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나 아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등장인물
장소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7부 정윤희 검사실
안쪽으로 책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책장이 있다. 책장에는 서류 봉투에 담긴 수사 자료들이 가득하다. 책상은 온갖 서류들로 어지럽다. 책상 앞에는 길쭉한 소파 두 개와 낮은 테이블이 있다. 한쪽에 커피메이커가 있다. 종이 냄새와 커피 향기가 섞여 있다.
수사 자료를 든 은희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뒤로 유리가 따라 들어온다.
유리는 말이 없다.
윤희가 사건 자료를 거칠게 넘겨 본다.
수사 자료를 보다가 전화를 건다.
윤희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윤희가 수사 서류를 살핀다.
유리는 말이 없다.
유리는 말이 없다. 윤희는 감정을 추스른다.
잠시 시간이 흐른다. 윤희가 숨을 고른다.
윤희 놀란다.
잠시
유리는 말이 없다. 앉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윤희는 어쩔 줄을 모른다. 일할 때와 다른 모습이다.
윤희가 커피메이커에서 커피 한 잔을 받는다.
한 잔을 더 따르려다 멈춘다.
윤희는 혼자 커피를 마신다.
커피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잠시
유리 나간다.
윤희 혼자 남는다.
긴 시간이 흐른다.
늦은 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윤희가 책상에 앉아 있다.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진다. 발이 아프다.
서류를 보다 휴대폰을 본다. 아무 연락이 없다.
커피를 마신다.
책장 속 낡은 봉투 속에서 CD 한 장을 꺼낸다.
표면에 ‘윤희에게’라고 쓰여 있다. 오디오에 넣고 재생한다
봉투 안에는 편지가 들어 있다. 윤희가 한 장씩 보고 내려놓는다.
‘Graceful Ghost’가 흘러나온다.
편지를 내려놓은 윤희는 답장을 쓴다.
윤희가 커피를 마신다.
막.
정윤희
40대 중반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 부부장검사
서유리
30대 중반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 검사
장소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7부 정윤희 검사실
안쪽으로 책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책장이 있다. 책장에는 서류 봉투에 담긴 수사 자료들이 가득하다. 책상은 온갖 서류들로 어지럽다. 책상 앞에는 길쭉한 소파 두 개와 낮은 테이블이 있다. 한쪽에 커피메이커가 있다. 종이 냄새와 커피 향기가 섞여 있다.
수사 자료를 든 은희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뒤로 유리가 따라 들어온다.
윤희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으며) 서 검사님.
유리는 말이 없다.
윤희
서유리!
유리
네.
윤희
어떻게 된 거야? 왜 진술이 엉망진창이 됐어? 우리가 길 만들어놓은 대로 가는 거 아니었어? 네가 틀림없다고 믿으라고 안 했어?
유리
죄송합니다. 변호사 접견 때 변수가 생긴 모양입니다.
윤희
변수? 그런 거 없게 만드는 게 우리 일이야! 왜 정신을 못 차려?
유리
죄송합니다.
윤희
내가 철저하게 준비하라고 했지? 구체적인 상황 만들어서 증인 머릿속에 박아놓으라고 했지? 분명히 ‘한 장관에게 회색 여행용 가방에 2억씩 3회 전달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씨는 어땠고 주변에 뭐 있었고 자세하게 그려 놓으라고 했잖아. 했다며? 틀림없이 믿으라고 해 놓고는 재판에서 이걸 엎을 때까지 눈치를 못 채? 응? 옷 벗고 싶어?
유리
죄송합니다.
윤희
유리야…… 유리야. 잘 들어. 이거 보통 사건 아니야. 장관 하나 끌어내리는 일이라고. 끌어내린다는 거,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유리
불법 로비 자금을,
윤희
(말을 끊으며) 아니지. 아니지! (잠시) 유리야. 이 대한민국은 수직적 체계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누구 하나 끌어내리면 다른 사람들이 한 칸씩 올라갈 수 있다는 거야. 10층, 11층 검사들이 눈에 불 켜고 끌어내릴 인간들 만드는 거, 그게 다 본인들 올라갈 자리 만드는 거라고. 올라가라. 올라가려면 자리를 만들어라. 자리를 만들려면? 끌어내려라! 이게 내가 검사 생활 20년 하면서 배운 거야. 유리야! 우리 지금 그거 하고 있는 거야. 부정부패?, 권력과 비리? 좋지. 수사하고 밝혀내서 사회 정의 구현하는 거? 그래 그거 맞긴 하는데, 내가 갈 자리 보고! 가고 싶은 쪽으로! 그쪽으로 방향 잡아서 사회 정의 구현도 하는 거라고. 알아들어?
