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小說
8화(최종화) 자기만의 171
작가 노트 : 프로젝트를 마치며
일기 제보자분들의 후기
먹다 남은 피자 조각이라고 생각한 내 일기가 masterpiece가 될 줄이야…… _이민경(2화 일기 바로가기)
내 일기를 소재로 창작된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정말 뜻밖의 순간 해방이 되어버렸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그저 출구였던 것 같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은 것을 누군가의 상상력을 통해 위로받아 눈물이 흘렀다. _지수(3화 일기 바로가기)
내 일기로 지어진 소설을 읽으며 평행 세계의 나를 만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찰나에 소멸될 줄 알았던 순간들이 어디선가 계속 다시 쓰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재미 할당량을 함빡 채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_노체(4화 일기 바로가기)
요즘에는 말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는 흔한 미신 같은 말에 마음이 갑니다. 새롭게 읽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승빈(5화 일기 바로가기)
171小說 프로젝트를 통해 저의 일상이 판타지가 되는 걸 보면서, ‘그렇지…… 위대한 모든 것은 지나치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되곤 하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주 쫄고 기가 죽곤 하는 현실의 유나를 무협판타지 소설 속 ‘운명의 팔찌 운반자’로 만들어주신 덕분에 현실의 저까지 무쇠솥처럼 단단해졌어요. 강해지고자 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_유나(6화 일기 바로가기)
저는 재미있는 게 너무 좋아요. 그래서 좋았어요. 정말 좋아요. _정지혜(7화 일기 바로가기)
월과월과월의 후기
‘우리’라는 인칭을 사용하여 글을 쓴 경험은 극히 드물었다. 글을 쓰고 소설을 창작하는 일은 고립된 감정을 동반해야만 더욱 수월할 것이라는 오해가 있었던 듯하다. 지금보다 자유로웠지만 지금보다 행복했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지난해 동안, 우리는 충분히 외로웠지만 그만큼 많은 글을 써내진 못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소설과의 싸움 그리고 패배를 반복하며 막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쓸 수 있는 글에는 등한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뀌게 될 줄은 몰랐던 2020년 3월, 우리는 우리가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방법적인 고민을 나누었다. ‘사적인 것’과 ‘문학’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심하던 중, 일기를 받아 소설을 창작해 돌려주는 ‘의뢰-착수’ 형식의 프로젝트 ‘171小說’을 구상해냈다. 계획보다 실천을 먼저 하자는 뜻이 모여 무작정 일기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금전적인 소득은 단념한 채 새로운 것, 그리고 문학을 흥미로운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일의 가치를 중점에 두니 뜻밖에도 우리의 프로젝트와 소설에 조금씩 관심을 주는 이들이 생겼다. 본 지면에 연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도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실제 인물과 그들이 쓴 일기를 다시 가상의 인물과 픽션 속 사건으로 만드는 일은 물론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먼저, 선행된 예가 없다는 것이 창작을 더디게 만들었다. 기성 소설들의 대부분이 작가 본인의 선험 혹은 타인을 통한 간접경험에서부터 비롯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관련 없는 제 3자의 인물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데려와 우리의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조금 아득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물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을 수 있는 훈련이 가능했다. 내 손에서 떠난 글은 더이상 나의 글이 아니라는 말은 그 인물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닌, 아직 내 손안에 있을 때, 보다 세심히 다루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았다. 반면 이런 주저함이나 조심성이 혹여 창작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 때면 팀원들과 충분한 합평과 회의를 거치기도 했다.
