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8회 지금 우리 학교는
기획의 말
1886년,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생겼다. 여학생을 위한 학교가 열렸지만 아버지들은 입학한 딸을 끌어내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2018년은 어떤가. 학내 성차별과 성폭력에 시달려온 학생들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고 외친다. 존엄이 없는 학교는 필요 없다. 그 절절한 목소리를 듣는다.
학생의 날 서울에서 스쿨미투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의 성차별?성폭력 경험과 증언이 쏟아지며 학교가 여학생, 여성에게 어떤 공간인지 광장에서 낱낱이 고발된 행사였다. 집회가 열리고 얼마 후엔 여성가족부가 주최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 주간 행사로 스쿨미투 주제의 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나는 토론자로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청중 질의응답 시간 마지막에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스쿨미투가 벌어진 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준비해온 성명문을 발표했다.
“우리에게 부모는 없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신 성적 불공정 문제에는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이던 부모들이 학내 성차별?성폭력 문제에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지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행사가 끝나고도 한참이나 가슴이 쓰렸다. 학교와 부모가 모두 외면하는 여학생들은 지금 어떤 싸움 속에 놓인 것인가. 학교와 부모는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우연찮게도 올여름 나와 내가 속한 단체는 지역에서 벌어진 스쿨미투 사건을 관통하면서 그를 ‘목격’했다. 이 글이 목격자로서의 성실한 증언이자 지금의 학교와 부모들에게 꼭 필요한 물음이 되기를 바란다.
H고에서 페미니즘 수업을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처음 받았을 때는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유를 묻는 내게 교장 선생님은 ‘교사와 학생 간의 갈등, 남학생과 여학생의 갈등’을 언급했을 뿐 수업 자체에 대한 문제는 말하지 않았다. 명분 없는 수업 취소를 받아들일 수 없어 단체 이름으로 정식 공문을 보내 소명을 요청하니 학교에서는 그제야 학내 페미니즘 이슈와 스쿨미투 발발 과정을 간단히 공유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페미니즘 수업에서 기인했다는 남학생들의 주장을 덧붙이며, 이로 인해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어 학생들이 학업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학교는 페미니즘 수업 때문에 스쿨미투가 발생했다고 판단했고, 때문에 앞으로 페미니즘 수업을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내가 진행한 수업에 스쿨미투에 참여했던 여학생들이 ‘없다’는 ‘사실’은 학교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건 차치하고라도, ‘미투’가 페미니즘 때문이라는 ‘주장’은 인과 오류를 넘어 황당하고 위험한 발상이었다. 문제의 바탕인 학내 성차별 문화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도 없고, 앞으로의 목소리 또한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게 아닌가. 지역 학교들에서 페미니즘/성 교육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단체에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과연 H고가 스쿨미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신뢰하기 어려웠다. 또 이러한 환경에서 여학생들이 어떤 추가 ‘피해’를 겪고 있을지도 걱정이었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교육은 스쿨미투의 원인이 아니라 해결 방법임을 분명히 짚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학교와 페미니즘 수업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지역 교육청에 H고 스쿨미투와 페미니즘 교육 취소 건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고 사건 대책위를 꾸려 공론화 활동을 진행했다.
