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_역에서_영어는

      ESL
       Muna Abdulahi

      I watch her mouth move, and I stumble over
      the makings of her sound to get close to her.

      I’ve lost all my favorite tusbax and scarves
      in rooms half lit & full of vowels touching teeth.

      The twisting of the tongue means nothing here.
      I listen to my voice while another grasps for dinner.

      I speak and eyes widen long into the night. They stretch their
      necks closer to god in hopes that translation will reach them.

      Will reach me. I borrow the sounds of eyebrows, skin, & hands
      to guide me. Turning language into a soft body I can talk to.

      Hooya says to be careful with this tongue. To let it
      consume you is to carry ghosts in every sentence.

      Yet, I watch the books that passengers hold onto on the metro.
      What language do they carry? Which one will I spill into tonight?

      Now I only dream in English. I do not recognize my own voice.
      I open my mouth and it carries no perfume of the people before me.

      English tucks my children in at night, cradles them into rest, into
      being. It carries my heavy body into tomorrow & asks for everything

      in return. I watch my mother’s mouth move in prayer.
      I let it consume the folds in between my eyes and hands.

      She demands me to speak in our native language.
      Yet, my tongue curls into a stutter, unable to resurrect

      words that were left outside all day with no one to carry them.



번_역에서_한국어는

      ESL1)
       무나 압둘라히

      나는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가까워지려고
      그녀의 소리가 만들어내는 것들을 더듬거린다.

      반쯤 빛이 든 & 치아를 건드리는 모음들로 가득 찬 방들에서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타스비흐2)와 스카프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여기서 혀를 굴리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또다른 목소리가 저녁 식사를 붙들고 있는 동안 나는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말하고 눈들은 밤이 깊도록 커진다. 신을 향해 더 가까이 목을 늘이며
      번역이 그들에게 닿기를 희망하며.

      나에게도 닿기를. 나는 나를 인도해줄 눈, 피부, & 손의 소리들을
      빌려온다. 언어를 내가 말 걸 수 있는 하나의 부드러운 몸으로 바꾸며.

      후야3)는 이 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너를
      소진하도록 두는 것은 모든 문장마다 유령들을 지고 다니는 거라고.

      그러나, 나는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붙들고 있는 책들을 본다.
      그 책들은 무슨 언어를 지고 다닐까? 내가 오늘 밤에 빠져들 것은 어떤 언어일까?

      이제 나는 영어로만 꿈을 꾼다. 나는 내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입을 벌리고 그것은 내 이전의 사람들의 향기를 전하지 않는다.

      영어는 밤에 내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그들을 쉴 수 있게,
      존재할 수 있게 달랜다. 그것은 내 무거운 몸을 내일로 이끌고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엄마의 입이 기도하며 움직이는 것을 본다.
      나는 그 기도가 내 눈과 손 사이 접힌 부분을 소진하도록 내버려둔다.

      엄마는 나에게 우리 모국어로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나의 혀는 말려들어 더듬고, 지고 다닐 이 없어

      종일 밖에 내버려진 단어들을 소생시키지 못한다.


번_역에서_이 시는

   시인 무나 압둘라히(Muna Abdulahi)를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먼 나라의 시인을 나의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늘 어렵다. 번역하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이 있으니까. 일단 온라인에 있는 시인 소개 몇 개는 이렇다.
   1. 무나 압둘라히는 소말리아계 미국인 시인이자 난민의 자녀이다. 그녀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시와 영어를 가르치는 미네소타 주 사람이다.4)
   2. 여행자. 국제 구어 시인. 소말리아계 미국인.5)
   3. 안녕하세여. 나는… 무나 압둘라히에여. 나는… 다섯살이고요, 유치원에 다녀여. 다른 애들은 나나나나를… 어어어 테러리스트라고 불러여.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여. 근데 우리 엄마 그러니까 후야는 나보고 똑똑하대여. 저번에여. 우우우우리는 음식을 사러 월마트에 갔어여. 어떤 남자가 오더니… 어 좋은 남자는 아니었어여. 나빴어여. 그 남자가 우리한테 오더니… 우리 엄마를 잡더니… 우리 후야 머리수건을 잡더니 벗어 던지면서 가! 가! 너네 나라로 돌아가! 내가…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걸 그 남자가 아는지 모르겠어여…6)

