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밑 콩
2화 ↔ : 이응 _세 겹 요를 구뷔구뷔
1
(←)
스스로 입고 벗지 못하던 때 나는 어머니의 인형이었다. 어머니는 손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잘하고, 좋아한다. 내 입으로 말하기엔 우습지만, 난 어렸을 때 제법 귀여워서 작은 동네의 아기 스타였다. 여행을 좋아하고 유럽 문화를 동경했던 어머니. 그 앞에 ‘인형 같은’ 수식어가 어울리는 딸이 생긴 것이다.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고운 파스텔톤 헤드보드와 풋보드가 화려한 침대, 프로방스풍의 옷장이 내 것이었다. 방문을 열면 레이스 깔개와 빈티지 촛대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취향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팝송과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책벌레 아버지. 아직 음악이 무엇인지 의식하기도 전에 오빠가 좋아하는 Backstreet Boys의 노래를 따라 불렀고, 아버지의 먹이나 유화 냄새도 어린 숨에 쉽게 익숙해졌다.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책이 있었고, 어머니의 작은 조각상들이 가득한 게 당연했다. 이미 세 사람의 취향으로 범벅이 된 집안에서 나는 모방을 익혔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의 취향은 곧 나의 취향이었다.
‘내 것’의 경계가 모호한 시점에 ‘내 스타일’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나는 거의 어머니가 사주는 대로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언제나 몸집이 작았던 나에게는 할머니, 어머니의 친구, 어머니 친구 딸, 고모, 이모, 사촌까지, 입다가 작아져서 못 입게 된 옷, 사이즈를 잘못 주문한 옷이 모두 흘러들어왔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에 더해 그들 모두의 취향까지 옷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야말로 범람이었다. 흡수하는 것만도 바빠서 나는 스스로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판단할 겨를 없이 자랐다.
어머니가 빨간 체크무늬의 원피스를 만들어주었을 때를 내 취향의 시작이라 하고 싶다. 그전까지 입던 옷들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선택은 똑똑히 기억난다. ‘그거 입고 학교 가기 싫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2
(―)
성인이 되고 내가 번 돈을 내가 쓸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나는 밴드를 좋아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누구나 그렇듯 무언가 조금 달라졌다. 밴드의 로고가 크게 박힌 티셔츠를 사모았다. Nirvana, Slipknot, Green Day 같은 유명한 밴드부터 늘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인디밴드들의 굿즈 티셔츠까지(어째서인지 그건 모두 검정색이었다). 밴드 멤버들 또한 (어째서인지) 검정색 옷을 즐겨 입었다. 땀을 흘려도 티가 덜 나는 이점도 있어서 좁아터진 홍대 공연장과 락 페스티벌을 다니던 나도 덩달아 옷장 속을 새까맣게 채웠다. 늘 위아래로 까맣게 입고 다녀서 어쩌다 회색 옷이라도 입으면 ‘이런 밝은 색도 입어?’라는 반응을 듣기 일쑤였다.
빠듯한 월급을 받는 신입사원은 소비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밖에 없다. 그땐 옷보다는 공연을 한 번 더 보러 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굿즈 외엔 새로운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늘 입어 해진 바지를 1년에 한두 번 정도 바꿔주는 것이면 충분했다. 당시에 다니던 회사가 꽤 보수적인 분위기였던 것도 옷에 대한 관심을 깎아내는 데 한몫했다. 너무 짧은 치마나 요란한 옷을 입으면 은근한 눈치를 주었기 때문에 늘 입는 것만 꺼내 입었다. 검정색 옷은 다행스럽게도 ‘장례식 갔다 왔냐’며 놀림의 대상이 될지언정 부적절하다고 여겨지진 않아 편했다.
애인이나 가족이 은근하게 예쁘게 좀 입고 다니라는 말을 건네면 ‘옷 사는 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대답했다. ‘옷 한 벌이 공연 하나 값이야’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밴드의 굿즈이거나, 누군가가 선물해주었거나 하는 의미를 없애고 나면, 옷이란 것은 언제나 내게 그 가격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실은 출근 전에 옷장에서 입을 고만고만한 옷을 고르며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음이 추운 시기가 있다. 퇴사 직후가 그랬다. 퇴사와 비슷한 시기에 취미 치고는 꽤 깊은 마음으로 하고 있던 밴드도 그만두었다. 쫓아다니던 밴드 중 몇은 활동을 중단하고, 몇은 해체하고, 몇은 그냥 뜸했다. 회사를 그만두고도 먹고살아야겠으니 아르바이트는 이어갔지만, 뭐든 해야 할 것 같아 다니기 시작한 영어 학원비를 내고 나면 여유 없을 정도의 금액이 남았다.