유리
네.
윤희가 사건 자료를 거칠게 넘겨 본다.
유리
(한숨) 서 검사님. 피의자 김제현. 다시 소환하세요. 변호사 없이.
윤희
네? 그건,
유리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수사 자료를 보다가 전화를 건다.
윤희
네, 송 계장님. 김제현 가족들 아내, 자식들, 부모, 사촌까지 다 확인하시고 계좌 따 오세요. (수사 자료를 보며) 아내 최유정씨는 참고인 조사할 겁니다. 네. (전화를 끊는다) 서 검사. 내일 가족들 다 털어요.
유리
김제현의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요, 아내는 지병으로 입원 중입니다. 부모님도 연로하시고요.
윤희
그래서요?
유리
네?
윤희
그래서? 입원 중이고 연로하시면 은행 계좌도 없어? 요즘엔 5살짜리도 건물주인 세상이야. 노는 계좌 분명히 있을 테니까 그거 찾으세요. 털면 뭐라도 나와요. 내일 피의자 다시 조사하면서 수사 진행 상황 알려줘요. 빈틈없이 조사 들어갔다고. (혼잣말로) 검사 무서운 줄 모르고 진술을 바꿔?
유리
먼지…… 털라는 말씀이시죠?
윤희
(잠시, 웃으며) 서 검사님. 철저히 조사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윤희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윤희
(통화한다) 네 부장님. 알고 있습니다. 네. 그 부분은 저희도 지금 대책을, 알겠습니다. (듣는다)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걱정 마십시오. 네. (전화를 끊는다)
변호사 놈들이 김제현 아내 쪽에 손댄 것 같네?
변호사 놈들이 김제현 아내 쪽에 손댄 것 같네?
유리
아내요?
윤희
병원에 있다며? 병원비다 뭐다 챙겨 주겠다 하고 회유한 모양인데? 내일 불러서 위증까지 때리겠다고 겁 좀 주고. 김제현 애들은 몇 살이야?
유리
초등학교 1학년이 첫째고 그 밑에 3살 둘째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윤희
한창 예쁠 때네.
유리
그렇죠.
윤희
애들은 어디 있고?
유리
김제현의 부모님과 함께 있습니다.
윤희
아이들 많이 보고 싶겠네. 내일 조사실에서 영상통화 한번 시켜줘라. 지칠 때쯤 해서. 애들 얼굴 보고 나면 정신 좀 차리겠지.
윤희가 수사 서류를 살핀다.
유리
부부장님.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윤희
뭐?
유리
가족들…… 사실 가족들 털어봐야 별거 없다는 거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피의자 압박해서 진술하게 하라는 말씀이신데, 진술도 사실 불확실한 부분이지 않습니까?
윤희
서 검사. 무슨 이야기 하시는 겁니까? 한 장관에게 돈 전달한 사람. 김제현 아니에요? 그게 팩트죠.
유리
그렇지만 김제현은 자신이 전달한 것이 불법 선거 자금인지 몰랐고, 김제현은 말단 직원일 뿐인데,
윤희
(말을 끊으며) 그게 왜 중요해? (잠시) 서 검사님 왜 이러시지? 유리야? 오늘 왜 이러니?
유리는 말이 없다.
윤희
큰일 났네…… 갑자기 우리 서 검사님이 정의의 사도가 되셨네? 한 장관이 알고 받은 돈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김제현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금의 출처를 더 확실히 해야 한다. 이거? 누가 몰라? 그 이야기 안 나오게 하려고 이 지랄하고 있는 거 몰라서 하는 소리야? 돈이 어디서 나왔든, 중간에 누가 어떻게 전달했든 결국 팩트는 한 장관이 돈을 잡수셨다 이거야. 이거 하나면 된다고. 유리야.
유리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윤희
하…… 왜 이러니 정말.
유리
저 정말 모르겠습니다. 부부장님. 아니 선배님. 저 모르겠어요.
윤희
이게 진짜,
유리
저 선배님 존경합니다. 믿고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윤희
그럼 믿고 따라와.
유리
하지만, 이번 일은 제가 감당하기가 너무 벅찹니다.
