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the universe
1화 스피리츠
원작 유 은
제작 김예빈
연출 권기봉 신혜원
원화 전수진
동화 오효석
핸드크림이 다 떨어진 날, 나는 우주복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건 그다지 오래 고민한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TV에서는 우주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고 있었고 그 우주인이 처한 상황이 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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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주에 떠서 팔과 다리를 최대한 길게 뻗고 있었습니다. 피겨스케이트 선수처럼 각운동량을 줄여 회전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겠지요. 그런데도 그를 등진 배경은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간간이 보이는 화성에는 방송사의 자그마한 장난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무인 화성 탐사선 스피릿이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멈춰버린 그를 방송사에서 안타깝게 여기기라도 하는 걸까요. 아닌듯합니다. 우주비행사가 후시녹음을 한 것 같은 내레이션에는 스피릿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주는 진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공은 유독하죠. 죽음의 향이라는 게 있다면 진공이 바로 그것일 겁니다. 진공을 마시는 건 숨을 참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감각입니다. 나는 분명히 뭔가를 마시고 있는데 가슴은 오히려 홀쭉해집니다. 더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것 같이 배가 불렀는데도 숨이 막히고, 코와 입은 당장에라도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듯이 꽉 막혀버립니다. 숨을 쉬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몸은 기괴하게 쪼그라들고……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하늘은 맑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치명적인 것들이 떠다닌다는 걸 압니다. 맑은 하늘이 아니라 유독한 하늘입니다. 창을 꽉 닫지 않으면 그들은 당장에라도 집 안까지 파고들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겠지요.
어쩌면 허황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보입니다. 그들은 자주 웃기도 하고 손을 잡고 있기도 합니다. 마스크만 없다면 놀랄 만큼 일상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나는 매일 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록하는데 단 한 번도 똑같은 사람이 이곳을 지나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죽거나 병에 걸려 아프다는 가설은 내 입장에서 꽤 합당한 추론입니다. 이곳이 강남 한복판 같은 번화가가 아니라 대학가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여기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는 철저하게 그런 논리 위에서 행동합니다.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생활은 모두 택배를 통해 해결하고 있습니다. 택배를 받다보면 확실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사실상 사람이나 마약, 흉기 빼고는 뭐든지 갖다주는 게 아닐까요. 물이나 식자재 같은 생필품부터 게임이나 책, 음식, 비누나 손 세정제, 마스크, 핸드크림까지 터치 몇 번이면 문 앞까지 가져다줍니다. 무엇보다도 처음에는 마스크를 택배로 구하는 게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마스크 부족이라는 얘기를 하면 잠꼬대 같은 소리가 되었습니다. 마스크 역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주문하면 몸통만 한 박스에 담겨 옵니다. 덕분에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핸드크림은 명백한 나의 실책입니다. 핸드크림이 한 박스 더 남아 있다고 착각한 탓에 마지막 핸드크림을 쓰고 나서야 내게 핸드크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는 곧 택배를 받기 어려워진다는 걸 뜻합니다. 내가 택배를 받을 때마다 하는 위생 절차 때문입니다.
나는 택배를 받으면 우선 집 밖에서 큰 택배 박스를 열고 집에서 가져온 비닐로 내용물을 덮습니다. 그다음 손을 한 번 씻고 돌아와 비닐을 보따리 삼아 내용물을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거실에 쏟습니다. 그 직후 비닐은 밀폐된 쓰레기통 안에 폐기합니다. 손을 다시 씻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내용물을 전부 여는데, 포장을 열고 내용물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바닥에 꺼낸 뒤 포장을 폐기하고 손을 씻고 돌아와 꺼낸 물품을 소독합니다. 각 물품에 대해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밖에서 들어온 오염된 공기로 인해 집 안에 바이러스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손을 이렇게 많이 씻을 때는 매번 핸드크림을 발라주지 않으면 습진에 걸립니다. 그래서 핸드크림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막상 나는 단 한 번도 습진에 걸려본 적은 없기에, 이 지식은 철저하게 나의 기억-지식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서 엄마는 언제나 내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고 있습니다. 엄마에 의하면 나는 걸음마를 배우자마자 세면대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는데 솔직히 그 말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도 핸드크림이 내 손에 닿는 감각이 이토록 좋은 것을 보면 적어도 내 몸에 핸드크림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여하튼 중요한 건 핸드크림이 없으면 저는 택배를 받기 매우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주복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핸드크림 없이도 택배를 받기 위해서.