대책위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H고가 속한 지역은 밑바닥에서부터 들끓기 시작했다. 교육청의 전수조사 전날 밤 H고 학부모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일부 교사들과 함께 대책을 의논했다. 그들이 의논한 ‘대책’은 스쿨미투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감히 지역 명문인 H고의 명예를 훼손’한 단체와 강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H고는 비평준화 지역의 인문계 학교로, 학생 대다수가 기숙사생활을 하며 철저히 입시 교육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서울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많은 편이다. 때문에 스쿨미투 사건이 공론화되자 학교와 학부모 집단은 우리와 전혀 다른 걱정을 했다. 성차별적인 학교 환경에서 학생들이 어떤 피해에 노출되었나 걱정한 게 아니라, 학교의 명성이 떨어져 더이상 ‘우수학생’을 받을 수 없거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질까봐 가장 우려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이 스쿨미투 ‘가해자’들과 성차별 문제를 방치한 학교가 아니라, 공론화를 추진한 단체와 페미니즘 교육을 한 강사, 그 수업을 기획한 교사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학교에서 페미니즘 이슈와 스쿨미투 발발이 페미니즘 수업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 것과 똑같은 논리였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여학생 당사자들이 어떨지 가장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폐쇄적인 학교의 바깥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일은 한계가 많았지만, 대책위를 시작하며 사건의 과정과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내가 H고에서 성교육과 페미니즘 수업을 진행하고 며칠 후, 마침 학교 여자 화장실에 한국의 성차별과 여성혐오 문제를 담은 쪽지가 붙기 시작했다. 몇 주 후 쪽지의 존재를 알게 된 남학생들은 한밤중 몰래 여자화장실에 들어가 쪽지를 떼고 그것을 구겨 사진으로 찍어서 욕설과 함께 SNS에 올렸다. 그 게시물에 다른 남학생들도 함께 욕 댓글을 달았다. “좆같은 페미들 시발” “어디서 쿵쾅거리냐” “꼴페미들아” 이에 분노한 여학생들이 온라인상에서 남학생들과 논쟁을 시작했고, 사건은 오프라인 공간인 학교에서도 이어져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여학생들에 대한 언어폭력과 공격이 일어났다. 더 견딜 수 없었던 여학생들은 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학교의 중재로 먼저 욕을 했던 남학생들이 SNS에 24시간 동안 공개 사과문을 올리기로 하며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24시간이 지나자마자 한 남학생은 다시 페미니즘을 조롱하는 이미지와 글을 올려 사과문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자 여학생들은 그동안 학교에서 겪은 피해 사례를 수집하여 문건으로 만들고 교사 대상 스쿨미투를 벌였다. 비상 상황이 된 학교는 전체 교사 회의를 소집했고, 학생들의 요구대로 미투 대상 교사가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동시에, 예정되었던 페미니즘 수업을 취소했다. 공개 사과문을 쓰고 나서 페미니즘을 조롱한 남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더구나 남교사 5명은 페미니즘 수업 취소를 재고하려는 교장에게 찾아가 페미니즘 수업을 계속하면 사직하겠다고 압박하였다. 이들이 ‘직’을 걸만큼 필사적으로 페미니즘 수업을 반대한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몰래 쪽지를 떼고 여학생들에게 욕을 퍼부은 남학생들과 이들이 다른 게 무엇인가. 이들의 공고한 ‘남성 연대’가 살아 숨쉬는 학교 현장에서 여학생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안전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처음 H고 스쿨미투를 공론화했을 때 학교와 학부모 집단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던 항의 중 하나는, “성폭력도 아닌데 왜 ‘미투’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학부모는 “그래서, 진짜 강간이라도 있었던 거냐.”고 묻기도 했다. H고 사건을 조사한 지역 교육청에서 “성차별은 있었지만 성폭력은 없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없다’는 결론에 사건을 보도하던 언론은 순식간에 잦아들었고, 어떤 학부모들은 ‘안심’했다. 그런데 성차별이 존재하는 곳에 성폭력은 ‘없’을 수 있는가. 나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조사의 ‘진실’ 여부를 떠나, 성차별과 성폭력을 철저히 분리해 바라보는 관점은 이들이 ‘인정’한 성차별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별이 곧 폭력이라는 인식은 인권 의식의 기본 감수성이다. 이들이 따지는 ‘진정한 미투’와 성‘폭력’의 범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기준에서 정하고 누가 판별하는 것인가. 성차별과 성폭력은 ‘다르’고 성차별은 성폭력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주장은, 남학생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건네며 “이런 건 여자들이 잘하는 거니까 네가 하라.”는 말을 교사로부터 들어야 했던 H고 여학생에게도 해당할까.
