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공부하면서 ‘확장’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시의 확장, 의미의 확장, 개념의 확장 등등…… 간혹 ‘좁다’ ‘갇혀 있다’ 등의 말로도 표현되는 이 감각이 바로 문학의 자유로움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무지개책갈피도 몇 차례의 확장을 경험한 바 있다. 퀴어문학 DB 구축과 리뷰 공유에서 출발한 활동은 돗자리 세미나, 연말 파티, 창작 교실, 팟캐스트 등으로 영역을 넓혀나갔으며 규모 또한 커졌다. 이는 독자가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 또한 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지난 11월 9일, 무지개책갈피는 퀴어문학 포럼을 주최했다. 그간 오프라인으로 진행했던 행사 중 참여 인원이 가장 많았던 행사였고, 섭외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그만큼 퀴어문학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는, 여러 유의미한 이야기가 나왔다.
   또다른 확장으로는 장르의 확장이 있었다. 퀴어문학 DB에 그래픽노블 카테고리가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비록 영세한 단체라 할지라도 우리는 꾸준히 퀴어문학의 장을 넓혀가고 있다. 어쩌면 비영리단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된다. 장르를 넓히고, 제도 바깥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도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무지개책갈피 4화는 소위 문단 문학, 제도권 문학이라고 불리는 영역의 바깥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의 대담이 되었다.
   대담은 퀴어문학 포럼을 마치고 바로 다음 날인 11월 10일, 다섯 명의 창작자와 함께했다.(더 자유로운 발언을 위한 참여자 분들의 제안으로 익명 처리를 하게 되었다.)



   퀴어문학 : 명명되지 않음을 명명하는 일


   A : 우리가 퀴어문학에 관해 나눌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지 나름 생각해보았다. 우선, 각자에게 퀴어문학이 뭔지 얘기해보고 싶다. 퀴어문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주관적이라고 생각되어서이다. 퀴어문학이란 무엇일까? 말해놓고보니 정말 원론적인 질문이다.

   B : 나는 청소년소설과 평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청소년문학에서도 계속 이야기되는 주제이다. 청소년문학이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결국 구성되는 씬과 요구되는 시장에 따라 나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국내에서 계속 호명되고 있는 퀴어문학은 문단 문학 씬 내에서 등장하는, 퀴어 정체성이 등장하거나 당사자 작가가 쓰는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C : 문학이라는 것은 항상 퀴어한 지점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여성 시인들의 시를 퀴어하게 읽어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퀴어적으로 읽을 수 있는 시들이 정말 많았다.

   A : 시에는 그런 말이 있다. 창작자가 시를 한 편 써서 서른 명이 읽으면 서른 편의 시가 된다는 말이다. 한번은 ‘퀴어한 시’에 관한 소개글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이혜미 시인의 작품과 황인찬 시인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 당시에는 황인찬 시인의 커밍아웃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당사자임이 불분명한 시인의 작품을 퀴어하게 읽어보는 시도였다.

   B : ‘퀴어함’이라는 단어를 쓰면 계속 확장이 되는데, 너무 넓어도 문제가 되고 너무 좁아도 문제가 된다. 각자 인지하고 있는 퀴어함, 퀴어문학이라는 렌즈의 배율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C : 어떤 퀴어 스터디에서 퀴어함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어떤 ‘넘나듦’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명명되지 않음이 결국 퀴어함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왔다.

   B : 명명되지 않음을 명명해야 하는 어려움이다.(웃음)

   D : 누가 봐도 주인공이 퀴어 같은데, 퀴어에 관한 이야기를 쓰지는 않은 작품도 있다. 퀴어가 아닌, 다른 대주제를 가진 작품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놓고(작품의 대주제를 퀴어 관련으로 설정하고) 쓴 작품이 아니면 구분이 어렵다고 느껴진다.

