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교열을 본다는 건 언어와 인사하고 살피고 멀어졌다가 인정하는 사교의 과정을 닮았습니다. 언어는 한순간도 고정화되거나 결론을 띠지 않습니다. 책은 언제나 과정의 형태에서 출간되지, 그 자체가 완결이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그간 무수한 언어들과 만나면서, 때때로 평정을 지켜야 할 편집자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끓어오르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제목처럼 ‘막말의 온도’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막말의 사전적 의미는 단순합니다.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하는 말.’ 표준국어대사전은 공동체의 합의와 단문화 규정, 구성원들의 함의를 포괄한다는 전제하에 제 함의도 얹어보겠습니다. ‘순정도 뫼리도 없이, 그저 할퀴고 지나갈 뿐인 미묘한 말들.’
   특히 문학에서는 그 포착 지점이 무척이나 미묘합니다. 내내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이 이상한 느낌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며칠씩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마침내 어느 단계에(주로 마감 직전에) 제 온도를 정리합니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적정한 온도를 함께 고심해주지만, 가끔은 저마다의 온도로 끓어오르다가 빵 터져버리는 순간도 있습니다.

   흔히 문학은 말하여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보지 않은 것도, 경험하지 않은 일도 언어로써 실체가 되고 세계가 됩니다. 작가 덕분에 독자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낯선 인물과 만납니다. 그렇기에 작가는 빚진 기분을 안고 사는 듯합니다. 조금만 헛갈리면, 주춤거리면 현실과 언어의 양쪽 파고에 휩쓸려가리라는 긴장이 그들의 글에서 높은 밀도를 형성해냅니다. 그 원고를 들여다보는 편집자도 유사 체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학적 에너지와 언어라는 현실 사이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휩쓸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잠자리에 들 때면 파김치가 되곤 합니다.

   파김치의 일상에서 자주 피로감과 위기감을 느낍니다. 친구의 메시지에서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얼굴을 붉힐 때가 있습니다. 가족 단톡방에서 부친의 대량 ‘펌질’ 글의 가부장성에 벌컥 성을 냅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전도하거나 지하철에서 욕설이 들리면 황급히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습니다. 자본의 나팔수처럼 막말을 유도하고 전파하는 언론에 무작정 책임을 돌립니다. 막말의 생태계에서 살아간다는 염증감은 나날이 깊어만 갑니다.
   저라고 비단 수신자이며 목격자이기만 할까요. 때로는 발신자로, 또 가끔은 교환수가 되어 막말의 현장에 섭니다. ‘독재자’라는 지칭이 막말이 된 시대. 무력(武力)보다도 ‘말’력이 훨씬 넓고 질긴 파장을 남기는 사회. 그럼에도 아직까지 나오는 대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쪽은 주로 위계에서 우위에 선 자들입니다. 혐오를 전파하고자, 위계질서의 포위망을 조이고자, 그리고 대부분은 별생각 없이 떠들 수 있는 권력의 무신경함이 막말을 내면화하고 전파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그간 무수한 막말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어느 맥락에서 누가, 누구에게 사용할까. 그 영향력은 어떻고, 어떤 방식으로 전파될까. 이 의문을 추적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말의 언어를 글의 언어로 채록하고, 사회적 함의와 모색을 거친 사유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편이 더 깊고 아름다운 지형을 만들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편집자와 작가로서 공동체에 참여하고자 하는 방식이랄까요.

   첫번째 영역을 ‘정치’로 잡은 건 반사 작용이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막말’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무수한 정치인이 노출됩니다. 그만큼 ‘K-정치’와 막말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유착 관계가 되었습니다. 물론 막말이라는 바늘에 꿰어지는 실 역할을 자처하는 자들이 뚜렷합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몇몇 이름, 복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애도할 줄 모르는 정치, 후안무치의 말을 반복 재생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이미 직업관에 충실한 기자들이 채록해놓은 자료가 넘쳐납니다.1) 이 막말들을 들여다보다가 이청준 작가의 「벌레 이야기」 속 김집사와 남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벌레 이야기」를 읽다보면 뻔뻔한 유아 살인범이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내보다, 아내 곁에서 할큄의 과정을 반복하는 김집사의 말에 온도가 올라감을 느낍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이지요.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종이 된 우리 인간들의 의무인 거니까요. 알암이 엄마도 그날 똑똑히 들었지만, 그는 애 엄마의 어떤 원망이나 책벌이라도 달게 받을 각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가 이미 주님의 사함 속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혼의 평화를 얻고 있는 증거였어요. 그래서 그는 애 엄마의 어떤 원망이나 증오도 달갑게 감수하고, 그걸 용서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2)


