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小說
3화 171은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_「감정도 아카이빙이 되나요」
지수님께서 제보하신 일기
어제는 이선희 노래 듣다가 이러저러하다가 백지영의 ‘사랑 안 해’를 들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막 터져나오는 거다. 지금 들으면 그냥 좀 시큰한 정돈데 어제는 눈물이. A랑 (혼자) 담판 지었다고 생각하는 요즘 그래서 속이 되게 까칠했나보다. C가 어딜 가는지……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눈물이 까르륵, 꺽꺽 소리까지 났다는. 간만에 그렇게 울었더니 필요한 눈물이라도 나왔던 듯 가벼운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 A랑 끝내야겠다, 라고 갑자기 손이 딱 놔진 후, 생각보다 내 상태가 괜찮아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완전 괜찮지는 않았나보다. 방금 내 번호로 온 전화가 맞았는데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끊겨버렸다. 찝찝하군…… whatever…… 암튼 A가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다. 내가 A를 싫어하게 될까 봐도 사실 겁이 나고.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떠올라 멍 때릴까 두렵기도 하고…… 갑자기 확 잊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도 이렇게 무덤덤해지는 부분이 있는데 걔도 그렇겠구나. 이미 오래 전에 마음 접었던 걸까 싶기도 하고. 내심 나를 먼저 찾아봐줬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아직도 가끔 올라오는데…… 희망 같았다가도, 그게 갑자기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생각보다 덜 끙끙거리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은 ‘A는 너를 부담스러워해! A는 너를 원하지 않는다! 나를 안 좋아하는 걸 넘어서 스트레스 받는다. 귀찮아한다.’라는 생각이 나를 확실하게 절제시켜주는 것 같다. 시간만이 정말 어떻게든 약이 되겠지.
A는 나중에 내 탓을 할지도 모른다. 너가 씹었잖아. 너가 피했잖아. 솔직히 B의 생일에 관해 얘기하면서 어색하게 이어가던 그 대화는 내게 충격적이었다. 나는 먼저 대화를 끊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사실 아직까지 답장 안 왔을 수도 있는데. 정말 아이폰 사기를 잘한 것 같다. 이것저것 따지기 시작하면 또다시 나도 모르게 데이고 집착하게 되니까 일단 지금은 내려놓아야겠다. 단체 쪽지도 일부러 안 읽는 거잖아. 괜히 또 나 때문에 *** 동창 버린 건 아닌지 걱정되네. 그래도 인생에 있어서 괜찮은 경험을 우리랑 함께했는데 괜한 걱정인가? CC는 이래서 골치인가보다.
「감정도 아카이빙이 되나요」
1년 만의 조회였다. 2033. 02. 11. 지수는 망막 스크린 속 영상 하단에 표기된 최근 조회 날짜를 보았다. 영상은 4년 전, 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함께 영화를 공부한 동기들과 교내 카페에 모여 대화를 나누었던 그날의 기록이었다. 현장에 머무르며 저물어가는 영화판 속에서 투사처럼 함께 몰락할 것인가, 미련 없이 떠나 시네마 아카이브의 고급 인력으로 거듭날 것인가 가늠을 보던 시절. 권태를 이기려 애쓰며 시네마테크의 보호에 목청 돋우던 그날. 지수는 대화에 곧잘 섞이다가도 금세 그림자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날의 영상 지수가 에이미에 대해 유일하게 조회할 수 있는 기록이기도 했다.
M사에서 만든 마이크로칩이 대중화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뇌피질에 칩을 이식했고, 뇌 내 정보 전달 속도가 놀랍도록 상승했다. 동시에 장기 기억 능력은 현저히 떨어져서 사람들은 기억-아카이브에 의존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망막 카메라가 수집한 시각 자료를 기반으로 마이크로칩은 개인의 기억을 매시 각각 아카이브에 저장했다. 타인이 등장하는 기억은 공용 영상으로 취급되었는데, 기억의 주인이 아닌 기억 당사자가 조회 권한을 수정할 수 있었다.