   E : 작품의 주제성에 관해서도 얘기해보고 싶다. 나는 퀴어 당사자가 쓰더라도, 그것이 퀴어적인 주제로 드러나지 않고 기득권에 편승하는 이야기라면 그것도 퀴어문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했을 때 회의적인 편이다. 주인공이 퀴어라고 했을 때에도 그 주인공이 다양성만을 위해 얹어진 인물이라면 사실상 그게 퀴어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주제성에 초점을 두고 읽는다. 그러면 창작자가 굳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도 퀴어문학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시스헤테로 중심적인 것을 벗어나서 그동안 기득권이 쓰지 않았던 정체성과 지향성을 쓴다면 그것이 퀴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B : 나는 그런 퀴어함이 주제 이외의 요소(형식이나 형태, 혹은 출간되는 방식)에 적용될 수는 없는지 고민하고 있다. 등단한 작가들이 생산하고 문단에서 소비되는 퀴어문학이 대체 뭐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예를 들어 요즘 제일 주목받는 퀴어문학을 읽었을 때, “이건 완벽하게 문단 문학과 호환되는 퀴어 서사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형태나 출간 방식에서, 읽히는 장소에서 퀴어함을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인가.

   C : 김봉곤 소설가의 등단작(「Auto」)은 형식도 퀴어하지 않았나 싶다. 빗겨나가는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형식이 퀴어하다고 느껴졌다. 어떤 특정한 형식이라고 말하기는 모호하지만, 작가가 스스로 생각했을 때 자신에게 맞는, 퀴어한 방식을 창출해냈을 때 잘 맞아떨어지면 형식도 함께 퀴어해질 수 있지 않을까. 김봉곤 작가 특유의 그런 느낌이 있다. 어떤…… 게이니즘? 게이스러움?

   A : 게이니스?(일동 웃음)

   D : 형식도 퀴어하고, 작품 자체가 퀴어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생각났다. 김사과 작가의 『나b책』인데, 주인공에서도 형식에서도 퀴어함이 느껴진다. 아까는 대놓고 퀴어 정체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퀴어문학으로 느꼈다고 말했지만, 퀴어로 의심되는 주인공이 주체적일 때에도 퀴어문학 같다고 느낀다. 의심이라는 표현은 좀 이상한 것 같지만, 그렇다.



   BL과 GL, 장르와 플랫폼


   C : BL과 GL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다. 포괄적으로는, 소위 장르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들. 이제는 그것이 문학이 아니라고 얘기하면 옛날사람이 된다. 그래서 BL과 GL은 진정한 퀴어문학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부터 등장인물까지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쓰인, 문단 외부에서 장르적인 플랫폼인 점에서 그렇다.

   A : 그것도 각각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BL은 게이보다는 여성의 판타지를 반영한 경우가 비교적 많고, 거기서 비롯되는 대상화를 많이 목격해서인지 조심스러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퀴어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고민이 된다.

   C : 레즈비언이 쓰는 GL이나 게이가 쓰는 BL팬픽처럼, ‘생산함’을 향유하는 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 (퀴어문학) 담론에서 언제까지 GL과 BL을 변두리로 두어야만 하는가.

   B : 결코 변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까 퀴어문학에 관해 얘기할 때, 시장에서 주목되고 범주되는, 문단에서 호명되는 퀴어문학을 말했는데 개인적으로 좀 황당함을 느낀다. 제도권 문학, 문단 문학이 퀴어문학이라는 단어의 자리를 독차지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이다. 문학의 퀴어함은 다른 장르를 받아들이면서 더 다양하게 해석되고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 장르에 대한 퀴어한 접근이야말로 앞으로 많이 등장하게 될 연구라고 느끼고 있다. 예를 들면 BL 세계관 중에 오메가버스 같은 세계관은 성정치에 대해 실험하는 장르로써 기능되면서 정말 퀴어한데, 당사자를 배제하는 판타지라는 말로 넘겨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 마치 젠더가 확장되고 넓어지듯 범주 또한 확장되는 방향이 맞는데, 타 장르를 인식할 때 나오는 방어적인 태도가 우리의 현재 같다.

   E : 나는 사실 장르소설 작가인데, 다른 작가에게서 GL은 쓰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거는 돈이 안 돼~”와 같은 맥락이었다. 이렇게 상업성으로 장르를 따지게 되어서 논의 자체가 힘든 부분이 있다. 이제 막 시장에서 장르 문학도 비평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는 추세이고, 텍스트릿에서 출간된 서브컬쳐 비평집인 『비주류 선언』도 최근에 나왔다.