원고 작업은 혼자 해야 하는 일임에는 변함없었으나, 주기적으로 합평과 회의를 거듭하여 새로운 이야기 혹은 인물을 발견해내는 일은 그전까지 해왔던 창작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혼자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윤리적인 고민 혹은 시의성의 커트라인 등을 함께 질문하고 답해보았다.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전까지 ‘독자-작가’로 이분되었던 소설 창작이 ‘일기 제공자-독자-검수자-작가’ 등의 세분화가 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대화를 거듭하면서 우리는 각자가 어느 장르에서 더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방학 숙제를 검사하는 초등학교 교사를 제외하고, 이렇게 단시간에 많은 일기를 읽어본 팀이 또 있을까. 우리의 소설이 ‘참 잘했어요’ 도장보다 그들을 더 기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제의 일상이 오늘의 소설이 될 수 있도록’이라는 슬로건을 잊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6개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소설이 되기에 무리가 있는 일기는 단 한 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가설을 증명해낸 과학자들처럼 기뻐하기도, 또 그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이 귀중한 경험은 속도가 더뎌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속 가능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래에 171小說 프로젝트를 진행한 팀 월과월과월의 일기 본문을 함께 게재해본다. 우리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여주신 분들께서도 이 경험에 동참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단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_이문경의 일기
강아지와 동네 산책 다녀오고 나서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황정은의 『연년세세』 한 권만 가방에 챙겨 넣었다. 오늘 E가 각본을 쓰고 감독하는 독립 영화의 한 장면에 보조 출연자로 일을 돕기로 했는데, 대기하고 촬영하는 동안 왜인지 이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는 단 한 장도 넘기지 못했지만. 아주 오랜만에 성수역으로 향했다. 촬영장에서 만나기로 한 J와 작년 겨울밤 이 근처를 헤매던 것이 기억났다. 그날은 꼭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추운 거리를 낮부터 저녁까지 걸었던 것 같다. 편의점 와인을 한 병 사서 밖에서 먹자는 J의 제안은 살짝 청춘들의 낭만극 같아서 혹할 뻔 했지만, 둘 다 동상에 걸려 죽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다양한 와인을 아주 싼값에 잔으로도 파는 프랜차이즈 술집을 검색했고 네이버 지도를 지침삼아 걸었다. 걷다보니 눈이 내렸고, 곧이어 그냥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휘몰아치는 눈보라 안에 있다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눈이 쏟아졌다. 얼굴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눈이 점차 쌓이기 시작했다. 스노우볼 안에 있는 기분이랄까. 그때 불 꺼진 블루보틀 건물을 지나가며 다음번에는 성수역에 와서 꼭 커피를 마셔야지, 일본에서 엄마와 함께 먹었던 그 맛있는 라떼를 먹어봐야지, 하지만 요새는 우유를 먹지 않는데 두유 옵션이 될까, 같은 생각을 하며 혼자 고민했던 것이 기억났다. J와 술집에 들어와 이것저것 간단한 안주와 잔으로 파는 와인을 몇 번이고 더 시키다가 간신히 막차를 타고 돌아갔다. 우리는 그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당시에는 내가 혹시 너무 이기적으로 살고 있나 싶어 걱정했지만, J가 좀더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고 말해줘서 그래, 나 좀더 이기적이어도 되겠다, 싶었다. 오랜만에 간 성수역은 작년과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낮과 밤의 차이가 아니었다. 마스크 쓴 사람들이 야외 식탁에 둘러앉아 고기 구워 먹었고, 근처에는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눈이 왕창 내리던 그날과는 다른 분위기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다들 코로나19로 달라진 일상에 이렇게든 저렇게든 잘 적응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카페에서 촬영 준비를 하며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던 E와 J를 만났다. 나처럼 보조출연자로 온 J의 동생도 보았다. J가 동생의 머리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해주는 모습, E와 J가 J의 동생과 나란히 서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정한 관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다정한 사람은 잘 알아보지 못하지만.
스태프가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아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연년세세』를 앞에 펼쳐두자, 다른 스태프가 와서 촬영이 끝날 때까지 먹으면 안 되는 커피와 쿠키를 세팅해줬다. 카메라감독과 녹음감독이 분주하게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두 배우가 내 앞 테이블에 앉아 리허설을 했다.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E가 보내주어서 미리 보아왔지만, 어떤 배우가 연기할지 상상가지는 않았는데, 촬영하는 내내 역할과 딱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연기를 잘해주었다. 촬영이 시작했다. 하나의 장면을 몇 테이크로, 다른 방향에서 찍었다. 처음에는 스태프들이 구분가지 않고 왜 다들 분주한 건지 잘 파악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조감독, 녹음감독, 촬영팀, 스크립터, 조명부, 의상부(J가 이를 포함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등등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 내 자리가 바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 바로 앞이어서 배경이 나오지 않는 장면에서조차 책을 읽을 만큼의 집중도를 높이기 어려웠다. 그만큼 촬영 현장이 재미있었다. 감독인 E와 조감독, 촬영감독이 한 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배우가 내 앞에서 움직이며 연기하고, 다른 스태프들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 촬영 현장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고…… 이 모든 움직임이 단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카페 밖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 촬영이 지연되었을 때도, 어쩌다 진행한 촬영에서 다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모두가 밖을 힐끔거릴 때도, 그리고 나도 모르게 제발 조금 뒤에 울어주기를 바랐을 때 느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 장면을 위해 한 순간 모두 같은 바람을 갖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 이 현장에 얼마나 몰입했냐면, 이미 E가 보내주어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배우가 대사를 읊으며 연기할 때 나도 같이 감정이 고조되어 눈물이 났을 정도였다.