   첫번째는 미국의 한 저명한 문학회에 적힌 소개이고, 두번째는 압둘라히 자신이 트위터에 적은 자기소개. 마지막은 시 퍼포먼스 공연에서 압둘라히가 다섯 살 자기 목소리로 읽어내는 공연-시 「우리를 똑바로 발음해라 Pronounce Us Correctly」의 일부이다. 세 소개를 읽고 나니 압둘라히는 ‘이동하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수많은 물리적 공간, 시적 공간, 말과 글을 끊임없이 이동하며 자신을 발음한다. 「ESL」도 그런 발음에 대한 시다. 소말리아와 미국 사이, 모국어와 영어 사이, 엄마와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무게와 떨림이 번역에서도 느껴지면 좋겠다.


번_역에서_우리는

   해동 : 이번 시 어떠셨나요? 소설 속 문장을 읽을 때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 찾기가 쉬워서 번역도 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더라고요.

   정민 : 개인적으로 저희 팀에서 진행해왔던 시 중에서 저는 가장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시에 대한 첫인상이 가장 낯설다고 해야 하나?

   지민 : 맞아요. 영어가 아닌 외국어 어휘도 있어서 막상 번역을 하려고 하니 읽을 때와는 또 다르더라고요.

   해동 : 맞아요. 원문하고 다르게 번역에는 주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선 제목 번역부터 한번 볼까요? ‘ESL’이 제2언어로서의 영어(English as a second language)라는 뜻인데, 이걸 우리말로 풀어서 번역할지 그대로 둘지 고민이 되네요. 여러분은 ESL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아선 : ESL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영어 교육과 관련한 의미로 쓰이잖아요. 우리에게는 일종의 획득해야 할 도구인 셈인데, 이민 2세대의 시점으로 쓰인 이 시를 보면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화자에게 영어는 미국에서 시민으로 ‘제대로’ 살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습득해야만 하는 언어니까요. 한국 독자가 그 차이를 감지하고 나서 이 시를 읽을 때 이주란, 시민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문제의식이 주요한 읽기의 기점을 만들어낼 것 같아요.

   주주 : 한국의 우리와 미국의 이민 2세대가 느끼는 영어가 달리 이해된다는 점에서 제목은 그대로 ESL로 두어 그 복합성을 유지했으면 좋겠는데요, 미국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의 공립학교에는 ESL반이 따로 있대요. 이민자 자녀, 외국인, 미국인이지만 종교 등등의 이유로 영어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을 위해서요. 이를테면 수학, 사회, 과학 시간에는 모두 같이 수업을 듣다가 국어 시간이 되면 ESL 학생들만 반을 옮기는 거죠. 그래서 ‘같은 반 친구’라고 하기에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어서 1년 내내 친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해요.

   지민 : 이번 시에는 그런 문화적 맥락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각주를 통해서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ESL이나 타스바흐, 후야 같은 것들이요. 특히 타스바흐는 이슬람교의 염주이고 후야는 소말리아어로 엄마를 뜻하는데, 이 단어들을 한국어로 친절하게 풀어 쓰면 시가 주는 본래의 느낌을 반감시킬 것 같아요. 영어로 펼쳐지는 시 안에서 낯설게 다가오는 외국어의 자리를 살려두는 게 더 좋겠어요.


   해동 : 제 생각에도 그런 단어들은 살려서 번역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제 시 본문 번역 과정에서 어려웠던 부분을 한번 얘기해보죠. 우선 ‘consume’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두 번 나오는 단어인데, consume이 지닌 한국어 뜻마다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거든요. 소모하다, 소진하다, 낭비하다, 태워버리다, 먹다, 사로잡다 등등 여러 뜻이 있더라고요. “너”와 “접힌 부분”을 consume 하는 게 어떤 건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서 번역어 선택이 어려운 것 같아요.