   B : 나는 이런 경험이 있다. 스스로 “이거는 완전 GL로 먹힌다!” 생각했던 창작물을 공개했다가 “그건 너무 퀴어 서사야.” 혹은 “GL 독자는 안 좋아하는 서사야.” 하는 반응을 접했다. 그래서 그것을 퀴어문학이라고 하면 “이건 좀 정체성과 당사자성이 없는 판타지에 가깝지 않나?” 하고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이러면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웃음)

   C : 완전 퀴어문학이 아닌가. 경계에 있는.(일동 웃음) 장르 문학은 그런 게 있다. 작업을 하다가 “어 이거 너무 문학적인데 어떡하지?” 하고 고민하게 되는 순간처럼.(웃음)

   B : 문학적이면 안 된다는 말이 재밌다. ‘문학적이라고 통용되는 요소들이 적어야 하는’ 장르의 ‘문학’이 있다는 것. 우리가 이야기하는 ‘문학적임’이 얼마나 한정된 장르의 규칙인가 생각한다.

   D : 개인적으로 소설을 쓰면서 고민한 부분이 있다면, 인물의 정체성이 너무 부각되는 점이었다. 사건과 인물을 분리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상황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가진 젠더퀴어일 때, 그 트라우마의 원인이 꼭 젠더에 관련해야 할 것 같은 상황. 정체성에 서사가 함몰될 때가 있다.

   B : 나는 그게 어떤 중력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소설을 쓸 때에도, 결국 소설의 주제는 청소년이 처한 현실과 청소년인권으로 회귀된다. 같은 맥락으로 퀴어 주인공이 등장하는 서사를 쓸 때, 다른 것을 상상했지만 퀴어 정체성으로 돌아오는 면이 있다. 그래서 다른 세계로 보내보기도 한다. 주인공을 미래로 보내자, 동물로 만들자, 이런 식으로 도약하게 되면 소설은 다른 장르로 불리게 된다. SF, 판타지 등으로.

   A : 정-말 느리기는 하지만, 요즘 문단에서도 장르적 요소를 흡수하고 있는 추세라고 생각한다. 특히 SF쪽에 퀴어적인 요소가 많은데, 만약에 그런 작품을 주로 쓰시는 작가님들을 중심으로 퀴어문학 필진을 섭외하게 된다면 약간 치우치는 느낌이나 도피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B : 그럼 도대체 정면 돌파는 무엇인가.



   #한국문학 #문단 문학 #제도권 문학


   C : 한국 문단은 옛날 옛적부터 불행 서사를 너무 좋아했다. 약자성과 불행 서사가 당연히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문학성이라고 생각하는 대중들의 버릇도 있다. 내가 요즘 좋아하는 작가는 『첫사랑은 블루』의 베키 앨버탤리인데, 소설에 등장하는 게이 청소년이 매우 밝았다. 소설의 내용도 공용 컴퓨터에서 로그아웃을 안 해서 아웃팅을 당한다거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게스트』라는 작품을 읽었는데 매우 재미있는 범죄 스릴러소설이었다. 『핑거 스미스』도 그렇고,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와 퀴어성이 잘 섞인 사례를 외국소설에서 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불행하고, 산뜻한 거. 같은 맥락에서 이종산의 『커스터머』도 좋았다. SF이기는 하지만.

   B : ‘SF이긴 하지만’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현실에서 한국문학이 확장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이상한 것 같다. 한국문학이라는 장르 안에서 퀴어라는 주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퀴어문학이라는 더 넓은 세계의 확장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C : 한국문학이 장르다, 라는 말은 정말 최고다. 한국문학은 장르일 뿐이다. 문단도 무너지고 있는데.

   B : 몰락한 양반가 같은 느낌.(일동 웃음)

   E : 요즘은 글쓰기의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작품의 장르가 SF나 로맨스여서 장르소설이고 작품이 현실적이어서 순문학이라고 분리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다만 독자들이 어떤 작품을 특정 장르로 인식했을 때 작가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순문학 같은 경우에는 연재소설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예를 들면 문장을 굉장히 현학적으로 배배 꼰다든지 하는 것처럼 자신만의 미학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독자가 그것을 용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장르 문학이나 연재소설 같은 경우에는 그 장르나 플랫폼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장르든 거기에서 독자들이 어떤 것을 자유롭게 허용해주는지 많이 알고 있어야 그 장르에 맞는 글을 잘 쓰는 것 같다.

