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빈님이 제보하신 일기


   악몽을 꾸었어요.
   집에서 엄마와 함께 쉬고 있었는데 위○○씨가 나타났어요(행정병으로 군복무하던 시절 나를 유독 괴롭히던 아저씨입니다). 소파 밑에 굴러 들어간 음료수 좀 꺼내보라는 이야기였어요. 얼굴이 많이 구겨질수록 팔이 길어진다고 믿는 사람마냥 찡그린 표정으로 팔을 뻗고 있었어요. 먼지 수북한 소파 아래로.
   악몽에서 깨어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데 테라(우리 집 강아지)가 다가왔어요. 여느 때처럼 앞발로 제 팔을 툭툭 쳐요. 이 행동은 쓰다듬어달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테라의 목과 등과 겨드랑이와 갈비뼈와 허벅지를 정성스럽게 만져주었어요.
   테라는 매일 아침마다 꾸준히 저를 찾아와서 마사지 노동을 시켜요. 이 반복적인 노동이 아니었으면 오늘 하루는 위○○씨와의 악연으로 시작할 뻔했어요. 테라가 평소와 다름없이 찾아와준 덕에 평소와 같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죠.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사랑은 꾸준한 무언가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고.
   테라가 매일 아침 제게 마사지사라는 직업을 부여하듯이 누군가가 나에게 있어서 꾸준한 무언가가 되어준다면,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꾸준한 무언가가 되어주겠어요.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어줄 반복이 되겠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의 소중한 일상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기준 말이에요.

   당신에게 전할 말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앞발로 나를 툭툭 치며 쳐다보는 우리 집 강아지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강아지가 사람이 밥을 먹을 땐 옆에 달라붙어 얻어먹으면서 자기 사료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일 수도 있어요. 강아지의 표정이 어쩜 그렇게 사람 같은지 알게 된다면 놀랄 거예요.
   혹은 시골 마을의 찻길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시골의 운전 규칙은 도시와는 달라요. 길가에는 차들이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어서, 교통 선을 지키는 것보다는 상황에 따라 선을 넘나드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길이 굽기는 얼마나 굽었는지…… 하고 말을 하려는 순간, 카톡창이, 우리의 톡방이 문득 기이해 보여요. 화면을 밀어올려 지난 대화들을 볼 수도 있고 당신의 사진을 눌러 지난 프로필을 구경하기도 해요. 사진들 속에서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지금과는 달랐던 우리의 관계를 생각하기도, 그러다가 멋쩍게 다른 사람들의 프로필이나 들여다보기도 하고,
   자꾸만 문장을 입력하고 지우기를 반복해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나을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어제 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소심한 동물입니다. 그냥 이런 연락은 꿈꾸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독백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당신의 생일이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생일 인사는 할 줄 모르겠습니다.


   「목소리」


   아. 아, 아.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잘 되는지…… 모르겠지만, 시작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그래요, 지금 제가 있는 이곳에서부터여야겠어요. 이제 정말로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선배, 선배도 알겠지만, 나는 지금은 당신의 별장에 있습니다. 선배가 빌려준 차로, 서울에서부터 다섯 시간은 넘게 운전해 내려와야 하는 남해의 깊은 산속에 왔어요. 1년에 두어 번, 아이들 방학에 맞춰 가족들과 며칠 묵고 만다더니 이 비싼 가구들은 낡지도 않았네요. 14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아, 물론 선배에게 당부한 대로 안방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제게 필요한 공간은 오직 2층에 있는 서재뿐이니까요. 부엌은 식기 몇 개만 돌려썼어요. 자주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둔해지는 게 싫어서 뭘 많이 해 먹지 않았어요. 거실에 있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더라고요. 아침에 세 시간, 간단히 밥을 먹거나 낮잠 자고 다시 세 시간 원고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하루 한 번씩은 숲속을 정처 없이 걸어요. 이 깊은 산골에 그나마 빛이 남아 있는 오후 4시 30분까지는 자주 밖에 나가보려고 합니다. 선배도 알다시피, 5시부터 이 주변은 캄캄해져요. 숲속에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만, 그건 그때 한 번뿐이었어요. 그날, 아직도 생생합니다. 바람에서 찬 기운이 느껴지고, 몸은 뜨거워졌다가 식기를 반복했죠. 그리고 어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흔적을 지우는 그 캄캄함만이 저를 감쌌어요. ……아, 저, 살이 많이 빠졌습니다. 챙겨 온 옷들이 많이 헐렁해졌더라고요. 그러니까, 선배, 안방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아직은 말이죠.