지수가 에이미에 대한 기억을 그날 하나만 되돌려볼 수 있는 건 에이미가 둘의 공용 영상 접근을 막아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지수가 에이미에 대한 모든 기억을 떠올릴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남아있는 기억은 온전히 자신의 뇌에만 의존한 것이었으니 정확하지 않을 뿐이었다.
카페는 영상원 건물 로비에 있었다. 한낮이었지만 먼지구름이 낮게 깔린 날이어서 이른 저녁처럼 사방이 어둑어둑한 날이었다. 지수를 포함해 동기들 넷이 늘 앉던 창가 근처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쇼우는 조교수 일을 시작할 거라고 했고, 제시카는 꽤 이름난 영화사에서 인턴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지수는 머뭇거리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에이미가 끼어들었다. 에이미는 로비로 막 들어서던 중이었고, 편집 일 때문에 들른 거라며 동기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활기차게 다가왔다. “너희끼리만 재밌는 얘길 그렇게 하니.” 에이미는 제시카와 지수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며 다른 테이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지수는 못마땅했다. 다른 친구들 사이도 비집고 들어서기에 얼마든지 널찍했는데, 꼭 자신 옆에 앉을 일인가. 너희 사이가 제일 넓길래. 따지고 든다면 에이미는 이렇게 받아칠 사람이었다. 지수는 에이미 반대쪽으로 의자를 끌며 조금 물러났다. “뭘 떨어지기까지 해.” 에이미가 지수가 앉아 있던 의자 손잡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지수는 가슴이 덜컹했다. 에이미에게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든 점이자, 결국 에이미를 미워할 수밖에 없게 만든 점. 오만하면서 상냥한 몸짓이었다. 지수는 시선을 피하며 웃었고, 다시는 에이미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좋은 영화는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거야.”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막바지에 달해 있었고, 쇼우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쇼우의 말은 동기들의 머릿속에 각자가 쓰는 언어로 곧장 통역하여 전달되었지만, 일어를 사용하는 이들 특유의 쑥스러움 가득한 표정이 쇼우의 얼굴 위로 비쳤다. “영화가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럴 거야.” 쇼우 옆에 앉아 있던 필립이 말을 받았다. 다들 가볍게 수긍했고, 얼마간 침묵이 오갔다. 서로의 머릿속 말이 들릴 것 같은 정도의 침묵이었다. 영화인으로서 다들 엇비슷한 형태의 자긍과 모멸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그 감흥을 제 것으로만 남기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였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법이었으니까.
침묵을 깬 것은 에이미였다. 저번 주말에 테일러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지수는 몸이 좋지 않다며 참석하지 않은 자리였다. 에이미가 먼저 입을 떼니 하나둘씩 파티에서 보았던 해프닝을 나누었다. 각자의 망막 스크린을 돌아가며 공유했다. 쇼우와 필립이 상황의 앞뒤를 맞춰보자며 자신의 영상을 반복 재생했다. “누가 영화 전공 아니랄까봐.” 에이미가 큰 소리로 농을 쳤다. 에이미의 농담엔 늘 자조가 비쳤다. 지수는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지 못했고, 에이미가 농담을 치는 방식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대화는 끊어질 듯 하면서 끊어지지 않았다. 다들 자리를 뜨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수가 그 자리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무얼 기대했던 거지? “아. 그때 헤더가 한 행동 진짜 웃겼는데.” 생일 파티에서 얼마나 취했는지를 겨뤄보기라도 하려는 듯 모두가 목소릴 높이고 있을 때, 에이미가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말을 뱉고 나서 먼저 굳은 쪽도 에이미였다. 