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퀴어: 우리는 어디서든
2화 오히려 자유로운 상실 이야기
강원 춘천에서 황정은의 「뼈 도둑」을 말하다
가장 추운 날에 가장 추운 곳으로 갔다. ‘읽는 퀴어’의 첫 행선지는 강원도. 가까워서 선택했지만 알고 보면 가깝지 않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기차를 탔다. 일요일 오전 기차에는 공석이 많았다. 삼각김밥을 우물거리며 황정은 소설을 읽었다. 몇 해만의 재독이다. 이번엔 전자책의 오디오북 기능을 이용해봤다. 기계적인 목소리가 소설의 첫 줄을 읊었다.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춘천에 가까워질수록 눈이 많이 보였다.
황정은의 「뼈 도둑」(『파씨의 입문』, 창비, 2012)을 읽고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했을 때, 당연한 질문을 받았다. “왜 하필 상실이에요? 새해 벽두부터.” 사실 나는 올해를 잔병치레로 시작했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심한 목감기를 앓았다. 전기장판 위에서 지글지글 몸을 익히면서, 나는 체념했다. 앞으로는 더 많이 아프겠지. 그러다 죽겠지.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뀐 지금. 나에게 새해는 그런 의미다. 그래서 상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탄생을 강조하는 새해이기에 더욱 더, 잃어버린 것들을 되짚고 싶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시작보다는 끝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공간이 필요하다. 끝과 시작이 아름답게 뒤섞인 황정은의 소설처럼.
춘천 사람들은 절대 가지 않는다는 명동 닭갈비 골목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춘천의 소박한 독립책방 ‘책방마실’로 이동했다. 조그만 난로 하나를 둘러싸고 앉은 사람은 총 여덟 명. 춘천 소재 대학에 다닌다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부산의 대학생과 직장인도 있었다. 모두 황정은 작가를 알고 있었으나 「뼈 도둑」은 처음이라고 했다.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즐거움 하나. 좋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쁨 하나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어진 대화의 일부를 싣는다.
일자 : 2018년 1월 28일(일)
참여자 : 보배(진행), 다홍, 지혜(이상 무지개책갈피 활동가), 닥닥이(대학생·부산), 보라(대학원생·강원), 쑤(대학생·강원), 조제(직장인·강원), 현정(대학생·경기)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눈에 갇혔다.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나를 부르라. 그 남자, 그 기록, 그 새끼, 그 물건, 그것, 나는 즉 그다. 그는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 많은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고 그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런 얼굴들 속에 있었다. 겨울이었다.
보배: 1월에는 어딜 가나 긍정 에너지가 넘친다. 나는 올해 서른이 됐다. 긍정이 넘치는 새해 에너지를 견딜 수 없어서,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과 ‘잃어갈 것’을 생각하게 된다. ‘상실’ 하면 황정은의 「뼈 도둑」이 떠올라 골라보았다. 「뼈 도둑」의 주인공 ‘조’는 동성 연인을 죽음으로 잃고, 함께 살던 집까지 빼앗긴다.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작은 산동네에 입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들 읽고 어떠셨는지.
보라: 첫 구절과 끝 구절이 같은데,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첫 장을 펼쳤을 때 느낌이 달라지는 것도 좋았다. 전체적으로 생각할 지점이 많은 소설이었는데, 특히 등장인물 성격이 대조되는 게 눈에 띄었다. 장은 표출하는 성격인 데 반해 조는 참는 편이었다가 죽은 애인의 뼛가루를 훔치고 싶다는 데에서 처음으로 적극적인 욕망이 드러난다.
보배: 조가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라는 게 자주 나온다. 장은 어떤 부당한 상황에도 말하고야 마는 인물인데, 슬프게도 그런 성격의 장이 죽었다. 우연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침묵하지 않으면 소수자는 생명까지 위험해진다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 같았다.
다홍: 반대로 조는 체념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게 침묵으로 드러났다. 눈도 침묵의 은유이지 않나. 과학적으로도 눈이 오는 날에는 더 조용하다는 연구 결과를 봤다.
현정: 나는 이 작품을 이번에 처음 봤다. 추운 계절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지금과 잘 어울린다. 주인공 조가 얻는 것 없이 모두 잃는데, 다 잃고 나서 오히려 후련해하는 것 같았다. 다 잃은 순간 뭔가를 얻은 느낌. 재난 상황도 그렇다. 조는 재난 상황 이전에도 자신의 집을 포함한 많은 걸 잃고 있었는데, 재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겨우 주인공과 비슷해진 느낌이다. 한편 소설의 재난 상황은 실제가 아니라 주인공의 상상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의 상황과 마음이야말로 재난 아닐까.
