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윤성      17살, 오늘 방학한다.
   수민      17살, 어제 방학했다.

   때

   12월 31일의 아침, 윤성의 방학식 날.

   곳

   수민의 방 안.


     조명이 켜진다. 수민이의 방 안이다. 침대와 공부 책상, 바퀴 달린 듀오백 의자, 옷장 따위가 있다. 방문엔 십자가가 걸려 있다. 윤성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동화 속 공주님의 잠옷이 연상되는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그의 옆엔 윤성의 소프라노 리코더와 악보가 놓여 있다. 수민, 의자를 윤성 앞으로 바짝 끌어가 앉는다. 감은 윤성의 눈에 아이라인을 그려준다. 수민은 편한 추리닝 차림이다.

   윤성
(눈 감은 채) 이제 떠도 돼?

     수민 책상 쪽으로 의자를 끈다. 붓 바꿔 잡고 다시 윤성에게로 온다.

   수민
아직.

     윤성의 눈 위에 섀도를 덧칠하는 수민. 윤성의 얼굴을 꼼꼼히 살핀다.

   윤성
(눈 뜨고) 언제 다 되는데? 나 연습도 해야 한단 말야.
   수민
아직이라니까.

     수민 책상에서 거울을 가져다 보여준다.

   수민
일단 한번 봐봐.
   윤성
이거,
   수민
너무 과한가?
   윤성
좋아. 생각보다 좀 옅어서.
   수민
완성은 아니야.
   윤성
좀 더 과감하게 해줘도 되는데.
   수민
너 불평하는 거야?
   윤성
무조건 고맙지. 난 그냥,
   수민
자연스러운 게 더 어려운 거야.
   윤성
맞는데. 내가 원한 건,

     윤성 드랙 퍼포머의 사진을 찾아 보여준다.

   윤성
이거.
   수민
이건 진짜 무대에 서는 드랙퀸들이나 하는 거지. 여기서 화장만 따라 하면 오히려 어색해. 이런 조명에, 보정 속옷에, 게다가 공연 내용도 다르고. 넌 연주한다며?
   윤성
어? 어.
   수민
벌써 아침이고. 이 시간 안엔 이게 최선이야.

     윤성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윤성
그래, 중요한 건 의외성이니까.
   수민
어떻게 할 건데? 막 뛰쳐나갈 거야?
   윤성
손들고, 잠깐 할 얘기 있다고 나가서,
   수민
(시큰둥하게) 니들이 뭔데 날 판단해?
   윤성
(웃으며) 비슷한데. 난 좀 더 우아하게.
   수민
(보는)
   윤성
리코더를 불 거야. <우아한 유령>이라는 곡인데,
   수민
리코더. 그렇구나.

     사이.

   윤성
수민아 혹시 언짢은 일 있어?
   수민
내가?
   윤성
아니, 좀. 덜 들떠 보여서.
   수민
커밍아웃이잖아. 가벼운 일도 아니고. (사이) 윤성아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소문은 소문일 뿐이잖아. 근데 네가 지금 하려는 건 아예 대놓고,
   윤성
(굳어서) 대놓고 드러내고 싶어. 나 겁 안 나.

     사이. 수민 다시 화장을 시작한다.

   수민
이번 학기에 네가 많이 시달리긴 했지.
   윤성
나 연주 좀 들어볼래?
   수민
마저 다 하고.
   윤성
이따 입술만 발라줘.

     윤성 리코더를 들고 방문으로 간다.

   수민
(따라 서며) 왜?
   윤성
리코더 침 좀 털고 올게. 화장실에서.
   수민
내가 해줄게. 엄마아빠 혹시 들어오실지도 모르고.
   윤성
너희 부모님 지금 없으시다며. 걱정 마.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는 윤성. 수민 무언가 참는 듯 가만히 서 있는다. 윤성의 악보를 침대 위로 집어던진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성.

   윤성
나 근데 급하게 소프라노 리코더로 바꿔서, 서 있었어?

     윤성 자신의 악보가 흐트러진 것 발견한다.