완전히 지친 상태로 계획 없이 회사를 그만둔 나에겐 하늘에 뜬 구름 조각만큼의 선택지가 있었다. 취미로 시작했지만 제법 즐기게 된 사진? 전공이었던 회화? 직업 경력이 조금 생긴 출판? 알음알음 용돈 벌이 정도는 되던 디자인? 아무것도 없어서 무엇을 시작해도 되는 시기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얼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이라도 풀게 그림이라도 그려볼까, 생각했다. 나는 매일 입는 옷을 수채화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위: 청재킷은 사촌 언니에게서, 시폰 스커트는 친구에게서 받았으며, 데님 셔츠와 얇은 니트 조끼는 어머니가 사오신 것이다. 아래: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빨간 니트 카디건과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까만 티셔츠, 까만 바지.
3
(→)
위아래 죄다 검정인 옷을 그리는 건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부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옷장 속에서 잠만 자고 있던 옷들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친구에게서 받은 분홍색 봄 재킷, 부산에 놀러 갔을 때 시장에서 산 짧은 니트, 사촌 언니에게서 거의 10년도 전에 물려받은 청재킷, 사이즈가 작아 고모에게서 나에게로 온 스커트…… 지난 모든 시간의 기억도 함께 깨어났다. 그러면서 옷장은 앞과 뒤로 철저히 나누어졌다. 앞은 이야기가 있거나 특별히 아끼는 옷이 차지했고, 뒤는 버리기엔 아까운 정도의 옷들과 경조사가 있을 때나 뜨문뜨문 입는 옷이 차지했다.
프로방스풍 옷장에서 독립하여 이사하던 날에야 나는 뒤쪽에 쑤셔진 옷들을 버릴 수 있었다. 옷장 속에서 옷 한 벌 한 벌을 꺼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 이삿짐 상자에 개켜 넣었다. 그동안 빛이 들지 않는 옷장 뒤쪽을 얼마나 쉽게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인지, 난생처음 보는 것 같은 옷도 있었다. 이삿짐 상자 속엔 어머니 취향의 원피스도 있었고, 친구나 사촌에게 받은 옷도 있었으며, 밴드의 굿즈 티셔츠도 있었다. 그대로 새집의 옷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번에는 앞과 뒤의 구분이 없었다.
독립과 동시에 나는 비건이 되었고, 자연스레 환경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원래도 그랬지만 신념까지 생기니 옷은 물론이고 새 물건 자체를 거의 사지 않게 되었다. 버리지도 않게 된 것은 덤이다. 제로웨이스트나 빈티지 마켓을 둘러보는 재미를 알게 되면서 그제야 취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알기 쉬웠다. 내가 장바구니에 담는 것이 하나같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패턴인 것이다. 하나를 깨닫고 나니 내가 버리지 않고 남겨둔 옷들에서도 또다른 규칙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친구가 선물해준 것, 내가 잃어버렸는데 누군가가 깜짝 선물처럼 찾아준 것, 어떤 사진에서 그 옷을 입은 내가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 그러니까, 기억이 묻은 것이었다. 아, 정말 넘쳐흐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옷의 양도, 패턴도, 의미도 옷장 속에 한가득이었다. 그야말로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맥시멀리스트다.
그 안엔 여전히 어머니, 아버지, 오빠, 친척과 친구의 취향이 있고 다른 사람이 10여 년 묵혀둔 옷까지도 흘러들어오지만 이젠 전부 오로지 내 선택이라고, 내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뿐이다.
얼핏 반대를 나타내는 기호처럼 보이는 ‘↔’ 모양은 장소와 장소를 잇는 길을 나타낼 때도 쓰이고, 길게 늘이면 한없이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연대기에서도 쓰인다. 왼쪽을 향한 화살표(←)와 한없이 길어지는 긴 선(―)을 달고 시간은 오른쪽(→)으로 달려나간다. 메주처럼 10여 년이 묵은 내 소중한 옷들은 시간 속에서 의미를 더해갈 것이고, 묵히고 숙성될수록 맛은 깊어질 것이다.
모임도토리(이응)
무대에 서는 직업 때문에 옷에 대해 꽤 생각해본 보컬리스트 계피, 빈티지 샵에서 촛대를 고르듯 옷을 사면서 한편으로는 밴드 굿즈 티셔츠를 모으는 이응, 풍선 가슴뽕을 넣고 유치원 수영복 콘테스트에 섰던 움파.
2020/08/25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