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목소리
8화(최종화) 연대기
여기서는 영영(永永) 무명(無名)인 그녀
영영.1)
대화
2019. 4. 16. 정윤
어느덧 ‘두 개의 목소리’ 최종화 원고 마감이네요. 작년 무더웠던 여름, 미선씨와 함께 《비유》 지원서 작성하면서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많이 설레기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우리가 그동안 무슨 일을 한 걸까요?2019. 4. 18. 미선
정말, 우리가 그동안 무슨 일을 한 건가요?^_^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한 편의 긴 책을 읽은 것 같기도 하고요. 아쉽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래도 분명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에요. 그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고요.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나왔고요. 지나가다 눈에 보이는 돌을 발견하면 멈춰 서기도 했죠. 정말로 돌들이 주머니에, 손안에 담겨 있어서 이건 꿈이 아니고 진짜구나! 합니다. 돌이켜보면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제가 묻기보다 정윤씨가 묻는 때가 많았어요. 누구도 물어주지 않았던 질문이요. 나도 모르게 주룩주룩 이야기 흘리게 되는…… 현숙의 이야기를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어요. 현숙 이야기 너머에서 동행했던 정윤씨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같이 들여다본 돌들도 있고 소리도 있지만 저는 정윤씨가 어떤 돌을 담았을까 궁금해집니다.추신. 주룩주룩 끝도 없이 흐르는 이야기를 가만히 내버려둬 주셔서 감사했어요. 어디서도 하지 않을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더라고요.ㅎ 무슨 마법을 쓰셨는지>.< 이야기에 이름 붙이지 않고요. 억지로 담게 하지도 않고요. 다시 삼키지도 않게요.
2019. 4. 21. 정윤
글쎄요. 저는 어떤 돌을 담았을까요…… 미선과 정윤, 우리 둘의 대화에는 미선씨의 동생 현숙, 저의 친구 문희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두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각자 지니고 있던 기억, 아프지만 아름답기도 한 기억들을 불러왔죠. 제가 더 많이 묻고 미선씨가 대답을 더 하든, 현숙에 대한 이야기가 문희의 이야기보다 비중이 많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우리 둘의 대화이니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미선씨와 저의 이야기를 서로 나눈 거죠.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그 기억에 대한 느낌과 생각, 질문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저에게는 행운이었어요. 미선씨라는 사람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에요. 미선씨가 있어서 문희의 죽음에 대한 저의 생각과 질문을 스스럼없이 내놓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만나본 적도 없는 현숙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타인의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저 자신이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둘의 대화이고 우리가 아는 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비유》를 통해 우리가 만나본 적 없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공유함으로써 우리의 글을 읽은 그 누군가는 자신의 죽음과 자신이 아는 이의 죽음, 모르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리고, 또 알게 된 사실 하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항상 어둡고 무겁고 슬프지만 않다는 것. 삶 자체가 그렇듯이요……2019. 4. 22. 미선
저도 정윤씨의 말에 동감하고 있어요. 우리 둘의 대화죠. 정윤씨의 질문과 경청도 대화의 한 모습이고 혼자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어요. 그럼에도 ‘내가 하소연을 한 것은 아닌가’ ‘내 고통을 너무 늘어놓은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4화, 5화를 지나가면서는 제가 꺼낸 말들을 거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죠. 부끄러운 마음이요. 비난받을까 두렵기도 했어요.저에게 이 대화가 쉽지만은 않았어요. 대면하게 된 마음들이 있었고 그게 힘들었죠. 그리고 ‘나는 현숙을, 정윤을, 문희를, 나를 보고 있던 게 맞는가’ 이런 질문이 들었어요.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애도하려고 했을까’ 생각해봤어요. 정윤씨와 나는 (그녀들이 잊히지 않게) 왜 기념비를 세우려고 애를 썼던가. 아마도 ‘잊히지 않게’가 아니라 ‘잊을 수 없는’이었던 거 같아요. 기념비를 세우지 않고는 망각할 수 없는 것이요.
