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談
1회 적응하기/창조하기(1)
소영현(사회, 본지 편집위원) : 《비유》에서 좌담 코너를 신설하였습니다. 현장 문제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오픈 좌담으로 다뤄보려 합니다. 어려운 자리에 기꺼이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정 주제나 그간 논의됐던 것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쉽게 말하지 못했던 것, 말할 수 없었던 문제를 논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자리로 생각하시고 편하게 말씀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재현론과 독자론의 문학적 재편이 야기한 효과와 문제들을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퀴어문학을 중심으로 최근 가시화된 문제들, 김봉곤 작가나 김세희 작가를 둘러싼 사건이 야기한 문제들, 대표적으로 당사자성에 입각한 글쓰기나 소수자 재현의 가능성과 한계 등에 대해서도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논의들은 창작자-독자-작품-출판사-비평의 관계 속에서 다룰 문제로 여겨집니다만, 그간 한편으로 창작자 개인의 창작 윤리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출판사의 개입의 문제로 다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가 재편되면서 생겨난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치는 이 문제들이 앞으로 다른 형태로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기존의 문학관이나 출판문화, 문학의 환경 변화나 독자관 등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두루 논의하기에 앞서 선생님들께 간단한 소개와 근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성은 : 시 쓰는 강성은입니다. 근황은 거의 집에 있다가 동네 밖을 두 달 만에 벗어났네요. 마스크를 끼고 만났지만 반갑습니다.
정용준 : 소설가 정용준입니다. 반갑습니다. 저 역시 코로나로 집에 많이 있어요. 곧 개강이라 수업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김미정 : 평론하고 있는 김미정입니다. 서울시민으로 20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사를 해서 경기도민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살 때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많이 느끼고 있는 나날입니다.
조우리 : 소설 쓰는 조우리입니다. 최근까지 한 달에 한 편씩 단편소설을 써서 독자들께 직접 보내드리는 프로젝트를 벌여서 마감을 하느라 저도 대부분 집에 있었네요. 오랜만에 밖에 나와보게 되었습니다.
진송 : 저는 진송이라고 하고 평론을 조금 썼어요. 학부 졸업을 앞두고 할 게 없어서 괴로운 두 달을 보냈어요. 6월부터 8월까지 할 게 거의 없는 상태로 도서관을 왔다갔다하면서 뭘 읽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개강을 앞두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여기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
소영현 : 네, 반갑습니다. 먼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장 안팎의 변화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2010년대 전반에 걸쳐 문학계의 변화들에 대한 실감을 나누고, 김봉곤 작가나 김세희 작가 관련 사태가 야기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채로 계속 뜨거운 감자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발언이든 누구의 편에 서는 발언이 되어버리는 상황 속에서, 지금은 아무것도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장르별로 아마 다 다르게 느끼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한 변화들의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나눠보고 싶습니다.
조우리 :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체감한 것은 소위 ‘문학장’이라고 생각했던 지면에서의 논의와 실제 독자들이 느끼는 온도차가 상당히 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극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여러 변화들 속에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것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아마 누구라도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인데 우리 문학이 과연 독자들과 사회적 합의를 형성할 정도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장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논의 과정에서 창작자와 비평가들이 과연 독자의 목소리를 어디까지, 어떤 위치에서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 학습했던 독자라는 존재, 창작자로서 창작 과정에서 고려하는 향유자로서의 독자뿐만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독자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문학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향유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화해왔는데, 특히 2020년 7월에 김봉곤 작가에게 제기되었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문제에서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독자들의 입장이 두드러졌다고 느꼈습니다. 작품 내적인 문제제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의 환불이나 절판, 책이라는 상품의 가치에 대한 항의를 하는 소비자로서의 목소리로 이어졌는데, 그런 지점은 그간 우리 문학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 아닌가, 그리고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명확히 드러났으니 이제라도 그것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소영현 :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부상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시의 입장에서는 어떤가요?
강성은 : 일단 요즘 잡지를 많이 읽지를 못해서 어떤 논의가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졌는지 잘 모르는 부분도 있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장이 변화한 부분이 조우리 선생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많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문단 내의 성폭력 관련 사건과 재판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서 여전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 듭니다. 제 주변이나 시단에서는 이 문제가 더 크기 때문에 절박하게 논의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는 해요. 저는 다른 얘기들을 더 들어보고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김미정 : 조우리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공감된 것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독자의 부상, 독자의 자기표현이라고 하는 것들에 함께 고무되었고, 그것이 협소성, 폐쇄성을 지목받아온 한국에서의 문학을 다르게 변화시키고 활력을 주는 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 2년 전 독자 논의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관점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즈음이기도 하고, 이제는 독자의 문제를 좀더 예각화해서 함께 고민해야 할 부지런함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조우리 작가님이 얘기하셨듯이 독자가 스스로를 소비자로 정체화하고 있다라는 점에 대해서는 실제로 상당히 경험하는 바인 것 같아요. 수용자의 체험이라는 것이, 종종 나는 주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하여 소비한다는 방식으로 구사되는데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근대 자본주의 시장의 산물인 것도 맞지만 한편으로는 그 압도적 조건에 갇히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추구해온 생물이기에 그 매력에 많은 이들이 투신해왔던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소비자 정체성이 전면화하는 장면들을 세계관이라기보다 일종의 포즈로서의 냉소, 위악이라고 이해해왔었는데, 최근에는 소비자 정체성이 진심, 세계관으로 통용되는 듯한 장면들에서 조금 생각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향유의 무수한 방법과 의미가 ‘소비자’라는 상징적 단어에 갇혀 고착화되는 듯한 상상력이 가장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대중 페미니즘의 동력에 대한 최근 국내외의 여러 목소리도 좀 귀기울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용준 : 요 몇 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고민과 함께 많은 것들을 겪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고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던져진 화두에 많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고 더 깊고 넓게 파고들어야 할 사안들도 많이 있지만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커다란 물이 저와 제가 속한 세계를 뚫고 흘러간 것 같습니다. 숨을 고르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지금의 제 감각을 아주 사적으로 표현해보라면 쓸쓸하다는 것입니다. 장기화된 팬데믹 상황과 겹쳐 있어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여러 일들을 겪는 동안 저와 동료들 그리고 소위 문학이라는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거리두기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 거리의 의미와 감각은 다양한 것 같아요. 자숙의 의미도 있고 반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실망스러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도 있고 두려움과 증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여러 방식으로 애를 써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인식과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많은 것들이 정화되었고 변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모두 섬처럼 떨어져 있는 것이 서운하기도 합니다. 글은 혼자 쓰는 것이지만 작가들에게도 사회가 필요하고 동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작가들이 모이는 것을 작가들 스스로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그것이 어떤 잘못과 문제를 예방하는 차원이라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받아들였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 덕분에 문학의 자리는 이전보다 맑고 깨끗해졌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투명한 물속에 물고기가 없습니다. 깨끗함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그곳을 떠나거나 피해야 했으니까요. 많은 질문과 물음 속에 살아왔습니다. 한 명의 작가 한 명의 개인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습니다. 한국 소설가로서, 남자 소설가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으로서, 늘 어떤 대표성을 갖고 있어야 했어요.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겠죠. 그것이 내내 어려웠습니다.