에이미가 굳는 것을 옆 눈으로만 보고 있자니 지수도 곧장 몸이 굳었다. “뭔데. 뭔데.” 나머지 친구들이 시시덕거리며 에이미를 부추겼다. 에이미는 실없는 웃음소리로 말을 받아치며 제 머뭇거림을 노련하게 숨겼다. 곧이어 모두에게 망막 스크린을 공유했다. 지수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헤더가 술에 잔뜩 취한 채 테일러 집 식탁에 엎드려 중얼거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뭐라고오?” 혀가 꼬부라진 에이미가 묻고, “칩이 고장 났어어.” 마찬가지로 꼬부라진 헤더가 답하는 장면. 다시 “뭐라고?” 킬킬거리며 에이미가 묻고, 헤더가 “머리 칩이 고장 났어.” 애교를 담아 칭얼거리는 장면. 헤더는 당시 에이미의 연인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과 하염없이 대화를 이어가던 그날, 그때 지수가 느꼈던 모멸감은 어쩌면 에이미에 대한 것일지도 몰랐다. 지수는 아카이브 조회를 거두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추슬렀다. 또렷한 영상으로 기억을 더듬어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씩 한 번 빠지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수는 출근 준비를 위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지수는 회사 공용 클라우드를 훑어보며 오늘 하루 작업할 기억-수정 리스트를 추려냈다. 기억 속 날씨나, 한두 마디 대사를 수정하는 작은 작업들 위주였다. 운이 좋은 날이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같은 지배적 기억을 수정하는 날이면 아무리 업무를 서두른들 초과근무가 불가피했다.
작업할 자료를 28인치 개인 스크린에 다운로드하고, 수정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프로그램이 완전히 작동하기까지 늘 5분 남짓 걸렸다. 타닥. 타닥. 3평 남짓한 작업실 안에서 초침처럼 은근하게 단단한 소리가 울렸다. 잠시 동안 모션이 먹히지 않는 스크린을 괜스레 손톱 끝으로 두드리는 건 지수의 버릇이었다.
마이크로칩이 대중화되면서 뇌 효율이 향상된 것 외에 달라진 부분이 하나 더 있다면 칩을 활용한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는 것이다. 상술에 밝은 기업들이 칩을 이용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그중 하나가 기억-수정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 개발 회사들은 일반인들이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하지 않았다. 이용 업장을 만들고, 지점을 내서 교육받은 직원들을 통해 일종의 시술받듯 프로그램을 체험하도록 했다. 기억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을 수정하는 일에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적 잣대가 중요하다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엄격한 기준 하에 기억-수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인된 상담가의 처방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기억을 수정할 수 있었다.
기억-수정 시술은 금세 유행했고, 여러 회사가 저마다의 프로그램을 들고 자기들 것만의 장점을 외치며 시장을 키웠다. 지수가 일하는 회사는 기억-수정 사업에 후발주자로 끼어든 회사 중 하나였다. 저렴한 비용으로 수정 작업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강점으로 내세웠다. 그게 소비자들에게 그리 매력으로 다가오는 지점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고, 본사는 지점을 하나둘씩 축소하고 있었다.
지수가 일하는 지점은 인구 밀도가 나날이 감소하고 있는 B시내에 위치한 7, 8평 남짓한 매장이었고, 작업실 밖에서 상담과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 셋과 기억-수정 작업을 담당하는 직원 둘을 두고 있었다. 기억-수정 작업은 별다른 기술을 요하지 않았다. 교육만 받으면 본사가 배포한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었다. 회사는 지수와 같은 일을 하는 직원들에게 마인드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지수는 언제나 그 이름의 작위적인 느낌이 거북스러웠다.
