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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건



   책상을 사려 한 달 정도 고민했지만 끝내 무언가를 사지 못했다. 책상을 새로 사는 것은 낡은 책상을 교체하는 일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면 대개 돌이킬 수 없다. 책상을 버린 뒤에도 잠이 들면 낡은 책상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지금 사용 중인 책상은 오래된 가구다. 처음에는 밝은 흰색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색이 바랬다. 나는 아마도 중학생 때부터 이 책상을 사용해왔던 것 같지만 정확한 구입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동안 이 책상에는 다종의 물건들이 놓였다 사라졌고 원인 모르는 흠집들도 남겨졌다.
   고가의 책상과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책상, 가볍고 저렴한 책상을 두루 둘러보았지만 무엇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냥 지금의 책상을 방에 두기로 했다. 책상의 다리들은 색이 다른 나무로 수리되어 있고 서랍은 열 때마다 괴상한 소리를 낸다. 어떤 서랍은 밑바닥이 휘어졌다.
   어쩌다 이것을 이런 형태로 계속 가지고 있게 된 것일까? 나는 가끔 이 오래된 가구가 낯설다. 이형의 시간들이 책상의 모습에 깃들어 있다.
   내게 가장 얻기 어렵고 회복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은 과거다. 과거를 아끼고 싶다는 소망은 그것을 버리고 싶은 충동과 맞닿아 있다. 나는 언제든 이 책상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여기 앉아 이 글을 쓴다. 무엇에 대해 쓰려 하든 끝내는 나에 대해 쓰고 만다. 글과 책상은 교체될 수 있지만 과거는 통제될 수 없다. 꿈속에서 나는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기억들을 맞닥뜨린다. 꿈의 수집은 현실과 꿈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작업이었던 것도 같다.



   허희정



   작년 여름에는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만드는 일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두 입자의 굵기, 커피 필터의 재질, 물의 양과 온도를 비롯한 많은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나는 펄펄 끓는 물을 아무렇게나 간 원두 위에 부어버렸고, 어쨌든 필터를 통과한 액체는 내가 부은 액체와는 다른 색깔이었으니, 나는 그 사실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나의 책상은 창문에 맞닿아 있고, 창문은 남서쪽을 향해 틔여 있고,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는 금방 밍밍한 액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사실이 불만스러워 책상의 방향을 바꾸어보려고 했지만 좁은 방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너무 적었다.
   가끔 이 방 안의 사물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책상 위에 늘어놓은 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물건들이 붙박이장 속에 들어앉아 있다. 붙박이장의 위치는 이 방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구조의 방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데, 유의미하거나 의미가 없거나 기록이 기억이 없는 물건들은 제각기 나름의 부피와 질량을 갖고.
   돌아볼 때마다 새로운 먼지가 앉는다.



   양선형



   이 기획을 진행하는 동안 이문동, 익산, 보은에 직접 방문했고 구글 맵을 통해 시드니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오랫동안 카페에 앉아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문장을 썼다. 나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 나로부터 나가고 싶고, 그것은 나의 어리석은 경험적, 관념적 삶의 범주를 초과하는 장소들을 내게 이식하면서 시작될 것이다. 무지 속에 환상과도 같은 장소가 자란다. 그곳이 나만의 멸균된 환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일이 자아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글쓰기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는 않을까. 나는 언제나 무엇을 얻을까. 힌트만을,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는 희박한 표지들만을 얻는다. 이곳에서 없어지는, 저곳에서 없어지는, 내가 없는 장소에서도 없어지는 것들이 있다. 눈앞을 구르는 돌멩이는 내가 가보지 못한 돌담 너머에서 날아온 돌멩이. 내가 맞아 피를 흘렸을 수도 있는. 꿈의 아카이빙이 그저 나를 무한히 강화하는 행위가 아니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모래를 움켜쥔 손을 놓으면 나 또한 모래처럼 흩어질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느리게 계속되는 흐름, 슬로모션으로 촬영된 실종의 스펙터클 속에 위치한다.



   Goat the funky



   어떤 곳으로 갈 수 있는 음악만의 속도가 있다.
   흐릿한 이미지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흐릿한 형상으로 무한하게 음악은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함께한 작가들의 원고를 읽으며,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장면으로 연결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거나 고르고자 했다.
   언제나 반응에 대해서 생각했다.
   댄스 플로어의 반응은 즉각적이다. 그들의 표정과 몸에서. DJ의 선곡이 별로거나, 분위기를 잊거나, 혹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온도가 달라진다. 반면 이 작업에서 나는 ‘랜선’을 통해야 했다. 웹페이지가 곧 플로어였고, 반응은 기존의 방식처럼 즉각적일 수 없었다. 작곡과 선곡을 하는 나의 주관과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객관화. 나중에 반응을 도모해야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의 작업실은 최대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극단적인 편안함이 가장 좋은 음악적 발상을 이끌어낼 거란 생각에서다. 편안한 채로 가만히 여러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귀를 기울일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카페에 앉아 있거나, 석양을 바라보거나, 아무 생각 없이 몸을 흔들거나. 가끔은 그들이 나를 흐릿한 곳으로 데려간다.