윤희
감당? 검사가 감당하고 말고가 어딨어? 네가 변호사야? 갑자기 왜 감정에 호소하고 이래. 우리 검사야. 대한민국 검사라고. 네 말대로 사회 정의 구현하려면 썩은 것들 도려내고 새 판 짜야 되잖아. 우리 지금 판 짜는 거야 유리야. 너 지금까지 만들어진 판에서 놀아나 봤지 직접 판 깔아 봤어? 우리가 지금 그거 하는 거라고. 내가 놀 내 자리 만드는 거라고. 얼마나 좋아?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면서 일해도 모자랄 판에 뭐? 감당하기가 힘들어? 네가 감당해야 하는 게 뭔데? 김제현네 가족들 눈물 바람 대신해주고 싶어?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뭔데? 서 검사, 넌 네가 올라갈 곳만 보면 되는 거야. 내가 아까 뭐라 그랬어, 갈 방향 보고 그 길 만들어서 가면 된다고 했지? 너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지금?
유리는 말이 없다. 윤희는 감정을 추스른다.
윤희
유리야. 그래, 이해해. 이 바닥 부조리해. 인정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연민과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맑고 밝게 일 처리해서 네가 뭘 얻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어요. 우리 올라가자. 유리야 우리 이번 사건 잘 정리하면 다음 인사 때 10층 올라갈 수 있어. 정의로운 검사. 너 그거 충분히 했어. 그래서 네가 가치 있는 거야, 지금까지 정석대로 잘 해왔으니까. 그런데 이제 아니야. 지금이 터닝 포인트야. 서 검사. 판을 바꿔서 놀 수 있다고. 계속 잡다한 형사 사건이나 맡으면서 겨우겨우 밥줄 연명할래? 몇 푼 되지도 않는 월급에 야근에 그냥저냥 살고 싶냐고. 안 그래도 된다니까? 진짜 힘이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다른 레벨이 되는 거라니까? 큰 그림을 봐 유리야.
유리
(잠시) 저한테는 선배님이 큰 그림이었어요. 저 실무수습 때, 남자 검사들 틈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앞서나가는 선배님 보면서 나도 저런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선배님 보고 공부했어요. 강하고 정의로운 정윤희 검사.
(잠시) 그런데, 조금 달라지셨네요.
(잠시) 그런데, 조금 달라지셨네요.
윤희
뭐가 다른데?
유리
아니 똑같습니다. 다른 잘나신 선배님들이랑. 똑같아요.
잠시 시간이 흐른다. 윤희가 숨을 고른다.
윤희
네가 요즘 스트레스가 많은가보다. 알았고, 일단 나가 봐.
유리
저 그만두겠습니다.
윤희
뭐?
유리
그만둘게요.
윤희
지금 무슨 소리,
유리
저 검사 그만둔다고요. 때려치우겠습니다. 이딴 게 검사 짓이면 전 못하겠습니다.
윤희
사건 수사 중에 이게 무슨 앞뒤 없는 소리야!
유리
(큰 소리로)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윤희 놀란다.
잠시
유리
저, 임신했습니다.
윤희
뭐?
유리
일 계속하고 싶었고 휴직할 생각이었는데, 아니요. 그만두겠습니다.
윤희
서 검사, 결혼했었어?
유리
(놀란다) 일 밖에, 아니 본인밖에 모르는 분이시니까. 네, 저 결혼 5년 차예요.
선배님.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남편도 있고 이제 뱃속에는 아기도 생겼고요.
걱정할 게 너무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선배님처럼 올라가는 길만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압박하고 겁주고 상처 줘가면서 기어이 올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선배님.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남편도 있고 이제 뱃속에는 아기도 생겼고요.
걱정할 게 너무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선배님처럼 올라가는 길만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압박하고 겁주고 상처 줘가면서 기어이 올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윤희
(잠시) 그, 그래. 알았어 서 검사. 그래서 그랬구나. 음, 이제 알겠네. 임신하면 좀 그렇지? 호르몬 때문에 감정이 좀 격해지고 그러지. 이해해. 같은 여자로서 그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어.
유리
아니요. 선배님은 몰라요. 선배님은 절대로 이해 못하세요. 같은 여자…… 전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어떤 때 보면 선배님은 그런 게 상관없는 분 같아요.
윤희
차 한 잔 마실래?
유리는 말이 없다. 앉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윤희는 어쩔 줄을 모른다. 일할 때와 다른 모습이다.
윤희가 커피메이커에서 커피 한 잔을 받는다.
