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서점 떠나는 길

   최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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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방이 무거웠다. 텀블러조차도 묵직했다. 텀블러 안에는 녹지 않고 얼어서 단단해져버린 자바 칩 프라프치노가 들어 있었다. 딱딱하게 변한 프라프치노는 텀블러 뚜껑을 열고 마시려 해봐도 한 덩어리가 되어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마실 수 없는 음료수와 무겁기만 한 텀블러가 좀 짜증이 났고, 그래서 양선형을 만났을 때 양선형이 맨 가방 외부 주머니에 텀블러를 꽂아달라고 부탁했다. 양선형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가방을 매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커먼 (얼굴은 하얀) 양선형이었다. 나는 양선형을 만나면 종종 노란 줄무늬 티셔츠 같은 것을 권하고는 하는데, 양선형은 그럴 때마다 자기가 이미 그런 옷이 있다고 답한다. 하지만 나는 양선형이 그런 옷을 입은 걸 본 적이 없다. 최근에 나는 양선형이 김지환과 함께 만든 〈해변 생활자〉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양선형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며 이 영화의 주연 배우는 양선형이기도 하다) 거기서도 양선형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양말도 신고 있었다. 신발이 무슨 종류였고 어떤 색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검정이 아닌 다른 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양선형과 나는 함께 신고서점에 들렀다가 이문동을 돌아다닐 계획이었다. ‘꿈의 수집’ 프로젝트는 순차적으로 연재되는 두 개의 글이 하나의 세트로 묶인다. 앞선 회차에서 이문동과 송도를 다루었으니 이어지는 회차에서도 다시 그곳들을 걸어야 했다. 우리는 원래 지도를 통해 이 반복을 매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 길치 끼가 있었고 이문동은 골목이 많은 미로 같은 동네였으며 그 골목들은 지금 쓰레기 더미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문동에 혼자 가고 싶지 않았다. 길을 잃을 것 같아 무서웠다. 어딜 가도 사람이 없는 빈집들뿐이고 인상이 비슷비슷한 쓰레기 더미들뿐이라면 출입구를 찾기가 곤란할 것 같았다. 양선형은 이문동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 내게 휴대폰으로 이문동 주변이 나온 기이한 지도를 보여주었다. 이문동 주위에는 강남처럼 잘 구획된 직선의 길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잘 정비된 그 지역 바로 위로는 낙서 같은 길들이 보였다.


   신고서점은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막 시작되는 지점 즈음에 있었다. 서점은 생각보다 컸다. 양선형과 나는 2층으로 올라가서 선풍기 바람을 쐬었다. 『서머 힐』 『거울 속에 있는 듯』 『고독』 『침묵』 『우정』 같은 제목의 오래된 책들이 있었다. 우리를 가장 재미있게 해주었던 것은 1층에서 찾은 『지하인간』과 『야망의 늪』이었다. 『야망의 늪』의 표지에는 ‘끝없는 전율의 드라마’ ’악은 악을 부를 뿐!! 한번 시작된 죽음의 파티는 끝이 보이지 않고 더욱 커져만 가는데…!!’라고 쓰여 있었고 『지하인간』에는 ‘이혼 직전의 부모와 그 아들, 뒤죽박죽이 된 젊은이들의 방황. 그리고 유죄와 추적. 거기에 깊게 내재된 버림을 받았다는 패배의식과 그것의 극복을 갈망하는 탈출심리!!’라는 말과 함께 둘둘 말린 지폐 위에서 버둥거리는 조그맣고 불그스름한 인간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 책들은 언제나 좀 귀엽고 좀 슬펐다. 나는 1층 계단 앞에서 1978년 판 미카엘 엔데의 『짐 크노프』를 발견했다. 2000년대에 출간된 버전들에 비해 표지가 좀더 멋졌다. 양선형은 그 책을 선물로 사주겠다고 했고, 나는 무척 기뻤다.