소영현 : 정용준 작가님이 지난 5년여의 시간이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비평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련의 사건들 이전에는 비평가들이 대면해서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가, 2015년, 2016년 계기로 오히려 더 많이 만났어요. 만나고 나서 겪은 갈등도 있지만 만나서 외롭지 않다는 경험을 새롭게 하기도 했거든요. 그런 의미로 강성은 시인님께 여쭤보고 싶은데요,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작가분들을 많이 만나기도 하셔서, 외로운 감각과 다른 감각이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강성은 :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거의 모임이 사라졌잖아요. 개별적으로 만날 수는 있겠지만 예전에 있었던 문단 내 모임이 많이 사라졌죠. 그런 자리를 통해서 동료들을 만나고 알게 되는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는 예전처럼 새롭게 시인들을 알게 되는 기회가 없어졌어요. 그런 모임에 아예 가본 적이 없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등단하고 몇 년이 지났는데 시인을 만나본 게 처음이라고 저에게 말한 젊은 시인도 있었어요. 저는 신인일 때 비슷한 또래의 젊은 시인, 작가들과 많이 교류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또래 시인들이 만나고 어울리면서 함께 재미있는 일을 기획하기도 하고 출간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하죠. 시를 쓰는 것 말고 책을 출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때라서 동료들에게 듣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지금도 저는 가장 되고 싶은 게 있다면 ‘젊은 시인’이에요. 젊은 시인들은 만나서 영향을 주고받고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 부분이 가장 아쉬워요.
그리고 제가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어서 교실 내에서 겪는 일들이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저는 예술고등학교에서부터 예술대학까지 강의를 하면서 꽤 많은 학생들을 만났어요. 문단 내 성폭력 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게 제가 아는 많은 학생들이 가해자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메일을 주고받거나 실제로 만나거나. 그런데 문단 내 성폭력 운동이 있기 전에는 학생들이 저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어왔는데도 전혀 몰랐던 거예요. 저에게는 너무 아찔한 경험이라 그 이후로는 안전한 교실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수업에서도 예전에는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던 말도 많이 해요. 작품을 볼 때 고려할 부분도 많아졌어요. 저뿐 아니라 학생들도 그렇습니다. 문학수업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수업 중에 공격적인 질문들이 오가는 합평 수업도 있었는데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저부터도 달라졌기 때문에 아마도 많은 분들이 교실에서 어려움을 겪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입장들이 다 이해도 되고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안전한 교실과 문학적 에너지를 나눌 동료들을 함께 얻을 수 있게 좀더 노력하고 소통하고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것이 요즘 저의 생각입니다.
소영현 : 진송 평론가는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젊은 평론가로서 어떤 변화를 겪으셨는지 여쭤보게 됩니다.
진송 : 저는 지면에 발표한 평론도 얼마 되지 않고 제도권에서 문학을 공부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요. 2016년을 전후로 한국문학이라는 장에 독자로 유입된 사람에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문학 내부, 혹은 평론가로서 발언하는 게 어색합니다. 독자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보셨는지가 궁금했어요. 왜냐하면 문학 혹은 비평에서 독자에 대해서 논의를 할 때 항상 추상적인,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저한테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상으로의 독자가 더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서 논의를 할 때도 비평을 보면서 기본적인 문학관이나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가치판단도 페미니즘 비평가와 그렇지 않은 비평가들 사이에 공유되는 게 거의 똑같은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나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또 비평의 구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독자들이 어떤 점에서 이 작품에 좋음을 느끼는지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다고 해야 될까요. 내적인 것에 대한 받아들임이 분명 독자들에게도 있었을 텐데, 이 알 수 없는 대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가다보니까 구체적인 내용, 반응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독자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보셨는지, 어떻게 접해보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이와 함께 이번 사건을 보고 거꾸로 2016년 즈음의 독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점이 있습니다. 피해자분들의 입장문에서 재현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드러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거든요. (김세희 작가는 피해 관련 모든 사실을 부인했고, 김봉곤 작가는 인정했기 때문에 사건을 중심으로 보자면 분리해서 다뤄야겠지만) 독자 문제를 중심으로 봤을 때, 김세희 작가 피해자분이 입장문에서 결국에 문제 삼은 것은 단편소설 「대답을 듣고 싶어」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도구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고, 김봉곤 작가 피해자분도 인용이 반인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내 아픔을 후지게 갖다 쓴 게 문제이고 맥락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김봉곤 작가에게 달았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걸 봤을 때 이게 2016년 즈음을 기점으로 삼아서 여성혐오적인 작품에 대해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재현 방식에 대해서 문제 삼았던 독자들의 상과 그렇게 무관한 흐름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해야 될까요. 이 사람들이 피해자이기 이전에 재현 방식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은 독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 ‘이야기의 주인이 나다’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흐름과도 연결지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승섭 선생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관련한 사건도 이런 흐름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결국은 새로운 독자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은 사건으로 보이기도 했다고 해야 할까요.
