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유림   17세. 고등학생
     성만   40세. 유림의 아버지
     수현   17세. 유림의 친구. 목소리만 등장
     여자 목소리(유림의 계모)   25세. 베트남인

     암전된 무대에 강렬한 조명으로 번개, 관객들이 깜짝 놀랄 만큼의 천둥


여자 목소리
(절규하며) ten kh?n ki?p! (땐 꼰 끼엡!)


     빗소리가 들리며 서서히 무대가 밝아진다.
     거실에는 커다란 시계가 6시 25분을 가리키고 있다.
     방에서 나오는 유림(17살. 여) 시선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노트에 멈춰진 채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간다. 신발을 신으려다 비 오는 창문을 힐끗 쳐다보며 신발장을 열어 우산을 찾는다.
     그때 요란하게 “응애응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유림
아빠, 방에 아줌마 없어? (한숨 쉬며) 너무 시끄럽잖아. 이 시간에 아기 울음소리 민폐야.


     거실에는 바닥에 소주병이 3개 나뒹굴고 있다.


성만
(혼자 중얼거리며) 지금이 밤이냐? 새벽이냐? 날이 밝는 게 싫다…… (한숨)


     성만(40살. 남)은 못 들은 것처럼 4번째 소주 뚜껑을 열고 잔에 따라 입에 털어 넣는다.


유림
(짜증 섞인) 좀 들어가서 아줌마 깨워봐! 저렇게 울어대는데 도대체 왜 달래질 않지? 자는 거야? 잠이 오나?


     유림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유림
아줌마! 아줌마!


     속싸개에 싸인 백일 남짓한 작은 아기를 안고 나온다. (인형으로 대체)


유림
왜 얘 혼자 있어? 방에 아줌마가 없다고! 아빠! 어디 갔는지 알어? 편의점이라도 간 거야?


     더욱 커지는 아기의 울음소리.
     한 번도 안아본 적 없는 듯 어색하게 아기를 안고(아니 들고 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있는 유림의 어색한 포즈.
     좀 더 가슴으로 안아서 흔들며 달래 보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유림
나 오늘 기말고사라고! 지금 안 나가면 시험 못 봐! 얘 좀 안아봐.


     창문 쪽을 향해 관객석과 등 돌려 앉는 성만.


유림
(한숨 섞인) 미쳐……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통화연결음이 한참 들리다가 거실 식탁 위에서 드르륵 진동 소리를 내며 울리는 핸드폰을 발견하고 유림은 그곳으로 걸어간다.


유림
뭐야…… (핸드폰을 집어들며) 이 아줌마…… 작정한 거야?


     반응 없는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다.
     유림이 아버지를 흘깃거리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질린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나와 아기를 거실에 있는 바닥에 내려놓는다.


유림
불쌍하다 불쌍해. 저 조그만 게 살겠다고 입 벌리고 우네. 다들 자기 입에만 처넣기 바쁜데 말이야. (아기를 향해) 야! 기다려.


     물을 끓이고 분유통을 찾는다. 뚜껑을 열어 젖병 분유를 넣으려다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몰라 통에 작게 써 있는 설명을 한참 쳐다본다. 4숟갈을 듬뿍듬뿍 퍼서 젖병에 담는다. (원래는 평평하게 깎아서 넣어야 하는 것이지만 유림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듯 우는 아기 목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유림.


유림
아! 간다니까!


     뜨거운 물을 젖병에 바로 부어버린다.


유림
(젖병을 떨어뜨리며 놀람) 아뜨아뜨!!!


     바닥에 떨어진 젖병에 분유 몇 스푼을 더 떠 넣고 뜨거운 물, 차가운 물을 대충 섞는다.
     젖병 입구에 입을 대어 조금 마셔본 후 뛰어온다.
     바닥에 누워서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기의 입에 꼭지를 물린다.


유림
울지마…… 제발! 왜 이래!


     이제야 겨우 진정된 아기. 울음을 그친다.
     유림은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어정쩡한 자세로 등을 구부리며 아기를 안고 먹인다.


