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매혹이다.
   2015년 봄, 신촌의 모 카페에서 모인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무지개책갈피라는 정체불명의 단체를 시작한 이유도 매혹 때문이다. 우리는 ‘퀴어’와 ‘문학’이라는 키워드를 엮어내는 일에 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낯설고 이상했지만 그래서 좋았다. 그날 우리는 퀴어문학이란 이름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회의를 가장한 수다를 떨며 매콤한 스파게티를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발족한 무지개책갈피의 정식 명칭은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다. 우리는 홈페이지를 통해 퀴어문학 목록을 소개하고 퀴어 독자의 시각을 담아낸 리뷰를 공유한다. 오프라인에서는 매년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고 퀴어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모여 세미나, 파티, 창작 모임을 진행하며 유튜브와 팟캐스트 콘텐츠를 만들기도 한다. 몇 차례 책을 출간하고 퀴어문학시상식을 열기도 했다. 무지개책갈피 활동에 대해 어느 활동가는 ‘참 이것저것을 한다’라고 표현했고 그 말이 맞다. 우리는 퀴어문학과 관련된 ‘참 이것저것’을 해왔다.
   그러나 매혹은 의심과 친하다. 최근 퀴어문학을 읽고 쓰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우리가 지난 4년간 내부적으로 해왔던 고민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리의 의심은 이것이다. 퀴어문학은 무엇인가. 퀴어문학은 이대로 괜찮은가. 퀴어문학은 사라질 것인가 또는 사라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무지개책갈피 안의 십여 명의 활동가는 각각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케이트 본스타인에 따르면 혼란은 우리가 어떤 큰 사건에 가까이 간 사실을 알려준다.1) 우리는 혼란스러웠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하는 자리가 필요했다. 따라서 퀴어문학을 주제로 한 포럼과 웹진 연재를 기획했다. 더 강하게 매혹되고 더 뜨겁게 의심하기 위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매혹과 의심을 풀어보려 한다. 2019년 9월, 서울 모처에서 무지개책갈피 활동가 중 다섯 명(다홍, 보배, 연, 종륜, 진영)이 모였다.



   퀴어문학의 시작, 고민의 시작


   연 : 모두 활동가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하여 들어왔다. 왜 무지개책갈피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들어오면서 기대했던 일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먼저 보배님은 무지개책갈피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보배 : 무지개책갈피가 설립된 것은 2015년 5월경이다. 설립을 결정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로는 퀴어문학을 장르화하고 싶었다. 퀴어문학이라는 이름도 없었고 관련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학을 볼 수도 있다’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고 싶었다. 두번째 이유는 내가 그랬듯 퀴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르화에 대한 욕망과도 연결된다. 장르가 있으면 찾아 읽을 수 있으니까. 2015년 당시엔 그랬다.

   종륜 : 지금은 입장이 달라졌는지?

   보배 : 이제 장르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본다. 지금부터의 목표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에겐 퀴어 인권 운동의 일환이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을 지속적으로 고민하려 한다. 현재 우리는 퀴어 정체성을 가졌거나 또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들과, 퀴어 정체성이랄 순 없지만 『이갈리아의 딸들』처럼 젠더 스위치 등의 장치를 통해 젠더, 섹슈얼리티를 질문하는 작품들을 모두 퀴어문학으로 소개하고 있다. 범주에 대한 고민은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최근 무지개책갈피의 퀴어문학 DB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면서 아예 없애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하기도 했다.

   연 : 언제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았나. 드래곤볼처럼 5,000개 모이면 홈페이지를 폭파하자고. 그게 멋있다고.(일동 웃음) 나는 여러 곳에서 무지개책갈피의 퀴어문학 데이터베이스가 유의미하며 잘 사용하고 있다는 의견을 들었다. 이 사이트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구나 싶어 정말 기뻤다. 폭파하자는 말은 농담이고 아직은 시기상조 같다. 다만 무엇을 퀴어문학 목록에 추가할 것인가, 그 선별 과정에는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할 테다.