소영현 :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문학 논의로 좁혀볼 수만도 없는 문제로서, 이야기의 주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며 재현을 문제 삼는 독자가 등장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우리 :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문단 내부의 구성원들에게도 상처를 남겼지만 독자들에게도 너무나 큰 상처였던 것 같아요.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을 통해 가해 사실이 밝혀지면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최근까지도 재판이 계속 이어졌잖아요. 그런 과정을 보면서 문학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이 어쩌면 가해자들에게 권력을 주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독자들도 상처를 받았고, 이후에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빨리 내가 목소리를 보태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된다는 사명감도 생겼다고 생각해요. 문제제기나 공론화가 있을 때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SNS에서 수많은 의견들이 쏟아지는데 독자들이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독자들은 문학장 내에서 자정이 될 거라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몇 년 동안 해결이 안 되고 있고 표절이라든지 문학상 운영의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들도 문단 안에서, 문학장 안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죠. 그렇다면 독자가 직접 나서야 된다는, 불신의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자정될 거라는 기대가 전혀 없다,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 개개인과 작품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있겠지만 한국문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 집단에 대한 어떤 윤리적?도덕적 신뢰 이런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가해자가 있어서 나에게 가해를 했을 때 단죄가 되고 빨리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을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지켜봐온, 2015년 이후에 한국문학에서 벌어진 일들을 봤을 때 어떤 것도 깔끔하게 마무리되거나 청산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용준 : 이야기의 주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며 재현을 문제 삼는 독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주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문제를 깊게 자신의 입장에서 다루어준 것이 고맙고 좋았다는 독자도 있습니다. 소설 독자는 논문이나 뉴스 독자와 달리 글을 정보와 의견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닌 이입하고 경험하고 공감과 동감의 감각적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저 역시 그런 독자이고요. 그것이 잘 되었을 경우에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건과 이야기의 인물에게조차 공감하고 동감하고 마침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이 독자에게 인문학적 인식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의 변화까지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신중해야 합니다. 목적이 과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기에 불특정 다수의 독자의 반응까지는 예상 및 제어할 수 없더라도 창작하는 동안 발생하는 많은 지점들을 섬세하게 체크해야 합니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그 픽션의 재료와 근거는 현실과 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야기의 소재와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이 작가의 삶과 그 주변에 닿아 있다면 작가는 소설에 대한 고민 이전에 그것을 쓸 수 있고 써도 되는지 사적인 관계의 장 안에서 먼저 고민하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소설을 한 편 쓴 적이 있었는데요. 어머니께서 재활용상자에 들어 있는 초고를 보시게 되었어요. 아마 아들이 무슨 글을 쓰는지 궁금하셨겠죠. 그런데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소설 속엔 아들과 어머니가 나왔는데 소설의 이야기와 인물을 동일시하신 거예요. 소설의 줄거리와 묘사 방식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 어머니는 상처를 받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들이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저는 그것이 일기가 아닌 픽션이라고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셨고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공간들과 오브제 미쟝센이 실제 저와 어머니의 디테일과 흡사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마음보다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저는 어머니의 마음 하나만을 고려해 그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 삶에서 제 경험 속에서 소설을 발견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깁니다. 소설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노력합니다. 더 열심히 가공하고 몇 번이고 체크하면서요. 저는 이런 논의가 픽션이라는 기본 속성 자체를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소설의 텍스트는 독자의 삶과 내면 감정과 감각의 장 안쪽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느끼는 독후감의 핵심은 이야기와 작가 그리고 인물과 맺는 은밀한 사적인 교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이 지양되고 작가가 근심 끝에 창작과 작의 그 자체를 포기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네요.
소영현 : 김봉곤 작가나 김세희 작가 관련 사태가 야기한 문제들로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독자 문제도 여러 측면에서 얘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여러 사태들에서 해법이 될 때 독자가 알리바이처럼 쓰이는 사례가 없지 않은 것 같아요. 독자는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인 건데 앞서 언급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독자들이 원해서 책을 폐기할 수밖에 없다든가 이런 방식으로 활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 독자가 이런 힘을 갖게 됐냐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로 한국에서의 재현에 대한 감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잖아요. 현실의 논리와 문학의 논리가 어느 순간 갭이 너무 심해져서 그것 사이의 갭의 가시화라고 해야 될까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갭의 구현물이 『82년생 김지영』이 아닐까 싶은데요. 현실은 척박한데 여성의 삶에 대해서 더이상 진전된 문학이 나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논리 속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것과, 현실의 논리 속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현실과 문학의 거리를 예전처럼 분리해서 보는 게 아니라 결합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현실이 문학 속으로 깊숙이 개입해 들어오면서 독자의 힘도 세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강성은 : 저는 출판사나 작가가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검토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사안의 심각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제가 크다면 일단 판매를 멈추고 문제 제기자와 대화를 통해서 혹은 중재자를 통해 시간을 두고 입장 차이를 좁혀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빠른 입장문보다는. 법적인 문제까지는 안 갔으면 좋겠는데 법적인 문제로 너무 빨리 넘어간 거 같아서 SNS를 통해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좀 안타까웠어요.