   아선 : consume은 소진하다, 내지는 소모하다가 적당할 것 같아요. 엄마가 혀를 조심하라고 한 건 너의 정체성이나 너의 뿌리를 그 혀(그러니까 영어)가 앗아갈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맥락이니 “잡아먹을”이라고 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소모하다’와 ‘소진하다’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주주 : 사전을 찾아보니 두 단어 모두 ‘써서 없애다’라는 뜻이 담겨 있지만 ‘소진하다’에는 그 과정이 추가로 들어있네요. ‘점점 줄어들어 다 없어지다’라고 나와 있어요.

   지민 : 그럼 맥락상으로 소진이 맞겠네요. 아무래도 화자가 겪는 경험의 과정이라는 함의가 있으니까. 다 써서 없어진 상태 자체를 말한다기보다는 그 과정이 드러나게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해동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10연에서 두번째 consume 뒤에 나오는 “the folds”는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요? 접힌 부분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무엇이 소진된다는 것인지 감이 잘 안 잡혀요.

   지민 : 기도할 때 손을 포개는 이미지가 생각나긴 하는데 그게 the folds는 아닌 것 같고……

   아선 : 소말리아의 국교인 이슬람 기도법이 그런 이미지일까요?

   지민 : 아! 입인가? 앞 행에서도 엄마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고 했으니까 the folds를 입술로 생각하면 말이 되는 것 같네요.

   지민 : 다음 연의 맥락으로 보면 화자의 엄마는 화자에게 우리 말로 하라고 요구한단 말이에요. 결국은 말과 관련된 시어라 생각해보면 입이라고 보는 게 맥락상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나”도 엄마를 따라서 기도한 걸로 볼 수도 있고요.


   해동 : ‘carry’라는 단어도 본문에서 다섯 번이나 나와요. “소진하다”처럼 통일을 시켜야 할까요? 그러기엔 한국어 의미 차이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다 “나르다”로 통일했어요. 이렇게 번역하면 통일성은 있지만 어중간한 번역이 되는 것 같거든요.

   아선 : “지고 간다”나 “지고 다니다”는 어때요? 목적어가 무겁게 느껴지게끔. 그리고 다섯 개의 carry를 통일하지 말고, 8연과 9연에 나오는 carries는 맥락에 맞게 다르게 번역하는 것도 좋겠어요.

   해동 : 좋습니다. carry를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하면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차의 이미지가 제일 먼저 나오거든요.


   해동 : 그나저나 여기서 화자가 더듬거리는 언어가 영어가 아닌 거죠? 소말리아어죠?

   주주 : 네, 화자가 더듬거리는 건 모국어라고 생각해요. 영어는 화자가 지금 여기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쓰기에 훨씬 더 편한 언어이고요. 생각해보니 이 시도 영어로 쓰였네요. 그래서 화자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많은 힘을 쏟고 있어요. 첫 연에서부터 화자는 무척 긴장하고 집중한 상태로 말하는 엄마의 입을 보고 있고요.

   지민 : 처음 시 읽었을 때 제목이 ESL이니까 “그녀”는 당연히 영어 선생님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읽다 보니 엄마였어요. ESL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할 땐, 외국인으로서 교육받는 영어의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떠오르잖아요? 이 용어 속 언어(Language)에 영어가 아닌 소말리어를 위치시킨 걸 읽어나가면서 시인이 일상적인 말에 무의식적으로 깃들어 있던, 당연하게 여겨지던 언어들의 자리를 탈바꿈시키는 걸 보고 정말 즐거웠어요!

   해동 : 저도 처음엔 선생님인줄 알았어요.(웃음) 그런데 3연에서 나오는 또다른 것은 또다른 목소리죠? 또다른 목소리가 저녁식사를 붙들고 있다는 건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요?

   지민 : 소말리아어로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또다른 소리인거죠. 화자의 소리는 영어니까요. 정말이지 화자는 영어가 아니라 소말리아어와 싸우고 있네.

