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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P의 예언-이미지 첫번째.

   우리는 친구였어요.
   여자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아침의 빛이 아랫입술에 드리워졌다.
   ―그때도 7월이었는데, 살이 바싹 마르는 여름이었어요. 한국보다는 훨씬 건조한 나라였죠. 나는 자원봉사자였고, 멍청한 오렌지색 모자를 쓴 채로 학교의 문이며 창문에 페인트를 칠했어요. 당신들 어머니는 교사들 중 가장 어렸죠. 동갑이었어요. 금방 친해져서, 일이 끝나면 잠긴 교실로 몰래 들어가 밤새 이야기를 했어요. 당신들 어머니는 영어를 배우길 원했고, 나는 그 나라의 진짜 생활이 알고 싶었거든요. 봉사 캠프 너머의 세상 말이에요…… 하나씩 하나씩, 서로 배워나갔어요. 영특한 사람이었어요. 세상을 바로 살고 싶어 했죠.
   여자가 떠나자마자 란은 말했다.
   ―저 사람 사기꾼이야.
   일도 동의했다. 여자는 어머니를 몰랐다. 어머니의 이름과 나이, 직업, 한때의 야망 정도만을 읊었을 뿐이다. 이야기 속 등장하는 영특하고 용감한 여자-,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바로 사는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살아남는 행위 그 자체였다.
   ―게다가 엄마는 저런 여자 얘기 같은 거, 한 적도 없어.
   ―대체 왜 온 걸까? 우리한테 뭘 원하지?
   그들은 어깨를 으쓱였다. 곧 웃었다. 여자가 누구인들 무슨 상관일까? 애초 빼앗길 게 없는데. 오히려 빼앗길 게 많아 보이는 쪽은 여자였다. 대화가 끝난 뒤, 그는 자신의 앞섶에서 명함과 봉투를 꺼내서 건넸다. 신의의 표시에요, 말했다. ‘신의’가 무슨 뜻인가 묻자, 여자는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신의란 서로 묶여 있다는 의미에요.
   그들은 인천역 앞에서 악수를 나눴다. 갈 곳이 필요하면 연락해요. 여자는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몇 개의 문이 생긴 셈이지.
   호텔로 돌아가던 중 일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들은 진우를 따라갈 수도, 여자를 쫓아갈 수도 있다고.
   진우라는 문 너머에는 어중간한 보호와 긴긴 기다림이 있다. 이 나라에서 합법적인 존재가 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티게 될 테다. 적어도 그 문은 일정량의 생존을 보장하는 듯 보였다. 그야말로 어머니가 바라던 문이었다. 어쨌든 산 채로 있는 것.
   그들은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어째서 여자야말로 정말 안전한 선택지처럼 느껴지는 걸까? 여자의 거짓말은 우스웠고, 태도는 서툴렀다. 그것이 믿음을 주었다. 쌍둥이는 그들에게 동시에 찾아드는 느낌을 믿었다. 한평생을 작살 섬의 창고에서 무국적자로 산다면, 야생동물에 가까운 감각을 얻게 된다. 여자는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쌍둥이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면에서는 진우보다 더 나아 보인다.
   물론 세번째 문이 있었다. 언제나 ‘그 외’라거나, ‘제 3’ 같은 단어로 뭉뚱그리게 되는 문. 열기 전까지는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문을 열기 전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란과 일에게 그 문은 아직 미지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다. 만일 쌍둥이가 원하는 무엇인가―신분보다, 안정적인 삶보다, 생존보다 더 필요시하는―생긴다면, 문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일과 란은 한동안 그 가능성을 잠재워두기로 했다.

2020년 7월 P의 예언-이미지 두번째.

   그곳은 ‘대기실’이라고 불렸다. 좁은 옥상으로 올라가면 한강이 보였다.
   대기실의 사람들은 물론 가난했다. 태어난 나라에서 그들은 의사거나, 정육점 주인이거나, 패션모델이었다. 여기서는 대기자라고만 불렸다. 대기자들도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일과 란은 대기실에 합류했다. 7월 중순에 진우의 차를 타고 인천을 떠나면서. 양옆 도로 뒤로 이어지던 해안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큰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서울이고, 저게 한강이야. 앞에 앉은 진우가 말해주었다. 강은 서울의 심장 같았다. 몹시 거대했으나, 바다와 달리 건너편이 있었다. 대교를 통하면 맞은편으로 갈 수도 있었다. 언제든 원할 때면 반대쪽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점. 쌍둥이에게는 그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대기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는 게 전부였다. 20년 전 공개된 P의 이미지,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땅을 무너뜨린다”고 풀이된 예언은 여전히 서울을 떠돌아다녔다. 몇 명의 대기자는 쨍쨍한 한낮에 거리로 나섰다가, 목이 한 번씩 졸리고서 돌아왔다.
   이후로 대기자들은 이른 새벽에만 외출을 했다. 어스름에 잠긴 거리는 창백하고 조용했다. 그 고요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습격에 대비하여, 대기자들은 두 줄로 열을 맞춰 거리를 걸었다. 막 떠오르는 햇빛에 비친 얼굴들은 뭉개진 조각처럼 보였다.
   진우는 격주에 한 번 꼴로 찾아왔다. 그으래, 알아보고 있어. 너희를 이 땅에 녹아들게 하는 방법 말이야. 시간이 걸려. 시간이 오래 드는 문제야. 그는 기관 일층의 공동 식당에 앉아서 그런 말들을 했다. 정수기의 물을 얻으러 온 대기자들이 뒤편에서 진우와 쌍둥이들을 흘긋거렸다. 몇 사람은 진우가 떠나자마자 다가와 물었다.
   ―저 사람, 이곳 정부 사람이잖아. 어떻게 알았지?
   ―어머니 친구예요.
   ―나한테도 소개시켜줄 수 있니?
   처음 거절을 한 날, 그들은 가방 하나를 통째로 도둑맞았다. 쌍둥이는 하루 종일 기관을 뒤져서 가방을 찾아냈다. 음식물쓰레기통에 들어 있었다.
   ―우리 괜히 온 걸지도 몰라. 섬에서 사는 게 훨씬 더 나았어.
   란이 그 말을 꺼낸 날, 일은 악을 쓰면서 울었다.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우리 앞에 빛이 가득하다며. 네가 그랬잖아. 란은 남매의 어깨를 안고 달래는 데 반 시간을 썼다.

