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내성적이었던 나, 지난 6월에 ‘퀴어문학 한영 낭독회’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번역문학 전문 잡지 Words Without Borders 제10회 퀴어호에 실린 한국문학 작품1) 을 작가와 번역가가 관객과 나누는 자리였다. ‘퀴한낭’을 기획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퀴어로서 자축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는 이혜미 시인과 「딸기잼이 있던 찬장」 「개인적인 비」 「펨돔」 「라라라, 버찌」 「지워지는 씨앗」을 읽었는데, ‘낭독한 시는 어떤 기준으로 골랐냐’는 관객 질문이 있었다. 지극히 진지하게 답하자면, 시집에서 싫어하는 시가 없기에 개인적으로 잘 살렸다고 생각하는 번역 위주로 골랐다. 잘 번역된 시 중에서 출간된 시가 많이 나왔고, 출간된 시 중에는 퀴어한 게 많다. 공교롭게도 시인의 레즈비언 친구들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농담한 시 세 편 모두 Asymptote에 출판되었다.
   왜 그런 게 잘 팔릴까? 성에 미친 사회? 동양인 여성 시인에 대한 호기심? 여성 간의 관계를 관음하고 소비하는 문화의 영향이 없지 않겠지만, 퀴어-여성 당사자의 관심을 지우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친구들에게 『뜻밖의 바닐라』(문학과지성사, 2016)를 소개할 때 ‘응 맞아, 그 바닐라야’라고 말한다. 도서관 책장에서 제목을 우연히 봤을 때부터 이 시집에 끌렸고, 이내 관능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작품 세계에 빠졌다. 처음 출간된 번역은 「펨돔」과 「개인적인 비」였고, 번역 시 전문 잡지 Modern Poetry in Translation LGBTQIA+ 특별호에 실렸다. 아니, 제목부터 야한데, 번역을 통해 더 노골적으로 만든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작가님이 낭독회에서 웃으면서 하신 이야기지만 뼈 있는 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일단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어에서는 주어와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쉽게, 티 안 나게 모호할 수 있다. (편견이 지켜주는 한국문학……) 나의 양성애자 선배이자 한국문학번역원 선배인 김소라 번역가는 신경숙, 한용운 작가의 작품을 예시로 들면서 영어와 한국어의 문법적인 차이에 대한 에세이 「The Implicit I: Contesting Ambiguity in Korean Literature」2)를 썼다. ‘발뺌의 여지’가 주는 미학이라고 할까? 나는 운좋게도 처음 번역한 책이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민음사, 2017)였다.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나오는 소설인데 근미래의 재난 설정이라서 벽장은커녕 지붕도 없다.
   아무리 소설보다 시에서 화자와 임의 관계성이 모호해도 『뜻밖의 바닐라』는 나 없이도 충분히 야한 것 같다. 예컨대 「라라라, 버찌」. 이혜미 시인의 시 중에 드물게 존댓말로 쓰였는데, 이 존대는 윗사람을 대우하는 게 아니라 플러팅하는 톤이다. “꽃도 잎도 벗어던진 버찌는 오늘, 그저 한 알의 유희”라는 구절을 따라 마음먹고 즐겁게 번역했다. 본격 유희 중심적인 번역이다.
   “버찌를 따러 갈 거예요 붉푸르게 얼룩진 것들만을 골라 주머니 가득 담을래요”는 “Hello, I’m going cherry picking I want to fill my pockets with only the ones stained dark”로 옮겼다. 영어로 cherry picking은 문자 그대로 ‘버찌를 딴다’는 뜻도 있지만 유리하거나 좋은 것만 선별하는 태도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붉푸르게 얼룩진 것들만을 골라 주머니 가득 담을래요”라는 연이 있기에 추가적인 의미를 얹어도 될 것 같았다. 또한, 나는 고민이 될 때 영어 번역문을 종종 한국어로 다시 번역해본다. 그냥 ‘I’m going cherry picking’은 ‘버찌 따러 간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뭔가 밋밋해지니 존댓말 문체를 살리기 위해 ‘Hello’를 넣었다. 한국인인 레즈비언 작가 친구가 좋아해줘서 더더욱 애정이 가는 번역이다.
   “환한 밤 내내 버찌를 가득 물고 곤란한 키스를 나눌까요”는 “Shall we fill our mouths with cherries and kiss naughtily knottily all night long?”으로 옮겼다. ‘곤란한 키스’는 번역하기 참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던 참에, 문득 말장난이 떠올랐다. 체리 꼭지를 혀로 매듭(knot)짓는 일종의 플러팅 수단을 바탕으로 ‘곤란한 키스’를 형용사-명사 대신 n 소리 자음의 화음이 부각되는 동사-부사-부사-부사 구절, “kiss naughtily knottily all night long”로 풀어봤다.