보배: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는 사실을 재독하면서 알았다. 게이 커플이란 이유로 사회적 고립을 당했던 주인공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도 물리적으로 겪게 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한 잔씩 마셨고 맞잡은 손을 비비며 집으로 가는 오르막을 올라갔다. 맞은편에서 비틀거리며 비탈을 내려오던 중년 남자가 그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 남자는 한번 지나갔다가 되돌아가서 장을 불렀다. 아니 이거 장 형제, 형제, 라고 불러 세우고 그런데 왜 남자와 손을 잡고 가느냐고 물었다. 머리를 기울이고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고 비딱하게 섰다가 앞뒤로 몸을 끄덕이며 장 형제, 아니 왜 남자랑 손을 잡고 가느냐고, 분위기 이상하게, 대답해보라고 어, 불쾌하게 사내새끼들끼리, 라고 말했다. 그냥 가세요 제발 가세요 가시라고요, 그는 말렸고, 뭐가 불쾌하세요 제가 불쾌합니까 저도 당신이 불쾌한데요, 라고 장이 말했고, 주먹이 오갔다.
보배: 「뼈 도둑」에는 퀴어 독자로서 강하게 이입되는 장면이 있다. 장과 조가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장의 ‘교회 아저씨’에게 들켜서 욕먹는 부분이다.
보라: 2011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 뉴스를 봤다. 50년 간 동거한 ‘여고 동창’이 죽은 후에 그쪽 가족들에게 집을 빼앗긴 할머니가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50년 간 동거한 커플을 여고 동창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50년 간 쌓인 관계를 조금도 보호하지 못하는 세상이 슬프더라. 아직 한국은 퀴어 혐오적이고, 서울?경기를 벗어나면 그 성향이 더 두드러진다.
조제: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춘천이라는 지역성과 많이 연결지어 읽었다. 춘천은 작고 보수적인 도시다. 실제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혼자일 때와 둘일 때. 모든 상황이 조금씩 다를 테다. 하지만 일단 일상적으로 몸을 사리게 된다. 데이트할 때에도 여기선 소문이나 아웃팅1)을 염려한다.
현정: 직접적인 위협을 당할 가능성은 적을 것 같다. 막말로 손잡고 다닐 수는 있다. 뽀뽀도 뭐, 하면 된다. 서울이든 춘천이든 신경 안 쓰고 데이트 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지역사회에서 느끼는 것은, 정상 가족을 규범으로 여기는 인식이 단단하다는 거다. 여자라면 남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이런 계획이 당연시된 곳에서 마음껏 발언하고 표현하기 쉽지 않다.
조제: 지역에선 퀴어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기도 어렵다. 그나마의 인원도 대학에 집중되어 있는데 대학 특성상 고정 인원이 없고 계속 물갈이된다. 지역성을 살리면서 활동하고 싶다면 사람이 먼저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현정: 수도권 이외의 지역들 사정이 비슷할 것 같다. 춘천이 특히 타 지역들과 다른 점이 뭘까 생각해봤다. 춘천은 교통 접근성이 좋아서 서울?경기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지 않다. 그런데 ‘빨대 효과’라는 것이 있다. 중앙과 주변을 연결하면서 본래 기대했던 효과(중앙으로부터 주변으로 확산 이동)가 아니라, 반대로 빨대를 쪽 빨듯이 중앙에 편입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춘천이 그렇다. 돈과 인재가 서울 쪽으로 빠르게 옮겨지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도 우려 중이다. 춘천의 가장 큰 사업이 문화관광 쪽인데, 공무원들 입김이 센 행정도시라 젊은 대학생들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맥 위주로 선택 지원한다. 여성/퀴어 관련 프로젝트가 진행될 가능성이 아주 낮다.
닥닥이: 나는 문예창작 전공생이다. 이쪽도 사정이 같다. 문예창작 전공생은 여자가 많은데 등단 문인은 남성들 힘이 세다. 여성/퀴어 문학으로 등단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적당한 걸로 등단하고 나서 쓰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 눈사람과도 같은 거인, 그의 등과 머리에 쌓인 눈, 체온의 냄새. 한발 한발 전진해갈 때마다 그는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하.
후.
하.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보배: 다시 「뼈 도둑」으로 돌아와서주인공은 결국 애인의 뼛가루를 찾으러 눈 속에 뛰어든다. 결말에 대해 의견이 많으실 것 같다.