   14년 전 사회부 기자 워크숍 뒤풀이, 기억나요? 제가 막 1년차가 되었고, 선배는 5년차였을 때요. 동기들은 죄다 기획취재팀에 들어가 활동하던 그때까지도 선배는 절 하리꼬미 시켰죠. 그 1년 동안 서울에 있는 경찰서, 파출소란 다 돌게 했잖아요. 차 운전석이나 서 내 의자에서 밤을 새웠어요. 집에서 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뒤풀이하던 횟집에서 선배는 저를 옆에 앉히고 술병을 건넸어요. 체질상 술을 못한다고 하자, 선배가 말했죠. 내 얼굴이 기자생활할 얼굴이 아니라고, 그래서 언제까지 견디나 보려고 나를 굴린 거라고. 뭐, 어쨌든 선배의 시험에 제가 합격했으니 좋은 곳에 데려가주겠다며 제 주머니에 선배의 차 키를 집어넣었죠. 그날 밤 저는 취한 선배를 뒷좌석에 눕히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어요. 고속도로를 타고 남해에 도착하니 아침이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비포장도로를 달려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선배는 몸을 뒤척였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지요.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 구불구불한 길 끝에 2층짜리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붉은 벽돌로 만들고, 1층 거실의 전면 창이 눈에 띄는 이 별장이요. 제가 기억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편의점 비닐봉지를 제작하던 선배 부모님이 은퇴하면서 지은 안식처였다고. 완공 직전 빗길 교통사고로 두 분 다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자식인 선배가 그것을 유산으로 받았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선배와 그곳에 내리 사흘을 묵었습니다. 선배가 다음해에 출간할 책의 원고 작업을 마무리하는 동안, 저는 매끼 식사를 차리고, 오래된 물건을 쌓아놓은 지하 1층 창고를 청소했어요. 어릴 적 선배가 타던 자전거와 부모님이 사용하던 전축기와 녹음기, 사진첩을 물걸레로 닦았습니다. 이불과 베개를 빨아 마당에 널고, 1년 넘게 쌓인 옥상의 낙엽을 모아 치웠죠. 서울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선배는 제 어깨에 손을 뻗었어요. 너는 내 사람이라면서요. 그때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선배는 아주 큰 빚을 진 거라고요.
   애인의 장례식을 치르고 직장에 돌아왔을 때, 인사 대기발령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 머릿속에는 선배와 선배의 별장만 떠올랐습니다. 이제 그 빚을 받을 때가 된 것 같았습니다. 10년이 넘는 취재기자생활 동안 제대로 된 단독기사 하나 터트리지 못한 저를 선배도, 회사도 기다려주지 않을 테니까요. 선배가 그랬죠. 그럴듯한 기사는 기자의 이름이 남지만 가치 있는 기사는 이야기만 남는다고요. 사람들은 첫 문장만 읽고 기사를 통으로 읽거나 아예 읽지 않을지를 결정하니까 우회하지 말고 직진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부터 선배에게 전할 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제 이야기니까요. 나는 지금 제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시작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내가 횡설수설한다고 해서 이 녹음기를 꺼버리면 안 됩니다.