   그리고 “아직 그의 버찌는 익어 터지지도 못했는데 진물 흐르도록 섞이지도 못했는데”는 “Her cherry hasn’t even had a chance to ripen and burst, to schmooze and ooze”로 옮겼다. 일단 ‘처녀막을 뚫다, 첫 경험을 하다’를 뜻하는 관용구 ‘pop your cherry’와 딱 어울린다. 의성어 schmooze는 수다를 떨다, ooze는 줄줄 흘린다는 뜻인데, 원문에 라임이 없는 건 나도 안다. 직역한다면 원문의 야함을 따라가지 못해 따분할 것이다. 매번 이렇게 창의적인 번역이 나오진 않지만, 내용과 적합하다면 지향하는 편이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작품 번역 그 자체를 넘어 번역 산업까지 신경 써야 한다. 낭독회를 준비하면서도 어떤 이성애자로부터 ‘요즘 퀴어문학이 워낙 유행하니까’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로 우리는 요즘 핫하다. 그러나 퀴어문학 작품 중에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가 나왔다고 해서 퀴어들이 오만가지 방법으로 차별받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회는 폭력적으로 이성애중심적이고 퀴어혐오적이다. 그래서 ‘성별만 다른’―즉 시스젠더-동성애중심적인― 연애 서사가 인기다. 그러나 섹시하게 여겨지지 않는 자들에겐 어떤 인간성이 주어지는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잘 팔리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인생은 ‘실패’가 아니라 ‘거부’의 증거다.
   퀴어함은 누구와 섹스하는 것을 통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손을 잡는 시나 곶감에 대한 시나 둘 다 퀴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곶감만 먹겠다는 건 아니구요…… 손잡고 같이 먹어요.) 『해가 지는 곳으로』는 여성애자들이 나와서 퀴어소설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만, 가부장제를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기 때문에 더 돋보인다. 이혜미의 시 중에서도 역시 야한 것을 좋아하지만, 시집의 퀴어함은 섹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액체성과 유체성3) 에서 온다. 퀴어이론가 후아나 마리아 로드리게스(Juana Maria Rodriguez)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생식보다는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퀴어하게 섹슈얼하다. 그것은 다감각적, 비동시적, 다의적, 변태적이고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4)
   또한 출판된다고 해서 작품이 진심 어리게 읽히고 비평받고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취약하게 만들고 내팽개치는 가시화는 쓸모없다. 가시화 그 자체가 차별적인 체제다.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여야 (그것도 누구에게?) 잘 지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류 사회가 우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 청탁받는 것인지, 색출되는 것인지 구별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육군 성소수자 색출, 해군 간부의 레즈비언 교정 성폭행, 트랜스젠더 교사의 취업 차별 등의 사건들이 드러났으며, 미국에서는 아웃팅당한 청소년이 자살하고 흑인 트렌스젠더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그래서 퀴어문학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냥 퉁쳐서 공동체가 되는 게 아니다. ‘퀴어’라는 정체성 아래에서도 다름을 존중해야 지속적으로 결속할 수 있다. 작가, 번역가, 비평가, 독자가 퀴어함을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함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감히 상상해본다. 그래서 나로 인해 영어 번역본이 세상으로 나갈 때도 그냥 내보내는 게 아니라 사회적 맥락을 감싸 보여준다. 소개글을 쓸 때마다 한국어 이름의 낯섦을 넘어 어떻게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번역만큼 공을 들인다. 은밀하게 행복해하고 싶지만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이렇게 서툴고 이상한 글을 쓰겠나?
   퀴어문학은 애초에 유행 탈 게 아니다. 퀴어가 지금-여기에 있다는 걸 입증하기도 하고, 지워진 역사를 맞춰보기도 하고, 우리에게 숨겨진 미래를 그려보는 도구다. 생존이 걸린 것이다. 지속되는 행복을 상상하기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상상해야만 한다. 퀴어 비극은 사실적이지만 퀴어 행복도 충분히 사실적이다. (나 역시 이 에세이의 초고를 호숫가에서 쓰면서 매우 행복했다.) 현실은 변할 수 있고 변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퀴어문학의 흐름을 기대한다. ‘발전’이란 개념은 사실 퀴어함의 반대다. 퀴어함은 실험과 실패를 포괄하는 미학이다. 실패의 기준은 권력으로 인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도록, 퀴어 해방을 위해 오늘도 싸우고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무지개책갈피(So J. Lee)

모든 퀴어 독자들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를 소재로 한 국내외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퀴어의 시각을 담은 비판적 리뷰를 공유하며, 한국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19/11/26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