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번개


   2019년 여름, 우리는 이화동의 카페에 앉아 그즈음 읽은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에 대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소설의 주된 배경인 세운상가와 그 내막, ‘공간의 구조’와 ‘이야기의 구조’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세운상가는 본래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로 부상했으나, 강남 개발이 빠르게 이뤄지며 주거지로서의 메리트가 사라지고 ‘슬럼’화가 되어버린 비운의 공간이다. 건축가 김수근이 디자인한 공간이지만, 각 부분을 시공한 건설업자들이 잇속을 챙기기 위해 설계를 수정해버린 탓에 완성된 건물은 초안과 무척 달랐다. 그 때문인지, 한 건축잡지에서 실시한 ‘한국 현대건축 태작(Worst) 30’에 순위를 올리기도 했다. 1987년 저작권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불법 비디오 유통의 온상지이기도 했고.
   황정은 소설에 드러난 것처럼 지금은 문을 닫은 점포도 많고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운영되는 점포도 있다.
   그쯤 얘기하다보니 그동안 우리가 세운상가를 그저 오며가며 지나치기만 했지, 제대로 방문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볼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창경궁에서 종묘로, 귀금속 거리를 천천히 지나쳐 세운상가로 향했다. 길을 지나며 “여긴 장석남 시집1)에 나온 곳(창경궁)” “여긴 김봉곤 소설2)에 나온 곳(종묘공원)” 짚어보기도 했다. 서울이 문학 속 공간으로 빈번하게 쓰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길과 공간을 가시적으로 접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자연히 공간 탐방에 호기심이 일었고, 그 속에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거란 막연한 예감도 들었다.
   우리의 서울 산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 산(産, made in seoul)책


   우리는 한국문학을 읽으며 자랐고, 각각 글을 짓는 사람과 집을 짓는 사람이 되었다. 건축과 소설은 선명한 경계를 지니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경계는 희미하며 여러 면에서 면밀히 맞닿아 있다. 하다못해 ‘짓는다’라는 단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글을 짓고, 집을 짓는 우리는 건축과 문학의 경계를 없애고, 맞닿은 지점을 찾기 위해 산책을 시작하기로 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를 방문하는 경우는 많지만, 문학의 공간을 탐방할 기회는 흔치 않다. 작가의 문학세계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문학 기행’을 가긴 하나, 오래간 문학 기행 역할은 「동백꽃」이나 「소나기」 같은 고전 속 공간을 관광지화한 곳이나, 작가의 생가를 방문하는 데에서 그친 것 같기도 해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서울 산: 책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공간’들을 산책하며 그 공간에 대한 단상이 소설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공간의 변천 과정, 그 내막엔 어떤 사건이 숨겨져 있는지 면밀히 살펴볼 예정이다.
   산책로는 이렇다.

① 동대문 DDP - 김사과의 「여름을 기원함」
② 용산 4구역 재개발 지대 - 김연수의 「동욱」
③ 세운상가 -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④ 노량진 - 김애란의 「건너편」
⑤ 후암동 적산가옥 - 박민정의 「신세이다이가옥」
⑥ 선릉 - 정용준의 「선릉 산책」


   공간과 사회는 떼어낼 수 없다. 모든 공간엔 역사가 묻어 있으며, 사회적 사건과 함께 구축되고, 증축되고, 부식된다.
   시대와 공간성이 잘 드러난 동시대 작가들의 소설 여섯 편을 선택했다. 이 소설들은 모두 서울의 공간을 기저로 삼고 있는 서울산(産, made in seoul) 소설이며, ‘용산 참사’나 ‘도시재개발’ 같은 오래 회자되어야 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단어와 문장만으로 공간을 상상하는 것을 넘어 시각과 건축성에 유념하며 소설을 함께 읽어나간다면 더욱 좋을 듯하다.



   산책 파티원 모집



   산책을 하며 우리는 두 계절을 지날 것이다. 공간의 풍경과 빛의 농도, 그곳을 머물거나 떠나는 이들도 걷는 동안 시시때때로 변할 것이다.
   이 글은 한국문학을 애정하는 이들도, 건축에 관심이 많은 이들도, 단순히 산책을 좋아하는 이들도 모두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코로나 이후 변화된 일상에 답답함을 느끼는 일부 독자들에겐 대리만족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속도를 맞추며 함께 걸어도 좋고, 때로는 잠시 쉬어가거나, 뒤따라도 좋다.

   당신이 우리의 서울 산책에 동행하는 것은 언제나 기꺼이 환영이다.



경계 없는 작업실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해온 소설가 성해나와 건축학도 원정아. 문학 안에는 사람이, 사람 안에는 건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 안에 있는 건축을 본다.

2020/06/30
31호

1
「숨의 사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 1995.
2
「여름, 스피드」, 『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