조우리 : 지금은 어느 때보다 ‘독자’의 존재가 뚜렷한 시기가 아닐까요. 독자들이 작가와 출판시장에 요구하는 바가 명백하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품을 원하는지, 어떤 작품은 원하지 않는지가 독자들의 선택에 의해 드러나고 있죠. 그런데 이런 독자들과 출판시장과의 관계가 부정적일 때에는 어떻게 상황을 타계해야 하는지 경험한 적이 없어요. 앞서 이야기 나눴던 것처럼 작가와 작품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우리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합의된 절차나 방법이 있는지, 문학뿐만이 아니라 어떤 예술도 지금까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논의하지 않았고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쪽도 제기 받은 쪽도 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출판사나 유통사에서도 고민이 많을 거예요. 이런 상황 속에서 만약 작가가 무결하다면 그를 주장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법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왜 문학의 문제를 법으로 해결해야 하느냐’라고 한다면, 그럼 법이 아니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한 작가에게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 문제를 작가와 독자가 합의하에 완벽히 마무리 짓는 방법이 있을까요? 작가는 한 개인이고, 독자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인데, 대중을 전부 만족시킬 수 있는 명확한 해명이라는 게 가능한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이거든요. 그리고 작가는 신상을 드러내고 평판에 영향을 받는 직업인데, 문제제기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위와 상관없이 복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잖아요. 이때 훼손된 작가와 독자와의 신뢰는 절대 이전과 같이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법으로 사실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싶어요.
진송 : 강성은 시인께서 일단 멈춰야 된다고 생각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일단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충분히 얘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 출판사와 작가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생각과 같이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그리고 조우리 작가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은데요. 제가 느꼈던 불만은 문학과 예술을 법으로 해결해도 되나 이런 측면이었다기보다 법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라는 측면, 그러니까 법에 대한 불신이 컸던 것에 가깝습니다. 낙태죄 폐지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동성혼 합법화도 되지 않은 나라에서 아웃팅을 과연 법이 문제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법이 얼마나 효용이 있는 건지에 대한, 그런 의문이 먼저 들었어요.
강성은 : 출판사와 당사자들이 충분히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아주 중대한 사안에 있어서는 일시품절 상태로 두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너무 나이브한 생각 같기도 하네요.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문단_내_성폭력 운동 때도 유사한 고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단_내_성폭력 운동 때 가해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분들 중에 실제로 책이 절판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법적으로 처벌받은 사람과 아직도 법적 소송을 이어가고 있는 한 사람이죠. 물론 같은 수위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수가 피해자임을 알리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뭔가 합의된 장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출판사가 이러이러한 입장이고 작가는 이러이러한 입장이고 문제제기자는 이러이러한 입장이라는 것이 상세하게 정리되면 좋겠어요. 보고서 비슷한 것이라도 나오면 제일 좋겠지만. 독자로서는 각기 다른 입장의 당사자들에게 휩쓸리거나 휩쓸릴까 불안하고 법적 조치에 대한 신뢰도 없으니까요. 저는 출판사에서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소영현 : 누가 어디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기구나 이런 것도 없는 형편이고요.
강성은 : 출판사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기도 해서 이 자리에 출판사 직원도 한 분 정도 왔으면 했어요.
조우리 : SNS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화력이 떨어지면 일단락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관심이 다른 새로운 사건으로 옮겨가다보니 한 사건의 발단부터 마무리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활발하게 의견이 나오는 시점에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요. 대중이 알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대중이 반드시 다 알아야 하는가 싶은 지점들도 있어요. 작품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이 꼭 대중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안인가, 어디까지 대중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소영현 : 최근 두 사건들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출판 관련자, 법 관련 분들을 모셔놓고 말씀 나눠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자리가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쓰는’ 사람으로서 고민해야 될 문제가 분명히 있는 거 같아요. 김세희 작가 관련해서도 어느 정도 문제가 일단락된 이후에야 뭔가를 논의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특정한 작가 개인의 문제로 한정할 수 없는, 문학적으로 ‘재현된 대상’의 ‘아웃팅’ 관련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지점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재현과 아웃팅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송 : 저는 이 사건이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김세희 작가 사건이 끝이 아니지 않을까요. 사후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어떻게 방지해야 할지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 다른 분이 고발을 하시면서 내 얘길 쓴 것이고 그렇기에 문제가 된다고 하면 또다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만이 반복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소영현 : ‘쓰는’ 사람으로서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해도, 작가 개인의 작가 윤리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문제제기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모든 문제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미디어 환경 변화 애기를 빼놓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독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에 끼친 영향이 어마어마하고요. 이외의 여타 조건 변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강성은 : 독자가 목소리를 가지게 됐다는 게 가장 큰 변화 같아요. 김봉곤 작가와 김세희 작가 경우처럼 자전적인 소설 안에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등장시켜서 논란이 된 일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인데 SNS 등을 통해 독자들의 목소리가 생겨나면서 이 일이 가볍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커질 수 있는 힘이 된 거라고 생각해요.
