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0. 지금까지 뭐 했지?


   리뷰 뭘까?
   리뷰모구모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1화와 2화를 거쳐 ‘리뷰 뭘까?’ 하는 질문은 이렇게 구체화되었다.


   “리뷰는 원본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가?”
   “원본으로부터 멀어진 리뷰는 어떤 반응을 생성할 수 있는가?”
   “우리는 리뷰로 대화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둘러싸인 리뷰모구모구의 마음을 사로잡은 전시가 있었다.




무대 디자이너 페터 팝스트는 예술적 동지였던 무용수 피나 바우쉬를 회고하며 WHITE(소금밭), RED(장미 언덕), PINK(카네이션 들판), GREEN(옥상 정원)을 테마로 한 무대 공간을 구성, 관객들을 초대했다. 피나 바우쉬의 대형 공연 사진들이 회전하는 방식으로 전시된 사진의 방은 촬영이 불가했다.


   “무대라는 공간이 춤, 무용수에 대한 리뷰가 될 수 있을까?”

   리뷰모구모구는 piknic에서 진행된 전시 〈페터 팝스트 : WHITE RED PINK GREEN ―피나 바우쉬 작품을 위한 공간들〉을 독일의 안무가 피나 바우쉬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한 페터 팝스트의 ‘무대 리뷰’로 해석했다. 춤을 추는 친구 재은을 게스트로 초대하여 함께 전시를 관람했다.


   Q1. 전시를 어떻게 보았나?


   주네 : 전시는 4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무대는 나무, 소금, 풀, 꽃 등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었다. 시각적 요소가 풍성해서 보기에 좋았지만 그곳에서 움직여야 하는 무용수의 입장에서는 장애물로 여겨질 것 같았다. 그런 무대 위에서 춤을 출 때 장애물은 무용수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까? PINK 섹션의 카네이션 ‘위로하기’1) 라는 퍼포먼스는 장애물과 무용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처럼 보였다. 각각의 장애물은 단순히 움직임을 제한하는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고 무용수의 움직임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페터 팝스트가 만든 무대 위에 펼쳐지는 피나 바우쉬의 안무는 어떤 몸짓이었을까? ‘사진의 방’에서 제자리를 회전하며 움직이는 양면의 사진이 구현하는 순간의 동작들이 이 궁금증에 답을 해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처럼 내리는 물을 맞으며 상승하는 듯한 역동적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장미꽃 언덕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는 무용수들. 그들의 몸짓은 쏟아지는 물, 꽃 무더기와 상호작용하며 텅 빈 무대였다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색다른 감각을 연출한다. 시각, 청각, 그리고 충분히 상상 가능한 촉각적 느낌으로.

   시루 : 규격 안에서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모순적이지만 불가능한 말은 아닌 것 같다. 특히 회전하는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이 돌아가자 서로 다른 풍경과 풍경이 면을 맞대면서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사진이 돌아가면서 공간의 분할이 달라지고 사진의 양면들, 면면을 구성하는 장면이 매 초마다 달라졌다. 우리는 모두 각자 흩어져서 걸었는데 면을 맞댔다가 떨어지는 사진의 벽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 찍히듯 눈에 박혔다. 동시에 공간을 구성하는 사진이 회전할 때마다 포착되는 장면 자체가 달라졌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정적이었던 상태가 다시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남자가 알몸으로 지팡이를 쥐고 있는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그 사진을 보면서 ‘사진 이미지로서의 몸’이 환기하는 육체성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육체가 주는 가장 직관적 감각이란 촉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실물이 아닌 사진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보는 ‘몸’은 사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통해 몸의 냄새, 온기, 촉각적 감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진’이라는 시각적, 정적 감각으로부터 피부에 맞닿는 감각으로 확장되는 역동적 경험이 일종의 육체적 해방처럼 느껴졌다.

   재구 : “나는 항상 그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었고, 그들은 무대를 이어받아 나를 해방시켰다.” 전시관 옥상에 전시되어 있던 페터 팝스트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빌려 협업 그리고 해방의 관점에서 전시에 대해 말하고 싶다. 협업은 서로를 가장 강력하게 구속하는 일인 동시에 가장 자유롭게 해방시켜줄 수 있는 방법이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협업에서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협업자가 나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공동의 작업물을 발전시켜가기도 한다. 이를 지켜볼 때 나는 커다란 영감과 함께 해방감을 느낀다. 무대를 만드는 페터 팝스트 또한 자신의 의도를 배반하며 무대를 운용하는 무용수를 보며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무대는 그 자체로 무용수에게 구속의 공간이지만 구속이 있기에 해방 또한 존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속을 우리는 어떻게 해방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이는 리뷰에도 적용되는 질문 같다. 리뷰는 원본과의 협업이다. 그래서 원본에 구속되지만, 리뷰는 원본의 손을 잡고 그것을 창작자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차원까지 데려갈 수 있다. 구속을 명확하게 인지한 채 그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보고자 하는 힘으로 리뷰는 해방을 창조할 수 있다.

