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_역에서
2화 ─에게
Dear ─
Donika Kelly
I am neither land nor timber, neither are you
ocean nor celestial body. Rather,
we are the small animals we’ve always been.
Land and sea know each other at the threshold
where they meet, as we know something of one
another, having shown, at different times,
some bit of flesh, some feeling. We called the showing
knowing instead of practice. We said,
at different times, A feeling comes.
What is the metaphor for two animals
sharing the same space? Marriage? We shared
a practice, a series of postures. See
how I became a tree [ ],
and you [ ] a body in space?
─에게
도니카 켈리
난 땅도 목재도 아니고, 너도
바다나 천체는 아니지. 오히려,
우리는 작은 동물들 우리가 언제나 그래왔듯.
땅과 바다는 서로를 문턱에서 알게 되잖아
그들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가 서로의 무언가를
알게 되듯이, 서로 다른 시간에, 드러내온
조금의 살, 어떤 느낌을. 우리는 이 드러냄을
알아가기라 불렀지 습관 대신. 우리는 말했어,
서로 다른 시간에, 느낌이 온다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두 동물을 위한
은유는 무엇일까? 결혼? 우리는 공유했잖아
어떤 습관, 그 일련의 자세들. 보렴
나는 어떻게 한 그루 나무가 되었고 [ ],
너는 어떻게 [ ] 우주 안의 몸 하나 되었는지를?
안녕, 오늘은 켈리의 시 한 편을 보낸다. 「─에게」 라는 제목의 시야. 켈리의 두번째 시집 『단념들 The Renunciations』에는 열세 편의 「─에게」 시가 실려 있고 이 시는 시집의 세번째 장, 그러니까 중간쯤 실려 있어. 읽어보니 어때? 고개를 갸웃거릴 네 모습이 선하다. 한 번에 잘 읽히지는 않지. 마지막 연의 빈칸도 당황스럽고 말이야. 「─에게」 시들에는 빈칸이 많아. 시인은 이 빈칸, 삭제된 공간을 지우개의 공간이라고 설명하더라. 한 인터뷰1)를 읽어보니 이 시들은 켈리가 가정 폭력 트라우마 심리 상담을 받으며 쓴 ‘진짜’ 편지들이래. 누군가를 생각하며 쓴 편지이지만 부치지 않은 편지들이지. 부치지 않을 거라서 오히려 그 안에 무슨 내용이든 담을 수 있었다고 해.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편지에 빈칸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빈칸은 나중에 켈리가 동료 시인 개비 칼보코레시(Gabby Calvocoressi)의 워크숍에 참여하면서부터 만들기 시작한 거래. 칼보코레시가 이미 쓴 글에 삭제된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켈리는 부치지 않은 편지들이 생각난 거지. 그때부터 켈리는 편지들을 다시 쓰는 작업에 열중했대. 그리고 지우면서 깨달았대. “나 여기에다가 나에게 편지를 쓴 거구나. 사실 누군가에게 주려고 한 게 아니었어. 나를 위한 것이었지.”라고. 그렇게 켈리는 편지에 빈칸을 만들면서 삶의 중심을 다른 이에게서부터 자기 자신으로 조금씩 옮겨갈 수 있었대. 자신을 위한 글쓰기를 시작한 거지.
이 시가 오늘 너의 하루에 작은 빈칸이 되길 바라며. 총총.
주주 : 이번 시 어떠셨어요? 저번 시보다 어렵지 않았나요.(웃음)
정민 : 어려웠어요.(웃음) 하지만 흥미로운 지점도 많았어요. 「─에게」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번 작품은 편지 형식을 띠잖아요. 편지는 주로 아끼는 사람에게 공을 들여 쓰는 글이고요. 저는 편지를 쓸 때 완벽하게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여분의 편지지를 준비해놓고 먼저 한번 써보고, 그다음에 옮겨 적거든요. 맞춤법 실수나 오래 고민한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요.
해동 : 저도 읽으면서 편지라는 형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저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부터 편지는 많이 안 쓰게 되었는데요. 특별한 날 애인에게 카드를 쓰는 정도? 그래서 가끔 편지를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아요.
주주 : 켈리의 시도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는 다정한 말이죠. 그 점은 번역할 때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딱딱한 문어체 말고 부드러운 구어체를 활용하는 식으로요. 이번 시에는 “know” “said” “shared”와 같은 동사들이 나오는데, 이에 종결어미 ‘하다’보다는 “알게 되잖아” “말했어” “공유했잖아”와 같은 번역어가 더 어울리네요.
아선 : 다정한 편지인 만큼 구어체로 번역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해요. 그리고 이 시가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영미시 전통의 편지글 형식으로 쓰인 서간시(Epistolary poem) 장르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어요.