   종륜 : 최근 윤이형 작가의 「하줄라프」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두 마리 암컷 용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나온다. 퀴어문학 목록에 추가하고자 했는데 태그에 ‘레즈비언’ ‘동성애자’로 넣는 게 되게 이상해서 멈칫했다.(일동 웃음)

   다홍 : 그런데 이미 목록에 있다. ‘레즈비언’ ‘동성애자’로 들어가 있다.

   보배 : 그런 경우 참 많다. 우리 홈페이지의 태그만 보면 정체성 정치의 대형 전시장이다.(웃음)

   연 : 태그는 철저히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다. ‘레즈비언에 대한 소설’을 찾고 싶은 독자가 우리 홈페이지에 들어와 ‘레즈비언’ 태그를 누르는 것만으로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보배 : 맞다. 그런데 확실히 홈페이지에 전시된 방식과 우리가 활동해온 것들(퀴어 작가 초청, 퀴어 작가들의 창작물 제작 등)만 보면 정체성 정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거기에는 고민의 역사가 제거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더 많이 나눠야겠다. 포럼과 웹진도 그 일환이다.

   퀴어 독자, 퀴어 창작자, 퀴어 단체의 한계


   종륜 : 혹시나 싶어 덧붙이는데 무지개책갈피가 정-말 영세한 단체이지 않나.(일동 공감) 우리는 그저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자원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데, 무지개책갈피의 활동을 마치 특정 출판 자본이나 권력과의 결탁으로 오해하진 않을까 조심스럽다.

   연 : 시장에서 퀴어 콘텐츠는 생각보다 힘이 없다. 대형 출판사에서 퀴어 콘텐츠를 펀딩을 통해 출간한 사례도 있지 않은가.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투자하기는 망설여지는 상품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종륜 : 반면에 문학장 안에서 퀴어는 하나의 ‘대세’로 취급받고 있는 것 같다. 그저 대세이기 때문에 ‘끼워넣기’ 식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끼워넣기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몇몇 퀴어 독자들은 현재 퀴어문학이 사실상 동성애문학인 것에 대해, 그렇다면 바이, 트랜스, 무성애 서사는 어디 있는가라는 비판을 던진다. 이것은 분명히 필요한 비판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예의 끼워넣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기능하진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보배 : 그것이 정체성 정치의 함정이라는 데 동의한다. 다만 나는 퀴어문학은 물론 여성문학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인데,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했으나 범주를 확장하고 단계를 달리해가며 점차 변화할 거라 기대한다. 무지개책갈피가 처음 생길 당시에 참고한 곳이 미국의 퀴어문학 단체 람다(Lambda Literary)인데, 그곳은 정체성에 기반을 둔 퀴어문학 목록이 없고 다만 여러 작품을 퀴어하게 읽는 리뷰만 소개한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퀴어문학 목록이 필요한 독자들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고 퀴어문학 아카이빙은 그 자체로 중요한 활동이라 여겨진다.

   진영 : 동의한다. 활동에 참여하기 전 퀴어 독자로서의 나도 무지개책갈피의 데이터베이스와 리뷰를 많이 활용했다.

   연 : 무지개책갈피는 (앞서 보배님이 말씀하셨듯이) 퀴어 독자들을 생각하면서 활동해왔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다. 대상 집단에 대한 한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늘려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데 다들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병행하다보니 한계도 있는 것 같다.

   진영 : 퀴어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나기 전에는 문학이 재미가 없었다.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서사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퀴어문학을 읽으며 문학의 재미를 찾았다. 무지개책갈피 활동에 함께하게 된 이유도 퀴어 독자들의 목소리를 더 늘리고 싶어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책은 읽는 사람만 읽더라.(웃음)

   보배 : 수에 집중하면 지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어쩌면 독자층을 늘리는 것보다 퀴어 콘텐츠에 관심 있을 지지자들을 늘리는 게 가능성이 있다. 무지개책갈피에서 독서 세미나를 열면 ‘저 평소에 책 안 읽는데 퀴어 모임이어서 나왔어요’라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책을 통해 퀴어의 목소리를 늘려가다보면 퀴어 독자의 수도 미미하게나마 늘지 않을까.