2020년 7월 P의 예언-이미지 세번째.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수송기 한 대는 한강에 불시착했다. 주한 미군 소속의 소송기였다. 조종사는 스스로의 실수에 색깔을 모조리 빼앗긴 양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는 기기의 성능을 테스트하던 중, 제어 장치의 고장으로 인해 공항에 불시착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각 강변에 앉아 있던 몇 사람은 당시의 상황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하늘이 찢어졌어요. 유리벽 너머로 모두 보였어요. 돼지 울음처럼 요란한 소리가 나고, 유아차에 탄 아이들도 비명을 질렀죠.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자 같은 게 떨어지더군요. 불시착을 조금 더 커다란 재앙의 예고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수송기가 군용이라는 점을 들면서 이야기했다. 전쟁 준비에 들어간 거야. 봐, 세상은 점점 이상해지잖아. 매일같이 버려진 사람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어.
   또 다른 사람들은 P의 예언을 꺼내들었다. 고장 난 수송기 앞에 선 조종사의 사진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 사태를 정확하게 예지한 듯 보였다. 이번에도 P는 알고 있었어, 정확해, P는 진화하는 거야!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여태까지와 달리 지나치게 직접적인 예언이 아닌가, 따져 묻는 사람들의 의견은 금세 묻혔다. 언제나 그랬다.
   여자는 수송기가 떨어진 다음날 ‘대기실’로 찾아왔다. 올림포스 호텔 이후로 첫 만남이었다. 그는 곧장 대기실의 관리자들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는 일과 란을 면회하고, 함께 외출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했다. 양식도 내용도 완벽했다. 담당 직원이 나른한 표정으로 허가 도장을 찍어주었다.
   여자는 일과 란을 주차장으로 데리고 나왔다. 포옹 직전의 어색한 손길로 그들의 어깨를 토닥거린 뒤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자꾸 기름이 새나, 걱정이 되어서요.
   여자는 자신의 세단 뒤에 쭈그려 앉아 한참을 꾸물거렸다.
   ―비켜보세요.
   란이 여자를 뒤로 끌어당겼다. 쌍둥이가 차를 고치는 동안 여자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팔짱을 끼고, 미간은 찌푸린 채. 계절에 맞지 않게 두툼한 점퍼를 입은 탓에, 이마까지 붉은 얼굴은 땀투성이였다. 일은 그 모습을 어디에선가 보았다고 느꼈으나 금세 잊어버렸다. 일이 전광판 곳곳에 박혀 있던 P의 예언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좋은 날이었다. 차는 금세 수리되었고, 여자는 라디오를 틀었다. 그들은 휴게소에 들러서 먹을거리를 잔뜩 샀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서울이 스쳐지나갔다. 을지로 충무로 퇴계로 세종대로. 그들 모두가 여기에 살던 왕과 장군의 이름이라고, 여자가 말해주었다.
   다음 날에야 대기실의 사람들은 쌍둥이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관리자들은 서류를 다시 보았다. 양식도 내용도 완벽했다. 비할 데 없는 거짓말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속보를 들은 듯 창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이런 것도 납치인 거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2

그날 새벽, 사민은 P로부터 또다시 메시지를 받는다. 쌍둥이가 보지 못하게 깊숙이 숨겨두었다.

   작업 노트


※스튜디오 풀옵션의 AI는 지난 7월, 구글의 뉴스 데이터를 모조리 빨아들인 뒤 재조립했다. 위의 세 가지 문장은 AI가 수집한 데이터를 완전히 다른 배열들로 새롭게 추출한 것이다. 이는 스튜디오 풀옵션이 본 프로젝트를 제작하는 첫번째와 두번째 단계에 해당한다.(〈P!ng〉의 프롤로그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단계 참고. 바로가기) 우리는 위 문장들을 구글에 던져 건져낸 이미지들을 P의 예언 삼아 3화를 제작하였다. 풀옵션의 AI와 P를 통해 두 세계는 미미하게 연결되고 있다.
위 모든 과정은 프로그래밍 언어 Python을 통하여 제작되었다.



스튜디오 풀옵션

텍스트와 이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번역합니다. 가능한 멀리까지 공놀이를 지속하며 오해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글 쓰는 함윤이와 디자인 하는 김형도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2020/08/25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