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던 후암동에서


   ‘서울 산: 책’을 하며 이렇게 날이 좋은 적이 있었던가. 볕이 좋고 쾌적한 날이었다. 손차양을 한 채, 후암동 이곳저곳을 누볐다.
   후암동은 골목과 언덕, 100년 전 지어진 도로와 새로 포장한 도로, 적산가옥과 신식가옥이 혼재되어 있는 묘한 동네였다. 서울에 이런 곳도 있구나. 골목 깊숙이 들어갈 때마다 펼쳐지는 이채로운 풍경에 감탄하며 「신세이다이 가옥」 속 ‘나’가 살던 집을 찾아 헤맸다.

후암동에 도착해 우리가 처음으로 들른 곳은 ‘후암가록’이었다.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에서 운영하는 ‘후암가록’은 후암동의 오래된 가옥들의 외부와 내부를 실측하고 도면으로 옮겨 기록하는 프로젝트다. 길에서 흔히 보이는 고택이나 누가(累家)의 경우 도면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언젠가 이런 집들이 기록 없이 사라질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그 기록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후암가록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다만, 우리가 후암동을 찾은 날은 전시 준비 중이어서 직접 마주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박민정의 「신세이다이 가옥」(《문학동네》 2019 겨울호)은 ‘후암동 옛집’에서 유년을 보낸 ‘나’의 이야기다. ‘권연벌레가 득실’대고, ‘특유의 쇠 냄새’가 떠돌던 그 집에서 보낸 유년은 전혀 밝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할머니, 그런 할머니에게 치여 자살기도까지 하는 수진과, 해외로 입양 보내지는 장선과 장희 자매까지.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된 장희는 ‘야엘’이 되어 한국에 돌아오고, 나에게 후암동 옛집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모두에게 지긋지긋한 옛집. 지금은 사라진 집터를 ‘구글 지도 앱’에서 검색하며 ‘나’는 ‘내게 깃든 후암동 집에 관한 기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복기한다.

    정아 : 소설 어떻게 읽었나?

    해나 : 처음 읽었을 때는 후암동 집에 대한 섬뜩한 기억과 그 기억의 중추가 되는 할머니를 중심에 두고 소설을 읽어나갔던 것 같다. 이번에는 건축과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거주와 매매에 초점을 두고 읽었던 것 같고.

    정아 : 거주와 매매?

    해나 : 주인공은 결혼을 앞두고 서울에 집을 알아보는 평범한 무주택자다. 내 집을 마련하는 혹독한 과정 속에서 그녀는 서울에 대해 조금씩 깨닫는다. ‘같은 강남이어도 청담동과 포이동은 다르고, 반포동과 내곡동은 같은 서초구가 아니라고’ 1), 할머니와 아버지 세대는 그 시대에 어떻게 집을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우리 세대에게 서울에서의 정주(定住)는 그만큼 녹록치 않고,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거기서 발생되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읽었다.

    정아 : 최근에는 어쩌면 내 집을 꿈꾸는 것도 사치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후암동 적산가옥이 왜 한 가족의 역사와 연결돼서 소설로 만들어졌는지 이해가 안 됐다. 아마 나만 이 의문이 들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다 신세이다이를 사전에 검색을 해 봤는데 우리말로 신생대(新生代)라는 뜻이더라. 그것을 보고 구세대의 관습을 끊어내고 새로운 시대로 간다는 의미로 제목을 짓지 않았나 싶었다. 8, 90년대에 가부장제 속에서 성차별을 당하면서 성장한 주인공 세대는 이런 차별에 대항하기 시작하는 세대이다. 구시대의 산물인 적산가옥에서 일어난 구세대의 폭력적인 관습을 새로운 세대에는 끊어낸다는 관점에서 이 소설 제목의 의미를 추측해보았다. 주인공이 굳이 신세이다이라는 이름을 후암동 집에 붙이는 대목에서 나름 확신이 들었다.

    해나 : 좋은 해석이다. 무심코 소설을 읽으면 갸우뚱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아 : 구시대의 산물 속에서 고통 받았던 주인공 세대가 새로운 세대가 됐다는 것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후암동 집은 1970년대 후반에 강남과 동부 이촌동 개발로 그 일대의 집값이 왕창 떨어져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평생 모아온 돈으로 마련한 집이라고 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이 살던 문화주택단지는 귀신이라도 들린 양 다들 꺼렸다. 할머니는 그 집을 사면서 매우 만족했다고 했다. 이렇게 마당도 딸린 기와집이 똥값이라니 행운이라며 좋아했다고.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간 집이면 어떠냐? 일본 귀신이 들린 집도 아닌데”라며 할머니는 그 일대 주택을 기피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고 했다.2)

   골목마다 적산가옥이 즐비했다. 적산가옥은 콘크리트 블록조로 지어져 얼핏 보면 서양식 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눈에 띄는 직선 형태의 지붕 모양을 가지고 있어 다른 집들과 구분할 수 있었다.

일본 전통가옥은 지붕이 직선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뾰족한 지붕의 모양은 유려한 곡선을 가진 한옥과 차이가 있어 후암동을 거닐다 보면 적산가옥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문에 가려진 현관의 일부만 봐도 이 집이 꽤 오래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암동 적산가옥은 사진과 같이 이층식 구조가 많다. 이러한 구조는 일본의 전통양식이라기보다 서구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특징이다. 일본의 문화주택을 통해 탈아 입구의 사상과 조선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나’가 살았을 후암동 집은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정아 :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서울 산: 책’에서 다룬 작품 중 가장 읽기 힘들었다.

    해나 : 왜 그랬나.