   아선 : 문자 그대로 mother tongue에 대한 거였군요. 모(엄마의)국어.(웃음) 그동안 우리는 언어를 빼앗긴 사람들의 정서에 대해서는 많이 얘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이 시의 고투는 반대 방향이네.

   지민 : 그러니까요. 제가 그동안 읽어봤던 한국계 미국인 시인들의 시와 느낌이 좀 달라요. 에드 복 리(Ed Bok Lee) 같은 경우, 친구 “박태영”(Park Tae-Young)의 친모 찾기 기억을 그려낸 「서류 Documentation」라는 시가 보여주듯 민족적인 소재와 객관적이고 무덤덤한 말투 사이의 간극이 자아내는 서정성을 보여주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압둘라히의 경우는 그런 상실의 애틋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잘 안 느껴져요.

   재원 : 리영 리(Li Young Lee) 시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중국 문화와 연관된 경험들을 통해 느껴지는 서정성이 있어요. 특히 유명한 「감 Persimmons」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어요. 미국 땅에서 영어를 배워가는 경험과 할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기억이 ‘persimmons’라는 하나의 말에 얽혀서 서정성이 드러나요. 이주민 출신 미국인이 갖는 독특한 정서인거죠.

   아선 : 돈미 최(Don Mee Choi)랑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도 생각나네요. 해당 작가들도 한국 역사를 소환해서 자기 정체성을 풀어가죠. 그런데 무나 압둘라히의 시에서는 그 방향성이 반대라 확실히 다른 정서였어요.

   주주 : 제가 보기에 이 시에 나타난 집이라는 공간은 소말리아어와 영어의 격전지 같은 곳이에요. 화자는 여기서 더 자주 쓰게 된 익숙한 언어와 엄마의 언어 사이에서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이 격전지 위에서 긴장감을 내비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정서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정민 : 저는 시에서 지칭하는 ‘엄마’라는 대상 자체가 ‘모국어’로 읽히기도 했어요. 화자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마치 소말리아어를 의인화시킨 것처럼 느껴졌어요. 특히 다시 반복해서 시를 읽으면서 첫머리에 돌아온 1연에서 가장 크게 느껴졌어요. 화자에게 모국어는 하나하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여 탐색할 만큼 낯설고 노력이 필요한 대상이구나 하고요. 사실 저는 모국어만큼 친숙한 언어가 없기 때문에 과연 그 심정이나 느낌이 어떨지 상상하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해동 : 이 시는 아니지만 시인이 자신의 다른 시를 낭송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소리에서도 격앙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호랑이처럼 낭송하시더라고요.

   주주 : 맞아요. 저도 시인의 다른 시 낭송 영상들을 봤는데 힘이 굉장하더라고요. 시인이 다루는 시적 소재 중에서 특히 엄마는 압둘라히에게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시에서도 화자와 화자의 엄마는 끊임없이 갈등 관계에 놓여 있거든요. 혹시 시인의 「나의 이민자 부모로부터 온 쓰이지 않은 편지 The Unwritten Letter from my Immigrant Parent」라는 시 낭송 영상7)을 보신 적 있나요? 저는 몇 번 보면서 매번 울었는데요. 이 시에서는 엄마가 화자예요. 미국에 힘들게 이민 온 엄마가 딸에게 하는 말은 정말 가슴이 아프게 절절해요. 이를테면 자신은 ‘외국인’이지만 딸은 미국인으로 키우면서, 자신은 꿈꾸기조차 어려운 아메리칸 드림을 딸만큼은 꿈꾸었으면 하는 거죠. 딸만큼은 이곳, 미국에서 말하고, 배우고, 뛰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또다시 말하면서 큰 꿈을 꾸라고 절규하듯 호소하는 낭송이 인상깊어요.