영화도 많이 보았고, 책도 많이 읽었고, 특히 소설을 많이 읽었던 사람이 기억-수정 작업을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점장이 늘 강조했지만 오갈 데 없는 문과 혹은 예체능 전공자들을 저렴한 값에 부리려는 알량한 수선이라는 걸 지수는 잘 알았다. 오래 기억에 남진 않을지언정 1초가 안 되는 다운로딩을 통해 책 수십 권을 한번에 읽을 수 있는 시대였고, 수정 작업 자체가 인공지능의 영역으로 점점 이동 중인 시기이기도 했다. 회사가 여전히 지수를 쓰는 이유는 지수가 아직 좀더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여긴 언제 망하려나.’ 프로그램이 제대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동안, 작업실 뒤쪽 탕비실을 빙자한 좁다란 스탠딩 테이블 앞에 서서 지수는 커피를 한 컵 가득 내려 받았다. 커피머신 버튼을 세 번 연달아 누르면 커다란 머그 하나에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커피가 찼다. 굼뜬 몸을 깨우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단, 기다림에 걸리는 시간을 채우는 행동일 뿐이었다.
프로그램 실행 완료 알림 음이 지수의 귓가를 때렸다. 가장 먼저 수정 작업을 할 기억은 교외로 캠핑을 간 3인 가족의 기억이었다. 두 달 만에 그친 먼지 비에 세 명의 동반자는 B시 외곽으로 캠핑을 떠났고, 제한된 길이만큼만 자라는 개량 잔디밭 위에 돔형 자동 텐트를 다 펼친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다시금 먼지 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억 속 날씨를 수정해주길 바랐고, 지수는 그들 여정의 시간을 조금 앞당겨 비가 내리지 않는 캠핑장에 그들을 두었다. 수정된 기억 속에서 그들은 흰 먼지를 산봉우리에 낀 연무처럼 두르고 있는 나무들 사이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낮은 천장처럼 드리운 구름떼를 눈으로 쫓을 수도 있었다. 지수가 시간을 수정하면 주변 환경은 자동으로 조절되었고, 거기서 기억 수정 요청자가 목격하게 될 세부사항은 지수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기억-수정 작업은 마음에 들지 않은 사소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좋게 바꾸는 게 대부분이었다. 타인의 삶을 매끄럽게 만들고, 엉킨 데 없이 만드는 데 지수는 공연히 지루함을 느꼈다. 모든 걸 다 좋게만 기억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기억의 몫이 그런 걸까. 아주 가끔 흥미를 끄는 작업이 있기도 했다. 부러 자신의 기억을 조금 더 나쁜 쪽으로 수정하는 사람들이었다. 허용된 범위 안에서 그들은 소중한 존재가 자연사한 기억을 사고사로 수정하거나, 먼지 구름 속에서 길을 잃은 일에 체내 시스템 조절기를 잃어버려 호흡까지 가빠온 기억을 덧대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기억을 수정할 때면 지수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한때 그들의 망막에 맺혔을 정보들뿐이었지만.
에이미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은 밤 11시 경, 지수가 지점 입구 셔터를 내리고 있을 때였다. 상담과 영업을 담당하는 세일즈 직원은 진작 퇴근을 한 후였고, 오후 출근을 했던 지수가 매장과 작업실 전부를 정리하고 지점 마감을 보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줄곧 에이미와 연락한 적이 없었으니 꼬박 4년만의 연락이었다.
졸업 후 에이미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렀고, 지수는 고향인 B시로 돌아왔다. 그 소식을 끝으로 지수는 에이미를 영영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에이미는 기록 연구를 공부하며 학업을 더 이어가다가 필름 아카이브에서 일을 시작했다. 에이미다운 선택이었다. 에이미는 오래된 필름 영화를 좋아했고, 제작 년도를 다 꾀고 있었고, 제작 환경이나 출연 배우와 관련된 이해관계를 다 알았다.
재회는 꼭 그래야 한다는 것 마냥 에이미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루라는 시간만 남겨두고 지수에게 연락을 해왔다. 출장을 온 거라고 했는데, 이곳에 들르게 된 연유를 구구절절 밝히는 게 뻘쭘했던 모양인지 메시지 속 말투에 어색함이 비쳤다. 지수 역시 못지않게 어색하게 답했지만 일단은 반가움으로 눙치고 싶었다. 잘 지냈어, 다른 동기들은 어떻게 지낸대, 저변에 깔린 감정의 파편일 수밖에 없는 빙빙 도는 안부의 말들을 나눴다.
