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다고 생각한 경로를 따라갔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이건 실패일까?


   A를 처음 만난 곳은 한 출판사의 시 창작 아카데미였다. 그가 같은 과 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학교에도 ‘현대시의 이해’나 ‘시 창작 실기’ 같은 과목이 버젓이 있는데 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났을까. 첫번째 A로 그를 섭외한 건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A는 여성으로서 목격하는 사건과 세계를 시로 쓰고 싶다고 했다. 일기 정도로 치부되는 여성의 이야기를 덜 조심스럽게, 더 공적으로 발화하는 것. A의 시에 항상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동시에 관계라는 주제를 계속 다루고 싶다고 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A는 진부하다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마음에 대해 골몰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며 웃어보였다.
   읽히기 위해 여러 곳을 오간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분명 즐거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A를 소모시키기도 했다. 감상이 아닌 평가. 단숨에 꼬집히는 결점. 언뜻 객관적인 말들 속에 숨은 경쟁심과 자기 과시. A는 그 과정에서 많이 지쳤다고 했다. 그런 데에 열을 올리지 않고 신뢰와 애정을 기반으로 쓰고 읽는 공동체를 상상한다, 라는 A의 말은 내 친구들의 목소리로도 내 목소리로도 여러 번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A와의 인터뷰는 한두 해 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환멸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고 캠퍼스에서 보이고 들리는 게 죄다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가 좋아 입학한 여학생들에게 학교는 안전한 배움터가 아니었다. 익숙했던 말들을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일. 그건 미안한 일이었고 그렇다 해서 대답이 쉽게 나오지는 않는 일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민망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A가 상상한 독자는 어떤 사람일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A는 원하는 X의 조건으로 가장 먼저 ‘이십대 여성’을 꼽았다. A는 남자 교수, 남자 선배 말고, 이십대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작가가 되고 싶다. 그중에서도 사랑과 환멸을 아는 사람의 감상이 궁금하다. 이십대 여성, 사람을 좋아해서 실망하는 마음에 대해 아는 사람. 마음속으로 가상의 X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A와 닮았고 우리와도 닮은 사람을.


   그가 이야기한 나머지 조건들은 X가 작품 속 상황과 인물을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꼽은 것이었다. 잔디밭이 나오는 시는 잔디밭에서, 테라스가 나오는 시는 테라스에서 읽어주길. ‘뱀을 실제로 본 적 있는 사람’ ‘히라가나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조건 모두 작품 속 인물을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상상한 조건이었다. 최대한 작품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X이길 바란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가 잠깐이나마 A에게 다정한 공동체를 선물해줄 수 있을까. 사이다 같은 결말은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약속을 했다. “최선을 다해서 연결해볼게요.”

*

   광화문을 지나고 서촌 언덕을 올라가 진짜 잔디와 테라스가 있는 카페로 X를 데려갔다. 며칠 동안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뒤져 찾아낸 카페였다. X는 기억을 더듬어 히라가나를 차례로 써보았다. 그러고는 ‘사람을 좋아해서 실망하는 마음에 대해 알고 있는’이라는 조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최근에 더욱더 잘 알게 되었다고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A의 글을 건넸다. 천천히, 여러 번 읽어줬으면 한다는 A의 부탁도 함께 전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사진을 몇 장 찍고, 잔디밭을 한 바퀴 돌고 왔을 때도 X는 여전히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내가 쓴 시인 것 마냥 X의 표정을 살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턱을 괴고 픽 웃으면 어느 구절을 읽는 중인지 심하게 궁금했다. 주황빛 가로등이 켜질 때쯤 X가 고개를 들었다. “다 읽었어요.”