   퀴어문학의 탈-장르화?


   종륜 : 최근 그런 비평을 읽은 적이 있다. 소위 퀴어문학이라는 것은 퀴어 정체성을 재현한 문학이 아니며, 이성애규범적인 삶의 방식을 의문시하는 문학이라는 것. 하지만 나는 이런 확장된 정의에 퀴어문학이 왜 독자들에게 필요했는지의 맥락이 삭제되어 있다고 느낀다. 처음 퀴어문학이 요청되었던 것은 퀴어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하는 (당사자)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퀴어문학이 당사자주의, 정체성 정치의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는 의견에는 (독자가 아닌) 작가의 당사자성의 측면이 더 강한 것 같다.

   연 : 여성문학 등 과거에 하나의 문학 장르가 구축되는 과정을 참고해 보면, 문학에 대한 순혈주의적 태도로 인해 독자층이 좁아지고 창작 활동에 제한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그로 인해 쇠퇴한 장르들도 존재한다. 다만 나는 지금 퀴어문학이 장르의 해체를 이야기할 시기에 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무지개책갈피가 퀴어문학 관련 활동을 해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섭외의 어려움 아닌가. 퀴어 당사자 작가는 물론 퀴어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창작자는 여전히 적다고 느낀다.

   보배 : 추측건대 소위 문단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분들에게 퀴어는 익숙한 담론이 되었을 테다. 그런데 그밖의 독자와 창작자들은 퀴어문학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나누거나 작품을 발표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이 양가적인 상황을 모두 체감하고 있고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다.

   종륜 : 그런데 문단 내에서 퀴어가 익숙해졌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스럽다. 많이 이야기된다지만 막상 언급되는 작가와 작품은 아주 한정적이다.

   진영 : 사실 무지개책갈피 내부에서도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여성문학, 퀴어문학 등의 분류에 의구심을 갖는 활동가들도 있다. 퀴어문학이 당사자들만을 위한 종족 담론이 될 것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점에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활동 방향을 정할 때에 늘 벽에 부딪히곤 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보배 : 동의한다. 다만 퀴어문학이란 장르를 경계하는 목소리 중에는 어쩌면 지금의 퀴어문학이 그것으로 전부일 거라는 상상이 있지 않을까? 퀴어문학은 이걸로 됐다, 이 정도가 전부다라는 목소리말이다. 우리는 그 해석에 동의할 수 없고, 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연 : 우리는 활동가로서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다. 예를 들어 나는 퀴어문학의 장르화에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접하면, 그렇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를 더 고민한다. 당장 퀴어문학장이 필요한 독자와 창작자가 있는 한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일을 할 것이다. 커밍아웃한 작가들이 너무나 소수인 상황에서 퀴어문학 장르 형성이 정체성 정치라고 말한다면 더 많은 퀴어 작가들의 커밍아웃을 막지는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다홍 : 나는 등단을 목표로 글을 쓰고 있는데 예전에는 나는 퀴어니까 퀴어임을 당연히 밝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복잡하다. 창작자로서 커밍아웃하겠다는 의지가 세분화되어 가는 것 같다. 더 고민해보려 한다.

   종륜 : 고민이라는 게, 커밍아웃을 한다면 정체성 정치에 공모하는 작가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인가?

   다홍 : 그렇다기보다는 퀴어라는 정체성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인데 지나치게 부각될 경우에 대한 걱정이랄까. 그래서 창작자들이 커밍아웃에 대해 조심하는 것 같은데, 한편 그렇다고 커밍아웃을 안 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싶기도 하다. 나는 커밍아웃을 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고민 중이다.