   서점을 나서면서 양선형의 가방에 꽂아놓았던 텀블러를 거꾸로 들고 입에 탈탈 털어보았지만 프라프치노는 여전히 한 방울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구부러진 골목길로 들어서자 모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 밖으로 나온 손발과 얼굴로 모기들이 자꾸 날아와 부딪혔다. 나는 간간이 비명을 지르며 쓰레기 더미 사이를 걸었다. 예상 외로 악취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비가 온 뒤였는데 습도도 그리 높지 않은 듯 느껴졌다. 그냥 사방이 몹시 조용했고, 사람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딱 한 명을 보았다). 혹시 여름날 높은 습도의 주된 원인은 길을 메운 사람들이었던 걸까?
   거리를 둘러볼 때마다 양선형 소설의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 듯도 했지만 그게 어떤 장면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걷다보니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인 놀이터에 노숙자분들이 모여 있었다. 고양이가 조용히 옥상을 기어다녔고 어느 집에는 아직도 불빛이 켜져 있었다. 눈길을 두는 곳마다 쓰레기 더미가 보였다. 이 쓰레기들은 누가 다 가져가나. 가져가서 어디에 두나. 불태우나. 묻나. 썩기를 기다리나. 우주로 보내나. 배 속에 플라스틱이 들어 죽은 바다거북과 지구 주위를 떠다니는 우주 쓰레기, 종이 빨대를 비웃으며 플라스틱 빨대로 빨대에게 영광을 되찾아주겠다는 트럼프 등이 떠올랐다. 신고서점의 책들은 시간이 흘러 어디에 버려지게 될까? 모든 책들이 언젠가는 쓰레기가 될 것이다. 내가 기뻐하며 가방에 넣은 미카엘 엔데의 책도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양선형은 걸으면서 자기가 이전에 걸었던 길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주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고 어디를 어떻게 다녔는지. 옛날이야기와 현재 이야기가 뒤섞여 진행되었다. 나는 골목 밖으로 다시 나와 그 동네를 떠나면서 뺨과 이마를 만져보았다. 모기에 물린 곳이 아프고 뜨거웠다. 나는 이곳에 와서 피를 잃고 책을 얻고 폐허를 보고 가는구나. 피를 너무 잃어서 그런지 머리가 멍했다. 배가 고팠다. 양선형은 뭘 좀 먹자고 했고 나는 좋다고 답했다. 음식점을 찾아 걸으며 다시 한번 텀블러를 뒤집어 입에 털어보았다. 프라프치노라고 알아보기 어려운 설탕물 몇 방울이 새어나와 입술과 손가락에 묻었다. 끈적거려 손을 씻고 싶었다.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역까지 가는 길은 다시 좀 습해져 있었다.



   높이, 송도, 디자인

   민병훈

송도에 도착해서 촬영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다가 뒤늦게 알아차렸다. 카메라 배터리를 집에 두고 왔구나. 할 수 없이 주머니에서 IPhone XR을 꺼냈다. 영상 〈송도의 높이는 제각각이다〉(총 5분 31초, 연출·촬영·편집 김지환, 텍스트·사운드·출연 민병훈).

   높은 곳.
   높은 곳이 싫다.
   높은 곳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송도는 높고
   송도의 높이는 제각각이다.
   아무 것도 없다고 허희정이 말했다.

   송도 오크우드 호텔 45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른 모든 건물들의 옥상이 보인다.
   허허벌판이나 황무지를 떠올렸다.
   아무 것도 없다.
   도시가 점점 아래로 낮아지면 좋겠다.
   허희정이 다니는 국제캠퍼스에는 허희정이 많다.
   사차선 도로 중앙에서 펄럭이는 만국기는 평행을 향한다.
   높이가 싫다.
   건물만한 선인장이 곳곳에 있다면 좀더 어울릴 것이다.
   호텔에 함께 묵었던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더 높은 층에 예약할 걸.
   높이를 물질화하는 방법.
   창밖으론 구름이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다고 허희정이 말했다.
   국제캠퍼스가 보이지 않았다.
   서해로 추측되는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높은 곳은 안도감을 주는가.
   안도감에 높낮이가 있는가.
   센트럴파크와 호수, 공원, 오리배, 육교, 외국인.
   외국인.
   외국의 도시들을 떠올렸다. 송도의 계획대로 머리가 굴러간 것 같았다.
   옥상을 내려다보는 시선.
   포스코 타워 로비에서 호텔 입구를 찾는 사람.
   인류는 계속 높은 곳을 향한다.
   대기권을 돌파한 사실도 먼 일처럼 느껴진다.
   글로벌.
   나는 송도를 오갈 때 송도를 빗나가고 있었다.
   오크우드 호텔 객실은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
   지하에 벙커를 만든 도시는 생각보다 많고 어쩌면 전 세계에 있을 수도 있다.
   지하의 높이.
   근린공원의 어색한 나무들.
   송도를 걸을 때
   나는 별안간 국기봉처럼 솟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상 〈빌딩, 인더스트리얼, 숲〉(총 2분 43초, 음악 Goat the funky, 촬영·출연 민병훈, 연출 김지환).


꿈의 수집

음악을 만드는 Goat the funky와 영화를 만드는 김지환, 소설을 만드는 민병훈, 양선형, 최영건, 허희정. 여섯 사람이 모여 일곱 장소를 표류합니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새로 출발한 사람들이 다시 따라 걷습니다. 이로써 ‘꿈의 수집’은 ‘장소와 장소’ ‘장소와 개인’ ‘개인과 개인’이라는 세 가지 관계의 꿈을 읽어내보려 합니다.

2019/10/29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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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selektor와 함께 독일 IDM music을 상징하는 Apparat. 그의 세번째 정규앨범 수록곡 〈Not a number〉. 글과 함께 읽히는 음악에 초점을 맞춘 Goat the funky의 선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