   신문사를 그만둔 다음 날, 선배에게 전화가 왔어요. 별말 없이 밥은 먹었냐고 했죠. 그때 갑작스레 전화를 끊은 건 부동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모아야 했거든요. 아파트도 매매하고, 집 안의 가구는 중고매장에 전부 넘기고 나니까 꽤 큰돈이 수중에 생기더라고요. 고물 차이긴 하지만, 처분하는 것보다 파는 것이 그나마 손해가 덜하니까, 그것도 헐값에 넘겼고요. 돈이 될 만한 것이라고는 전부 팔아 그동안 들어간 애인의 병원비며, 밀린 공과금에 주변에 빌린 자잘한 빚까지 갚았습니다. 돈이라는 게 참 이상하더라고요. 내 손에 들어왔을 때도, 다시 나갔을 때도 모두 다 내 것 같지 않았거든요. 억울했어요. 살리기 위해서 돈을 썼는데 살아야 할 사람은 죽고 돈도 없어졌으니까. 그러고 저는 살았습니다. 다만 잘 곳 없이요. 나는 누군가의 애인이었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신문사의 기자였으며, 집과 차를 소유했으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갖고 싶은 것을 사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라지면 나는 무엇이 되나요? 나는 내가 되나요? 글쎄요, 선배.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나’라는 단어조차 가질 수 없는, 그냥 ‘무’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그 상태가 되면 나는 무언가를 바라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럴 마음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지요. 그게 너무 무서웠습니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은 건 그 때문이에요. 선배가 나를 정말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한 번만 도와달라고요. 6개월 동안 먹을 최소한의 음식과 인스턴트식품을 사서 선배에게 빌려온 차 트렁크에 실었습니다. 노트북과 기자생활을 하며 매일 작성한 일지 파일을 프린트해 뒷좌석에 챙겼어요. 두 박스밖에 안 나오더군요. 제 14년의 삶이요.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내 이름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남해의 별장으로 향한 겁니다.
   처음 일주일은 정말 잠만 잤습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병간호를 병행했던 탓인지 그동안의 피로와 긴장이 한순간 몰려왔거든요. 배가 고픈 줄도, 몸이 배기는 지도 모른 채로 그냥 계속 잤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야 급하게 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허기가 좀 해결이 된 다음에야 별장 안을 돌며 가구에 씌워진 흰 천을 거두었어요. 마당에서 먼지를 털고 반듯이 접어 지하층에 잘 가져다두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에서 짐을 꺼내 별장 안으로 옮겼어요. 그새 음식들이 상했더라고요. 그나마 멀쩡한 것들을 골라 냉장고와 찬장에 정리해 넣었고, 옷가지도 옷장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노트북과 박스들은 2층 서재로 옮겼어요. 14년 전 선배가 원고 작업을 했던 그 서재로 말이에요.
   일지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에이포 용지로 천 장이 넘는 일지를 읽고, 예전 기억을 떠올려 중요한 사실을 메모하는 데만도 한 달이 걸렸습니다. 인턴 첫날부터, 인사이동 발표가 나기 전 편집교정부 과장 자리로 부서 이동을 제안했던 편집장님과의 회의까지 그 14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더라고요. 첫 1년은 선배가 시키는 대로 경찰소와 파출소를 돌아다니며 거기서 만난 형사와 다른 신문사 기자 들의 연락처, 신상을 간단히 적어놓았습니다. 어쩌다 물어온 사건들은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 채 그 파일에 잠들어 있더군요. 그리고 선배의 별장에 처음 갔던 그날 이후, 5년간은 여러 기획기사팀에 자료 조사 역할을 하며 돌아다녔네요. 경기도 최대 크기의 요양원에 요양사 보조로 잠입해서 회계장부를 복사했던 적도 있었고, 서울 중심부의 재개발 지역에서 몇 달간 발로 뛰며 부동산 투기 혐의로 의심되는 재벌의 끄나풀 정보를 모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였어요. 그 수많은 취재기사들 중 데스크를 통과해 신문에 인쇄된 기사는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빈도는 연차가 올라갈수록 높아지더라고요. 그때 제 별명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수구입니다. 뭘 해도 하수구에 물 빠지듯 심층취재 결재가 떨어지지 않는다고요. 그즈음부터 일지에는 이제는 없는 애인과의 이야기가 등장하기 시작해요. 함께 아파트를 구해 살며 겪은 작고 큰 이야기들도 세세히 적혀 있지만, 그건 제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와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그만두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일지를 읽고 나니까, 저, 죽고 싶지 않더라고요. 죽으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요. 그냥 살아 있고 싶고 그걸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온 지 한 달은 그랬던 겁니다.