   지민 : 시인이나 화자가 갖는 엄마와의 관계와 모국어와의 관계를 연장선에 놓인 거라고 보면 시인이 정체성이 시에서 드러나는 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까 제가 윗세대 이민자 출신 미국 시인과 압둘라히는 좀 다른 느낌이 든다고 했잖아요. 이게 시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이전 세대 시인들은 자신의 모국에서 비롯된 문화 정체성이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는 편이에요. 그런데 압둘라히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아요. 오히려 엄마를 통해 나의 모국어이자 나의 낯설음이 되어버린 그 ‘대상’에 대해 더듬거리는 손짓이지만,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어떻게든 알아가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해요.

   아선 : 그리고 엄마와 모국어라는 소재를 통해서 시인 본인이 미국시, 좀더 좁히면 미국 이주시 장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확실히 알고 있고 또 그 위치에 대해 시를 쓰고 있는 거죠.

   주주 : 저도 이 시를 ‘시 쓰기에 대한 시’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서점에 가면 미국 이주자들이 출판한 시집이 정말 많아요. 특히 시인이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 느끼는 어려움과 긴장을 드러낸 시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요. 압둘라히의 작품도 그런 ‘이주시’의 전통 안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압둘라히의 ‘이주시’ 쓰기가 벌어지고 있는 공간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화자는 시의 마지막에 “종일 밖에 내버려진 단어들을 소생시키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때 밖은 어디일까요? 저는 이 밖은 화자의 집 밖인 동시에 ‘나’의 밖, 시의 밖이라고 생각해요. 이전 세대 이주시인들이 모국어를 ‘나’의 안에 간직하고 영어와 사투를 벌인 것에 반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압둘라히에게 엄마의 언어는 어느새 ‘나’의 밖에 내버려진 거죠.

   아선 : 시에 등장하는 노동들이 주로 가내 노동들이란 점도 눈길을 사로잡아요. 그런데 집안을 꾸리는 이 노동들이 충돌하는 두 언어에 의해 수행되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건 소말리아어, 아이들을 어르고 재우는 언어는 영어. 이 충돌이 일으키는 일상 속의 긴장감이나 갈등이 이 시를 흥미롭게 만들어요.

   주주 : 더 재미있는 게요. 이 시가 결국은 영어로 쓰인 시잖아요. 그런데도 소말리아어 단어 두 개가 시 속에 몰래 들어와 있어요. 타스바흐와 후야. 타스바흐는 화자가 아끼는 물건이었고 후야 역시 화자와 절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 친밀한 존재들이 영어라는 언어를 비집고 화자의 의식 속에 들어와 있는 거죠. 해동 님, 시 재미있죠?

   해동 : 그렇네요. 말 그대로 stumble over, 더듬거리며 읽는 재미가 있어요. 요즘 예능 보면 노래 가사 듣고 맞히는 거 하잖아요. 그것도 가사의 맥락으로 답을 찾더라고요. 시를 이해하는 것도 그것과 비슷한 거 같아요.


번_역에서_흐르는 말은

총 1분 35초.

   나는 매일 언어를 장착한 꿈을 꾸고,
   입의 낯선 움직임 속에서 언어의 바깥과 안을 더듬거리고 만지고 보고 듣고 만지고 보고 듣고.


   작업 노트 3

   #외국어
   벌써 미국에 온 지 3개월이 지났네요. 아직 저는 화자처럼 꿈을 영어로 꾸지는 않아요.(웃음) 꿈은 한국어로 꾸고요, 대신 혼잣말이 늘었어요. 이제 영어로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그 대화를 미리 상상하면서 할 말을 준비하게 되더라고요. 수업에서 발표하는 것뿐 아니라 그냥 간단한 일상 대화도 막상 영어로 하려면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한 적이 많거든요. “하우 아 유?”라는 물음에 맨날 “파인 땡큐 앤드 유?” 할 수는 없잖아요. 별로 파인하지도 땡큐하지도 않은데요. 그래도 아직 제 방만큼은 한국어가 가득하고 영어가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모국어와 외국어에 대해 고민이 많은 와중에 좋은 시를 만나 반가웠습니다._주주