조우리 : 제가 SNS에서 본 말 중에 인상 깊었던 건 그거였어요. ‘작가가 독자를 기만해서 공범으로 만들었다.’ 독자들은 작품을 소비하면서 스스로가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페미니즘 리부트, ‘#문단_내_성폭력’ 운동, 표절 사건 등에 본인이 연루되었다는 감각, 내가 무결한 독자가 아니라는 감각에 대해서 독자들이 두려워한다고 저는 느꼈어요. 빨리 입장을 밝히고 내가 공범이 아님을, 내 결백함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잘못됐다’라고 말함으로써 발 빠르게 피해자의 편에 서고 싶어하는 것은 #문단_내_성폭력 운동에서의 경험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보다 나은 쪽, 옳은 쪽으로 의견을 내서 힘을 보태야 한다는 감각 때문에 초조함을 느끼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SNS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게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SNS에서는 사용자 모두가 자신만의 타임라인으로 의견을 펼치기 때문에 논의가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산발적으로 흩어지고, 이 때문에 어떤 합의라고 할 만한 것에 이르기가 어렵죠. 그리고 문제제기와 해명 과정에 드러난 주장들이 사실의 전부가 아닌데도 대중은 드러난 내용들로 각자의 해석에 따라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판단을 내려서 단죄하려고 해요. 여러 고려할 점들 때문에 당사자들이 공론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인데도 그런 점은 간과되고요.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처럼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논의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서로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 내걸린 대자보를 향해 지나가는 행인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물론 그런 방식이 필요한 공익의 문제도 있죠. #문단_내_성폭력 운동과 같은 것이요.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에 항상 도움이 되는 방식인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성은 : 미디어 환경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누구든지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채널, SNS 등을 가지고 있고 해야 할 말이 있고 억울한 일이 있을 때는 국민청원도 할 수 있죠. 그런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문학 환경 안에서도 크게 작동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자의 역할은 달라질 것 같아요. 과거의 독자는 멀리 있어서 잘 안 보이는 존재였는데 지금은 너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예전에 독자를 상상하면 책을 통해서만 만나고 현실에서는 안 보였거든요. 지금은 독자가 책을 읽는 것만 아니라 구매하고 알라딘이나 100자평도 쓰고 중고서점에 파는 행위까지 상상이 되는 거죠. 문학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저는 여전히 과거의 독자와 만나는 게 좋고 저 역시 그런 낡은 독자이지만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독자가 온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미정 : 선생님들 말씀에 대체로 동의하고요, 생각이 복잡해지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비슷한 사례들, 개인적으로 일본에서의 문학 환경에 관심이 있어서 살펴보는 편인데요. 과거 미시마 유키오나 유미리 같은 작가가 비슷한 문제들로 인해 어떻게 법정으로 가게 되고 어떤 판결이 나고 그것과 직간접적으로 일본에서의 문학이나 소설의 관념이나 방법에 어떤 영향이 가고 그런 것이 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근대의 소설, 문학 등의 구조를 공유하고 있으니 유비적으로 자꾸 생각하게도 되고요. 작년(2020년)에 한참 SNS가 뜨거울 때 마침 일본의 한 표상연구자(히비 요시타카)가 『프라이버시 소설의 탄생―모델 소설의 트러블사』라는 책을 냈는데요.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이 “타자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리얼리즘 소설은 작자 자신만 등장하는 궁극의 ‘사소설’만 남은 것 같다. 그것이 모델소설 120년 역사의 종말의 풍경이다.”라는 식의 내용이었어서, 사실 우리가 겪는 어떤 트러블들이 문학 혹은 예술을 둘러싼 근대적 관념을 재점검하고 적극적으로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 선생님들도 창작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거나, 개인의 윤리 혹은 개인 창작 문제로 더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말씀들에 동의합니다. 법과 미디어 등의 조건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틀도 그것에 굉장히 크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미 문학 자율성 개념 같은 것이 곤경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도 여겨지고요. 다른 많은 것도 그러하지만, 문학을 둘러싼 상황은 유례없이 이중 구속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는 분열적인 상황인 거죠.
가령, 법이나 미디어는 나를 나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을 점점 강화하고 있죠. 문학과 예술이 아무리 ‘우리’의 ‘연결됨’을 이야기하더라도 실제 현실에서의 법만 하더라도 저작권법, 소유권의 문제는 조밀해지고 있죠. 또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을 하면 미디어 속에서는 진짜 개체로서의 나인지 아니면 내 생각과 감정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나의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확신할 수 있을지…… 원론적으로 생각 하면 실제로 나라는 존재 자체 늘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관계 속에서의 나이죠. 이러한 어떤 복잡한 지형 같은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 피해와 가해, 개인 대 개인의 문제의 시비를 가린다는 방식만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많이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 더이상 나뉘지 않는 존재’(individual)라는 근대적 존재론의 단위, 나의 단위를 질문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유를 시작해야 얽힌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입니다. 개인, 개체의 사고는 곧 ‘차이’로서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고, 나만의 고유한 무엇, 너만의 고유한 무엇이라는 식으로 구획하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서구에서는 350년, 한국에서는 100년 가까이 자연화한 감각이죠. 그런데 과연 ‘나’는 오로지 ‘개인’으로만 존재하나, ‘차이’를 통해서만 나를 주장해야 하나. 이런 고민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쓰는 이의 태도, 읽는 이의 태도 다 같이 달라지는 지점이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진 이론적 지점들 통해서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충분히 말하기에는 다듬어야 할 것들이 있으므로 이 정도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조우리 : 저는 SNS상에서 의견이 다를 때 인신공격으로 가게 된다는 점때문에 법의 언어까지 고려하게 되었는데요. 지금의 SNS 공론장에서는 의견과 감정이 섞여 있어서 서로의 감정을 공격하는 방식의 대화를 하고 있다보니까 감정이 배제된 법의 언어에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이 좀 생기거든요. 예를 들어서 SNS에서 피해 사실을 공론화했을 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나와서 얘기를 하고 그것을 둘러싼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그 진위에 대한 것은 어떻게 논의가 되거나 진행이 되는지를 알아보기가 어렵고 서로의 주장에 대한 공격들만 계속 이어지는 방식으로 뻗어나가게 되니까. 피로가 단시간에 쌓이고 빨리 며칠 안에 출판사든 작가든 입장문을 발표해라, 빨리 이 문제를 봉합해서 이 모든 논쟁을 끝내라, 이런 압박 속에서 무언가를 충분히 검토하거나 서로의 주장을 맞춰보거나 이럴 기회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사자들 간에 이야기를 해보거나 시시비비를 가려볼 수 있는 장으로서의 법의 언어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SNS에서의 모든 논의는 시간이 흐르면 ‘가장 끝까지 이야기한 사람’의 의견만 남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심지어는 당사자 간의 합의와도 상관없이요. 보통은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떠나고 최후에는 비난의 언어밖에는 남지 않게 되더라고요. 지금 상황에서 지금 법의 언어가 예술이나 문학에서 일어난 문제를 명백하게 밝혀줄 것인가는 기대가 적은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SNS 공론장에서 주는 피로감이나 이런 것과는 별개의 어떤 완결성을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소영현 :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얘기 같은데 들여다보면 꽤 다른 의견들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환경 변화가 문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문학적 재현이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고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요.