유림
(비아냥) 올 게 왔네. 뉴스에서만 보던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만 거야. 엊그제도 이런 뉴스 티브이에서 봤어. 베트남 신부 도망간 거. 맞네…… 뭐 없어진 거 없나 잘 찾아봐. (실소를 터트리며) 그런데 우리 집에 돈, 금붙이란 게 있을 리 없잖아? 거지 같네.
상만
혼자 계속 나불거리는데 대꾸 안 해줘서 더 긁는 거냐? 입 다물고 꺼져. 내가 못 때릴 것 같냐? 매가 그리워? 확!


     말없이 빈 소주잔을 매만지던 상만.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상을 엎으려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유림
악!


     순간 놀란 유림이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아기를 보호하려 온몸으로 꼭 끌어안는다.


유림
(짜증) 당장 이걸 어떡해. 이 새벽에 어디 가 맡길 수도 없고, 그냥 내려놓고 가자니 굶겨 죽일지도 모르겠고. 왜 하필 오늘이냐고…… 아줌마 슬금슬금 도망치는데 보고만 있었어?
상만
말릴 새도 없었어. 너무 순식간이라.
유림
그래서 보냈다고? 하…… 둘 다 대책 없다.


     상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소주병을 들어 잔에 콸콸 따른다.
     떨리는 손이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소주잔을 채우고 넘쳐 상 아래까지 흘러 떨어진다.
     유림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린다.
     아기를 안은 구부정한 자세에서 한 손은 젖병, 다른 한 손으로 겨우 어깨와 턱에 걸쳐 전화를 받는다.


유림
여보세요
수현 목소리
야 너 뭐야! 어디야? 시험 때는 가장 먼저 오는 애가…… 지금 어디야? 너 빨리 뛰어! 지각하겠어!
유림
나 아직도 집이야. 지금 지각이 문제가 아니야. 시험시간에도 못 갈지도 모른다니까!
수현 목소리
에이, 농담 그만하고
유림
암튼 지금 상황이 복잡해.
수현 목소리
미친! 뭔 소리야. 시험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딨는데. 빨리 그냥 와. 뭔진 몰라도 학교 다녀와서 해결하면 되잖아.
유림
(발을 동동 구르며) 그런데…… 나 진짜 오늘 결석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빵점? 거기에다가 무단결석? 너무 일이 커지겠지?……
수현 목소리
이걸 쓰는 애를 본 적은 없는데. 최악의 상황에서 최후의 방법이 있긴 해.
유림
(다급하게) 뭔데?
수현 목소리
생리 결석
유림
아……
수현 목소리
그런데 문제가 있어. 양호선생님께 증거물 제출 알지? 피 묻은 생리대를 들이밀어야 믿어 준다니…… 으엑! 근데 누가 만든 법이야? 여자의 머리에서 나올 리가 없어. 설마…… 교장? 토 나와.
유림
나 생리 끝났는데? 니 꺼라도 빌려줘.
수현 목소리
(정색) 미쳤구나? 아주 돌았어. 그런데 농담 같지가 않아서 더 소름이다. 너 집에 무슨 일 있는 거야?
유림
(한숨)……


     한숨을 쉬다가 실수로 아기 입에서 젖병의 꼭지가 빠진다.
     아기 울음소리 “으앙!”


수현 목소리
이게 무슨 소리야? 아기 울음소리 같은데! 너 어디야?
유림
(당황) 아, 아니야…… 잠시 후에 다시 걸게. 끊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결심을 한 표정으로 아기를 안고 아버지에게로 향해 걸어간다.


유림
(아기 내미는) 받어!


     상만 힐끗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들어 유림을 바라본다.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선다.


상만
(혀가 꼬인) 줘. 이리 내라고.
유림
(줄까 말까 망설이며) 진짜 혼자 돌볼 수 있겠어?
상만
(유림을 밀치며) 가! 가!
유림
나도 몰라! 갈 꺼야!


     유림이 조심스레 아기를 넘겨주는데 술 취한 상만이 위태위태하게 받다가 떨어뜨릴 뻔한다.


유림
악!!