쑤: 뼈를 훔치기 위해 눈에 뛰어드는 것이 자포자기의 심정 같았다. 가는 길의 식량만을 챙기고 뼈를 찾은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보라: 나는 제목의 뼈 도둑이 조를 지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의 가족과 세상이 조로부터 애인의 뼈를 훔친 것이다. 조는 마땅한 자기 것을 찾으러 길 떠난 것 같다. 실제로 찾았는지 여부와 찾은 이후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조에게 삶의 의지가 생겼다는 것,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닥닥이: 불교적으로 보면 순간이 영원이라고 한다. 1초를 살아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이후에 죽고 살고보다 1초의 삶을 만들어가는 조가 인상적이다.
보배: 좀처럼 자기 의견을 말할 줄 모르던 조가 처음 ‘말하고 싶다’고 언급한 장면이 있다. 죽은 애인인 장의 뼛가루를 갖고 싶다고 장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 부분이다. 나는 이 소설이 일단 연애소설 같다. 그것도 절절하고 막대한 연애소설 같다. 조가 장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눈의 침묵만큼 거대하다. 소설 마지막에 조가 내딛는 한 걸음이 모든 독자들에게 인상적이었으리라 믿는다.
예상대로였다. 우리 모두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잃은 것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두 시간이 부족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기보다 손에 손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난롯가 주변에 부드럽게 떠다녔다. 자유롭게 상실을 말했다. 그날, 우리가 얻은 것이었다.
토니 모리슨은 『가장 푸른 눈』에서 ‘나가는 것’과 ‘쫓겨나는 것’을 구분한다. 추방은 곧 실제적 죽음이다. 쫓겨남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소유욕이 강해진다.2) 황정은 소설 속의 조와 마찬가지로, 춘천 작은 책방에 모인 우리의 상실(감)은 쫓겨남에서 비롯된다. 빼앗기고 쫓겨나는 경험은 우리를 메마르게 한다. 욕심으로만 바삭거리게 한다. 그래서 가장 퍼석한 겨울, 황정은의 「뼈 도둑」과 여덟 명 독자들의 만남은 다행이었다. 첫 회의 막막함을 앞으로의 기대로 바꿀 수 있었다. 쫓겨남을 자발적인 나감으로 바꾼 소설 속의 조처럼. 우리도 그래질 것이다.
*무지개책갈피 홈페이지(www.rainbowbookmark.com)에서 전체 대담을 보실 수 있습니다.
황정은의 「뼈 도둑」(『파씨의 입문』, 창비, 2012)을 읽고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했을 때, 당연한 질문을 받았다. “왜 하필 상실이에요? 새해 벽두부터.” 사실 나는 올해를 잔병치레로 시작했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심한 목감기를 앓았다. 전기장판 위에서 지글지글 몸을 익히면서, 나는 체념했다. 앞으로는 더 많이 아프겠지. 그러다 죽겠지.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뀐 지금. 나에게 새해는 그런 의미다. 그래서 상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탄생을 강조하는 새해이기에 더욱 더, 잃어버린 것들을 되짚고 싶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시작보다는 끝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공간이 필요하다. 끝과 시작이 아름답게 뒤섞인 황정은의 소설처럼.
춘천 사람들은 절대 가지 않는다는 명동 닭갈비 골목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춘천의 소박한 독립책방 ‘책방마실’로 이동했다. 조그만 난로 하나를 둘러싸고 앉은 사람은 총 여덟 명. 춘천 소재 대학에 다닌다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부산의 대학생과 직장인도 있었다. 모두 황정은 작가를 알고 있었으나 「뼈 도둑」은 처음이라고 했다.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즐거움 하나. 좋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쁨 하나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어진 대화의 일부를 싣는다.
첫번째 읽는 퀴어
장소 : 강원 춘천 책방마실일자 : 2018년 1월 28일(일)
참여자 : 보배(진행), 다홍, 지혜(이상 무지개책갈피 활동가), 닥닥이(대학생·부산), 보라(대학원생·강원), 쑤(대학생·강원), 조제(직장인·강원), 현정(대학생·경기)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눈에 갇혔다.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나를 부르라. 그 남자, 그 기록, 그 새끼, 그 물건, 그것, 나는 즉 그다. 그는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 많은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고 그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런 얼굴들 속에 있었다. 겨울이었다.
보배: 1월에는 어딜 가나 긍정 에너지가 넘친다. 나는 올해 서른이 됐다. 긍정이 넘치는 새해 에너지를 견딜 수 없어서,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과 ‘잃어갈 것’을 생각하게 된다. ‘상실’ 하면 황정은의 「뼈 도둑」이 떠올라 골라보았다. 「뼈 도둑」의 주인공 ‘조’는 동성 연인을 죽음으로 잃고, 함께 살던 집까지 빼앗긴다.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작은 산동네에 입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들 읽고 어떠셨는지.