정용준 : 과거의 독자와 지금의 독자는 다릅니다. 독자는 읽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예전에는 작가는 독자를 모르고 독자는 작가를 몰랐습니다. 작가가 독자를 선택할 수도 없었고 독자는 작가의 글에 개입할 수도 없었죠. 작가, 작품. 독자. 이 셋은 텍스트로 연결되었지만 컨텍스트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작가와 작품 독자 이 셋은 한 문단 속에 존재하며 상호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SNS를 통해 작가는 독자의 피드백을 바로 받을 수 있고 독자 역시 작가가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 심지어 감정과 마음까지 서로 알게 되었죠. 이런 현상은 분석하고 논의할 수는 있지만 바꿀 수도 바꿀 필요도 없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혹 이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그 역시 비판을 할 수 있지만 바꾸거나 돌이킬 수는 없는 전진이고 흐름입니다. 독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어떤 글을 출간하고 어떤 글이 좋고 가치가 있는지 제작의 단계와 비평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읽는 존재뿐만 아니라 읽고 싶은 텍스트를 결정하고 텍스트의 가치와 의미까지 논할 수 있는 종합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창작, 제작, 비평, 편집의 메커니즘은 바뀔 것이고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그것의 효과와 영향은 어떤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며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려면 유연함과 즉흥성 그리고 미디어 환경에 능해야 할 텐데 그것에 자신이 없고 감각이 둔한 작가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쪽인 것 같아요.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지게 될 텐데 걱정이 됩니다.
김미정 : 저는 문학 내부, 문학장이라고 하는 표현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 생각을 좀 하는 편인데요. 그것이 문학이라는 관념을 둘러싼 다양한 역할과 이해관계를 역동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문학 안과 밖이라는 식의 구분을 공고히 하는 작용도 크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 이후 문학장 비판의 언어가 오히려 문학장을 공고히 하는 측면도 있지 않나 싶고요. 문학 안에서 기존에 통용되던 논리들이 거의 유명무실한 게 대부분인데 자꾸 그런 환영을 소환해서 뭔가를 해야 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공회전한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자리에 저를 두면서도 기존 문학 관념으로부터의 확장성을 꾀하는 편이라서일지…… 어떤 책임소지의 문제를 두고 단일한 대상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위 문학 안팎으로 연루된 복잡하고 세밀한 조건을 함께 보고 싶은데 자꾸 명료한 윤곽과 속도가 요구되는 것 같아요.
진송 : 갈등이 있고 그것을 내부적으로 조정하다가도 못 견디겠으면 사람들이 다 SNS로 뛰쳐나가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됩니다. 조정중인데 다 못 참고 입장문이 네다섯 개씩 왔다갔다하고……
조우리 : 문학장 안에서 잘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죠. 얼른 다른 방향으로 알려서 내가 생각하는 옳은 방향에 힘을 실어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문제제기들이 문학장, 예를 들면 지면에서의 논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작가에게 문제가 제기되고, 독자들도 그 문제의식에 동의를 했는데 평단에서 ‘우리가 분석해봤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라고 한다고 해서 작가의 무엇이 회복되는가, 무엇이 복원되는가 묻고 싶어요. 작가의 입장에서는 독자와의 관계가 훼손된 것인데, 한 번 훼손된 것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잖아요. 어떤 문제가 발생한 뒤에 작가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고 복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과 논의가 그간 전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합의가 되는 문제인가는 부차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겠지만요.
김미정 : 사회적 합의 말씀이 나와서 잠시 반농담이지만,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런 드라마틱한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할까 생각이 들어요.
소영현 : 사회적인 합의가 불가능한 게 사실이고 문학계 안에서 해결 불가능한 문제인 게 분명하고, 더구나 문학 안팎의 구분 자체가 그다지 유용하지 않기도 하고요. 그런데 또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는 해결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순간 사회의 해법밖에 남지 않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얘기할 수 있는 한 얘기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거꾸로 들어요. 해법을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심지어 해법에 대해서 거의 말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무엇이 논의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얘기를 집중해야 한다 이런 얘기는 필요한 게 아닌가.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우리 : 사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그저 문학장 안에서 어떻게 해보자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면서도 고민이 많았어요.
