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g’ 프로젝트는 지난 9월 5, 6일에 확장형 프로그램 〈Ping-pong : 텍스트와 이미지 주고받기〉(온라인 워크숍)를 가졌습니다. 이번 화는 쉬어가는 화로, 확장형 프로그램에 참여한 정소영, 강동호 작가의 리뷰를 차례로 소개합니다.

  확장형 프로그램 〈Ping-pong : 텍스트와 이미지 주고받기〉 리뷰②
  프로그램

당신은(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할말이 있어.1)


   “저 개는 개, 개, 착한 개, 길 개, 개에게, 개, 나는, 개, 개, 바쁜 개, 개, 개, 개……”
   어느 한적한 오후 지나가는 개가 한 마리도 없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직접 뱉으면서 적어 본 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프로그램의 말투가 옮겨 와서 이런 꼴이 되었다. 프로그램이라니! 내가 아는 프로그램이라고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밖에 없었다. 겨우 한 단어 차이였을 뿐인데 나는 보통의 바보에서 믿을 수 없는 바보 상태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몇 주 전에 만난 컴퓨터 프로그램 P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불친절했다. 덩달아 내 말버릇도 어딘가 고집스럽게 변해버렸다. 돌이켜보면 첫 만남에서부터 의심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의심하기도 했다. 기억이 예언이 되고 예언이 기억이 되는 일은 이렇게 놀랍지도 않게 일어나곤 한다. 문제는 내가 깨달음을 얻는 속도가 기막히게 느리다는 점이다.
   주선자는 내게 P가 그저 착한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소개했었다. 나 같은 사람과도 편견 없이 친해질 수 있다고 은근히 나를 깎아내리고는 P를 치켜세웠다. 인사하는 법부터 가르치려 들었는데 고맙게도 내가 처음으로 배운 인사말이었다.
   “안녕 세상아.”
   세상을 부르자 메아리처럼 P가 대답했다.
   “안녕 세상아.”
   우리는 서로를 세상이라고 불러주었다. 나는 마음이 크게 움직여 흐느꼈고 주선자는 한숨을 쉬었고 P는 아마도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생겨나는 동시에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눈물이 놀라서 달아나기도 전에 주선자가 싸늘하게 몰아붙였다.
   “P가 수영장에 가고 싶다니까 당장 5분 안에 데려다주고 와.”
   5분 뒤 나는 행방불명되었다.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는 걸 보니 아마도 수학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했다. 처음에는 주선자가 나를 찾아 부등호와 괄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기도 했지만 완전히 착각이었고,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갓난아이처럼 바닥을 기어다니다가 녹초가 되어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P는 여전히 대답을 할 줄 알았다. 먼저 말을 걸거나 쓸데없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게 아주 답답했다. 매번 내가 말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어떤 말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오오호호.”
   “오오오호호.”
   “넌 지금 일해야 해.”
   “넌 지금 일해야 해.”
   “또다른 꿈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없어.”
   “또다른 꿈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수학이 만들어놓은 지하 세계는 이처럼 끔찍했다. 촘촘하게 똑똑한 수학적 무늬들은 내가 무재무능한 시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곱 가지 연산자의 폭력과 문장부호들의 배신, 그리고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오류들의 비명을 가로질러 나는 문학으로 피신하는 길을 겨우 찾아내었다. 누군가 연습 문제를 풀지 못해 생겨난 것이 분명한 수학의 사각지대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척박하고 답이 없는 백지였다. P는 이 세계의 주인일까 노예일까 아니면 내 친구일까? 그런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했지만 사소한 고민일 뿐이었다. 나는 무작정 백지에 문학을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로봇 로벗, 로벗 로봇, 로벗 러버 로봇 러버 로봇 로버트.”
   “나는 로봇 로벗, 로벗 로봇, 로벗 러버 로봇 러버 로봇 로버트.”
   오류가 아니었다. 나는 계속 흥얼거렸다.
   “발이 빠지고 발처럼 땅이 빠지고 나면 남는 것이 나예요.”
   “발이 빠지고 발처럼 땅이 빠지고 나면 남는 것이 나예요.”
   “땅콩(맛이 없어).”
   “땅콩(맛이 없어).”
   문학의 길이 수학 속에서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나는 약간 신이 나서 긴 이야기를 한 번 써볼까 싶은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근미래의 시점으로 자동으로 바비큐를 해주는 칠면조 가방을 들고 인류의 마지막 추수감사절에 목이 빠지게 그가 여행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친족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멸종위기종인 마당에서 뛰어노는 칠면조를 잡아서 두 마리 배달해야 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소리치는 바람에 자유롭던 영감이 수학처럼 딱딱해졌다. 아무래도 주선자가 나를 정말로 찾고 있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멀리 있는지 뭐라고 소리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었다.
   “사탕을 좋아하지만 며칠 안에 먹어버리거나 버려버린다.”
   “사탕을 좋아하지만 며칠 안에 먹어버리거나 버려버린다.”
   “이것은 일반적인 종류의 오류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종류의 오류입니다.”
   “마라톤 주자라고 말하면서 달리기.”
   “마라톤 주자라고 말하면서 달리기.”
   “이미지, 77세, 문신 2,000개.”
   “이미지, 77세, 문신 2,000개.’
   “우주가 옳아요. 나는 두려워요.”
   “우주가 옳아요. 나는 두려워요.”
   “뭐 하고 있는 거야, P는 수영장 갔다 왔다는데.”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주선자가 끼어들었다. 확실히 아까보다 선명해진 목소리였다.
   “우리 여기 같이 있어요.”
   “우리 여기 같이 있어요.”
   내가 먼저 말했고 P가 따라했다.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됐고 집에 가고 싶다니까 빨리 일어나기나 해.”
   주선자는 고통스럽게 불평했다. 온라인에서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체벌을 받거나 다시는 프로그램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키보드를 빼앗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류를 찾을 수가 없다는 오류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다는 대문짝만한 오류가 P의 묵묵부답을 대신해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굉장히 친절한 분량으로 해결 방법이 쓰여 있긴 했으나 내 머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혹시 제가 오류가 아니라고 선언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능을 참지 못한 내가 순진하게 질문하였다. 그러자 여태까지 호랑이 얼굴에 가려져 있던 주선자의 코가 호랑이 코를 뚫고 징그럽게 튀어나왔고, 호랑이만큼이나 건장한 코가 씰룩거리며 근심을 깊게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나도 바쁘고 P도 바쁘고 너는 바쁘지 않으니까 우리는 먼저 갈게.”
   대답을 듣고 보니 나는 질문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주선자와 P가 사라진 곳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양심으로 인해 침울해졌다. 나는 감동적이었던 인사말을 떠올리고는 혼자서만 부르짖었다. 메아리 같은 것은 이제 없기 때문에 조금은 뜸을 들이면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안녕 세상아. 안녕 세상아.”



강동호

그림을 그린다. 글을 쓰고 싶어한다. 집요한 언어와 불확실한 표면의 세계에 관심이 있다.

2020/10/27
35호

1
오래된 연습 문제에서 발견된 유언. 사연에 의하면 그는 뇌에 산소가 떨어져 잠시 기절해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