보라: 첫 구절과 끝 구절이 같은데,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첫 장을 펼쳤을 때 느낌이 달라지는 것도 좋았다. 전체적으로 생각할 지점이 많은 소설이었는데, 특히 등장인물 성격이 대조되는 게 눈에 띄었다. 장은 표출하는 성격인 데 반해 조는 참는 편이었다가 죽은 애인의 뼛가루를 훔치고 싶다는 데에서 처음으로 적극적인 욕망이 드러난다.
보배: 조가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라는 게 자주 나온다. 장은 어떤 부당한 상황에도 말하고야 마는 인물인데, 슬프게도 그런 성격의 장이 죽었다. 우연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침묵하지 않으면 소수자는 생명까지 위험해진다는 걸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 같았다.
다홍: 반대로 조는 체념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게 침묵으로 드러났다. 눈도 침묵의 은유이지 않나. 과학적으로도 눈이 오는 날에는 더 조용하다는 연구 결과를 봤다.
현정: 나는 이 작품을 이번에 처음 봤다. 추운 계절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지금과 잘 어울린다. 주인공 조가 얻는 것 없이 모두 잃는데, 다 잃고 나서 오히려 후련해하는 것 같았다. 다 잃은 순간 뭔가를 얻은 느낌. 재난 상황도 그렇다. 조는 재난 상황 이전에도 자신의 집을 포함한 많은 걸 잃고 있었는데, 재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겨우 주인공과 비슷해진 느낌이다. 한편 소설의 재난 상황은 실제가 아니라 주인공의 상상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의 상황과 마음이야말로 재난 아닐까.
보배: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는 사실을 재독하면서 알았다. 게이 커플이란 이유로 사회적 고립을 당했던 주인공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도 물리적으로 겪게 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한 잔씩 마셨고 맞잡은 손을 비비며 집으로 가는 오르막을 올라갔다. 맞은편에서 비틀거리며 비탈을 내려오던 중년 남자가 그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 남자는 한번 지나갔다가 되돌아가서 장을 불렀다. 아니 이거 장 형제, 형제, 라고 불러 세우고 그런데 왜 남자와 손을 잡고 가느냐고 물었다. 머리를 기울이고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고 비딱하게 섰다가 앞뒤로 몸을 끄덕이며 장 형제, 아니 왜 남자랑 손을 잡고 가느냐고, 분위기 이상하게, 대답해보라고 어, 불쾌하게 사내새끼들끼리, 라고 말했다. 그냥 가세요 제발 가세요 가시라고요, 그는 말렸고, 뭐가 불쾌하세요 제가 불쾌합니까 저도 당신이 불쾌한데요, 라고 장이 말했고, 주먹이 오갔다.
보배: 「뼈 도둑」에는 퀴어 독자로서 강하게 이입되는 장면이 있다. 장과 조가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장의 ‘교회 아저씨’에게 들켜서 욕먹는 부분이다.
보라: 2011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 뉴스를 봤다. 50년 간 동거한 ‘여고 동창’이 죽은 후에 그쪽 가족들에게 집을 빼앗긴 할머니가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50년 간 동거한 커플을 여고 동창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50년 간 쌓인 관계를 조금도 보호하지 못하는 세상이 슬프더라. 아직 한국은 퀴어 혐오적이고, 서울?경기를 벗어나면 그 성향이 더 두드러진다.
조제: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춘천이라는 지역성과 많이 연결지어 읽었다. 춘천은 작고 보수적인 도시다. 실제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혼자일 때와 둘일 때. 모든 상황이 조금씩 다를 테다. 하지만 일단 일상적으로 몸을 사리게 된다. 데이트할 때에도 여기선 소문이나 아웃팅1)을 염려한다.
현정: 직접적인 위협을 당할 가능성은 적을 것 같다. 막말로 손잡고 다닐 수는 있다. 뽀뽀도 뭐, 하면 된다. 서울이든 춘천이든 신경 안 쓰고 데이트 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지역사회에서 느끼는 것은, 정상 가족을 규범으로 여기는 인식이 단단하다는 거다. 여자라면 남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이런 계획이 당연시된 곳에서 마음껏 발언하고 표현하기 쉽지 않다.