한 잔을 더 따르려다 멈춘다.
윤희
서 검사, 뭐 마실래?
유리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윤희는 혼자 커피를 마신다.
커피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윤희
그래도, 이번 사건은 마저 하고,
유리
아니요. 싫습니다. 담당 검사는 부부장님이시니까 제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박 검에게 인수인계하겠습니다.
윤희
박 검은 자기 사건도 있고,
유리
제가 잘 말하겠습니다.
잠시
윤희
그래도, 일을 그만두는 건 다시 생각해 보지?
유리
아니요. 생각 많이 했습니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윤희
서 검사, 일단 휴가 내고 쉬었다가 나중에 가서,
유리
싫습니다. 나중에 복직하고 여기저기 다닐 생각 없습니다. 그만두겠습니다.
윤희
유리야, 정말 왜 그러니!
유리
부부장님은 절대 이해 못하세요.
윤희
도대체 내가 뭘 이해 못해? 나는 지금 일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너 검사 되기 쉬웠어?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 갑자기 그걸 다 내려놓겠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유리
검사 되기 어려웠죠. 그런데 선배님, (잠시) 엄마 되는 일은 더 어려웠어요. 저 시험관 시술 몇 번이나 한 줄 아세요? 겨우 가진 아이예요. 지금 제 나이 생각하면 마지막일 수도 있어요. 저는 아이에게 더 신경 쓰고 싶습니다.
윤희
서 검사. 그래 알았어. 그런데 서 검사가 그랬지? 남자들 틈에서 밀리지 않는 나를 봤다고. 나도 힘들었어. 나 때는 지금처럼 여자 검사가 많지도 않아서 야근하느라 집에 못 가면 숙직실도 못 쓰고 그냥 사무실에서 엎드려 잤어. 여자라고 무시하는 일은 일상이었고 남자 선배들은 남자 후배들 챙겨주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지. 좀 챙겨주는 선배인가 싶으면 홍일점이니 뭐니 하면서 희롱이나 하고. 나 정말, 이 악물고 버텼어. 여자 검사는 뭐 어떻다 하는 소리 듣기 싫어서 일도 더 열심히 했고 여자라서 다르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남자들이랑 똑같이 굴렀어. 접대 자리 가서도 기 안 죽으려고 같이 어울리고 거칠고 험한 일 부러 골라 맡아서 아득바득 해냈다고. 기 세고 독하다는 소리 들으면서 지금까지 버틴 거야. 지금은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너도 힘들었잖아. 내가 모르겠어? 버티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거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래서 같이 가자는 거야. ‘여자라서 나가떨어졌네’ 소리 듣지 말고 우리 같이 올라가자. 나는 너랑 꼭 같이 가고 싶어 유리야.
유리
그래서, 이렇게 되셨구나.
윤희
뭐?
유리
안쓰럽습니다. 지지 않으려 애쓰시다가 결국 똑같아지셨네요.
윤희
똑같다고? 내가? 아니야 난 다르지. 나는 달라!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썼는지 알아? 매일이 전쟁이었어. 서유리 너야말로 다를 거 하나 없는 인간이었네. 내가 잘못 봤어. 엄마? 누구의 엄마로만 살고 싶은 거야? 서유리 검사. 서유리 네 이름은 없어지는 거야. 그렇게 사라진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이름을 잃었는지 알아? 너는 그게 용납이 돼? 나는 이제 더는 잃고 싶지 않아. 정신 차려 서유리. 그만두겠다고? 나는 절대 용납 못 하니까 그렇게 알아. 남은 수사 차질없이,
유리
나가 보겠습니다.
윤희
서 검사! 서유리!
유리 나간다.
윤희 혼자 남는다.
긴 시간이 흐른다.
늦은 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윤희가 책상에 앉아 있다.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진다. 발이 아프다.
서류를 보다 휴대폰을 본다. 아무 연락이 없다.
커피를 마신다.
책장 속 낡은 봉투 속에서 CD 한 장을 꺼낸다.
표면에 ‘윤희에게’라고 쓰여 있다. 오디오에 넣고 재생한다
봉투 안에는 편지가 들어 있다. 윤희가 한 장씩 보고 내려놓는다.
‘Graceful Ghost’가 흘러나온다.
편지를 내려놓은 윤희는 답장을 쓴다.