   A : 그런데 순문학이라는 장 자체는 폐쇄적이고 권위적이어서, 기성 문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더 많이 읽힐 수 있는 점이 창작자의 자유와 상반된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연재소설은 플랫폼의 특성상 독자와 더 직접적으로 대면하기 때문에 상업성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다. 순문학의 경우엔 미래지향적이지 않은 기준이 있다. 아무리 개성 있고 새로운 작가라고 해도 등단작이 새롭다고 느껴졌던 적은 별로 없었다.

   B : 나는 그 자유라는 것을 욕망으로 생각했다. 독자들이 그 장르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의 문제로. 그런데 앞으로는 그게 해시태그가 되고, 교차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잘 다듬은 문장과 그 문장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성의 요소를 나누어 해시태그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제도권 문학이라고 부르는 문학의 요소도 부분적인 해시태그가 되어 호명되면, 또 하나의 장르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C : 대개 그런 해시태그 문화를 보면, 쓰는 사람이 해시태그를 직접 달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문장력’ 해시태그를 스스로 붙이게 되면……(일동 웃음) 농담이다. 해시태그를 스스로 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연재소설이 가지고 있는 퀴어함도 획득될 것 같다. 명명되는 느낌으로.

   B : 문단이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세대교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제 문단 문학이라는 장르를 볼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욕망이 뭔지,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두고 갈 것인지 고민해봐야 하는 것 같다.

   C : 모든 곳에는 자본이 개입된다. 유난히 문학 쪽에 자본의 개입이 느렸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문단이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권력과 자본이 함께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시 같은 경우에는 막 공공재처럼 쓰일 때도 있다. 그래서 소설보다 시를 쓰는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가 좀더 자유로워지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어차피 돈이 안 되기 때문에” 더이상 문단의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라는 얘기를 활발하게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A : 소설가는 아직 전업으로 삼을 수 있지만, 시인은 절대 무리다.(일동 웃음)



   큐레이션의 필요성


   E : 나는 마음 맞는 퀴어 친구들과 함께 퀴어문학잡지 비정기간행물을 만든 경험이 있는데, 1쇄가 다 팔리고 2쇄를 찍게 되었다. 필진에는 등단한 친구도 없었고,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고, 여러 주제로 쓰여 모든 글이 퀴어문학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런 자유로운 비정기간행물의 가능성에 대해 알아가면서, 생각보다 독자가 열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장성도 중요하겠지만 도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원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다.

   B : 그런 비정기간행물이나 독립출판 펀딩은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는 대신에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있다. 일일이 챙기는 독자 입장에서는 피로감이 들어서, 누군가가 묶어서 소개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A : 요즘은 독자에게 다이렉트로 텍스트를 보내는 메일링 서비스도 간간히 보인다. 옛날에는 자신의 글을 공개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인 지면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매체와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기회 또한 늘어났다. 그것이 다양성을 가져오지 않을까.

   D : 퀴어문학을 개인으로서 독립출판이라는 형식으로 출판하면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퀴어문학의 한계점은 어딜까, 하는 궁금함이다. 자유로움의 끝을 보고 싶어진다.

   B : 비슷한 맥락에서, 편집자와 기획자의 자유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섭외와 기획에 있어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자신의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의견을 얼마나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지. 그 자유도가 낮으면 섭외나 청탁도 계속 같은 풀 안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일상에 녹아 있는 소수자 혐오가 걸러지지 않은 채 아동청소년문학 안에 등장할 때, 그것을 커트할 수 있는 감수성과 자유도가 편집자에게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어렵게 느껴진다. 그것을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학에 대한 새로운 상상도 실천이 어렵다.

   C : 그래서 정말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무언가를 들이받게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부당한 일을 보게 되면 항의를 하는 편이었는데, 결국 돌아오는 건 쌈닭 이미지와 “너만 옳은 줄 아느냐.” “네가 옳다고 생각한 말들이 피해만 주고 있다.” 같은 반응이었다.

   B :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의문이 든다. 들이받을 사람을 잘 들이받고 있나? 하는 생각. 내가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해도 되나? 하는 의심이다. 할말은 해야 하는데, 결국 이 사람도 권력이 있는 결정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피곤해하고 나도 피곤해지는 그런 상황들이 있다. 문단권력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작가 ‘지망생’, 혹은 ‘습작생’이라는 말을 쓸 때 나는 문단권력을 느낀다. 두번째로는 잡지 청탁을 받았을 때, 작가 소개란에 등단한 지면이나 직업 등의 소속밖에 적을 수 없었던 경험이 있다. 작가 소개로 바꿀 수 있냐고 물었더니 관행이라면서 어렵다고 했다. 잡지의 역사가 있다고.