추신. 그녀에게 찾던 것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던 거 같아요. “미안해……”라는 말이요. “밥 잘 먹고 잘 자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있다 갈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득 채워서 갈게. 걱정하지 말고 오케?”라는 말이요.
2019. 4. 23. 정윤
미선씨가 저에게 하소연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는 말을 오히려 거두셔도 될 것 같아요. 자신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타인에게 꾸밈없이 건네고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을 거듭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미선씨가 그런 일을 했고 저는 그 대화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매 순간 감동했고 감사했어요.2019. 4. 27. 미선
네. 정윤씨 말을 듣고 보니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애도를 한 것 같네요. 제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자살 생존자(자살 유가족)로서 제가 갖는 고통도 있었던 거 같아요.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에는 꺼낸 말을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 봤어요. 두 가지의 충돌이요. 하지만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은 테러 사고로 인한 죽음도 자살로 인한 죽음도 결코 개인의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저희가 사적인 대화에서 멈추지 않고 공적인 자리로 이 주제를 드러내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죠. 그래서 용기를 낸 거고요, 정윤씨도 그래서 문희 언니에 대한 대화를 제안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많은 사람이 좀더 공적인 자리로 사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함께 애도해 나갔으면 해요.2019. 4. 28. 정윤
‘두 개의 목소리’ 프로젝트를 통해 저희가 그런 시도를 한 것 같아요. 누구라도 용기를 내고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요. 미선씨의 동생 현숙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서 미선씨와 미선씨의 가족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 고통을 제가 제대로 헤아릴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미선씨의 동생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고 미선씨가 동생의 죽음에서 느끼는 것을 대화로 알아가면서 미선씨의 자리를 상상해보는 것이 애도 작업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애씀이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난해 마련한 전시회에서 우리의 작업을 통해 사람들이 현숙과 문희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켜보고 이야기를 건넨 것처럼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애도의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해요.2019. 4. 29. 미선
저 또한 현숙과 문희 언니의 당시 심정이나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정윤씨의 공포와 슬픔, 죄책감도 그렇고요. 단지 내 고통에 빗대어 짐작해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부끄러움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우리 둘의 대화 과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고요. 결국 우리를 보게 해주었네요. 우리를 보는 일이 그녀들을 애도하는 일이었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그 과정 앞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남았어요. 그게 참 좋아요. 기쁘고요. 그걸 지속했다는 게 위로이고 힘이고요. 제가 만난 애도이고요.이 대화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몰랐을 거예요. 정윤씨와 대화하면서 보게 된 것이 많아요. 정윤씨가 비춰준 말들이 저의 시선을 투명하게 만들어주었어요. 아마 다신 없을 행운인지도 모르겠어요.
추신. 저는 누군가의 고통과 심정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에 좀더 솔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에게 좀더 솔직하게 되었고요.
정윤은 미선에게 보낸 마지막 이메일에 사진 한 장을 보냈다.
두 개의 목소리
안미선은 그림을 그리고, 안정윤은 영상을 만듭니다. 미선과 정윤은 죽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기록합니다. 마치 산책길을 거니는 사람들처럼, 예쁜 돌을 주우면 보여주고 낯선 소리를 들으면 멈춰 서서 같이 귀 기울였다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2019/05/28
18호
- 1
- 에드거 앨런 포우, 「까마귀」, 『꿈속의 꿈』, 아티초크, 2013, 35쪽.
- 2
- 미선의 동생 안현숙은 문구 디자이너를 꿈꾸던 청년이었다. 장난감 수집을 좋아했다. 특히 로봇을 좋아했고 로봇 전개도를 만들어 조립하기를 즐겼다. 1981년 10월 28일 태어나 2007년 10월 15일 스스로 생을 마쳤다.
- 3
- 정윤의 친구이자 옛 직장 동료인 강문희는 전자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결혼 후 남편의 전근으로 여러 나라에 체류하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케냐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중 무장테러리스트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1975년 5월 14일 태어나 2013년 9월 21일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