김미정 : SNS 등에서의 소통 방식이 일상의 리얼리티를 이루고 있기에 지금 이 자리가 전통적 공론장이지만 상대적으로 무력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현 : 관점과 정치적 입장으로 편가르기가 심해진 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 팬데믹 상황 때문이기도 하죠. 이전에는 저기 SNS세계가 있고 여기 현실이 있는 것처럼 어떤 구분이 가능했다면, 코로나 이후로 어느 순간, 현실적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은 건 SNS세계밖에 없어진 상황에 처하게 되었잖아요.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뭔가를 느끼거나 공유하거나 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더 심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김미정 : 그런 듯도 합니다. 특히 문학 전공하는 학생들과 자주 만나면서 느끼지만 스스로에 대한 외부 시선으로부터의 열패감(가령 적폐, 시대착오)도 상당한데, 그런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실제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프레이밍된 이미지 같은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진송 : 문학이 적폐라고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그 적폐조차 따라오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문학 안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해 다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퀴어에 대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데, 문예지 밖으로 나가면 그런 거 아예 통하지조차 않는 곳이 너무 많아서 이걸 적폐라고 하기에는 좀…… 현실이 안 받쳐준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문학권력의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학계 내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논쟁들을 볼 때 현실과 치열하게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이런 논쟁이 현실과 괴리된 채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용준 : 저는 이 좌담에 참석한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싶은지,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힘들어요. 하지만 근 몇 년 동안 자신의 작의를 지나치게 고민하고 쓰고 싶은 마음과 표현의 문제에 과중하게 시달리고 있어요. 물론 미래의 창작자들이 무책임한 작의와 자의적 판단과 미학에만 몰두한 표현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각성하고 조심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고 답도 방법도 없는 미궁 속을 빙빙 도는 고민이라면 그래서 질문과 물음에 갇혀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쓰는 것을 조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 의심하고 경계하고 심지어 그 자체로 옳지 않다고 자책하고 자학하는 의식이 만약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고민해볼 문제입니다. 아직 해결할 문제들 미진한 부분들 많지만 많은 일들을 겪고 지나오면서 새로운 인식이 생겼고 피해와 가해를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맞는 용어의 선택과 태도도 문학의 자리 속에 어느 정도 자리 잡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불합리와 비윤리를 감지하는 감각도 높아졌고 반응 속도와 표현력도 빠르고 강해졌다고 생각해요. 그 결과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불공정한 계약의 문제, 출간하는 책과 잡지, 공모전 및 등단의 문제, 심사위원의 자격 및 구성의 문제까지 변화는 폭넓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완벽주의자들이 갖는 딜레마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깥에서 바라볼 때에는 충분히 객관적으로 애쓰고 있는데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고 여기는 엄격함 때문에 자꾸만 자기를 내리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해요. 문화 예술계 안에서만 단순 비교했을 때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다른 예술에 비해 문학의 장은 지속적이고 폭 넓게 이런 문제를 끝까지 다루고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위기가 장기화되면 우리는 문학이라는 정체성을 부끄러워하고 민망해하는 저조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자아비판과 내가 속한 세계를 끝없이 냉소하고 회의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감과 애정을 회복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이런 논의도 어떤 합의와 해법 혹은 해결을 향해 모으고 통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많이 이야기하면서 정보를 넓히고 주요한 사안을 알리고 여러 시각, 몰랐던 입장, 사정, 과정 등등을 나누는 것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아요. 그것을 하나로 모으려고 애를 쓰면 이상한 목적이 생기게 되고 사안과 논의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가 있습니다. 문학 안에서의 해결이나 합의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요. 안에서 서로 합의 가능한 문학적 기준과 판단을 만들면 좋겠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듯 그것은 모아지기는커녕 넓혀지기만 할 뿐입니다. 저는 문학의 문제도 어떤 법과 기준을 정해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때 끝없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이 나지 않는 것을 해결이 날 때까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법을 마련해서 그 논리와 기준으로 모종의 판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아요.
소영현 : 정용준 작가께서 우리가 해온 것에 대해서 자신감과 애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점에 동의해요. 그럼에도 문학계 내에서 적체된 문제라고 해야 될까 그런 것들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가시화된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가시화된 문학계에서의 문제들에 대해서 환경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검토해보는 (오늘 이 좌담과 같은) 자리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고요. 다른 한편으로 법 문제의 경우에도, 법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지금 현 상황에서 선생님들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처럼 법의 논리가 도입되는 순간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도 자체가 확정되어버리는데, 사실 그것들은 담론 투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고, 계속 변화하는 거잖아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 것도 문제이고요. 더 중요한 건 원래 사회 문제 속에서의 피해와 가해처럼 선명해 보이는 게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고 얘기를 해왔던 게 문학인데, 그것 때문에 벌어진 문제를 거꾸로 법의 논리로 물어보는 방식에 위험성이 없지 않기도 하고요. 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지금 현 상황에 대한 논의도 좀더 깊이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합의를 향해 논의를 모으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확장된 논의들의 축적 없이는 (작가) 개인들에게만 지워져버리는 여러 책임들에 대한 느슨한 의미에서의 해결책도 마련하기 어렵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재현론과 독자론의 문학적 재편이 야기한 효과와 문제들을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퀴어문학을 중심으로 최근 가시화된 문제들, 김봉곤 작가나 김세희 작가를 둘러싼 사건이 야기한 문제들, 대표적으로 당사자성에 입각한 글쓰기나 소수자 재현의 가능성과 한계 등에 대해서도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논의들은 창작자-독자-작품-출판사-비평의 관계 속에서 다룰 문제로 여겨집니다만, 그간 한편으로 창작자 개인의 창작 윤리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출판사의 개입의 문제로 다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가 재편되면서 생겨난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지나치는 이 문제들이 앞으로 다른 형태로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기존의 문학관이나 출판문화, 문학의 환경 변화나 독자관 등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두루 논의하기에 앞서 선생님들께 간단한 소개와 근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성은 : 시 쓰는 강성은입니다. 근황은 거의 집에 있다가 동네 밖을 두 달 만에 벗어났네요. 마스크를 끼고 만났지만 반갑습니다.
정용준 : 소설가 정용준입니다. 반갑습니다. 저 역시 코로나로 집에 많이 있어요. 곧 개강이라 수업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김미정 : 평론하고 있는 김미정입니다. 서울시민으로 20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사를 해서 경기도민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살 때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많이 느끼고 있는 나날입니다.
조우리 : 소설 쓰는 조우리입니다. 최근까지 한 달에 한 편씩 단편소설을 써서 독자들께 직접 보내드리는 프로젝트를 벌여서 마감을 하느라 저도 대부분 집에 있었네요. 오랜만에 밖에 나와보게 되었습니다.