   보배 : 최근 1~2년 사이에 내가 느끼는 큰 변화 중 하나는 퀴어 독자들도 작가의 커밍아웃 여부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가 커밍아웃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 ‘팩트 체크’보다는 창작물에서 독자가 느끼는 퀴어 프렌들리함이 더 중요하달까.

   종륜 : 나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가 A작가의 소설을 읽는다면 A작가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트랜스젠더인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다만 내가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A작가라는 추상에서 퀴어함이 느껴지는지가 중요하다.

   연 : 결국 작가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잘 쓰면’ 된다는 이야기로 돌아온 것 같다. 최초에 작가의 퀴어 정체성에 주목하게 된 이유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발족했던 2015년에 주섬주섬 모았던 퀴어문학에는 퀴어를 대상화하고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작가의 당사자성을 안전망 중의 하나로서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안전망이 생길수록 작가의 정체성은 점점 덜 중요해질 것이다.

   보배 : 결국 퀴어 독자들에게 우리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퀴어 작가들이 쓴 문학도, 퀴어 소재가 등장하는 문학도 아닌, 퀴어에 대해 ‘잘 쓴’ 문학이다. 하지만 퀴어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는, ‘추천할 만한’ 퀴어문학을 골라낸다면 그건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할 수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문학 검열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우리는 그저 ‘등장하는’ 모든 경우를 다루기로 합의했다. 다만 ‘퀴어 독자의 시선’을 보여주기 위해 퀴어문학 데이터베이스 이외에 퀴어문학 리뷰를 함께 소개했던 것이다.

   연 : 슬픈 사실은 퀴어문학이 ‘붐’이라는 지금도 내 입장에서 ‘잘 쓴’ 퀴어문학은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것이다.

   보배 : 맞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시스젠더 이성애자 독자들이 좋아하는 퀴어문학과 퀴어 독자들이 좋아하는 퀴어문학이 구분된다고 느낀다. 대중적인 성공을 이뤄낸 퀴어문학 중에도 퀴어 독자들이 보기엔 불편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퀴어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아직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연 : 동의한다. 문단 또는 대중이 ‘허락하는’ 퀴어문학의 선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느낀다. 현실에서 퀴어들이 접하는 한계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장르의 해체라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부르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범주는 살아 있다. 협소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건 사라질 범주이지만, 적극적으로 부르는 사람에게는 확장 진화할 범주다. 결국 이것은 어느 문학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지 상상하고 선택하는 문제다. 지금의 여성 서사가 예전의 여성 서사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을 왜, 어떤 맥락에서 여성 서사로 언급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어떻게 달라져 가는지도 꼼꼼하게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진영 : 무지개책갈피 내부에서도 의견이 다양한 상황이라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지금의 퀴어문학과 앞으로의 퀴어문학에 대해서.

*

   이날 우리는 중앙에 테이블을 두고 모여 앉아 컵라면을 후후 불어 먹었다. 매운 스파게티를 나누어 먹었던 4년 전의 시작과 비교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당시 상상하기 어려웠던 논의가 이어졌다. 여기에서 다 밝힐 수 없지만 활동 방향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퀴어문학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모인 우리들도 퀴어문학에 대한 태도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퀴어문학은 경합의 장이다.
   경험만큼 의심도 커졌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매혹되어 있다. 무지개책갈피는 “한국에도 퀴어문학이 있습니다”를 말하기 위해 시작된 단체다. 4년이 지난 지금, 그 다음의 논의가 요청된다. 기쁜 일이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퀴어문학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E. M. 포스터가 『하워즈 엔드』에 쓴 것처럼, “오직 연결하라(Only Connect).”



무지개책갈피

모든 퀴어 독자들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를 소재로 한 국내외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퀴어의 시각을 담은 비판적 리뷰를 공유하며, 한국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19/10/29
23호

1
케이트 본스타인, 송섬별 옮김, 『자, 살자』, 이매진, 2016, 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