   그 다음 날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새벽 같은 시간에 일어나 2층 서재로 갔어요.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14년간의 기록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지의 구절을 읽고, 그날의 기억을 최대한 살려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점심은 냉동해놓은 빵 두 조각과 커피로 간단히 해결했어요. 한두 시간 정도 깊은 숲속을 거닐고 돌아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일어나서는 저녁까지 같은 작업을 반복했어요. 그러고 나서는 기절입니다. 쓴다는 것은 손가락과 머리로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이 원고를 쓸 때만큼은 온몸으로 쓰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어깨와 허벅지와 복부에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하루 종일 누군가에게 구타당한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아침부터 다시 같은 작업을 반복했어요. 그렇게 3개월이 꼬박 지나자 그 모든 것을 정리한 원고가 만들어졌어요. 그래도 갈 길이 남았죠. 남은 날들 동안 글을 다듬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점심을 먹고 좀 홀가분한 기분으로 별장을 나섰습니다. 흙바닥에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고는 없으니까, 그동안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뭇가지에 붉은 천을 묶어두었거든요. 4개월간 매일같이 산책을 했으니, 내 나름의 이정표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방향으로 걸어보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날 원고를 탈고했고, 그러고 나니까 허탈하기도 했고, 앞으로 저 원고를 어떻게 고치나, 진짜 내 이야기가 되게, 다른 사람들도 듣고 싶은 글로 어떻게 재탄생시켜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다보니까 마음도 그런 겁니다. 그냥 어제들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걸었는데, 길을 잃었고, 그러다 늪을 만났습니다. 선배도 보셨나요? 그랬다면 아무렇지는 않았겠죠. 생각에 빠져 걷다가 한쪽 발이 바닥에 푹 빠져버렸어요. 다행히 몸을 금방 뒤로 젖히는 바람에 두 신발 모두 젖는 일은 없었지만,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그 늪이, 정말 크고 조용한 저 늪이 있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저 큰 늪을 발견했다는 게 흥분되기도 하고…… 아무튼 옆에 있는 주먹만 한 돌을 던졌는데, 풍덩하는 소리도 없이 아주 천천히 늪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걸 지켜보다가 무언가 섬뜩한 기분에 휩싸여서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늪에서부터 멀리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한참 동안 길을 찾지 못해서 밤이 다 되어서야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몇 시간이 제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길을 잃은 게 무슨 문제냐 생각하겠죠, 선배. 제가 말하는 문제는,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일어났습니다. 내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같은 시각에 일어나 노트북을 켰습니다. 전날 설친 잠에 정신이 몽롱하기는 했지만, 커피도 한잔 마셨고, 머리가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기사를 쓸 당시 주고받은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켜고 신문사 메일함에 로그인을 하려는데, 없는 아이디라는 안내창이 뜬 겁니다. 퇴사 후에도 1년은 개인 메일함을 열람할 수 있다고 안내를 받았는데 말이죠. 경영지원실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는데, 담당자가 그러는 겁니다. 그런 아이디는 없다고요. 제 이름과 부서를 다시 알려주고 혹시 누가 제 계정을 막아놓은 건지, 실수로 삭제한 건지 그런 것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안 좋았을 뿐 이상하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여기서부터 아주 황당합니다. 제가 근무한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근무 기록이 없으니, 당연히 제 개인 메일 계정도 없다는 거고요. 선배 이름까지 대며 확인을 부탁했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고, 언성이 높아졌어요. 14년 전이지만, 입사 통보서까지 확인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계속 통화를 이어가며 포털사이트를 켰습니다. 3차 임원직 면접을 보고난 후 당시 경영지원실에서 합격 소식을 입사 통보서로 보내줬는데요. 그게 아직 메일함에 남이 있을 테니까요. 거기에서조차 로그인이 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요, 긴 시간 동안 로그인을 하지 않아서 계정이 비활성화된 거라고, 그때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모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조합했지만 실패했고요. 우선 전화를 끊고, 다른 포털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로그인은 불가능했어요. 고객상담센터에도 연락했지만 경영지원실 답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까 화가 나더라고요. 내 존재가 그렇게 지워지기 쉬운 것이었나, 이곳에 내려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금방 잊혀지나…… 답답한 마음에 선배와 통화를 해보려고 했던 건 그때였어요. 그런데 연락처에 아무 번호도 저장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모두 지워진 겁니다. 통화 기록도 없었어요. 방금 신문사와 포털사이트에 전화를 걸어서 내가 거기서 일했네 마네, 내 아이디가 있네 마네 했는데 말이에요.