H고 사건은 나와 우리 단체에 적지 않은 상흔을 남겼다. 우리는 악의적인 비난과 가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H고뿐 아니라 학교가 속한 지역의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연일 발표되는 대책위의 성명으로 구체적 사건 내용이 모두 드러나고 전국 1000명 이상의 시민과 500개 이상의 단체가 그에 지지를 보내자 H고에서는 결국 예정된 페미니즘 수업을 다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결정 직후 보도된 기사에서 학교 측이 “억울하지만 (학업을 위해) 학생들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나왔듯, 그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배운 것은 ‘성평등’이 아닌 것 같다. 학생의 인권보다 진로가 우선하고 기-승-전-입시(대학)로만 청소년을 다루는 한국의 현재 교육 상황에서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판이 변하지 않고는, 처음 스쿨미투가 벌어지고 페미니즘 수업을 취소하기로 한 결정처럼 “이래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는 안 돼.”의 수준에 계속 머물러 있을까봐 걱정되기도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우리를 위한 학교, 부모는 없다.”는 여학생들의 참혹한 선언은 우리 또한 H고 스쿨미투 사건에서 목격한 ‘사실’이었다. 남자 교사들이 여학생들 눈치를 보고 죄인처럼 되었다는 동료 여교사, 페미니즘 수업을 들은 아들이 기분 나빠했다는 학부모, 남학생들도 성차별을 당했다는 교육청…… 이 요지경의 상황 어디에도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변하고 보호하는 어른은 없었다. 학교에 문제 제기하는 교사는 고립되었고, 문제의식을 가진 학부모나 지역 주민들조차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며 침묵했다. H고에서 만난 여학생 하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헬조선 탈출”이라고 간단명료히 답했다. 여성청소년이 살고 싶지 않은 아니,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든 건 누구일까. 젠더폭력을 멈추라 말하는 딸에게 “페미는 정신병”이라고 혐오 발언을 하는 아들을 감싸는 건 누구인가. 지금 우리 학교와 부모는 누구를 위하고, 누구를 소외시키고 있는가. 스쿨미투는 우리가 쌓은 ‘헬’, 가부장제의 균열을 알리는 신호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1886년,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생겼다. 여학생을 위한 학교가 열렸지만 아버지들은 입학한 딸을 끌어내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2018년은 어떤가. 학내 성차별과 성폭력에 시달려온 학생들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고 외친다. 존엄이 없는 학교는 필요 없다. 그 절절한 목소리를 듣는다.
학생의 날 서울에서 스쿨미투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의 성차별?성폭력 경험과 증언이 쏟아지며 학교가 여학생, 여성에게 어떤 공간인지 광장에서 낱낱이 고발된 행사였다. 집회가 열리고 얼마 후엔 여성가족부가 주최한 ‘세계 여성폭력 추방’ 주간 행사로 스쿨미투 주제의 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나는 토론자로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청중 질의응답 시간 마지막에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스쿨미투가 벌어진 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준비해온 성명문을 발표했다.
“우리에게 부모는 없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신 성적 불공정 문제에는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이던 부모들이 학내 성차별?성폭력 문제에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지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행사가 끝나고도 한참이나 가슴이 쓰렸다. 학교와 부모가 모두 외면하는 여학생들은 지금 어떤 싸움 속에 놓인 것인가. 학교와 부모는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우연찮게도 올여름 나와 내가 속한 단체는 지역에서 벌어진 스쿨미투 사건을 관통하면서 그를 ‘목격’했다. 이 글이 목격자로서의 성실한 증언이자 지금의 학교와 부모들에게 꼭 필요한 물음이 되기를 바란다.
