인지 모르는 웃음. 저녁이면 돌아올 엄마의 출근길에도 눈물이 터지고 말았던 깊은 불안함. 오늘의 엄마도 어제처럼 환하게 웃을지 궁금해 살피는 눈빛.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공간 마음이 너무 좁아 마구 튀어나오고 마는 감정을 사진 속에서 본다. 사진 속을 홀로 산책하며 그 시절 나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 자라는 시기가 지나 무엇인가 되어가는 지금, 스스로 느끼는 연민은 보는 이를 피로하게 만드는 변명일 뿐이었다. 나를 향한 연민, 이제 낡은 앨범을 들추는 그 순간에만 허락된 감정이다.


   어릴 적 사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자기애에 기반한 것일까? 혹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일까. 어쩌면 나를 의심하지 못하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사진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어떤 것이 여기에는 들어 있지 않나. 미워 보일까 긴장한 사진은 시간이 오래 지나서 보아도 감동이 없다. 거기엔 내가 없고 그 순간의 불편한 마음만 남아 있다. 바로 이것, 나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눈빛을 보고 나에게 사랑에 빠지고 있었다.


   첫 전시회 방명록에 남겨진 엄마의 메시지. 전시장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며 웃었다. 저 귀퉁이 낙서가 어떤 그림인지 안다. 엄마는 내가 처음으로 그린 사람 그림을 엄마는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나는 가만히 웃다가 코끝에서 오는 신호를 알아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가 카메라를 드는 순간을 상상한다. 나의 모든 처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 나는 사진 바깥세상으로 엄마와 함께 산책을 한다.



단어 더미 탐미

은영. 일러스트레이터. 마음에 깊이 남아 잊혀지지 않는 것을 담아 기록하고 그립니다.
샛별. 그림책 작가. 건강히 오랜 호흡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휘리. 일러스트레이터. 살아 있는 것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2019/03/26
16호

1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 물체를 있는 모양 그대로 그려냄. 또는 그렇게 그려낸 형상.(출처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