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to X
4화 수취인 분명
과거의 친구를 떠난 사람. 허수경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 사람과 삶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종종 죄책감이 되고 마는 사람. 허수경의 말을 빌리자면, 마음끼리 살 섞으려2) 하는 사람. 더이상 시를 쓰거나 공부하지 않는,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보다 애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
「큰 개」는 A의 꿈을 다룬 시다. 시에는 ‘Z 언니’가 나오고 화자는 ‘다시 Z 언니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 현실에서도 Z 언니는 A가 이제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이다. 말하자면 이 시는 부치지 못한 편지 같은 것. A는 이 시를 Z 언니에게 보낼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서로를 떠난 사정과 다시 연락하지 못하는 여러 어려움이 얽혀 있기에 망설이고 있다고. 그런 고민 중에 우리와 만나게 됐다. A는 이 기회에 Z 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가장 Z 언니에 근접한 사람을 향해서 시를 보내보기로 했다.
A에게 Z 언니는 어떤 사람일까. Z 언니는 A에게 허수경의 시를 알려준 사람이고, A는 자연스럽게 허수경을 좋아하게 됐다. 허수경이 마음끼리 살 섞으려 했듯이 Z 언니도 그런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A 스스로도 모르던 마음을 언어화해준 사람이라는 설명에, 뭔가 알 것 같았다. Z 언니가 아니라, 그를 생각하는 A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Z 언니와 닮은 사람에게 시를 보내고, 반응을 살피고 싶다는 마음도 이해가 갔다.
Z 언니와 아주 유사한 독자가 이 작품을 읽고 어떤 마음이 드는지 이야기해준다면 이 시를 아주 먼 훗날에라도 Z 언니에게 전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A의 말을 듣다보니 어쩐지 우리가 〈TV는 사랑을 싣고〉가 돼야 할 것 같았다. 코 끝 찡한,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해내야 마음이 개운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름다운 결말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걱정이 됐다. X의 반응이 A의 마음을 해치면 어쩌지, 우리가 찾은 X가 A의 마음에 돌 하나를 더 얹지는 않을까, 어깨가 무거워졌다. X를 찾겠다고 약속하기 전에 우리가 A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X는 A의 사연이 아니라 시를 읽게 될 테니까. A에게 더 묻기로 했다. A의 사연이 편지가 아니라 시여야, 문학이어야 하는 이유는 뭔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쓰는 사람인지.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시는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말하는 시였어요. 결국 그게 누군가에게 갈 수 있는 문학인 것 같아요. 저도 마음을 있는 대로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요. 시에서 추구하는 정직함이 삶에도 있길 바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가 좋다고 생각하는 시는 ‘남김없이 말하는’ 시. 마음을 있는 대로 밖으로 내보내는 정직함이 시에도, 삶에도 있길 바란다고 했다. A가 말하는 건 어떤 정직함일까. 이를테면 A는 필명을 쓰지 않는다. 필자인 ‘나’를 만들어내면 그뒤에 숨게 될까봐. 통합된 자아로, 한 명의 ‘나’로, 남김없이 말하고 정직하게 쓰고 싶다고 했다.
A의 말을 듣고 정직하게 쓰는 일을 상상해봤다. 그리고 잠시 아찔해졌다. 나를 완전히 드러내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드러낸다면 좋겠지만, 의도치 않게 나의 나쁜 마음, 게으르고 못된 심보까지 드러난다면…… 내가 그걸 있는 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부끄러웠다. 따지자면 나는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글을 쓰는 것 같은데. 내 이야기 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반 년 째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고, 이름을 드러내고 글을 쓰는 것이 점점 두려워져 필명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와 A는 정반대의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A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진 것은, A에게도 이 과정이 투쟁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A가 정직하게 쓰고 싶은 건 그게 쉽고 편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거나 시를 가림막으로 삼아 나쁜 말을 할까 걱정이 되어서라고 했다. 마음을 있는 대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때 어떻게 하면 콤플렉스, 치부까지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스스로 묻고 답해보는 과정이 시를 쓰는 과정이고, 내면적인 투쟁을 하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A와 나는 아주 다른 지점에서 글을 쓰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욱 투쟁이라는 말에 공감이 됐다.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까지 감출 것인지는 쓰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감춰도 감춰지지 않는 것이 분명 있다. 쓰지 않은 것까지 들킬 수밖에 없다면, 결국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 ‘나’를 마주하고, 드러내는 게 두렵지 않은 마음을 마련해가며, 더 좋은 마음, 좋은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아주 오래 필요할 것이고 그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나아간다는 건 투쟁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일일 테다.