예정보다 길어진 촬영이 끝이 나고 다음 신이자 마지막 장면 촬영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현장을 정리하는 E, J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엑스트라는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최고의 엑스트라가 되고 싶은 이상한 마음) 정말 내 삶과 관계없는 이상한 고민도 해보고, 영화라는 매체에 매혹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과연 그게 내 일이 됐을 때도 매력을 느낄지는 모르겠다. 지금 내가 내 일을 증오하는 것처럼. 하지만 영화 현장의 이상한 흥분과 그 몰입도가 너무나 낯설었고 그만큼 좋았다. 영화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 책 제목처럼, 특정한 순간을 필름이라는(디지털이라 하더라도) 도구에 담아 봉인하는 것일 텐데, 없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현재와 그 시간을 재생하는 영화적 시간 동안만큼은 그 어느 순간보다 생생하게 느껴진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 영화가 경험하면 할수록 더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하다니,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영화 현장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흥분과 살아 있는 기분, 생생함을 어쩌다 체험하니, 나도 한동안 살짝 고조된 상태였다. 집에 돌아오니 동생과 동생 남자친구가 엄마를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별로 거들 것도 없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엄마를 데리러 가기 위해 밖을 나섰다. 잠깐 동안 이 집에서 나도 엑스트라 역할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내일의 일
_강아의 일기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최소 네 달 전부터 준비한 이사를 팀 직원들에게 꼭꼭 숨기고 있다가, 이사 일주일 전이 되어서야 공지를 전달한 회사에 너무나도 큰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12월 말에 그만둬야지, 하고 전부터 계획은 하고 있었지만…… 시기가 이렇게 앞당겨질 줄은 몰랐다. 얼마나 직원들을 존중하지 않았으면 사무실 이사를 그렇게까지 숨긴 걸까? 항상 최악을 예상하지만, 언제나 최악을 넘어서는 곳이다.
퇴사 직후엔 일주일 정도 쫓기듯 글을 썼고, 준비하고 있던 공모전에 제출했다. 불안이 나를 잡아먹을 새도 없던 시간이었다. 당장 바쁜 것들을 끝내고, 한시름 놓은 지금은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낙천적인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근래에 J도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을 겪었고, 우리는 똑같은 날 퇴사를 했다. 서로 겪은 일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대신 울기도 했지만, 또 싸우기도 했다. 이번 일들로 내가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난 남을 위로하는 방법을 참 모른다는 거였다. 엉뚱하게 현실적인 해결책만 강박적으로 제시하고, 마음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단어를 쓸 땐 이상하게 뚝딱거리고, 내가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왜 아직도 한숨만 쉬냐며 화를 내기도 하고. 그걸 또 돌이켜 생각하다가 미안해하고. 근데 또 미안함을 표현하는 걸 어려워하고. 극단적으로 치미는 감정을 다루는 데 이제는 좀 노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힘이 들 땐, 바보 같아 보여도 투명하게 감정적인 응원이 정말로 큰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왜 그렇게 냉소적이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니 냉소는 정말로 강한 자의 태도가 아니다. 사실 너무 약한 사람이 강해 보이고 싶을 때, 냉소적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냉소조차 힘을 못 펴는 상황이 되면 더 깊은 우울이 닥친다.
새로운 계획과 포부가 마음속에 가득하지만, 옮겨 쓰기는 조금 두렵다. 희망이 죄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너무 많은 좌절이 반복되었기 때문인 걸까? 그렇게 길들여진 걸까? 매체에선 매일같이 재난과 종말을 말하지만, 실상 우리의 일상은 우스꽝스러운 일투성이다. 두 가지 상황은 전혀 상관없는 일들처럼 보이는데, 지금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극단적인 재난 서사는 전부 다 틀려먹은 것 같다. 그토록 극단적인 풍경은 어쩌면 지금 당장 재난의 한가운데 있는 이들은 배제한 풍경일지도?