   시가 인쇄된 종이는 X의 메모로 빼곡했다. 드문드문 그림도 있었는데, 미술을 전공한 X가 A의 시 속 공간이나 인물의 생김새를 상상해서 그린 것이었다. 시에 종종 묘사된,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상적 폭력에 공감하는지 묻자 X는 ‘당연하다’라고 대답했다. 게다가 X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A의 시는 지금 여기 같아요. 선선하다 생각했는데 오래 있으니 춥고, 지금 하늘처럼 파스텔 톤이지만 사실은 차가운 색깔로 칠해져 있어요.” 이 연결에 대한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시에 나오는 관계들은 다 안타까워요. 근데 이러면 힘들어서 나중에 둘 다 죽어요. 그만둬야 해요.”
   ‘안타깝다.’ 내내 등장한 단어였다. X는 다섯 편의 시에 깔린 슬프고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무드를 음미하는 대신 이런 관계는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랑하는 동시에 죽이고 싶어하는, 그래서 서로를 떠날 수 없는 관계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때 함부로 뛰어들면 안 된다고. 그럼 둘이 같이 죽게 된다고. 미심쩍은 애인과 사귀는 친구를 말리듯이 X는 단호했다.
   그건 X의 굳은 결심처럼 들리기도 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거라면, X는 빗속에서 오래 있어본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X는 시 한 편 한 편마다 떠오른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겁이 날만큼 무섭게 화를 낼 때를 빼고는 사랑스러웠던 전 애인. 씩씩해서 좋지만 내가 없어져도 씩씩하게 살아갈 것 같아 서운했던 친구.
   모든 걸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던 X는 이제 그러지 않는다. 세상에는 노력할수록 실패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같이 병들지 않으려면 용기를 가져야 해요.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질질 끌고 가면 안돼요. X의 말은 가짜 걱정이 아니었다. 다만 예상 밖의 엄한 말에 시 속 화자들은 퍽 당황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A에게 주고 싶은 것을 물었다. X는 악수를 건네고 싶다고 했다. 그건 고생하셨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주셔서 감사해요, 당신의 작품이 좋아죽을 지경은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부분의 팬이 되었어요, 라는 뜻이라고. 또 하나 주고 싶은 건 ‘알프스 산맥의 맑은 공기’였다.
   “가본 적은 없지만 제가 아는 가장 청정한 지역이 알프스거든요. 어쩔 수 없이 작품 속에 오래 머무를 텐데, 잠시 환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습-하. 맑은 공기로.”


   악수와 맑은 공기. 괜찮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이 연결은 성공일까?

*

   X의 감상을 들고 다시 A를 만났다. 어쩐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A의 글을 X가 어떻게 읽을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A의 반응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A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X가 이야기한 사랑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힘들고 지치는 관계라는 걸 알지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마음,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들에 대한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X가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던 것들을 A는 “건강해지기 위해 충분히 슬퍼하는 시간”으로 다시 명명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왜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A는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X가 보내준 만큼의 공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모든 문장에 공감해주길 바라면서 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쓰기와 읽기가 어긋난 지점들이 아쉽지만은 않았다. A는 X가 이십대 여성이었기 때문에 X의 감상을 더욱 귀담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느슨한 설계로, 의도를 열어둔 채 쓰고 싶어졌다고도 했다.

*

   A는 X가 제안한 악수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둘은 아주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각자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생각보다 미지근했다. A와 X를 연결하면 어떤 형태로든 스파크가 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X가 A에게 포옹이 아닌 악수를 건네고 싶다고 했을 때, A도 X와의 악수 정도면 적당하다고 했을 때, 석연치 않은 느낌에 주춤했다. 로맨틱한 키스신을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격정적인 뺨 올려치기? 그러니까 처음에 하려던 게 뭐였더라.
   A와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본다. A가 가닿고 싶은 지점을 잘 알고 있다고, 이 만남이 끝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시나리오 상 그곳은 페미니즘 어쩌고였던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십대 여성. 그들이 합심하는 감동 서사.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는 걸 만남을 다 통과한 후에야 겨우 알게 됐다.
   두 여성이 만났으니 공감과 연대가 움틀 거라는 허상은 걷어두고. 이 담백한 만남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야했다. 페미니즘 시라는 것에 대해, 시라는 장르에 대해,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의 간극에 대해, 엉뚱한 읽기에 대해. 어쩌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개인과 개인의 다질적 삶의 맥락에 괄호를 쳐버린 것은 아닐까. 두 사람의 마음 어디에선가 마법의 열쇠가 작동해 서로를 척척 읽어내리라고, 미끄러지는 기표쯤은 가로세로 퍼즐처럼 풀어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게 아닐까.
   그들이 다섯 편의 시를 두고 삶과 관계를 말할 때, 각자의 불확정적인 삶의 진실이 걸어왔다. 그들 각자의 믿음이 뻗어나가다가 잠깐 휘어지며 교차하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뻗어나가는 걸 본다. 그들의 만남이 고꾸라졌다고 생각한 곳에 다행히도 구덩이도 웅덩이도 없다. 단단하고 고른 그곳을 밟고 서 있으면 각자의 삶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거 같다. 그것 참 다행이지 않느냐고, 명쾌하지 않은 채로 놔두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다.



근사

나래. 나은. 지원. 같은 학교에서 같은 허기를 느낀 세 사람이 작당 모의합니다. 냉소와 조롱과 뒷담화보다 근사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쓰고 읽는 당신이 궁금합니다. 문학 ‘하는’ 우리를 위해 움직입니다.

2019/11/26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