   민병훈



   책상을 엎어야 한다. 책상을 분해해서 다시 조립해야 한다. 책상에서 도저히 할 수 없을만한 일을 생각해야 한다. 책상을 두 동강으로 쪼갤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책상만 아니면 된다는 말을 책상 위에 새겨야 한다. 책상이 불러온 장면, 장소, 장식, 장난들.
   책상에서 책상으로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고, 낙관적인 생각들을 밀어내면서, 다시 앉아야 한다. 붙잡지 말아야 한다. 붙들려야 한다.
   책상의 롤링, 책상의 요잉, 책상의 피칭.
   책상은 운동하지 않는다.



   김지환



   하룬 파로키는 컨트롤 데스크와 플레이어, 레코더가 있는 편집실 의자에 앉아야 글이 써진다고 한다.1)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는 대화하는 인물의 미소를 발견하기 위해 플레이어를 재생하고 역재생한다.2) 나는 이미지를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전에 나는 이미지를 보고 쓰는 사람인가. 세 거장이 멋있으니까 그들처럼 작업하면 나도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실 의자에 앉았다. 민병훈이 송도의 소리를 수집하기 위해 샷건 마이크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고 있는 영상을 재생하고 역재생한다.3) 미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더위를 먹은 건지 매미의 저주파 소리로 신경이 날카로운 건지 미소를 잃었다. 한 번의 좌절을 경험하고 양선형과 최영건이 『물결 벌레』를 낭독하는 장면을 재생했다.4) 하지만 미소를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영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너지는 금시에 소진되었고 좌절감으로 피곤해졌다. 컴퓨터 책상에 엎드렸다.
   나탈리 그랑제에서 볼법한 정원에 있었다. 이따금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릎은 감각이 없었다. 눈이 아파서 끔벅끔벅 감았다가 떴다. 스마트폰을 자제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한 결과임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게임 중독자였다. Toon Blast를 너무 많이 해서 게임을 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지고 있었다. 펑. 펑. 매일 밤마다 큐대가 어른거린다던 쓰리쿠션 꿈나무 Goat the funky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긴장을 풀려고 꽉 쥔 주먹을 펴서 손바닥을 봤고 멀리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응시했다. 왜 지문은 선명한데 풍경은 흐릿한 거지. 마침 멀리서 허희정으로 보이는 사람이 정원을 배회하고 있는 게 보였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눈동자가 보일 듯 말듯 눈을 떴다. 그러면 더 잘 보일 것 같았고 실제로 잘 보였다. 눈을 완전히 감지는 않았다. 그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내 얼굴은 여러 모로 죽상이었다. 예전보다 더 잘 볼 수 없어서 우울했다. 스마트폰을 정원 호수에 던졌다. 물수제비는 처참히 실패했다. 이런 나를 스트라우브와 위예가 봤다면 당혹스러웠겠지. 호수 옆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봤다. 빛 알맹이가 점멸했다. 눈썹에 맺힌 눈물이 태양에 의해 난반사하는 프리즘이었다. 당혹스러움을 관찰하면서 눈의 시력을 걱정하거나 스마트폰의 생사를 상상하기보다는 내 미소가 어디에 숨은 걸까 생각했다. 그리고 꿈의 수집 멤버들의 미소를 찾을 수 있을지 자문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계속 좌절하는 수밖에. 숨겨진 미소를 찾으려고 해야지. 울면서 부딪혀봐야지. 물론 이제 세 거장을 흉내내는 건 그만할 거지만.

영상 〈숨겨진 미소〉(총 3분 17초, 연출 김지환). 영상에 삽입한 음악은 Peter Chase가 작곡한 〈L'appartement-final〉이다.



꿈의 수집

음악을 만드는 Goat the funky와 영화를 만드는 김지환, 소설을 만드는 민병훈, 양선형, 최영건, 허희정. 여섯 사람이 모여 일곱 장소를 표류합니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새로 출발한 사람들이 다시 따라 걷습니다. 이로써 ‘꿈의 수집’은 ‘장소와 장소’ ‘장소와 개인’ ‘개인과 개인’이라는 세 가지 관계의 꿈을 읽어내보려 합니다.

2020/03/31
28호

1
Harun Farocki, 〈Interface〉(1995)
2
Pedro Costa, 〈Where Does Your Hidden Smile Lie?〉(2001)
3
꿈의 수집 2화 영상 〈송도의 높이는 제각각이다〉
4
꿈의 수집 3화 영상 〈익산, 미륵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