    정아 : 후암동 집에서의 일들이 답답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눈칫밥을 먹는 딸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밤에 화장실 간다고 뺨을 맞는 주인공, 할머니의 구박에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 집에 살았던 수진, 해외에 입양되는 줄도 모르고 작은아버지를 따라 나간 장희와 장선, 미혼모라고 온갖 욕을 들어야 했던 고모까지.

    해나 :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마음 한구석이 갑갑했다. 주거문제와 가족문제, 각 세대의 갈등을 복합적으로 쌓아 놓은 소설이다.

    정아 : 그렇다. 갈등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모아놓았다.

    해나 : 장희와 장선을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나?

    정아 : 정황상 추측만 할 뿐이다. 당시 여자아이는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게 아니면 필요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꽤 있지 않았나. 그리고 집의 가장인 할아버지는 징용 갔다가 죽고, 그 뒤를 이을 장희, 장선의 아버지인 큰아버지의 존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 부재를 꿰차고 있는 건 할머니다. 할머니는 여잔데, 가부장의 전형을 다 보여주는 행동을 한다. 아마 작가는 의도적으로 큰아들을 지우지 않았을까. 집에서 큰아들의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에 두 아이를 입양을 보낸 것 같다.

    해나 :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작은아들은 사업이 망했지만 다시 재기한다. 큰아들은 그러지 못했고, 해서 작은아들이 그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지 않았을까. 야엘이 이 집에 살았어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지워진 자식’으로 취급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예전에 배수아 작가의 「영국식 뒷마당」(『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 있다. 집안 식구들에게 무심하게 버려진 이모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을 금하고, 그녀를 언급하는 것조차 꺼린다. 장희와 장선도 후암동 집에서 비슷한 존재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날에는 석녀(石女)라고, 아이를 못 가지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 있었다. 찾아보니 집에서 쉬쉬하고, 애물단지 취급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많더라.

    정아 : 전통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여성을 어떻게든 비하하고 지우려는 움직임이겠지. 고모 역시 미혼모로 할머니의 온갖 구박을 받는다. 심지어 야엘이 후암동 옛집을 기억하면서 고모를 ‘아주머니’라고 칭하기까지 한다는 부분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알 수 있다.

1920-30년대 후암동 전경. ‘후암厚岩동’이란 지명은 두텁 바위에서 유래했다. 큰 산(남산)과 단단한 돌처럼 두터운 이웃, 단단한 마을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신궁이 남산자락에 지어지며 일본인들이 자연스레 후암동에 터를 잡게 됐다. 서구와 일식 주거문화를 혼합한 문화주택이 모여 신세이다이 주택지, 미요시와 주택지, 쓰루가오 주택지 등의 단지형 고급 주거지가 형성됐고 이 주택들은 해방 이후 적산가옥으로 불리게 됐다.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문화주택은 수십 년이 흘러 낡은 주택이 되었지만, 그만큼 시간의 켜가 묻어나며 후암동 특유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시)

해방 이후 후암동 전경. 남산 자락은 과거 한양도성이 지나는 자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신궁이,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동상이, 박정희 정권 때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는 등 역사적으로 수많은 건축적 사건이 지나간 자리이기도 하다. 남산 자락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굴곡을 지나왔다. 그 아래 위치한 후암동 역시 그 변화를 함께 견디며 주거지로서 많은 의미를 담은 동네로 자리 잡았다. (사진 제공: 서울시)

    해나 : 후암동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

    정아 : 우선 이 동네에 과거 조선신궁이 있었고, 일본인들이 그 가까이에 살기 위해 터를 잡으면서 문화주택단지가 형성됐다. 일본은 사무라이 문화 때문에 높은 계급은 위에 살고, 낮은 계급은 밑에 살아서 언덕 지형을 선호한다더라. 후암동이 마침 언덕지형이라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은 서구를 선망하는 심리가 있어 겉은 서양식으로, 내부는 일본식으로 집을 지었다. 그래서 일본식 주택이 아닌 문화주택이라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해나 : 작년에 이완용의 집을 모태로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3)이란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완용의 집은 서양식과 일본식을 섞어서 지었던데. 그 역시 서구와 일본을 선망했다고 들었다.

    정아 : ‘우리는 서양인이다’라는 일본인 정서의 영향으로 친일파인 이완용 역시 서구를 선망했을 것이다. 영화 <아가씨>에서도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주택이 보이지 않나.

    해나 : 그렇다. 적산가옥이란 ‘적의 재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적산가옥을 우리는 어떻게 보존해야 할까.

    정아 : 시대에 따라 적산가옥은 선망의 대상,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신식 주택이었다가 리모델링 혹은 철거할 주택이 되기도 하고, 다른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 주인과 함께 하기도 했다. 이런 집은 역사상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암동에는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집들이 숱하다. 100년은 곧 주인보다 오래 살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 점에서 의미가 크기 때문에 여러 세대가 거쳐 간 이 집들은 더 시간이 흘러 사라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현재 후암동 적산가옥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하더라.

    해나 : 언니 말처럼 후암동은 역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품은 장소인 것 같다.

    정아 : 그렇다. 이런 곳을 어떤 공간으로 쓰느냐는 이제 우리 세대의 몫일 것이다.


   * 12월에는 정용준 작가의 「선릉산책」을 읽고 선릉에 갑니다.



경계 없는 작업실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해온 소설가 성해나와 건축학도 원정아. 문학 안에는 사람이, 사람 안에는 건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 안에 있는 건축을 본다.

2020/10/27
35호

1
《문학동네》 2019 겨울호, 422쪽(e-book 기준).
2
같은 책, 422쪽(e-book 기준).
3
성해나, 《문장웹진》 2019년 8월호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