   솔직히 말할까요? 선배, 저 그때는 내가 미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여기 오래도록 혼자 있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스스로에게 연민도 가져봤어요. 그렇다고 당장 짐 싸들고 서울에 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결심으로 내가 여기 내려왔는지 선배도 이제는 아시잖아요. 우선 나 자신과, 선배와 약속한 6개월은 채우기로 했습니다. 쓰기로 한 글은 완성하자. 없는 자료야 나중에 메꾸면 되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인 겁니다. 늪에 빠져 서서히 잠기는 돌처럼 마음 한 모서리가 두려움에 젖어갔지만 우선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 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원고 파일을 열면 갑자기 모든 글이 다 날아가고 백지만 보인다든가, 이전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프린트해온 자료를 찾는데 흰 종이밖에 없다든가 하는 일이요. 시력이 안 좋아진 건 아니에요. 숲속 산책은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는데, 나뭇잎이며 저보다 멀리 있는 나무며 돌, 풀, 재빠르게 움직이는 청설모가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두 눈이 더 좋아진 것처럼 생각됐으니까, 분명 시력이 문제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상한 일은 자꾸 생겨났죠. 매일같이 점점 살이, 눈에 띄게 빠졌는데요. 아침마다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서면 그런 나 자신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심지어는 몸의 부위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손이, 어느 날은 한쪽 어깨가 또 어떤 날은 목이…… 안 보여요. 그냥 없어지는 거예요. 거울 속에서 나는 몸의 어떤 부위가 보이지 않는 불완전한 사람으로 서 있어요. 지하 1층 창고로 내려가 선배의 녹음기를 가져온 건 얼굴의 반쪽이 거울에 비치지 않는 어느 날부터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서울로 올라가는 건 이미 늦었을 테니까, 이렇게 녹음을 해 증거를, 뭐라도 내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놓기 위해서요.
   몇 주 동안은 녹음기를 앞에 두고 앉아서 녹음 버튼을 누를까 말까 한참 고민만 했습니다. 나는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럼 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긴 건지 과거를 한 장면 한 장면 뒤로 돌려볼 수밖에 없었어요. 14년 기자생활이야 매일이 그리 다르지 않게 흘러갔으니까 별로 되짚을 만한 게 없었고. 췌장염에 걸린 애인이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병원에서 나와 요양원으로 옮겨가는 동안 들어간 시간이며 병원비를 계산하기도 하고, 매일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이렇게 옆에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가지기도 한 날들이 생각났어요. 하지만 나는 한결같이 그의 옆을 지켰습니다. 그의 일상이 되어주었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거잖아요. 상대방의 꾸준한 무언가가 되어주는 일. 그러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인생을 거름망에 흘려보내다보니, 딱 하나 남더라고요. 잊히지도 않고 잊어서는 안 되는 일. 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이불 밑에 약지 손톱보다 작은 돌 하나가 있는 것. 그 작은 돌 하나가 튀어나와 있어 잠자리가 불편해지고, 그래서 도저히 잠을 자지 못하게 되는. 그게 바로 위차장님이었습니다.
   선배는 물론이고 애인에게조차 말한 적이 없는데요. 행정병으로 근무하던 시절, 위 차장을 만났어요. 정말 나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 사람. 이유야 알 수는 없죠.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한 적은 있는데요. 대체 뭐가 어떻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모릅니다. 행정병 근무가 끝난 후에도 내 꿈에 종종 나오는 사람이었어요. 거기서 나를 괴롭혔는데요. 그 꿈을 더이상 꾸지 않게 된 건, 신문사를 다닌 지 3년 즈음 됐을 때였습니다. 몇 년 만에 연락한 위 차장이 연락해왔거든요.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제 손을 잡으며 그러더군요. 자기 동생이 버스 기사인데, 부당해고 당했다고, 그 일을 기사화해줄 수 없느냐고요. 마주 앉은 식탁이 흔들렸습니다. 목을 축이라고 준 오렌지주스 캔이 떨어졌죠. 옆에 있던 수납장 밑으로 굴러들어가더군요. 그의 부탁은 협박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부모 없이 둘이 서로 의지해 자랐다면서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어요. 목이 마르니 저기 밑으로 굴러 들어간 저 캔을 꺼내달라고요. 새것을 주겠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수납장 앞에 가서 섰습니다. 그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죠. 수납장 바닥의 좁은 틈새 사이로 손을 뻗어 넣더군요. 캔이 깊숙이 들어갔는지 그가 팔을 더 뻗으려 얼굴을 바닥에 바짝 밀착했습니다. 나는 양말을 벗고, 맨발로 그의 얼굴을 밟았어요. 그는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는데도 아무 말 없었습니다. 오렌지주스 캔을 찾으려고 할 뿐이었죠. 그것만 손에 쥐면, 나에게 건네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오렌지주스 캔을 받아들고, 그것을 식탁에 올려둔 채,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기사는 쓰지 않았어요. 그 버스기사? 위차장? 어떻게 됐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복수…… 복수는 아니었습니다. 통쾌함도 없었어요.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마음도 느끼지 못했어요. 그 집을 그렇게 나온 그 순간부터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나를 어둡고 깊은 늪으로 가라앉히게 만든 거예요.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죠.