    자식을 죽인 살인자가 이미 주님에게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면서 평화로운 얼굴을 합니다. 그를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던 엄마조차 고통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사람에게 던지는 이 말은 막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람을 죽이는 언어입니다. 행간 사이사이에서 용서와 평화라는 시퍼런 칼날이 읽는 이마저 겨누는데,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요. 자식을 잃었음에도 ‘화자’라는 위치에 복무하느라 말하기 기계가 된 듯한 남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범인 김도섭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은 누구보다도 아내 자신을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마음속에서 아내 자신이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아내로선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소망을 해서도 안 되었다. 그랬더라면 아내는 적어도 자신의 구원의 길은 얻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3)


    저 나태한 정치인들의 무디고 투박한 막말의 자리에 이 칼날들을 넣으면 어떻겠습니까. 정치의 핵심 전략이 ‘말’이라면 기본 소양도 부족한 자들의 막말을 복기하는 건 얼마나 구태의연한 일이 될까요. 살인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김집사와 남편은 계속해서 살아갑니다. 전도를 하고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눕니다. 일상에서 그들과 마주칩니다. 때로는 지인들과의 만남에서, 가족 식사 자리에서, 저자 미팅에서 칼날의 언어를 만나면 저는 쉽게 무력해집니다. 때때로 검색이 되어서, 더 크게 실망해서, 자꾸 눈에 띄어서 견딜 수 없었다는 유족들을 떠올립니다.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가해자가 처벌받을 때까지, 싸울 수 있을 때까지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떠오릅니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4)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광주를 들여다보기를 겁내는지도 모릅니다. 떠올릴 때마다 맘에서 피가 나고 귓가에 절규가 울리니까요. 그럼에도 입을 다물어선 안 되는 그때의 이야기를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편집자인 저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고민을 새롭게 합니다. 막말의 검색 결과로 뜨는 저 저열한 말들을 중계하지 않고도 어떻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일테면 2017년 1월, 특검 사무실에 출석한 최순실이 고성과 막말을 내지를 때 한 청소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지막이 내뱉듯이) 염병하네!”


   세월호와 광주를 향한 정치인들의 막말을 채록하였다가, 지웠습니다. 어떤 막말은 지움으로써 다시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막말의 온도’는 소설 쓰는 사람 유재영, 책 만드는 사람 최고라의 공동 채록 프로젝트입니다. 2019년 8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일곱 장에 걸쳐 연재됩니다. 삶의 각 영역에 걸쳐 발생하는 막말의 뜨겁고 차갑고 미지근한 온도를 모으고 읽고 쓰는 과정으로 탐구하려고 합니다.
   막말을 정의하거나 구획하는 건 채록자들의 관심 범주가 아닙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현재로서 이들의 시선은 한국 사회의 막말이 어느 맥락에 놓이는지, 어떤 자장을 형성하는지, 그 결합과 유포 과정을 탐색하는 데 가닿아 있습니다.
   일곱 개의 장을 ‘발생 영역’으로 구분한 건 이 무한대의 범주와 확장에 대한 고민 때문입니다. 여러 겹의 층위를 드러내고자 애쓸 테지만 ‘글’이라는 속성과 만나서 특정 맥락의 독해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여지가 있습니다. 채록자들이 문제의식 없이 내뱉은 막말이 삽입되어 아이러니를 창출할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막 말하기’의 칼끝은 언어의 죽음입니다. 이를 방지하고자 원칙을 내세워봅니다.

   1.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2. 채록된 막말을 의도 없이 전시하거나 유포하지 않겠습니다.
   3. 듣고 쓰기의 비중을 맞추는 데 애쓰겠습니다.

   두 사람 다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렬한 고로 채록자의 성실성보다 고수의 표현 욕구가 커지려고 할 때 ‘막말의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보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메일이나 SNS를 통해 제보해주신 막말은 7회차 연재에 미처 담지 못하더라도 트위터 계정 ‘오늘의 막말’5) 을 통해 전시하겠습니다. 참신한 막말, 막돼먹은 표현, 미묘한데 혐오적인 맥락 등 함께 읽으며 그 온도를 곱씹어볼 말이라면 무엇이든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어깨와 손끝이 차갑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수신자이며 발신자, 목격자이며 교환수로서 이 온도와 무게를 감당하면서 치열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고해소가 필요할 듯합니다. 성경을 막말 텍스트로 읽으면서도 좋아하는 성사 구절이 있습니다. 막말을 인격화한다면, 그에게 남길 일종의 전언을 중얼거리며 프로젝트를 시작해봅니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



일단공작단

유재영은 소설을 쓰고, 최고라는 책을 만듭니다. 서로 가장 많은 말을 주고받는 상대입니다. 대개는 다정한 말로 서로에게 온기를 전달하지만, 이따금 차갑거나 뜨거운 말을 던져 파문을 일으킵니다.

2019/08/27
21호

1
오마이뉴스 2014년 6월 1일자 기사 <소름 돋는 세월호 막말, 이걸 용서해야 하나?>를 참고할 것. 링크 바로가기
2
이청준, 『벌레 이야기』, 열림원, 2007, 91쪽.
3
같은 책, 74쪽.
4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57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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