   언어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숨을 쉬고 싶을 땐 늘 언어의 힘을 빌렸던 것 같아요. 한국어에 막막함을 느꼈을 땐 영어로 숨 쉬는 법을, 영어의 세계에서 숨이 차다 싶을 땐(논문 쓸 때였답니다) 태국어로 숨 쉬는 법을 배웠답니다. 타 언어의 망망대해에서 헤엄치다보면 “언어를 내가 말 걸 수 있는 하나의 부드러운 몸으로 바꾸”는 그 과정이 여러모로 나를 자극해요. 타인의 입을 보기, 나의 말려드는 혀를 자각하기, 내버려진 언어들을 돌보기, 서로 낯선 단어들을 가까스로 이어 보기. 이런 경험들이 저의 물리적인 환경을 바꿔내진 못하지만 어떤 차원의 세계는 확실히 넓혀주더라고요. 그건 어떻게든 “그녀에게 가까워지려”는 저의 시도니까요. 이 시는 기본적으로 미국에 정착한 이주민의 자녀로서의 시인이 겪는 경험과 고투를 담고 있지만, 언어가 인간과 맺는 간단치 않은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후야”의 걱정이 시인의 세계를 가두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웃음) 그리고 언제나 느끼지만 정민 님의 영상이 너무 아름답고 제게 또다른 세계를 열어주어요. 같은 팀이라서 너무 행복!_아선

   #번역
   문장 구조가 비교적 명확해서 이번 시 번역은 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게 웬걸…… 다수의 대명사와 다의어, 그리고 예상과는 정반대였던 화자의 태도 등은 번역 작업을 어렵게 만들더라고요. 특히 제 경우에는 처음에 미리 화자의 태도를 넘겨짚고 시를 읽었던 것이 시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됐던 것 같아요. 제목과 시인의 출신을 알고 읽으니 당연히 화자가 모국어를 더 편하게, 영어를 더 불편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이 한 부분이 꼬이기 시작하니 번역어 선택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번 번역 경험을 통해서 텍스트를 읽을 때 텍스트 그 자체에 먼저 집중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_해동

   이번 시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닿았던 시구는 “지고 다닐 이 없어 /종일 밖에 내버려진 단어들” 이었어요. 종종 시를 다른 장르에 비교하면서 여긴 참 사람이 부족한 곳이라는 말을 하곤(듣곤) 하는데요.(웃음) 한편 영어로 된 시만을 읽고 번역하고 풀이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보면 영어는 다른 외국어(이 시를 빌려오자면 소말리아어)와 달리 “지고 다닐 이”가 참 많은 언어잖아요. 또한 우리 팀이 현재 하는 작업은 결국 한 편의 시를 함께 “지고 다”니면서 한국어와 이미지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함께 이 말들을 “지고 다닐 이”를 만날 수 있어서, 그리고 이 마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를 압둘라히의 시에서 배울 수 있어서 참 좋다는 거예요!_지민

   #영상
   내가 가진 언어, 입으로 뱉을 수 있는 언어 그리고 낯선 언어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볼 수 있게 한 시였던 것 같아요. 여전히 제게 한국어만큼 친숙하고 가까운 언어가 없어서 그런지 시의 화자가 지닌 심정이나 느낌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번 시를 통해 언어를 둘러싼 생각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제게는 오히려 반대로 가끔 완전히 낯선 언어 속에 있는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고도 느꼈어요. 언어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 여행지에서 모두 읽을 수 없는 언어를 마주했을 때 마치 무중력상태가 된 것처럼 이상한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거든요. 그렇게 보니 언어라는 것은 참 신기하구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꼭 필요한 대상이면서 편리한 대상이면서, 복잡한 대상이면서 모든 것이면서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면서._정민

흡사

영문학 전공자 박선아, 박민지, 반주리, 백재원과 디자이너 김민정으로 이루어진 시 번역 그룹입니다. 언어와 이미지로서의 번역을 통해 다음 역으로 나아갑니다.

2022/11/08
60호

1
제 2언어로서의 영어(English as a second language).
2
Tusbax. 이슬람교에서 기도에 사용하는 염주와 같은 도구 또는 이슬람교의 기도문.
3
Hooya. 소말리아어로 엄마를 뜻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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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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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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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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