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연금 실습
2화 수소(H)
백지에서 시작하자.
온갖 색채와 명암이 예외 없이 누락된 공간.
넓은 화면 어디에나 백색 포자 같은 안개가 내려앉아 있다.
자실체가 빽빽하게 자라난 구상균에 늑막을 눌리는 가운데
질식당한 허파들로 쌓아올린 무덤이 여기에 있다.
공백의 몸.
침묵은 공기가 흐르는 길목마다 결석처럼 형성되기에,
빙설보다도 창백한 공란들은 시종일관 염증으로 부풀어 있다.
이른바 음향학적 폐색.
안쪽으로 오므려 쥐는 손가락 하나 없이
스스로 목 졸려 죽어가는 동안―
아주 작은 흑반 하나가 낭종처럼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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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점에서 시작하자.
3밀리미터 크기의 구(球).
아니, 3밀리미터 크기의 구(口).
주름 없는 공간에 구멍을 뚫고 나타난 최초의 평면 도형은
전자식 판서 시대의 문필가들이 사용하는 마침점 혹은
열기/닫기 구분이 없는 ASCII식 아포스트로피(U+0027)와 위상학적으로 일치한다.
하나의 점 혹은―
하나의 입이 음소를 빚어내는 동작으로 씰룩거릴 때,
가장 먼저 구강 깊숙이 삼켜진 재료는 수소였을 것이다.
백지 위에 잠들어 있는 원소들 가운데 가장 가볍기 때문이다.
색도 냄새도 없는 주제에 점막을 자극하는 기체 원소는
로고스의 목구멍을 간질여 아래와 같이 말하게 하였을 것이다.
빛이 있으라!
그러므로 가장 처음 발성된 목소리는 기침 파형의 파열음이었다.
이로써 1바이트 용량의 음소들이 섬전암처럼 백지 위로 튀어나오며,
서로 다른 귀퉁이로 뻗어나가 듀테리움으로, 트리튬으로 융합될 것이다.
다시 말해,
파열음의 잔해들이 아직도 우리 머리 위에서 공전하며
오리온자리에서는 베텔게우스로,
센타우르스자리에서는 알파 센타우리로,
마침내 어느 별 볼 일 없는 항성계에서는 태양으로 이름 불린다는 사실.
시인들은 알고 있다.
우리 목소리가 단지 로고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렇기에 지금 이 텍스트처럼
끊임없이 행을 바꾸거나 비우면서 시를 쓰는 것이다.
어느 오래된 종교 서적에 따르면,
모든 문장은 빛에서 왔고 빛으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들은 가까이 붙여놓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그러나 동시에 끊임없이 당기는 힘도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날아가버리고 말 테니까.
모든 문필가는 찾아야만 한다.
글줄 사이에 숨어 있는 라그랑주 점을.
지금 내가 이 텍스트를 끊임없이 공전시키고 있듯이.
그러지 않으면 누구든지 붕괴 중인 적색 거성으로 빨려들어가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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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이야기 하나 :
아주 먼 옛날, 아나톨리아 지방을 다스렸던 리디아 왕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헤라클레스 왕조의 23대 왕 칸다울레스는 수많은 양들을 재산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왕은 그를 대신해 가축을 돌보아줄 목동들도 무수히 거느렸을 것이다.
기게스는 그런 목동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언제나처럼 양을 치던 기게스는 난데없이 지진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지진으로 벌어진 땅속에서 동굴을 발견하였는데,
그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동굴 안에서 기게스는 죽어 있는 거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거인은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기게스가 그것을 빼내자 기게스의 손가락 굵기에 알맞은 크기로 줄어들었다.
기게스는 이 수상쩍은 보물에 정신이 팔려 며칠이나 양을 돌보지 않았다.
얼마 후, 왕의 군인들이 기게스를 잡아들이기 위해 들이닥쳤다.