   선배, 오늘 내가 노트북을 켜고 그동안 정리한 나의 기록들을 열었을 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그게 한순간의 착각이나 환영이 아니었을 때 나는 별장을 뛰쳐나왔습니다. 차를 타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차문을 열려고 하다가 차 키를 거실에 두고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별장을 삥 둘러 거실이 보이는 전면 유리창에 다가갔어요. 거실 소파에 있는 낮은 탁자 위에 있더군요, 선배의 차 키가. 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습니다. 햇빛이 창을 밝게 비추고 있었어요. 별장을 둘러싼 숲이 창에 반사되어 보였죠.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없었습니다. 창문에는 저 없이 숲의 나무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어요.
   녹음기를 켜고 녹음을 시작한 건 그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서울로 돌아가려 합니다. 차를 타고 긴 시간 운전해 선배의 집 앞에 도착할 거예요. 그런데 정말 내가 무사히 갈 수 있을까요? 가는 길에 내 몸의 한 부분이라도 잃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선배를 만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말 사라졌을까봐,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을까봐 이렇게 녹음을 남깁니다. 나의 이야기를, 선배는 기억해주실 건가요? 아니, 나를 기억하고 있나요?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작가노트_이문경


   고어물이나 좀비영화는 좋아해도,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를 보지 못한다.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예고편으로 나오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만 보아도 며칠은 불면에 시달린다. 한밤중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도시 괴담이나 학교 괴담 이야기를 꺼낸다? 그럼 귀에 이어폰을 꽂거나 방으로 들어갔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 그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나도 안다. 사람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귀신이 무서운 걸. 그래서 귀신 이야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공포가 아닌,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에 관한 공포였다.
   웹서핑을 하고 있으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 읽고, 보게 된다. 블로그와 브런치는 물론 유튜브와 sns까지 모두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에서부터 어디서는 들을 수도 없는 내밀한 자기고백까지. 사람들은 말하고 싶어한다.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믿으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찍고 일상을 문장으로 옮기고 또 어떤 이들은 아주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자서전을 쓴다. 그런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지워지고 기억에서 사라지는 일 아닐까?
   승빈님은 오래된 기억과 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일기를 보내주셨다. 이 일기를 바탕으로, 오래 전의 일을 잊지 못하고 죄책감을 안은 채 살아가는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또 직면하는 이야기를 써보았다.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일이 승빈님에게는 가장 큰 공포일까? 주인공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이 윤리적으로 옳은 것일까? 일기로 소설을 쓸 때 마음 편히 써도 좋다고 허락해주신 승빈님 덕분에 그런 고민들은 최대한 멀리 두고 소설을 썼다. 다만 이 공포소설의 역할에 대해서는 오래 고민했다. 소설을 읽을 승빈님과 독자가 자신에게 가장 두렵고 공포스러운 일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생기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의 윤리라고 믿는다.



월과월과월

매주 월요일(月)에 모여,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넘나들며(越), 문장(문장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 우리말 ‘월’)을 쓴다는 목표 아래 모인 창작 동인이다. 만화 시나리오 작가 강아는 좋아하는 만화와 소설 앞에선 조금 상기되는 편이다. 대학원생 박몽은 동경에 거주중이고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 단 한 해도 학교를 쉰 적 없는 학교 덕후다. 생활체육인 이문경은 책을 만들며 시와 소설을 읽고 쓴다.

2020/10/27
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