H고에서 페미니즘 수업을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처음 받았을 때는 학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유를 묻는 내게 교장 선생님은 ‘교사와 학생 간의 갈등, 남학생과 여학생의 갈등’을 언급했을 뿐 수업 자체에 대한 문제는 말하지 않았다. 명분 없는 수업 취소를 받아들일 수 없어 단체 이름으로 정식 공문을 보내 소명을 요청하니 학교에서는 그제야 학내 페미니즘 이슈와 스쿨미투 발발 과정을 간단히 공유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페미니즘 수업에서 기인했다는 남학생들의 주장을 덧붙이며, 이로 인해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어 학생들이 학업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학교는 페미니즘 수업 때문에 스쿨미투가 발생했다고 판단했고, 때문에 앞으로 페미니즘 수업을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내가 진행한 수업에 스쿨미투에 참여했던 여학생들이 ‘없다’는 ‘사실’은 학교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건 차치하고라도, ‘미투’가 페미니즘 때문이라는 ‘주장’은 인과 오류를 넘어 황당하고 위험한 발상이었다. 문제의 바탕인 학내 성차별 문화를 인식하지 못하기에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도 없고, 앞으로의 목소리 또한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게 아닌가. 지역 학교들에서 페미니즘/성 교육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단체에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과연 H고가 스쿨미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신뢰하기 어려웠다. 또 이러한 환경에서 여학생들이 어떤 추가 ‘피해’를 겪고 있을지도 걱정이었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교육은 스쿨미투의 원인이 아니라 해결 방법임을 분명히 짚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학교와 페미니즘 수업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지역 교육청에 H고 스쿨미투와 페미니즘 교육 취소 건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고 사건 대책위를 꾸려 공론화 활동을 진행했다.
대책위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H고가 속한 지역은 밑바닥에서부터 들끓기 시작했다. 교육청의 전수조사 전날 밤 H고 학부모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일부 교사들과 함께 대책을 의논했다. 그들이 의논한 ‘대책’은 스쿨미투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감히 지역 명문인 H고의 명예를 훼손’한 단체와 강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H고는 비평준화 지역의 인문계 학교로, 학생 대다수가 기숙사생활을 하며 철저히 입시 교육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서울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많은 편이다. 때문에 스쿨미투 사건이 공론화되자 학교와 학부모 집단은 우리와 전혀 다른 걱정을 했다. 성차별적인 학교 환경에서 학생들이 어떤 피해에 노출되었나 걱정한 게 아니라, 학교의 명성이 떨어져 더이상 ‘우수학생’을 받을 수 없거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질까봐 가장 우려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이 스쿨미투 ‘가해자’들과 성차별 문제를 방치한 학교가 아니라, 공론화를 추진한 단체와 페미니즘 교육을 한 강사, 그 수업을 기획한 교사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학교에서 페미니즘 이슈와 스쿨미투 발발이 페미니즘 수업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 것과 똑같은 논리였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여학생 당사자들이 어떨지 가장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폐쇄적인 학교의 바깥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일은 한계가 많았지만, 대책위를 시작하며 사건의 과정과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내가 H고에서 성교육과 페미니즘 수업을 진행하고 며칠 후, 마침 학교 여자 화장실에 한국의 성차별과 여성혐오 문제를 담은 쪽지가 붙기 시작했다. 몇 주 후 쪽지의 존재를 알게 된 남학생들은 한밤중 몰래 여자화장실에 들어가 쪽지를 떼고 그것을 구겨 사진으로 찍어서 욕설과 함께 SNS에 올렸다. 그 게시물에 다른 남학생들도 함께 욕 댓글을 달았다. “좆같은 페미들 시발” “어디서 쿵쾅거리냐” “꼴페미들아” 이에 분노한 여학생들이 온라인상에서 남학생들과 논쟁을 시작했고, 사건은 오프라인 공간인 학교에서도 이어져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여학생들에 대한 언어폭력과 공격이 일어났다. 더 견딜 수 없었던 여학생들은 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학교의 중재로 먼저 욕을 했던 남학생들이 SNS에 24시간 동안 공개 사과문을 올리기로 하며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24시간이 지나자마자 한 남학생은 다시 페미니즘을 조롱하는 이미지와 글을 올려 사과문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자 여학생들은 그동안 학교에서 겪은 피해 사례를 수집하여 문건으로 만들고 교사 대상 스쿨미투를 벌였다. 