   A : 그럼 내 소속은 이씨 가문인 걸로.

   C : 우리 관행이 더 오래됐다.(일동 웃음)



   퀴어하게 좀 읽어주세요!


   A : 무지개책갈피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때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바로 커밍아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상하게 여성 작가가 퀴어소설을 쓰면 앨라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성 작가가 퀴어소설을 쓰면 당사자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커밍아웃 안 했다고 하니까 되레 왜 안 하냐고 화내고. 부당한 것 같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예전에는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연히 해야죠!”라고 답했다. 그런데 요즘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그래서 창작자의 커밍아웃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다.

   D : 자유로운 퀴어문학이라고 얘기했는데, 나는 작가로도 커밍아웃을 하고 싶다. 그냥 가볍게 커밍아웃을 한 다음, 누가 그 정체성을 부정하는 반응을 보이면 “이건 제 관행인데요.”라고 하고 싶다.

   C : 이 얘기를 나눴을 때, 주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시 세계가 정체성에 먹히는 것이 싫어서 물러나고 싶다고 했다. 심지어는 행사 같은 곳도 참석하지 않고 글로만 독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신 분도 계셨는데, 일면 동의한다. 그런데 요즘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가 가진 문학적 자유를 포기하고 (퀴어를) 전면에 내세운, 대놓고 퀴어 얘기인 시를 쓰면 커밍아웃 없이도 퀴어로 호명되지 않을까, 그걸 내가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 하지만 내 미학에 맞지 않아서 쓰지는 못 했다.

   A :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는 것이 시라는 장르이다보니, 그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작가’라는 ‘사람’으로 독자를 만나지 않고, 익명으로 글만 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꽤 멋지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사회적 변화를 위해 내 이름과 얼굴을 걸고 정치적 스탠스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솔직히 답답하기 때문이다. 퀴어하게 쓰려고 노력해도 배제당하면 끝이니까.

   E : 나는 일대일 관계에서는 커밍아웃을 하겠지만, 공개적으로 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 한번은 어떤 분이 자신이 속한 창작 집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는데, 내가 퀴어니까 권유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집단에 퀴어 당사자가 아닌 사람밖에 없으니까 들어오라는 식이었다. 나로서는 커밍아웃을 해야겠다는 느낌보다는 비퀴어 집단에 있을 때 드는 느낌이 부담스럽다. 표본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문학장에서는 여전히 시스젠더 게이, 레즈비언 중심의 서사만 가시화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커밍아웃의 중요성이 느껴진다. 일상의 가시화가 문학적 가시화가 되는 느낌으로.

   C : 퀴어라는 개념을 성애와 떨어져서 생각했으면 좋겠다. 기존의 문학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읽어낼 수 있는 점이 많은데, 그걸 놓치는 것이 아쉽다. 그런 건 평론의 역할이기도 하다. 퀴어문학의 물결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평론가들이 퀴어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한다. 평론 또한 문학의 영역에 속하는데, 그 분야에서도 퀴어문학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평론의 형식 자체도 새로움을 지향했으면 한다.

   A : 원래 평론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정말로 수용자의 입장이 더 열려 있다면 굳이 창작자가 나서서 커밍아웃 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담을 통해 개인적으로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던 고민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더 많이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쏟아져나온 논의와 각자의 경험은 대담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포럼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다른 풍요로움이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 안에 어색함을 극복했다는 점도 인상깊었다. 초면이었던 참여자 분들에게 “여러분, 초면 맞으시죠?”라는 농담을 건넸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퀴어 창작자라는 공통분모는 끈끈한 화합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확장이라는 표현을 선물해준 교육장은 나의 문학이 더 넓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이번 대담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그 사실을 체감했다. 연재를 기획할 때, 대담의 참여 대상을 ‘비등단 창작자’와 ‘작가 지망생’으로 적은 것이 그 증거이다. 그것을 깨닫고 돌아보게끔 만들어준 참여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무지개책갈피에서 퀴어문학의 확장을 위해 더 많은 시도를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무지개책갈피

모든 퀴어 독자들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를 소재로 한 국내외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퀴어의 시각을 담은 비판적 리뷰를 공유하며, 한국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