윤희
정심에게. 심아,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내? 대학 졸업하고 결혼했다는 소식까지는 들었어. 아, 그 후에 둘째를 임신했다는 이야기도. 서로 사느라 바빠서 안부 한 번 못 물었네. 오늘,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 편지를 꺼내 읽었어. 문득 네 생각이 났거든. 편지 속의 너는, 늘 나를 응원하고 나를 궁금해했더라.
나,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어.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서류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쁜 놈들이랑 싸우지. 재밌어. 일이 너무 재밌어서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어. 기억해? 내가 변호사 되겠다고 했었잖아. 아무도 내 앞에서는 말 함부로 못하게, 말발로 이겨 먹는 사람 될 거라고. 대학 가서 공부하다 보니까 검사가 그렇게 멋있더라고.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심아, 네가 늘 그랬잖아. ‘너는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고. 감나무에 올라가거나, 체육 대회 때 달리기하거나 할 때 들었던 말이지만 그게 나한테는 주문처럼 남았어. 힘들 때마다 그 말로 버티다 보니 지금은 부부장검사가 됐네? 제법 높은 사람이야 나.
심아, 오늘 후배 하나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왔더라. 임신했다고. 그래서 그만둬야겠다 싶었나 봐. 엄마가 되니까, 아이랑 있어 줘야 하니까. 그런데 그 맘 다 알면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냐고 일부러 더 악담하고 화를 냈어. 멋없지?
그 후배가 그러더라. 선배는 절대로 모른다고. 마치 내가 적이라도 되는 듯이 쳐다보면서, 이해 못 할 거라고. 그 눈이 너무 아팠어. 나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심아?
심아, 너는 대학가요제에 꼭 나갈 거라고 했었잖아. 왜 안 나갔어? 너 정말 노래 잘했었는데. 대학가요제를 하면 혹시 네가 나오지는 않았을까 유심히 보고는 했었어. 난 정말 네가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지금도 유효해. 넌 내가 봤던 사람 중에 가장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야. (잠시) 네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을 어떻게 참고 살아? 그 노래들이 다른 것들로 변했을까? 네 아이들은 어때? 널 닮았어?
가끔은 믿어지지가 않아. 내가 이렇게나 어른으로 오래 살고 있다니. 그때는 너무 짧았는데 어른은 참 길다. (잠시) 새해 복 많이 받아. 정심아.
나,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어.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서류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쁜 놈들이랑 싸우지. 재밌어. 일이 너무 재밌어서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어. 기억해? 내가 변호사 되겠다고 했었잖아. 아무도 내 앞에서는 말 함부로 못하게, 말발로 이겨 먹는 사람 될 거라고. 대학 가서 공부하다 보니까 검사가 그렇게 멋있더라고.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심아, 네가 늘 그랬잖아. ‘너는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고. 감나무에 올라가거나, 체육 대회 때 달리기하거나 할 때 들었던 말이지만 그게 나한테는 주문처럼 남았어. 힘들 때마다 그 말로 버티다 보니 지금은 부부장검사가 됐네? 제법 높은 사람이야 나.
심아, 오늘 후배 하나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왔더라. 임신했다고. 그래서 그만둬야겠다 싶었나 봐. 엄마가 되니까, 아이랑 있어 줘야 하니까. 그런데 그 맘 다 알면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냐고 일부러 더 악담하고 화를 냈어. 멋없지?
그 후배가 그러더라. 선배는 절대로 모른다고. 마치 내가 적이라도 되는 듯이 쳐다보면서, 이해 못 할 거라고. 그 눈이 너무 아팠어. 나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심아?
심아, 너는 대학가요제에 꼭 나갈 거라고 했었잖아. 왜 안 나갔어? 너 정말 노래 잘했었는데. 대학가요제를 하면 혹시 네가 나오지는 않았을까 유심히 보고는 했었어. 난 정말 네가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지금도 유효해. 넌 내가 봤던 사람 중에 가장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야. (잠시) 네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을 어떻게 참고 살아? 그 노래들이 다른 것들로 변했을까? 네 아이들은 어때? 널 닮았어?
가끔은 믿어지지가 않아. 내가 이렇게나 어른으로 오래 살고 있다니. 그때는 너무 짧았는데 어른은 참 길다. (잠시) 새해 복 많이 받아. 정심아.
윤희가 커피를 마신다.
막.
박주영
‘내가 사랑했던 연극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사랑할 만한 연극을 만들기 위해 극을 쓰고 있다.
잃어버린 이름들을 계속해서 부를 생각이다.
아마도 작가.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