   수민
어?
   윤성
수민아 너 진짜 괜찮니?
   수민
내가 뭘.
   윤성
그래? (침대에 앉는다) 그럼 마저 해줘, 화장.

     수민 붓을 올렸다가 그대로 내려놓는다.

   수민
얼추 된 거 같은데. 그만하자.
   윤성
내 기준엔 아닌데? 방학식이잖아. 당장 내일부터 학교 안 가는데, 할 거면 확실히 해야지.
   수민
윤성아. 내 생각엔 진한 것도 좋지만,
   윤성
그러면 진하게 부탁해. 왜,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니?
   수민
말했잖아, 걱정된다고.
   윤성
그냥 걱정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심통이 나 있는데?
   수민
뭐?
   윤성
자꾸 검열하지 마. 너 내가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게 싫잖아.
   수민
너 웃긴다. 어차피 남의 얼굴인데 내가 왜?
   윤성
그러게. 남의 얼굴인데 말이야.

     윤성 옷장에서 롱패딩을 꺼내 입는다.

   윤성
(다시 침대에 앉으며) 10분 남았네. 버스 맞춰 나갈게.

     사이.

   수민
그래 어쩌면 검열한 걸 수도 있지. 근데 그건,

     윤성 수민을 바라본다.

   수민
그건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윤성
(보는)
   수민
그냥 커밍아웃도 이해 못 받을 마당에 난 너무 가는 건 안 좋다 생각해.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까지는 안 보고, 그냥 웃는 애들이 대부분일 거야. 사진도 찍힐 거고. 차라리 짧고 간결하게 괴롭히지 말라는 식으로,
   윤성
괴롭히지 말라는 게 커밍아웃이니?
   수민
그 뜻이 아니잖아.
   윤성
이거 딱 그거야.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 테니, 우리 자녀 퀴어되는 거 막아야 한다.
   수민
나 너 아빠 아냐. 너 퀴어되는 거 막은 적도 없고.
   윤성
지금 막고 있는 거야. 모르겠니? 남자 좋아하는 건 괜찮아. 근데 퍼레이드는 좀 신사답게, 정장 입고. 커밍아웃? 좋아. 근데 원피스는 벗고 좀 호감 가게.
   수민
아니, 나는 그냥 무조건 과하게만 나가면 오히려 비웃음을 살 수 있다는,
   윤성
제발 내 퀴어니스를 도려내는 혐오를 멈춰줘.

     사이.

