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나 아냐
4화 선배는 왜 엄마만 해요?(上)
나1)는 올해 초 우연히, 나의 선배이자 90년대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B의 프로필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B의 최근 배역들이 ‘엄마’ ‘아내’처럼 이름이 주어지지 않고 대상화된 것들이 많았다. 문득 예전에 봤던 남자 선배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그 선배의 프로필에는 ‘아빠’ ‘남편’ 같은 배역명은 없었다. 이름이 없는 배역은 ‘의사’나 ‘군인’처럼 직업이 쓰여 있었다.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왜?’라는 물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극작가인 나는 앞으로 어떤 인물을 만들어야 할까?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창작집단 담은 프로필의 주인공을 만나기로 했다. 인터뷰 제목이 ‘선배는 왜 엄마만 해요?’라는 것을 듣고 배우 B는 말했다.
“아니야. 나 엄마만 하지는 않았는데?”
“난 요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기도 전, 선배는 최근에 일어난 여러 정치 사회적 문제들로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이 작업이 여성주의적 연극을 만들기 위한 저 나름의 방법이에요.” 나는 대답했다. 나는 시작부터 마음이 들떴다.
먼저, 며칠 전 끝난 선배의 공연 〈이카이노의 눈〉에 대해 질문했다. 창작집단 담의 작가 모두가 함께 관람한 공연이었다. 우리는 배우의 인물 창조 과정이 궁금했다.
배우 B : 내 인물의 이름이 손문대인데, 제주도의 ‘설문대 할망’ 알지? 제주도의 창조신. 거기서 따온 이름이야. “바다는 경계가 없으니까, 손문대는 돌아가야지.”라는 대사도 있고 ‘제주도, 4.3사건의 생존자, 바다’라는 의미망이 들어가 있는 인물이라 손문대를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인물로 해석했어. 그것이 그 인물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연출이 나에게 요구했던 것은 달랐어. 그냥, 기능적인 사람들 중 하나로 밝고 분위기를 띄우고 활발한 인물을 원한 거야. 자신의 연극 스타일이 확실히 있었던 거지. 어려웠어.
선배는 이번 공연 연습 과정에서 ‘무겁다’ ‘튄다’라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했다.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깊게 이해하고 그 인물이 무대 위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배우의 일이다. 선배는 자신의 인물을 진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전체 극을 보는 연출의 의도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선배가 말한 ‘기능적인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이삼십대 시절 선배가 맡았던 배역들은 주로 주인공이거나 중심인물이었다. 선배의 선 굵은 연기와 잘 맞았던 그 인물들은 무대 위에서 살아 있었고 나는 그런 선배의 연기가 좋았다. 그러나 사십대가 되고 나이가 들면서 선배는 ‘엄마’나 ‘아내’처럼 기능적인 인물을 자주 맡게 되었다. 작품의 흐름을 위해 기능적인 인물의 서사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표현되곤 한다. 중심인물의 서사를 위해 존재하는 인물들. 물론 그런 인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왜 다수의 중년 여성 인물이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일까?
배우 B : 인터뷰 제목이 ‘왜 선배는 엄마만 해요?’라는 말을 듣고 ‘내가 그랬나?’ 생각해봤더니 최근 5년 동안은 그랬더라고.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지금까지의 내 역할들을 생각해보면 주로 이렇게 나눌 수 있어. 무녀나 신(神)적인 존재2), 노인3), 엄마4). 물론 〈하녀들〉의 ‘쏠랑쥬’나 〈낯선 사람〉의 ‘천샤오보’처럼 독립적인 인물도 있었고 〈낮은 밤〉의 로맨스역도 있었어. 지적인 인물은 딱 한 번 했어, 〈인류 최초의 키스〉의 변호사.
80편은 족히 넘는 선배의 프로필은 마치 한국 연극의 역사와도 같았다. 반평생을 무대 위에서 충실히 살아내고 중년이 된 여자 배우. 그런 선배에게 지금 주어지는 역할들은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내가 억울하기까지 했다.
배우 B : 그래, 우리나라 희곡에 나오는 여자 역할이 너무 왜소해. 특히 중년 여성 캐릭터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왜 중년 여성은 본질적인 고민을 할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역할은 남성 캐릭터가 맡고 여성 캐릭터는 그걸 보좌하거나 지원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역할로 한정되는 게 아쉽다는 거야. 그게 왜 남편이나 아들과 연관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선배는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열다섯 살 때 〈햄릿〉을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필리어’도 ‘거트루트’도 아닌 ‘햄릿’을 연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아직도 여전히.