비상 상황이 된 학교는 전체 교사 회의를 소집했고, 학생들의 요구대로 미투 대상 교사가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동시에, 예정되었던 페미니즘 수업을 취소했다. 공개 사과문을 쓰고 나서 페미니즘을 조롱한 남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더구나 남교사 5명은 페미니즘 수업 취소를 재고하려는 교장에게 찾아가 페미니즘 수업을 계속하면 사직하겠다고 압박하였다. 이들이 ‘직’을 걸만큼 필사적으로 페미니즘 수업을 반대한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몰래 쪽지를 떼고 여학생들에게 욕을 퍼부은 남학생들과 이들이 다른 게 무엇인가. 이들의 공고한 ‘남성 연대’가 살아 숨쉬는 학교 현장에서 여학생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안전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처음 H고 스쿨미투를 공론화했을 때 학교와 학부모 집단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던 항의 중 하나는, “성폭력도 아닌데 왜 ‘미투’냐.”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학부모는 “그래서, 진짜 강간이라도 있었던 거냐.”고 묻기도 했다. H고 사건을 조사한 지역 교육청에서 “성차별은 있었지만 성폭력은 없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없다’는 결론에 사건을 보도하던 언론은 순식간에 잦아들었고, 어떤 학부모들은 ‘안심’했다. 그런데 성차별이 존재하는 곳에 성폭력은 ‘없’을 수 있는가. 나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조사의 ‘진실’ 여부를 떠나, 성차별과 성폭력을 철저히 분리해 바라보는 관점은 이들이 ‘인정’한 성차별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별이 곧 폭력이라는 인식은 인권 의식의 기본 감수성이다. 이들이 따지는 ‘진정한 미투’와 성‘폭력’의 범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기준에서 정하고 누가 판별하는 것인가. 성차별과 성폭력은 ‘다르’고 성차별은 성폭력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주장은, 남학생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건네며 “이런 건 여자들이 잘하는 거니까 네가 하라.”는 말을 교사로부터 들어야 했던 H고 여학생에게도 해당할까.
H고 사건은 나와 우리 단체에 적지 않은 상흔을 남겼다. 우리는 악의적인 비난과 가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H고뿐 아니라 학교가 속한 지역의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연일 발표되는 대책위의 성명으로 구체적 사건 내용이 모두 드러나고 전국 1000명 이상의 시민과 500개 이상의 단체가 그에 지지를 보내자 H고에서는 결국 예정된 페미니즘 수업을 다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결정 직후 보도된 기사에서 학교 측이 “억울하지만 (학업을 위해) 학생들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나왔듯, 그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배운 것은 ‘성평등’이 아닌 것 같다. 학생의 인권보다 진로가 우선하고 기-승-전-입시(대학)로만 청소년을 다루는 한국의 현재 교육 상황에서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판이 변하지 않고는, 처음 스쿨미투가 벌어지고 페미니즘 수업을 취소하기로 한 결정처럼 “이래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는 안 돼.”의 수준에 계속 머물러 있을까봐 걱정되기도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우리를 위한 학교, 부모는 없다.”는 여학생들의 참혹한 선언은 우리 또한 H고 스쿨미투 사건에서 목격한 ‘사실’이었다. 남자 교사들이 여학생들 눈치를 보고 죄인처럼 되었다는 동료 여교사, 페미니즘 수업을 들은 아들이 기분 나빠했다는 학부모, 남학생들도 성차별을 당했다는 교육청…… 이 요지경의 상황 어디에도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대변하고 보호하는 어른은 없었다. 학교에 문제 제기하는 교사는 고립되었고, 문제의식을 가진 학부모나 지역 주민들조차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며 침묵했다. H고에서 만난 여학생 하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헬조선 탈출”이라고 간단명료히 답했다. 여성청소년이 살고 싶지 않은 아니,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든 건 누구일까. 젠더폭력을 멈추라 말하는 딸에게 “페미는 정신병”이라고 혐오 발언을 하는 아들을 감싸는 건 누구인가. 지금 우리 학교와 부모는 누구를 위하고, 누구를 소외시키고 있는가. 스쿨미투는 우리가 쌓은 ‘헬’, 가부장제의 균열을 알리는 신호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유진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해도 되는 세상에 살고 싶은 ‘여자’. 이상한 것에 대한 감각을 키워준 가부장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언어를 찾을 때마다 힘이 세지는 느낌이라 계속 말하고 글을 쓴다. 이상한 것을 보고, 말할 줄 여자들과 지혜를 나누는 기쁨에서 희망의 단초를 찾는다. (문화기획달 상상지기 http://mooncult.blog.me)
2018/12/25
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