조제: 지역에선 퀴어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기도 어렵다. 그나마의 인원도 대학에 집중되어 있는데 대학 특성상 고정 인원이 없고 계속 물갈이된다. 지역성을 살리면서 활동하고 싶다면 사람이 먼저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현정: 수도권 이외의 지역들 사정이 비슷할 것 같다. 춘천이 특히 타 지역들과 다른 점이 뭘까 생각해봤다. 춘천은 교통 접근성이 좋아서 서울?경기와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지 않다. 그런데 ‘빨대 효과’라는 것이 있다. 중앙과 주변을 연결하면서 본래 기대했던 효과(중앙으로부터 주변으로 확산 이동)가 아니라, 반대로 빨대를 쪽 빨듯이 중앙에 편입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춘천이 그렇다. 돈과 인재가 서울 쪽으로 빠르게 옮겨지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도 우려 중이다. 춘천의 가장 큰 사업이 문화관광 쪽인데, 공무원들 입김이 센 행정도시라 젊은 대학생들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맥 위주로 선택 지원한다. 여성/퀴어 관련 프로젝트가 진행될 가능성이 아주 낮다.
닥닥이: 나는 문예창작 전공생이다. 이쪽도 사정이 같다. 문예창작 전공생은 여자가 많은데 등단 문인은 남성들 힘이 세다. 여성/퀴어 문학으로 등단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적당한 걸로 등단하고 나서 쓰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그는 상상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텅 빈 납골당으로 들어서는 사람, 눈사람과도 같은 거인, 그의 등과 머리에 쌓인 눈, 체온의 냄새. 한발 한발 전진해갈 때마다 그는 그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에 관한 꿈으로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갈 수 있었고, 살 수 있었다.
하.
후.
하.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보배: 다시 「뼈 도둑」으로 돌아와서주인공은 결국 애인의 뼛가루를 찾으러 눈 속에 뛰어든다. 결말에 대해 의견이 많으실 것 같다.
쑤: 뼈를 훔치기 위해 눈에 뛰어드는 것이 자포자기의 심정 같았다. 가는 길의 식량만을 챙기고 뼈를 찾은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보라: 나는 제목의 뼈 도둑이 조를 지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의 가족과 세상이 조로부터 애인의 뼈를 훔친 것이다. 조는 마땅한 자기 것을 찾으러 길 떠난 것 같다. 실제로 찾았는지 여부와 찾은 이후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조에게 삶의 의지가 생겼다는 것,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닥닥이: 불교적으로 보면 순간이 영원이라고 한다. 1초를 살아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이후에 죽고 살고보다 1초의 삶을 만들어가는 조가 인상적이다.
보배: 좀처럼 자기 의견을 말할 줄 모르던 조가 처음 ‘말하고 싶다’고 언급한 장면이 있다. 죽은 애인인 장의 뼛가루를 갖고 싶다고 장의 가족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 부분이다. 나는 이 소설이 일단 연애소설 같다. 그것도 절절하고 막대한 연애소설 같다. 조가 장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눈의 침묵만큼 거대하다. 소설 마지막에 조가 내딛는 한 걸음이 모든 독자들에게 인상적이었으리라 믿는다.
예상대로였다. 우리 모두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잃은 것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두 시간이 부족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기보다 손에 손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난롯가 주변에 부드럽게 떠다녔다. 자유롭게 상실을 말했다. 그날, 우리가 얻은 것이었다.
토니 모리슨은 『가장 푸른 눈』에서 ‘나가는 것’과 ‘쫓겨나는 것’을 구분한다. 추방은 곧 실제적 죽음이다. 쫓겨남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소유욕이 강해진다.2) 황정은 소설 속의 조와 마찬가지로, 춘천 작은 책방에 모인 우리의 상실(감)은 쫓겨남에서 비롯된다. 빼앗기고 쫓겨나는 경험은 우리를 메마르게 한다. 욕심으로만 바삭거리게 한다. 그래서 가장 퍼석한 겨울, 황정은의 「뼈 도둑」과 여덟 명 독자들의 만남은 다행이었다. 첫 회의 막막함을 앞으로의 기대로 바꿀 수 있었다. 쫓겨남을 자발적인 나감으로 바꾼 소설 속의 조처럼. 우리도 그래질 것이다.
*무지개책갈피 홈페이지(www.rainbowbookmark.com)에서 전체 대담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지개책갈피, 보배
"한국에도 퀴어문학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작된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문학이라는 장르조차 생소한 한국에서 퀴어를 다루는 소설을 모으고 읽고 씁니다. 읽고 쓰는 당사자 작가와 독자를 응원합니다. 그리하여 대답하려 합니다.
"네. 한국에도 퀴어문학은 있습니다.”
2018/02/27
3호
- 1
- 아웃팅(Outing):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 (출처: 위키백과)
- 2
-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백양출판사, 30~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