만나자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에이미였다.
공항 인근 번화가에 있는 카페에서 지수는 에이미를 다시 마주했다. 오랜만의 만남은 그래야만 한다는 듯 각자가 하는 일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뤘다. 에이미는 4년 전보다 훨씬 단단해져 있었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를 느끼고 있었다. 에이미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수가 물었고, 에이미는 아마 네가 보기엔 커다란 기계 장치를 돌리는 일에 불과해 보일 거라며 손을 내젓곤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자료가 손상되지 않도록 온도와 습도를 돌보고, 자료 조회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인공지능 개발자들과 회의를 거듭하는 식의 고루하고 진부한 일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산화를 막기 위해 밀폐해둔 자료 더미 한가운데 있으면, 캄캄한 창고에 일렬로 끝없이 서 있는 저장장치 한가운데 있으면, 그토록 견고한 침묵 앞에 있으면 앞으로도 여전할 지루한 작업들이 어쩐지 미래를 위한 커다란 일처럼 느껴진다고도.
지수는 에이미의 말을 곰곰이 들으며, 에이미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다. 그날, 카페에서 에이미가 지수를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떨 수 있었던 것도.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캠퍼스 안 인공정원 안에서 에이미가 먼저 지수의 손을 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더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갑자기 이해가 다 됐다. 동시에 더이상 돌고 도는 대화를 내버려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왜 연락한 거야?” 지수는 되도록 싱겁게 들리길 애쓰며 말투에 힘을 뺐다. 에이미는 움직임을 멈췄지만 그 행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액세스 거부가 풀려 있길래.” 에이미는 느리게 미소 지었다. 지수는 맞받아칠 만한 말을 곧장 찾을 수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던 일이었지만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기억이 났다. 유일하게 접근 가능한 기억의 그날, 에이미가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 이후에 지수는 에이미가 자신의 정보로 접근하는 것을 완전히 막아두었다. 액세스가 막히면 쉼 없이 정보를 생산하는 상대의 뇌로부터 정보 전달이 차단되고, 무엇보다도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이들끼리 통역이 멈춰버렸다. 물질적 발화는 그대로 체감할 수 있지만, 말을 뱉고 있는 상대의 입술은 어류의 뻐끔거림과 다름없어 보였다. 보통 신호 처리 과부하에 걸린 머리를 쉬어주기 위해 쓰이는 기능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마저 모종의 표현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접근 거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와 에이미는 한 번 더 말을 나누었을 것이다. 대화라기엔 뜻이 닿지 않아 제대로 된 의사 전달이 없었지만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영상원 건물 복도에서 옆을 스치듯 지나갈 때든, 지수가 남들과 함께 대화 나눌 때든, 공기 중을 떠도는 지수의 말이 더이상 통역되지 않는 걸 알아차리고 에이미가 지수를 붙잡았다. “이제 너와 대화를 원하지 않아.” 복도 한가운데 서서 에이미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지수는 한국어로 말했다. 에이미는 만나서 직접 묻는다면 지수가 적어도 영어로 대답을 해줄 수는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고 했다. 지수의 말을 완전히 못 알아들은 에이미는 마치 선량한 관광객처럼 웃었다. 에이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보 같아 보이는 미소였다. 익스큐즈미, 하고 에이미의 입에서 반사적인 답이 나오려할 때 지수는 에이미의 손을 뿌리치고 제 갈 길로 갔다. 지수의 말뜻은 근처에 있던 쇼우가 알려주었다고 했다. 에이미는 뒤늦게 화가 났고 자신과 관련한 모든 영상에 지수가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고도.