지금의 내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일의 일인 것 같다. 내일은 여태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한 책을 읽고, 매일의 루틴을 짜고, 운동을 해야지. 요즘은 갑자기 정통 판타지에 빠져서 관련 책을 수십 권 샀다.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를 읽고 있다가 잠깐 멈춘 상태였는데, 어서 읽어야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귀 따갑게 추천해줘야지. 이렇게 자그마한 것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좀 나아진다.
月月月
_박몽의 일기
알람을 맞춰놓은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이른 새벽 6시경에 눈을 떴다. 또 커다란 보름달이 뜨려는 모양이다. 과학적이지 않은 추문에 불과할지는 모르겠으나, 슈퍼문이 뜰 무렵에 불면증이 찾아온다는 뉴스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주기와 맞지 않는 월경까지 찾아올 수 있다고 했다. 그 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밤새 뒤척이느라 두세 시간을 자면 많이 잔 거였다. 가끔 이렇게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지면 나는 달을 탓할 수 있게 되었다. 달의 인력에 잠을 방해받는다는 건 무거운 피로감에 대처할만한, 꽤나 낭만적인 위로가 되어주고 있었다.
갑자기 남아버린 시간에 조깅을 하러 나갈까 했지만 아침 8시부터 12시 사이에 택배가 오기로 했기 때문에 꼼짝없이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언제 불현듯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샤워도 할 수 없었다. 일본은 택배함을 갖추고 있는 맨션에 살지 않은 이상, 반드시 택배를 본인이 직접 수령해야 한다. 이 불편함도 언젠가는 적응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당장에 네 시간 남짓의 시간을 빼앗긴다는 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불편했다.
다시 잠을 청해볼까 하고 히터를 켜고 누웠지만 결국 휴대폰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발을 들어 암막 커튼을 거둬보았다. 발코니 바로 앞 이층 건물의 지붕 끄트머리가 누운 자리에서 보였다. 답답한 풍경 속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말 여러모로, 날 지치게 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미리 방안으로 들여놓은 빨래를 갰다. 순전히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잘 마른 빨래를 개는 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쉼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난 왜 쉬고 있지? 대학원 수업이 없는 날에도 아르바이트나 일정을 만들어 나가곤 했는데. 오늘은 왜 텅 비어 있지? 하는 생각에 나는 얼른 스케줄러를 열어보았다. 역시나 저녁 약속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사과 반쪽을 잘라 먹었다. 좋아하는 커피를 빈속에 먹을 수 없어서 아침으로 사과를 먹는 습관을 들였다. 난 내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느니 성가신 걸 하나 더 하고야 마는 사람인가 보다. 바나나도 먹었다. 바나나도 그렇다. 새롭게 들인 취미인 등산 때문에 산에 오르기 전에 하나씩 먹으려고 사놓은 바나나였다. 먹고 나니 오히려 더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잘못 산 프로틴 우유에 시리얼을 한 그릇 말아먹었다. 냉동실에 처박아놓은 감자칩도 함께 먹었다. 이쯤 되니, 난 누굴 기다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 것 같다. 이 무료함을 식욕으로 착각할 만큼.
11시가 지났지만 택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비 때문인가. 적어도 정해놓은 시간은 지켰는데. 내가 시킨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다쳤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길한 생각을 2초정도 했고 다시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난 정말 착하게 살아야겠다. 방안에 갇히는 걸 이렇게 못견뎌하니, 감옥에 들어갈 일을 해선 안 된다. 스트레칭은 매일 하려고 한다. 두 달 전 교통사고 이후로 들인 습관이다. 내 몸과 대화를 하라는 의사의 말을 순순히 잘 듣고 있었다. 어디에 멍이 들어 있는지, 어느 부위의 피부가 좋지 않은지, 살이 붙었는지 근육이 붙었는지 스스로의 몸을 살피는 과정은 재미있고 필요하다. 이런 나를 나르시스트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던 걸 보면, 난 정말 그런가보다.