우주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우주복에서 중요한 것은 공기가 드나들지 않게 완전히 밀폐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택배를 받을 수 있었더라면 완성된 우주복을 구매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재료조차 살 수 없어서 집에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고민 끝에 집에 있는 비닐을 녹여 붙여서 온몸을 감싸는 점프수트를 만들었습니다. 발에는 조그만 보라색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얼굴이 보이지 않게 머리에는 검은색 편의점 봉투를, 팔과 다리에는 심심할 때마다 하려고 모아둔 에어캡을, 몸통에는 택배를 받을 때 쓰는 대형 비닐을 사용했습니다. 비닐을 녹일 때는 고대기를 썼고 이로써 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입니다. 비닐을 녹인 고대기로 머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설상가상으로 비닐을 녹이니까 고약한 냄새가 나서 미치도록 환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비닐 탄 냄새가 코로나보다는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꾹 참았습니다. 마스크가 없었다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우주복은 처음엔 얼굴까지 다 덮는 형태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들면 사람이 질식사할 수도 있겠다는 걸 나는 입어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덕분에 기껏 만든 우주복은 머리 부분을 중심으로 찢겼습니다. 왜 우주비행사들이 머리에 어항 같은 걸 쓰고 있는지 몸소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싶어서 사용한 검은 봉지로는 밖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집에 머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유리통 같은 건 없어서 나는 고민 끝에 작은 비닐우산을 뚜껑처럼 사용해 우주복을 만들었습니다. 철심에 자꾸 머리카락이 걸려서 고생을 조금하다가 어찌저찌 우산살만 남기고 나머지는 분해해버렸습니다. 또한 산소통은 없었기 때문에 마스크를 대신 사용해 정화된 바깥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알록달록하면서도 투박한, 말하자면 지구 전용 우주복이었습니다.
우주복을 처음 입은 순간 나는 그것이 내가 앞으로 입어야 할 옷이라는 사실을 곧장 깨달았습니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비닐이 조금씩 몸에 밀착되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우주복은 오히려 홀쭉해집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두번째 피부처럼 내 몸을 부드럽게 감쌌습니다.
인생 처음 느끼는 편안함이었습니다. 나는 까무룩 잠들어버렸습니다. 불면증까지는 아니어도 잠을 곤히 자지 못하는 편이었던 저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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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니 세상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하늘이 뿌옇고 칙칙해서 꼭 불길한 예감 같았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시종일관 똑같이 어둑어둑했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렸는데 어찌나 세차게 내리던지 창밖으로 행인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감히 묵시록적이라고도 할 법한 풍경이라고나 할까요. 이상한 이야기지만 하늘에서 악마가 강림한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창밖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푹 자서 그럴까요, 꽤 오래 깨어 있었던 것 같은데도 전혀 졸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풍경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습니다. 동시에 거리가 온통 비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묘한 공포감을 주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끝장이라는 표현을 떠올리자 빗줄기가 반짝였습니다. 해가 다시 드는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빗방울들만 변한 것이었습니다. 그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내리고 있는 건 비가 아니었습니다. 별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유리처럼 연약한 별이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서졌습니다.
죽음의 향이라는 게 있다면 진공이 바로 그것일 겁니다, 하는 우주비행사의 말을 떠올리고 있을 때 나는 무언가 아스팔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건 이미 우주에서 멈춰버린 스피릿이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별과 함께 지구 위로 떨어져내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서지지 않은 게 용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스피릿에게 시선을 주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무인탐사선이 나는 유독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의 삶이 성공도 실패도 없이 그저 주어진 것을 하다가 멈춰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을 마감하고 아주 멈춰버린 채로 지구로 돌아온 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일지 나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 별을 맞으며 달렸습니다. 나는 우주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별을 맞아도 괜찮았습니다. 별이 내 머리 위에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분명히 강렬하게 별을 맞고 있는데도, 그래서 몸이 따끔따끔한데도, 사실 내 몸에는 비가 닿고 있지 않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상하지만 견딜만한, 어쩌면 조금은 상쾌할지도 모를 감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달려서 나는 쓰러져 있는 스피릿 바로 앞에 섰습니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스피릿, 그는 아주 느린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선뜻
선뜻은 문학을 ‘먼저’ ‘뜻깊게’ 알리고자 하는 집단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모인 다섯 명이 한국문학의 미디어 트렌지션을 고민하며 현재의 형식보다 문학을 친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고민합니다.
작가, 배우, 성우, 감독, 연주가, 작곡가, 디자이너, 아트디렉터, 경영가, 개발자, 설계사 등 다른 이름을 가진 5인 안의 끝없는 가능성을 기대해주세요.
2021/07/27
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