“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혹시 몰라 확인을 했어. 네가 여전히 나를 막아두고 있는 건지.” 에이미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고, 그 말을 끝으로 식은 차를 한 입 삼켰다. 지수는 부끄러웠다. 머릿속에 꼭꼭 숨겨져 있던 기억을 반추하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었던가. 에이미에 대한 접근 거부를 멈춘 건 그저 1년에 한 번 연락망을 정리하는 지수의 오래된 습관 탓이었다. “네가 여전히 날 용서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힘들었을 거야.” 슬픔이 물밀듯 밀려온다, 라고 옛날에 표현을 썼더랬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수는 정보가 물밀듯 밀려오는 걸 느꼈다. 에이미와 공유하던 기억 아카이브 접속이 가능하다는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화해이거나, 혹은 그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일로써.
“있잖아.” 라고 지수는 말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솔직해진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진실의 밑바닥엔 에이미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미움 역시 담겨 있을 테니까. “네가 남겨둔 그 기억을 수정해버렸어.” 지수는 그 말 역시 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게 다 기억났을 뿐이었다.
작가노트_강아
뇌 내 마이크로칩이 보편화되고, 인간의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시대를 상상할 때, 많은 사람들은 초지능을 지닌 인간이 등장할 것이라 말한다. 미래인간은 전자화된 자신의 뇌를 통해 컴퓨터와 디지털 정보를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고, 지식의 총량을 무한대로 늘일 수 있다.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질 테고, 우리의 머릿속 정보는 모두 0과 1로 번역될 것이다. 그렇게 변화한 세상 속에서 기억은 과연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할까. 주관적인 해석과 손질의 결과인 현재 우리들의 기억이 미래엔 오로지 객관적인 정보로만 존재할까. 혹은 명백한 객관은 미래에도 여전히 불가능할까.
고백하자면, 나는 이번 지수님의 일기 내용을 SF라는 장르에 맞춰 넣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기가 특정한 날의 장면보다는 특정 인물에 대한 내밀한 감정에 머무르는 내용이었고, 그 감정을 어떻게든 미래 세계에 오롯이 녹여보고 싶었으니까. 한때 애정을 품었던 이와 좋지 않게 끝을 맺은 후, 개인의 내면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감정을 무엇보다도 온전히 살려보고자 애를 썼다. 이게 되나? 이게 맞나? 번번이 쓰다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참 길었다. 세계관에 힘을 주자니 인물이 죽는 느낌이고, 인물의 감정을 살려보자니 세계관이 힘을 잃는 느낌이고.
결론적으로 내가 중점적으로 강조하고자 한 ‘슬픔’이라는 감정을 살려보기 위해 ‘기억하기’라는 행위의 힘을 빌렸다. 지능의 스펙트럼이 아무리 넓어진들 인간은 여전히 강렬한 감정을 동반하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 것이다. 감정은 해석이고, 숫자가 침입할 수 없는 주관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물과 장르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중심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 중심에서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하나 있다. 기술은 예상보다 항상 일찍 다가오고, 우리의 태도는 예상보다 훨씬 늦게 달라진다.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면 냉소와 회의가 짙은 생각으로 보이겠지만, 우리의 일상을 염두에 두면 가느다란 유머가 비치는 생각이라고 본다. 언젠가 농담이 될 수 있는 인간적인 행위들이 과학의 세계에 여전히 가득하기를.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박중서 옮김, 폴라북스, 2013)를 패러디한 제목
월과월과월
매주 월요일(月)에 모여,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넘나들며(越), 문장(문장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 우리말 ‘월’)을 쓴다는 목표 아래 모인 창작 동인이다. 만화 시나리오 작가 강아는 좋아하는 만화와 소설 앞에선 조금 상기되는 편이다. 대학원생 박몽은 동경에 거주중이고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 단 한 해도 학교를 쉰 적 없는 학교 덕후다. 생활체육인 이문경은 책을 만들며 시와 소설을 읽고 쓴다.
2020/08/25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