기게스는 몸을 감출 요량으로 낮게 엎드린 채 가구 사이를 기어다녔는데,
그러다가 반지로 바닥을 긁게 되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반지의 둘레가 회전함과 동시에 기게스의 몸이 사라졌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유물을 손에 넣게 된 기게스는 곧장 궁전으로 숨어 들어갔다.
목동이 왕을 암살한 뒤, 새 왕조의 초대 왕좌에 스스로를 앉히는 순간이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 πολιτεiα』를 빌어 말한다.
누군가 결과를 책임질 필요 없이 행동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 일화에서 배워야 할 것은 따분한 교훈이 아니다.
예컨대, 빛을 어떻게 굴절시킬 것인가?
또는,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까지 숨길 것인가?
지금 내가 이 공란에 기게스를 적으면 기게스가 되살아나고,
기게스를 지우면 기게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듯이.
최초의 목소리,
이른바 로고스의 기침을 디코딩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성이 아니라 소멸을 지시하는 것이다.
수소 에너지의 총합 : 엔트로피를 붕괴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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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이야기 둘 :
나중에 엠페도클레스는 주장할 것이다.
세상이 4원소―바람과 불, 물,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류가 오랫동안 망자를 장사 지내온 방식을 보라.
생명을 얻은 것은 무엇이든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믿음에 따라,
죽은 인체는 풍장되거나, 화장되거나, 수장되거나, 매장되어 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최초의 목소리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죽음과 동시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구 결빙된 침묵만이 존재하는 장소.
다시 백지에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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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이야기 셋 :
코펜하겐대 생명공학 연구 혁신 센터의 스호러 이사자더-나비카스 교수 연구팀의 발견.
알츠하이머병과 함께 치명적인 퇴행성 뇌질환으로 분류되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
파킨슨병의 발병 원인이 밝혀지다.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를 처리하는 신경 신호가 망가진 결과,
중뇌 흑질에 방치된 단백질 폐기물이 뉴런들을 하나하나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다.
지금 바로 의료용 촬영기기를 한 대 빌릴 수 있다면,
고령자, 특히 퇴행성 뇌질환 환자 한 명을 그 밑에 데려다놓고 싶은데,
예컨대, 운동 완서와 근육 강직을 호소하는 우리 할머니의 두뇌는 어떨까.
특수한 조영제만 있다면,
뉴런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화학적 그림자를 남길 수도 있겠지.
사멸하는 세포들의 사체에 가려져
천천히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불빛들을 비출 수 있겠지.
그녀는 오래 살았고,
동세대 인간들의 느릿느릿 반짝이는 바이탈 비트가 하나둘 암흑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 일을 질리도록 지켜보았겠지.
인간은 죽음 앞에서 가장 정직해진다는 말마따나
주위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어땠을지에 관해서도
유의미한 통계 자료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먼저 떠난 동료 하나하나를 죽음 앞에 부쳐진 부기 노트처럼 취급하는 마음.
담담하게.
죽음이 다가올 때는 앞선 사례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천체물리학자들은 설명한다.
우주는 매일 조금씩 더 어두워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주는 파킨슨병을 앓는가?
마지막 남은 항성이 마지막 남은 수소마저 다 태우고 나면
우주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백지에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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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점이 있다.
하나의 입이 있다.
만물은 언제나 행간 안에 잠들어 있다.
온갖 색채와 명암이 예외 없이 누락된 공간.
가장 가벼운 기체 원소 또는 공백의 몸으로.
백지에서 시작하자.
※ 참고 자료 : 한기천, 〈세계 1천만 명이 앓는 파킨슨병, 마침내 발병 원인 밝혀냈다〉, 연합뉴스 2021년 07월 10일 기사 [바로가기]
작업 노트 2. H를 H²으로 융합시킨 결과
H : 어느 해식 동굴에서 시작되는 충격과 운동의 리듬.
H : 시작과 끝이 동시에 비추어진 순간의 기록.
보이스엔진
문학을 통해 자신의 선율을 써내려온 소설가 신종원과 음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온 음악가 최혜리. 최초의 음성을 모방한다.
2021/08/10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