대망의 12시였다. 아직 택배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당장 급한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일이 있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오니까. 비가 오는 날 외출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남을 더 잘 관용할 수 있게 된다. 남도 내게 그러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점심을 차려먹기로 했다. 계란을 부치고 카레를 데우고 데친 오징어를 그릇에 덜었다. 오랑우탄 같던 아침식사에 비하면 그럴싸한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내놓은 뒤 책 모서리에 휴대폰을 세워 오마이걸 무대 영상을 틀어놓고 밥을 먹었다. 두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 먹어버렸다. 이제 정말 커피를 마시러 나가고 싶어졌다, 고 생각하던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파자마 위에 얼른 외투를 걸쳐 입고 나가보니 기사님이 숨을 헐떡이며 부리나케 사과했다. 키가 작은 여성 기사님이셨는데(일본에 와서 여성 택배 기사와 트럭 운전수가 많은 것을 보고 나도 모르던 내 편견을 깨달은 적이 있다), 나는 기사님을 원망한 적도 없는데 도리어 미안해졌다. 내가 서명을 하는 와중에도 연이어 사과를 하던 기사님에게 구태여 감상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무거운 박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주문한 건 브리타 정수 물통의 필터 여섯 개들이와 2킬로그램짜리 덤벨 한 세트였다. 난 내가 1킬로그램짜리 덤벨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보다 묵직한 민트색 아령 두 개가 나타나 약간 당혹스러웠다. 두 배로 강해져야겠다. 반품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이제 외출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대충 화장품을 바르고 헤어오일을 문지르며 이른 준비를 마쳤다. 사실, 저녁 약속은 7시라 급할 건 없었다. 그냥 약속 시간 전에 커피를 마시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싶었다. 내일 있을 대학원 세미나수업에 앞서 논문을 미리 정리해보기로 했다. 카타야마 선생이 쓴 일본의 플라워데모(미투운동)와 버지니아울프의 작품 속 중절 키워드에 대한 논문이었는데, 가볍게 읽어보려다가 점점 흥미가 생겨 전문을 번역해보았다. 나는 일본의 플라워데모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학자는 학자고 논문은 논문이었나보다. 울프의 작품관에 더 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나는 이 학자들의 해석 방식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서 사원 할인을 받아 커피를 마시며 공부했다. 언제나 친절한 요시마츠 씨가 내 안경을 보더니 안경 렌즈를 맞추었냐고 물었다. 지난주엔가 내가 요시마츠 씨에게 안경 렌즈가 싼 곳을 물었던 것 때문이었다. 덕분에 잘 맞추었는데 요시마츠 씨가 알려줬던 가격의 두 배였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시마츠 씨는 또 그걸 알고 나한테 사과를 했다. 미치겠네 정말. 아니라고, 덕분에 다른 데 보단 싸게 산 거라고 했다. 여하튼 공부도 마치고 약속시간이 되어서 장소를 옮겼다. 2주에 한번 만나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있는 카바자와라는 친구를 만나는 약속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건 재밌다.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건 답답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일기를 다시 읽어본다. 나는 내가 내 이야기를 하는 데에 서툰 사람인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니다. 어쩌면 171小說 프로젝트를 하면서 배운 것도 같다. 누구나의 일상에 빛나는 부분은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도 정말로 그게 가능할까 의심했던 스스로가 설득된 것일 수도 있겠다. 어느 날 이 일기를 그대로 의뢰받게 된다면 나는 어떤 소설로 치환할 수 있을까.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까맣게 잊고 말 것도 같다. 들어오는 길에 오늘밤 달이 컸는지, 둥글었는지 확인하는 걸 잊었던 것처럼.
*월과월과월의 일기로 창작한 소설을 171soseol@naver.com으로 보내주세요! 선착순으로 171小說 프로젝트 굿즈 엽서를 드립니다. 보내주신 소설은 171小說 인스타그램(@171.soseol)에 게재합니다.
월과월과월
매주 월요일(月)에 모여,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넘나들며(越), 문장(문장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 우리말 ‘월’)을 쓴다는 목표 아래 모인 창작 동인이다. 만화 시나리오 작가 강아는 좋아하는 만화와 소설 앞에선 조금 상기되는 편이다. 대학원생 박몽은 동경에 거주중이고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 단 한 해도 학교를 쉰 적 없는 학교 덕후다. 생활체육인 이문경은 책을 만들며 시와 소설을 읽고 쓴다.
2021/01/26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