   수민
(시계 보며) 7분 남았다. 가, 버스 오면.
   윤성
그래, 누구랑 다르게 난 당당하니까.
   수민
이게 진짜. 그만하자니까.
   윤성
시작도 끝도 참 맘대로다.
   수민
내가 시작했다고?
   윤성
화장 도와주겠다 말하고 내내 죽상이던 게 누군데?
   수민
어쨌든 도와줬잖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안 돼?
   윤성
그게 잘 안되네. 게이라 뉘앙스에 민감하거든.
   수민
개뿔. 그건 그냥 성격이 안 좋은 거거든?
   윤성
뭐라고?
   수민
야, 나도 게이야.
   윤성
나도 일반화하기 싫지만 게이가 대개 뉘앙스에 민감하고 회의적인 건 사실이야. 사실인 걸 어쩌니?
   수민
항상 그런 식이지.
   윤성
무슨 소리야?
   수민
게이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거 너무 짜증 나.
   윤성
난 단지 부분적 사실을 말할 뿐이야. 맨날 공만 차고 허허허허 몰려다니는 애들보다야 우리가,
   수민
그래 더 비꼬기도 잘하고, 똑똑하고, 그런 자신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우리가 아니라 네가 그렇겠지.
   윤성
축구 하는 애들 얘기는 네가 먼저,
   수민
아주 혼자만 당당하고, 혼자만 참게이야. 대단해.
   윤성
뭐? (사이) 그거였구나?
   수민
또 뭐?
   윤성
아까부터 좀 이상했거든. 분명 걱정하는 거 말고도 언짢은 마음이 있는데, 난 그게 그냥 내 행동거지를 단속하려는 오지랖인 줄 알았어.
   수민
그래, 나 혐오자다.
   윤성
너 나를 부러워하고 있구나?
   수민
뭐?
   윤성
내가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선택한 거. 넌 그게 켕겼던 거야, 왜냐하면 넌 못하는 선택이니까.
   수민
난 현명하게 안 할 뿐이야.
   윤성
어떻게 친구가 그럴 수 있어? 축하해줘야지.
   수민
이제 와서 친구? 그래, 축하한다. 커밍아웃 파티라도 열어주랴?
   윤성
허.
   수민
왜 내가 또 혐오라도 했니?
   윤성
너한테 정말 실망이야.
   수민
난 처음부터 끝까지 나처럼 행동했을 뿐이야.
   윤성
아니, 내가 알던 너는 그렇지 않았어. 주변 남자애들 때문에 주눅들 때마다 전화로 조언도 해주고. 걔네가 알고 보면 더 웃긴 애들이라 욕도 해주고,
   수민
보통은 그럴 때 고맙다고 하지.
   윤성
결국 뒤에서일 뿐이었어. 정작 앞에 나설 용긴 없었던 거야, 넌.
   수민
너도 오늘에서야 결심한 거야. 그것도 진짜 실행할지는 모르는 일이고.
   윤성
난 꼭 커밍아웃할 거야.
   수민
그래? 그렇게 당당한 애가 롱패딩은 왜 이렇게 열심히 입으셨대?
   윤성
그거야 밖이 추우니까,
   수민
목 끝까지 지퍼를 채울 정도로?
   윤성
그건,
   수민
혹시 알아? 가서도 내내 간 보다 롱패딩 입은 고대로 하교할지.
   윤성
학교랑 거리는 다르잖아.
   수민
너 겁 안 난다며. 그것도 학교 한정이야?
   윤성
사람인데 어떻게 겁이 안 나!

     사이. 윤성, 리코더며 악보를 챙긴다.

   윤성
최악이야. 연습도 못하고. 안 그래도 부담되는데, 응원은 못해 줄망정. 난 이게 다 네가 날 부러워하느라 날 아끼는 마음까지 내팽개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그래, 알아. 넌 인정 안 하겠지. 끝까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오늘 화장 진심으로 고마웠고, 이제 우리 다시는,
   수민
부러웠어.
   윤성
(보는)
   수민
너 그 옷 여동생이 빌려준 거지?
   윤성
무슨 소리야.
   수민
부모님은? 커밍아웃 후에 부모님 귀에 얘기가 들어가면 어떨지 생각해 봤어?
   윤성
나도 그 부분은 두려워, 지금 너랑 나랑 비교하려고 하는 거면,
   수민
적어도 다시 한번 허튼짓 하면 정신병원에 처넣는다는 소리는 안 듣겠지. 너희 부모님은 그래도 이성적이시잖아.
   윤성
그게 무슨, (사이) 너희 부모님이 그러신 거야? 왜 얘기 안 했어?
   수민
본인 일로 너무 바쁘신데 얘기할 틈이나 있어야지.
   윤성
그런 걸 어떻게 눈치로만 알아채니?
   수민
좀 눈치챌 수도 있지! (십자가 가리키며) 난 신자도 아닌데 내 방문에 십자가가 왜 달려 있겠어?
   윤성
그거야,
   수민
아직 출근 시간 전인데 집은 왜 비어 있고? 우리 집 맞벌이도 아니란 말야.
   윤성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민
다 교회에 신년 캠프 가셨어. 남동생은 방학식 빼고도 간 캠프인데 나만 안 갔어. 난 방학식도 어제 이미 했는데, 나만 빼고.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더라도 이렇게까지 하기에 나도 충분히 힘들지 않았겠니?
   윤성
그것도 네가 말을 안 해줬잖아.
   수민
말했었어. 일주일 전에. (사이) 네 당당한 커밍아웃 세리머니 준비하느라 주변 사람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겠지. 친구라고? 실망이라고? 너야말로 언제 내 사정에 관심 가지기나 했니?
   윤성
그건,

     사이.