배우 B : 누가 나한테 주겠어. 여자를 쓸 생각도 안 하잖아. 나는 여성으로 바꾼 햄릿을 연기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 존재를 연기하고 싶은 거야. 남성처럼 연기할 필요도 없어.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이 있는가?’를 고민하는 인물이니까 가능해. 그것은 성별과 상관없지. 나는 오디션 볼 때도 햄릿 대사로 봐. 아무도 안 시켜줘서 혼자 그런 걸로 햄릿 해.
선배는 햄릿의 독백으로 오디션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며 막힘없이 햄릿의 독백을 읊조렸다. 그 모습이 오랫동안 좋아해온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익숙해 보였고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지독한 악인’은 어떠냐고 물었다. 요즘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었다. 극 속에서 주인공 여성이 주로 자애롭고 포용하는 ‘바른’ 인물로 그려지는 게 지겨웠기 때문이다. 여성서사 작품을 보며 여성 인물의 도덕성을 검열하게 되는 나의 태도도 싫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아주 악하고 비도덕적인 여성 인물을 구상하고 있었다.
배우 B : 너무 좋지. 나는 악한 역할을 못 맡아봤어. 악인. 여자한테는 진짜 악한 역할은 주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 무자비하게 악한 역할을 맡아보고 싶어. 사건의 진행은 정말 잔인하고 극단적이더라도 결국에 하려는 이야기는 달랐으면 해.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불행과 절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휴머니즘’ 그런 걸 예술에서 말하고 싶어. 예술은 그래야 하잖아. 그런 역할들 너무, 탐나지.
선배는 오랫동안 연극을 해온 중년 비혼 여성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연극을 하고 싶은 삼십대 비혼 여성이다. 인터뷰 내내 나는 선배의 모습에 나를 겹쳐서 생각했다. 선배의 내일은 나의 내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인물을 만들어야 할까?
“탐나지.”라고 말하던 배우 B의 눈은 새로운 것을 발견한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처럼 빛났다. 나는 저 눈빛에 어울리는 인물을 꼭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왜?’라는 물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극작가인 나는 앞으로 어떤 인물을 만들어야 할까?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창작집단 담은 프로필의 주인공을 만나기로 했다. 인터뷰 제목이 ‘선배는 왜 엄마만 해요?’라는 것을 듣고 배우 B는 말했다.
“아니야. 나 엄마만 하지는 않았는데?”
1. 나이가 들수록 왜소해지는 여성 인물들
“난 요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기도 전, 선배는 최근에 일어난 여러 정치 사회적 문제들로 ‘페미니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이 작업이 여성주의적 연극을 만들기 위한 저 나름의 방법이에요.” 나는 대답했다. 나는 시작부터 마음이 들떴다.
먼저, 며칠 전 끝난 선배의 공연 〈이카이노의 눈〉에 대해 질문했다. 창작집단 담의 작가 모두가 함께 관람한 공연이었다. 우리는 배우의 인물 창조 과정이 궁금했다.
배우 B : 내 인물의 이름이 손문대인데, 제주도의 ‘설문대 할망’ 알지? 제주도의 창조신. 거기서 따온 이름이야. “바다는 경계가 없으니까, 손문대는 돌아가야지.”라는 대사도 있고 ‘제주도, 4.3사건의 생존자, 바다’라는 의미망이 들어가 있는 인물이라 손문대를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인물로 해석했어. 그것이 그 인물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연출이 나에게 요구했던 것은 달랐어. 그냥, 기능적인 사람들 중 하나로 밝고 분위기를 띄우고 활발한 인물을 원한 거야. 자신의 연극 스타일이 확실히 있었던 거지. 어려웠어.
선배는 이번 공연 연습 과정에서 ‘무겁다’ ‘튄다’라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했다.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깊게 이해하고 그 인물이 무대 위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배우의 일이다. 선배는 자신의 인물을 진하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전체 극을 보는 연출의 의도에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선배가 말한 ‘기능적인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이삼십대 시절 선배가 맡았던 배역들은 주로 주인공이거나 중심인물이었다. 선배의 선 굵은 연기와 잘 맞았던 그 인물들은 무대 위에서 살아 있었고 나는 그런 선배의 연기가 좋았다. 그러나 사십대가 되고 나이가 들면서 선배는 ‘엄마’나 ‘아내’처럼 기능적인 인물을 자주 맡게 되었다. 작품의 흐름을 위해 기능적인 인물의 서사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표현되곤 한다. 중심인물의 서사를 위해 존재하는 인물들. 물론 그런 인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왜 다수의 중년 여성 인물이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일까?