해동 : 전통적인 서간시에는 받는 이가 특정된 경우가 많잖아요.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이 오르몬드 공작부인에게 쓴 시나,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엘로이자가 아벨라르에게 Eloisa to Abelard」처럼요. 드라이든과 포프의 시처럼 보내는 이, 받는 이의 위치를 명확히 할 경우, 매우 사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전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서정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와도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지민 : 현대에는 훨씬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서간시들이 많죠. 이 시도 그렇고요. 그 점을 고려하며 이 시를 읽을 때 중요해지는 건, 받는 이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을 때 드러나는 효과인 것 같아요.
아선 : 우리가 이번 프로젝트 연재를 기획할 때 다섯 개의 키워드(여성, 퀴어, 장애, 이주, 공동체)를 꼽았고, 각 키워드에 어울리는 시를 한 편씩 다루기로 했잖아요. 이 시는 퀴어라는 키워드를 염두에 두고 선정했고요. 선정한 이유에는 켈리가 스스로 당당하게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시인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 시 자체에서도 퀴어함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오늘 이 퀴어와 퀴어함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 좋겠어요.
그런 맥락에서 말씀드려보자면, 저는 이 시가 받는 이를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일반적인 편지가 띠는 프라이버시를 전복시키면서 퀴어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전복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이 편지의 의의를 생각해봤을 때 ‘퀴어성의 보편화’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퀴어한 게, 더이상 퀴어하지 않은’ 세상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요.
주주 :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켈리가 이 시를 통해 퀴어함을 별난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그린다고 읽었어요. 4연에서 화자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두 동물을 위한 / 은유”를 찾는데, 이때 ‘결혼’은 화자가 선택하지 않고 쓱 넘어가는 선택지 중 하나잖아요.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 단어가 잘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쿨하게 다른 단어를 찾아 나서는 거죠. 물론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이 부분이 다르게 와닿을 것 같아요. 켈리가 사는 아이오와주는 2009년에 동성결혼 합헌 판결을 내렸고, 2015년 연방 대법원 판결 이후 이제 미국은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이 가능해졌으니까요.
지민 :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 줄다리기를 생각하다보니 3연과 4연에 나온 “practice”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감이 조금 잡히네요. 이 단어는 주로 ‘관행’ ‘관습’ 혹은 ‘습관’ 등으로 번역이 되는데, ‘우리’ 사이를 드러내고 공유하는 무언가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사회 구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풍습이라는 뜻이 강한 ‘관행’이나 ‘관습’보다는 두 사람 사이 반복되어 몸에 익은 ‘습관’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아요.
지민 : 이 시의 퀴어함에 대해 말한다면 마지막 연에 있는 커다란 빈칸을 빼놓을 수 없죠. 이 시에서 빈칸은 초대의 공간인 것 같아요. 누구든, 무엇이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주주 : 맞아요. 읽으면서 빈칸에 여러 단어를 집어넣어 보게 되더라고요. 부사도, 제목에서 지워진 받는 이의 이름도 넣어볼 수 있고요.
정민 : 저는 빈칸을 보고 “편지라면 어설픔도 무기가 된다”(手紙なら、不器用さも、武器になる)라는 일본 우체국 광고 카피가 떠올랐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게 편지는 완벽하게 쓰고 싶은 장르인데, 켈리의 편지-시에는 큼직한 빈칸이 뚫려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요. 미완성인줄 알고요.(웃음) 그런데 여러 번 읽으면서 빈칸이 열어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편지야말로 ‘나’와 읽는 이 모두에게 유연한 매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해동 : 그러고 보니 빈칸을 채워나가는 동력이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있네요.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삭제한 말들이 존재하지만, 독자는 읽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그 빈칸을 채우니까요.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새로운 시가 탄생할 수 있겠어요.
지민 : 반복되는 문장 구조를 염두에 두면 각 행의 빈칸은 a tree [in space] / you [became] a body in space, 즉 ‘공간’과 ‘되기’의 몫으로 남겨진 자리처럼 보이기도 해요. “땅”과 “바다”가 “그들이 만나는 곳에서” 그 마주침의 순간에서 서로를 알게 되는 것처럼,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우리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살을 부딪히는 물리적인 접촉의 순간에 있다고 시인은 말하는 것 같아요.
아선 : 아까 퀴어 관련해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잖아요. 이 빈칸이 기능하는 방식도 내 존재의 특별함과 보편성을 동시에 확인하려는 욕망들, 그 욕망이 움직이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지민 : 켈리가 2017년 12월 Foglifter 잡지 인터뷰2)에서 “퀴어는 (…)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Queer (…) means being in the body)라고 말한 적이 있더라고요. 그런 욕망들이 움직이는 시공간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는 “은유”일 뿐, 우리의 순간이 될 수 없는 거죠.