     아기를 겨우 받아 꼭 껴안고 울먹이다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유림
저 알콜중독자를 어떻게 믿고…… 내가 어떻게 학교를 가냐고…… 아니! 베트남에서 15살 어린 여자를 새엄마라고 데려왔으면 잘 좀 챙겨주던가! 오죽하면 집을 나갔겠냐고! 응? 이 사달을 만들어!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할 정도지. (아기를 쳐다보며) 왜 이런 혹까지 만들고 말이야!
상만
그 여자가 원해서였어.
유림
알아. 그 여자란 사람이 그렸던 미래가 있었겠지. 행복이라는 욕심을 부렸을 거야. (비웃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줌마 매일 울었어. 밤마다 우는 소리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어.
상만
가! 잔소리 그만하고 애는 그냥 내려놔. 울다가 지 풀에 지치면 그치겠지.
유림
시끄럽다고 입 틀어막게? 제정신 아닌 알콜중독자한테 아기를 맡기고 혼자 어디 가서 놀고 있으려나. 그 여자도 제정신은 아닌가봐.


     상만 벌떡 일어나 아기를 빼앗아 흔들 침대에 뉘여 세게 흔든다.
     아기 숨이 넘어갈 듯 울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유림
(아기를 안으며) 미쳤어? 이렇게 심하게 뇌 흔들리면 병신 돼!


     말은 거칠지만 아기에 대한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유림
(분노) 도대체 몇 명이 아빠 때문에 울어야 하는데? 고약한 승질 할머니 치매에 수발하며 똥 받아내던 엄마…… (울분 터뜨리며) 본인 폐 썩는 줄도 모르고 암으로 세상 떠나고…… (어이없어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베트남 여자 데려와서 17살 차이 늦둥이 동생도 보게 해주고. 챙피해 죽겠다고! 그래…… 차라리 잘됐다 싶었어. 나 고등학교 졸업하면 아빠랑 모든 소식과 연을 다 끊을 생각이었으니까. 떠넘길 사람 잘 나타났다 싶었지.
상만
싸가지 없는 년. 나도 너 같은 딸년 필요 없다. 하는 말마다 불만 짜증! 아주 미쳐버릴 것 같다고! 그만 땍땍거려!
유림
이제 해방되나 했는데. 아줌마는 도망간 건가? 참 내 인생도 기구하네. (아기를 바라보며) 혹이 하나 더 생겨?……


     품에 안고 있던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그라들고, 잠이 든 것을 확인한다.
     조심스럽게 아이를 침대에 뉘이고 한참을 토닥인다.


유림
무슨 달콤한 말로 꼬셔서 데려왔는지 모르겠는데. 아, 재혼에 나 같은 다 큰 자식이 있다는 것을 당연히 몰랐겠지. 대단한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란 걸…… 지방 변두리 다세대 주택 방 두 칸짜리 좁은 집에 커다란 짐가방을 풀면서 당황하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도대체 왜 데려왔어? 노리개야? 더러워……


     유림의 핸드폰 전화벨 울린다. 눈물을 닦고 심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진정한 후에 받는다.


수현 목소리
(작은 목소리로) 너 아직도 집이야?
유림
응. 수현아. 나 오늘 아무래도 못가. 안 되겠어.
수현 목소리
선생님한테 무슨 핑계라도 대야지. 너 왜 그래? 나한테도 말 못 할 이유가 뭐야? 너 납치당했니? 아니면 성폭…… 아니다…… 내가 무슨 소릴. 네가 결석한다는 얘기를 듣고 난 그냥 알겠다고 해야 하는 거니?
유림
나 못 가는 거 아니야. 안 가는 거야. 결석 사유? 그런 거 없어. 말 못 해.


     갑자기 밖에서 경찰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중에는 “어머!” “으악!” 비명도 섞여 있다.
     유림은 호기심에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어 내려다보려다가 비가 들이치고 있는데도 이미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유림
왜 비가 오는데 열어놨어?


     그리고 다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뒤돌아 스르르 주저앉는다.


유림
나…… 무단결석이 아닌 게 됐어.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유가…… 있어. 우선 끊자.


     유림과 눈이 마주친 상만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다.


유림
(울먹이며) 아니지? 아니지?……


     다시 조명으로 번개와 날카로운 천둥소리가 무대를 휘감는다.
     암전되며 빗소리만 적막하게 들린다.

     *첫장면의 여자 목소리 ten kh?n ki?p! (땐 꼰 끼엡!)은 ‘당신을 저주해!’라는 뜻이다. 관객들은 그 의미를 몰라도 된다. 단, 이방인의 원망 섞인 마지막 절규라는 느낌을 표현해야 한다.



장지영

"해봐라!” 판을 깔아줘도 안 하던 그 좋은 시절 다 보내버리고 벌써 36살.
뒤늦게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흰머리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