시에서 추구하는 태도가 삶에도 있길 바란다는 A의 말을 다시금 생각한다. 바람인 동시에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믿음의 균형을 맞춰가면서, 삶의 태도를 시에 비춰보고, 시적 태도로 다시 삶을 살겠다는 다짐. 삶과 시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서로를 끌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A의 말을 들으며 왜 편지가, 안부 문자가 아니라 시여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조금 해소되었다. Z 언니를 생각하는 A의 마음이 몇 번이고 꺼내져 다듬어졌을 것을 생각하면 Z 언니에게 보내는 말은 편지가 아니라 이 시의 모양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마음을 드러내고 보낼 것인지 균형점을 결정하는 일을 A와 시가 함께 했을 것이기 때문에.
A와의 인터뷰는 A가 찾고자 하는 시와 삶의 균형점, 그걸 찾아내는 데 필요한 용기를 엿본 시간이었다. A는 용기가 아주 많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용기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A의 다짐에 덧대어 함께 다짐하고 싶어졌다. 더 나은 마음을 가진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그리고 이따금 이런 다짐이 무뎌질 때, 글을 쓰고 읽는 일이 다시 용기와 다짐을 충전시켜줄 수 있다면,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정말 글을 읽고 씀으로써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제 남은 건 독자를 찾는 일. A의 시를 공들여 읽어줄 독자를 찾아 나서야 한다. 늘 그랬듯 이 만남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A에서 X, 그리고 Z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다음 화에 계속)
-지원의 에필로그
허우적대고 있다는 느낌, 나만 뭔가를 모르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뭐라도 붙잡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보다 몇 배는 보폭이 넓은 글들이 성큼성큼 나로부터 멀리 가게 해주었다. 나를 데리고서 가보지 못한 곳에 정착하는 글들. 그런 글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이런 글은 누가 쓰지, 누가 읽지, 그런 게 궁금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벌써 한 사람이 있다는 건 덜 외로울 수 있다는 것. 조금이라도 나은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
누가 읽고 쓰는지를 찾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계속 언저리에 있는 느낌이었다. 열심히 찾아다닐수록 징그럽고 나쁜 것들을 많이 봐야 했다. 문학이 그런 걸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도 했다. 문학보다 문학이 아니어야 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분노했다.
분노가 냉소가 되고 다정한 말보다 조롱이 익숙해졌을 때 뒷담화말고 다른 걸 해보자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호기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from A to X를 핑계 삼아 마음껏 물었다. 더 좋은 걸 읽고 쓰고 싶은 갈증에 대해서, 그걸 공유함으로써 우리 함께 깊어지고 확장되는 순간에 대해서. 글이 만남의 매개가 되고 우리가 마음을 들여 이야기를 나누면 그 순간들이 다시 글이, 좀더 나은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될 수 있음을 믿는다.
근사(최지원)
나래. 나은. 지원. 같은 학교에서 같은 허기를 느낀 세 사람이 작당 모의합니다. 냉소와 조롱과 뒷담화보다 근사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쓰고 읽는 당신이 궁금합니다. 문학 ‘하는’ 우리를 위해 움직입니다.
2020/02/25
27호
- 1
- 나은, 나래와 함께 ‘from A to X’를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미처 전하지 못한 인사말을 이번 화 마지막에 덧붙였다.
- 2
- 허수경, 「마치 꿈꾸는 것처럼」,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