배우 B : 인터뷰 제목이 ‘왜 선배는 엄마만 해요?’라는 말을 듣고 ‘내가 그랬나?’ 생각해봤더니 최근 5년 동안은 그랬더라고.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어. 지금까지의 내 역할들을 생각해보면 주로 이렇게 나눌 수 있어. 무녀나 신(神)적인 존재2), 노인3), 엄마4). 물론 〈하녀들〉의 ‘쏠랑쥬’나 〈낯선 사람〉의 ‘천샤오보’처럼 독립적인 인물도 있었고 〈낮은 밤〉의 로맨스역도 있었어. 지적인 인물은 딱 한 번 했어, 〈인류 최초의 키스〉의 변호사.
80편은 족히 넘는 선배의 프로필은 마치 한국 연극의 역사와도 같았다. 반평생을 무대 위에서 충실히 살아내고 중년이 된 여자 배우. 그런 선배에게 지금 주어지는 역할들은 너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내가 억울하기까지 했다.
배우 B : 그래, 우리나라 희곡에 나오는 여자 역할이 너무 왜소해. 특히 중년 여성 캐릭터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왜 중년 여성은 본질적인 고민을 할 거라는 생각을 못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역할은 남성 캐릭터가 맡고 여성 캐릭터는 그걸 보좌하거나 지원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역할로 한정되는 게 아쉽다는 거야. 그게 왜 남편이나 아들과 연관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2. 그래서 당신은 어떤 인물을 원하시나요?
선배는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열다섯 살 때 〈햄릿〉을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필리어’도 ‘거트루트’도 아닌 ‘햄릿’을 연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아직도 여전히.
배우 B : 누가 나한테 주겠어. 여자를 쓸 생각도 안 하잖아. 나는 여성으로 바꾼 햄릿을 연기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 존재를 연기하고 싶은 거야. 남성처럼 연기할 필요도 없어.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이 있는가?’를 고민하는 인물이니까 가능해. 그것은 성별과 상관없지. 나는 오디션 볼 때도 햄릿 대사로 봐. 아무도 안 시켜줘서 혼자 그런 걸로 햄릿 해.
선배는 햄릿의 독백으로 오디션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며 막힘없이 햄릿의 독백을 읊조렸다. 그 모습이 오랫동안 좋아해온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익숙해 보였고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나는 ‘지독한 악인’은 어떠냐고 물었다. 요즘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었다. 극 속에서 주인공 여성이 주로 자애롭고 포용하는 ‘바른’ 인물로 그려지는 게 지겨웠기 때문이다. 여성서사 작품을 보며 여성 인물의 도덕성을 검열하게 되는 나의 태도도 싫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아주 악하고 비도덕적인 여성 인물을 구상하고 있었다.
배우 B : 너무 좋지. 나는 악한 역할을 못 맡아봤어. 악인. 여자한테는 진짜 악한 역할은 주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 무자비하게 악한 역할을 맡아보고 싶어. 사건의 진행은 정말 잔인하고 극단적이더라도 결국에 하려는 이야기는 달랐으면 해.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불행과 절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휴머니즘’ 그런 걸 예술에서 말하고 싶어. 예술은 그래야 하잖아. 그런 역할들 너무, 탐나지.
선배는 오랫동안 연극을 해온 중년 비혼 여성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연극을 하고 싶은 삼십대 비혼 여성이다. 인터뷰 내내 나는 선배의 모습에 나를 겹쳐서 생각했다. 선배의 내일은 나의 내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인물을 만들어야 할까?
“탐나지.”라고 말하던 배우 B의 눈은 새로운 것을 발견한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처럼 빛났다. 나는 저 눈빛에 어울리는 인물을 꼭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창작집단 담
구하나, 박주영, 서동민. 세 명의 극작가가 담에 모였습니다. 담담하게 다음을 도모합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담.
2020/09/29
34호
- 1
- 극작가. 창작집단 담의 멤버 중 한 명.
- 2
- 배우가 출연한 공연 〈주인이 오셨다〉 〈트로이의 여인들〉 〈엘렉트라〉 〈나생문〉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외에서.
- 3
- 〈웃어라 무덤아〉 〈옥상 밭 고추는 왜〉 〈이영녀〉 외에서.
- 4
- 〈졸업〉 〈네가 있던 풍경〉 〈그게 아닌데〉 〈여자는 울지 않는다〉 〈길 떠나는 가족〉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