주주 : 욕망을 중심에 두고 읽으니 ‘우리’의 ‘되기’가 보다 명확하게 읽히네요. 마지막 연은 첫 연의 이미지를 다시 쓰고 있기도 하잖아요. ‘나’는 목재가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고, ‘너’는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 천체가 아니라 “우주 안의 몸 하나” 되었다고 하니까요. 켈리가 시를 전개하면서 너와 내가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존재라는 점을 차근차근 짚어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저 번역 고민이 하나 있어요. 첫 행의 “timber”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우선 ‘목재’라고는 했는데, 번역만 읽으면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어요.
아선 : 영어에서도 ‘timber’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잖아요. 만약 시인이 ‘숲’이라고 쓰고 싶었다면 ‘forest’ ‘wood’ 등 다른 선택지가 많았을 거예요. 하지만 어색한 느낌이 있으니 조금 더 고민해봅시다.(웃음)
해동 : 저도 나무, 숲 등 여러 번역어를 놓고 고민했지만 ‘목재’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timber’라는 단어의 어원을 검색해봤는데 고대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짓다’ 또는 ‘집’을 뜻하더라고요. 건축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재료로서의 나무를 뜻하는 단어니까 ‘목재’라는 번역이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지민 : 저는 번역하기 막막한 단어를 만나면 구글 이미지 검색을 해보는데요. Timber를 검색하면 목재가 가득 쌓여 있는 숲의 이미지가 제일 먼저, 가장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효용이 있는 것들, 해동의 말처럼 건축 등을 목적으로 하는 재료가 널린 자연 공간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휴, 그런데 ‘목재’라는 번역에는 그 공간의 이미지가 다 담기지 않아 좀 아쉽네요!
아선 : 1연에 제시된 시어들을 생각하면 켈리가 “우리”의 만남을 자연물을 갖다 쓴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어요. 특히 퀴어와 관련해서요. 왜냐하면 ‘queer’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명사로서 특정한 성적 정체성보다 형용사로서 ‘괴상한’ ‘의심스러운’ ‘기분이 개운치 않은’ 등 부정적인 정의들이 먼저 나오잖아요. 이 정의들에는 ‘자연스럽지 않다’라는 뜻이 공통으로 들어 있죠. 그래서 저는 이 시가 자연물을 활용하는 방식이 흥미로웠어요. ‘나’와 ‘네’가 맺는 모종의 관계를 자연물을 경유하여 드러내니 ‘우리’ 관계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져요.
해동 : 켈리는 자신의 인종과 성적 정체성을 작품에 주요한 문제의식으로 녹여내는 시인이잖아요. 2016년에 첫 시집 『우화집 Bestiary』을 낸 뒤 진행한 인터뷰3)에서도 관련된 고민과 깨달음을 털어놓은 게 기억이 나요. 『우화집』에 시를 어떤 순서로 배열할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몇몇 시를 다시 살펴보았는데, 이 시들이 시인 스스로 하기 어려웠던 말, 자신이 흑인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고요. 작가가 어떤 문제의식에 몰두하고 있는지 고려하면 이 시의 ‘우리’에서도 좁은 의미인 성적 정체성으로서의 퀴어함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민 : 맞아요. 하지만 좁은 의미의 퀴어와 보다 넓은 의미의 ‘퀴어함’을 구분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작가를 잘 모르고 읽었는데도 이 시가 충분히 퀴어하다고 생각했거든요.(웃음)
정민 : 사실 저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키워드가 ‘퀴어’인 줄 몰랐어요. 읽기 전에 다른 자료를 참고하지 않아서 더 그랬나봐요. 제게 이 시는 그냥 좋은 시 한 편으로 다가왔거든요. 물리적인 빈칸도 있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잠시 머무르며 독자 혼자 생각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좋은 시라고 생각했어요.
주주 : 이번 시는 읽자마자 ‘아, 퀴어 시네!’라는 느낌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적 정체성으로서의 퀴어를 중심 소재로 다룬 현대시들을 떠올려보면 「─에게」보다 육체성을 전면에 드러낸 작품들이 먼저 생각나니까요.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시처럼요. 섹스 장면을 구체적으로 담은 시도 많고요.
지금 우리가 당장 ‘퀴어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답을 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저는 시인이 퀴어라고 해서 그의 모든 작품이 퀴어 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시인이 규범적 지식, 관습적 지식을 어떻게 대하는지, 독자에게 얼마만큼 생각할 자리를 내어주는지도 봐야죠. 그러니까 저는, 잘 쓴 시는 모두 어느 정도 퀴어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이 시는 그런 면에서 퀴어하기도 하고요.
아선 : 모든 잘 쓴 시는 퀴어하다! 슬로건으로 만들면 좋겠는데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