   수민
버스 시간이다. 가. 절교든 뭐든 좋은데 앞으로 다른 사람이랑 친해져도 당당하지 못하다 어떻다, 다른 사람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판단하지는 마.

     윤성, 문고리를 잡는다.

   윤성
이번 학기에 음악 실기 평가가 있었어. 그러니까 나 소문 퍼지고 난 후에. 그 이후에 아무 일 없는 척하고 지냈어. 너 말대로 내가 직접 시인하지 않는 이상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근데, 막상 음악 실기 평가 순서가 다가오니까 너무 떨리는 거야. 성이 기역인 애들부터 하나씩 불려서 앞으로 나가는데, 손바닥에 땀이 말도 안 되게 나더라. 내 앞에서 종이 울려서, 일단 그날은 넘어갔어. 다음날 교무실에 찾아가서 말했어. 개인 사정이 있어서, 최하점을 받는 대신 보고서를 대신 내겠다고. 그날 집에 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난 괜찮은 게 아니었다고. 이대로 방학식까지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수민
그래서 방학식 날로 정한 거구나.
   윤성
하필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잖아. 왠지 새 출발을 하는 기분도 있고.

     사이.

   수민
웃기는 애야. 사과를 하랬더니 자기 사연을 풀고 있어.
   윤성
사과의 뜻인 거 알잖아.

     수민 책상으로 간다. 가장 빨갛고 대범한 립스틱을 골라 윤성의 입술에 정성껏 칠해준다.

   수민
오그라드는 건 여기까지만 하자.
   윤성
지금 이 장면도 되게 게이 같은 거,
   수민
또 그런다.
   윤성
참 우리답다고. 됐냐?
   수민
근데 어쩌냐, 버스 놓쳐서.
   윤성
늦는다고 학교 못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 차 타야지. 아예 방학식 중에 확 앞문 열고 들어갈까?
   수민
으아 떨리겠다.
   윤성
후. 남은 시간 연습이나 해야겠다.
   수민
그래. 아까 리코더 보니까 화가 확 올라오더라. 골라도 어디 딱 게이 같은 악기를 골라서.
   윤성
게이 같은 건 없다며?
   수민
맞아. 순도 백 퍼센트로 혐오의 의미였어.
   윤성
(웃으며) 사악한 것.

     수민, 컴퓨터 의자에 가 앉고 윤성을 바라본다. 윤성 심호흡을 하고 리코더에 입술을 댄다. <우아한 유령> 다장조로 부르는데, 소프라노의 음역대가 낮은음들을 다 포함하지 못한다.

   수민
잠깐. 너 리코더 잘 분다며?
   윤성
이거 못 부는 건 아냐. 너는 뭐, 꼭 오케스트라 들어갈 것처럼 잘 불어야 잘 부는 거니?
   수민
아니, 또 싸울 필요는 없고.
   윤성
음악 실기시험 그날 화나서 알토 리코더 부숴버렸단 말야. 오늘 전까지 내내 고민하다 찾으려니까 소프라노 리코더밖에 없더라고.
   수민
샵이나 플랫 붙여서는 못 불고?

     윤성 고개를 끄덕인다.

   윤성
어쩌지? 다 망했어. 역시 그냥 오늘 커밍아웃하지 말까?
   수민
야, 결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걸 여기서 그만둬. 악보 줘봐.

     윤성 악보를 수민에게 건넨다.

   수민
낮은음은 내가 목소리로 해볼게. 음악이 되는지 한번 보자.
   윤성
뭐 하러? 어차피 학교는 나 혼자 가잖아.
   수민
일단 해봐.

     윤성 <우아한 유령>을 리코더로 분다. 낮은 도 아래의 음은 수민이 목소리로 허밍한다. 두 사람의 연주 놀랍도록 매끄럽다. 리코더와 허밍의 합주가 엄청나게 당당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딘가 우아한 구석이 있는 소리를 낸다. 연주 이어지고, 조명이 꺼진다.


     막.



서동민

퀴어 재현은 왜 어떻게 시도해도 퀴어 혐오처럼 보이기 쉬운 걸까요? 퀴어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그 이야기로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두 명의 퀴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제겐 나름대로 큰 변화였습니다.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