   재은 : 나는 코리오그래피 그리고 힙합 장르의 춤을 추는 스트리트 댄서다. 스트리트 댄스는 파티 문화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이론이나 동작보다 즉흥, 자유로운 표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전시를 보며, 모든 춤이 결국 무대, 음악이라는 제약에 항상 묶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음악에 완벽하게 맞추면서도 음악을 넘어서고 싶다는 모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그를 몸짓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재은의 몸짓-리뷰(인스타그램 @u__jennie)


   Q2. 나는 언제, 왜 ○○○이라고 생각하나?


   〈페터 팝스트〉를 보면서 페터 팝스트의 무대 디자이너로서의 자각, 피나 바우쉬의 무용수로서의 자의식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에 리뷰모구모구는 스스로 자기가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떠한 경험으로 구성되었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자 일종의 ‘자기’ 리뷰이지 않을까?

   -시루, 평론하는 사람
   이 프로젝트를 왜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과 관련지어볼 때 나를 지칭하는 많은 단어 중 ‘평론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사람들이 왜 문학을 읽을까, 문학을 쓸까, 문학을 좋아할까 하는 것이 너무나 궁금한데 이 ‘궁금함’이 내가 문학(을 하는 사람)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동력인가 하고 생각해본 적 있다. 나는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 얼마만큼 다층적인 이유로 다양하게 드러나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평론도 무엇에 대한 ‘반응’일 텐데. 나는 무엇에 대해, 왜,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 그것에 가장 골몰하도록 만드는 활동이 평론 쓰기이고 이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결국 이 프로젝트도 내가 무엇을 왜 궁금해하는가에 대한 반응을 살피기 위한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무엇을 쓸 때 주로 괴롭다. 하지만 이것이 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반응 중 하나라면 ‘평론가’로서 뭔가를 수행할 때 가장 이 질문에 골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구, 서른
   이전의 나는 늘 세계에 뒤덮여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타인에 의해 내가 함부로 잘려나가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서른이 되면서 나는 세계, 타인에 의해 내가 정의, 규정되는 일, 자주 오해받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과 나 사이의 교집합을 더듬어보려고 노력한다. 절대 확정될 수 없는 나라는 범위를 무책임을 무릅쓰고 무한정 확장해보려고 한다. 실제로 서른에는 내가 군데군데 나 같은 것들을 뭉쳐놓으면, 그들을 “언니” 하고 부르며 꺼내주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서른의 나는 그 모두를 나의 일부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타인에게 그 사람이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에 대해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서로를 마음껏 오해하고 그 부분을 호명해보는 용기, 거기서 끝내지 않고 거듭 오해할 것을 알면서도 다만 오차를 줄여보려는 정성. 서른의 나는 그것이 내가 부정되는 방식이 아니라 다만 나를 넓혀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다. 피나 바우쉬와 페터 팝스트가 서로를 서로의 영역으로 밀고 당기며 각자의 예술의 자리를 확장했듯이, 우리는 서로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 서로를 통해 더 넓어질 수 있다.

   -주네, 휴학생
   올해의 나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인 것 같다.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것이 어렵다. 상태의 전환이랄까, 빠릿빠릿하게 하지 못한다. 학교라는 장소에 있는 동안 내 자의식은 항상 ‘학생’이었다. 계속해서 수업을 들었고 학교 내에서 하는 일 이외의 다른 것을 시도하지 못했다. 지금 나는, 휴학생이다. 수업을 듣고 있지도 않고 이렇게 다른 길로 나와 보았다. 현재 하고 있는 리뷰모구모구는 반 년 정도의 프로젝트이지만 휴학생인 나를 가장 잘 자각하게 해준다. 리뷰모구모구의 주네, 휴학생. 첫 연재, 첫 원고 게재. 나름 신선하고 매우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


   다음 화 예고


   리뷰모구모구는 지금까지의 협업을 바탕으로 각자의 ‘리뷰’를 도모하고자 하는데…… 그 첫 시도로 지금까지의 리뷰에 대한 주네의 리뷰를 선보인다!

   주네, 「리뷰노트 : 리뷰모구모구의 이미지들」


리뷰모구모구

시를 쓰고 미래를 상상하는 재구, 리뷰를 많이 쓰고 의문을 던지는 시루, 덕질을 하고 대화를 중재하는 주네.

2019/10/29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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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섹션의 무대 공간 바닥에는 움직이다가 건드리면 철사가 꺾이는 조화 카네이션이 가득 꽂혀 있었다. 누군가의 움직임에 의해 카네이션이 꺾였을 때 그것을 바로 세우는 것을 “카네이션 위로하기”라고 부른다. 이 퍼포먼스는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무대에서 비롯되었고 이번에 우리가 다녀온 전시에서도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