진송 : 저는 진송이라고 하고 평론을 조금 썼어요. 학부 졸업을 앞두고 할 게 없어서 괴로운 두 달을 보냈어요. 6월부터 8월까지 할 게 거의 없는 상태로 도서관을 왔다갔다하면서 뭘 읽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개강을 앞두고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여기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
1.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계의 실감들: 소비자-독자 부상 그리고……
소영현 : 네, 반갑습니다. 먼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장 안팎의 변화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2010년대 전반에 걸쳐 문학계의 변화들에 대한 실감을 나누고, 김봉곤 작가나 김세희 작가 관련 사태가 야기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채로 계속 뜨거운 감자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발언이든 누구의 편에 서는 발언이 되어버리는 상황 속에서, 지금은 아무것도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장르별로 아마 다 다르게 느끼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한 변화들의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나눠보고 싶습니다.
조우리 :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체감한 것은 소위 ‘문학장’이라고 생각했던 지면에서의 논의와 실제 독자들이 느끼는 온도차가 상당히 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극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여러 변화들 속에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것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아마 누구라도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인데 우리 문학이 과연 독자들과 사회적 합의를 형성할 정도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장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논의 과정에서 창작자와 비평가들이 과연 독자의 목소리를 어디까지, 어떤 위치에서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 학습했던 독자라는 존재, 창작자로서 창작 과정에서 고려하는 향유자로서의 독자뿐만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독자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문학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향유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화해왔는데, 특히 2020년 7월에 김봉곤 작가에게 제기되었던 ‘사적 대화 무단 인용’ 문제에서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독자들의 입장이 두드러졌다고 느꼈습니다. 작품 내적인 문제제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의 환불이나 절판, 책이라는 상품의 가치에 대한 항의를 하는 소비자로서의 목소리로 이어졌는데, 그런 지점은 그간 우리 문학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 아닌가, 그리고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명확히 드러났으니 이제라도 그것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소영현 :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부상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시의 입장에서는 어떤가요?
강성은 : 일단 요즘 잡지를 많이 읽지를 못해서 어떤 논의가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졌는지 잘 모르는 부분도 있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학장이 변화한 부분이 조우리 선생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많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문단 내의 성폭력 관련 사건과 재판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서 여전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 듭니다. 제 주변이나 시단에서는 이 문제가 더 크기 때문에 절박하게 논의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는 해요. 저는 다른 얘기들을 더 들어보고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김미정 : 조우리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공감된 것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독자의 부상, 독자의 자기표현이라고 하는 것들에 함께 고무되었고, 그것이 협소성, 폐쇄성을 지목받아온 한국에서의 문학을 다르게 변화시키고 활력을 주는 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 2년 전 독자 논의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관점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즈음이기도 하고, 이제는 독자의 문제를 좀더 예각화해서 함께 고민해야 할 부지런함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조우리 작가님이 얘기하셨듯이 독자가 스스로를 소비자로 정체화하고 있다라는 점에 대해서는 실제로 상당히 경험하는 바인 것 같아요. 수용자의 체험이라는 것이, 종종 나는 주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하여 소비한다는 방식으로 구사되는데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근대 자본주의 시장의 산물인 것도 맞지만 한편으로는 그 압도적 조건에 갇히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추구해온 생물이기에 그 매력에 많은 이들이 투신해왔던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소비자 정체성이 전면화하는 장면들을 세계관이라기보다 일종의 포즈로서의 냉소, 위악이라고 이해해왔었는데, 최근에는 소비자 정체성이 진심, 세계관으로 통용되는 듯한 장면들에서 조금 생각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향유의 무수한 방법과 의미가 ‘소비자’라는 상징적 단어에 갇혀 고착화되는 듯한 상상력이 가장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대중 페미니즘의 동력에 대한 최근 국내외의 여러 목소리도 좀 귀기울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용준 : 요 몇 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고민과 함께 많은 것들을 겪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고 담론이 형성되었으며 던져진 화두에 많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고 더 깊고 넓게 파고들어야 할 사안들도 많이 있지만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커다란 물이 저와 제가 속한 세계를 뚫고 흘러간 것 같습니다. 숨을 고르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지금의 제 감각을 아주 사적으로 표현해보라면 쓸쓸하다는 것입니다. 장기화된 팬데믹 상황과 겹쳐 있어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여러 일들을 겪는 동안 저와 동료들 그리고 소위 문학이라는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거리두기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 거리의 의미와 감각은 다양한 것 같아요. 자숙의 의미도 있고 반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실망스러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도 있고 두려움과 증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여러 방식으로 애를 써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인식과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많은 것들이 정화되었고 변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모두 섬처럼 떨어져 있는 것이 서운하기도 합니다. 글은 혼자 쓰는 것이지만 작가들에게도 사회가 필요하고 동료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작가들이 모이는 것을 작가들 스스로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어요. 그것이 어떤 잘못과 문제를 예방하는 차원이라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받아들였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 덕분에 문학의 자리는 이전보다 맑고 깨끗해졌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투명한 물속에 물고기가 없습니다. 깨끗함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그곳을 떠나거나 피해야 했으니까요. 많은 질문과 물음 속에 살아왔습니다. 한 명의 작가 한 명의 개인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습니다. 한국 소설가로서, 남자 소설가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으로서, 늘 어떤 대표성을 갖고 있어야 했어요.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겠죠. 그것이 내내 어려웠습니다.
소영현 : 정용준 작가님이 지난 5년여의 시간이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비평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련의 사건들 이전에는 비평가들이 대면해서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가, 2015년, 2016년 계기로 오히려 더 많이 만났어요. 만나고 나서 겪은 갈등도 있지만 만나서 외롭지 않다는 경험을 새롭게 하기도 했거든요. 그런 의미로 강성은 시인님께 여쭤보고 싶은데요,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작가분들을 많이 만나기도 하셔서, 외로운 감각과 다른 감각이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강성은 :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거의 모임이 사라졌잖아요. 개별적으로 만날 수는 있겠지만 예전에 있었던 문단 내 모임이 많이 사라졌죠. 그런 자리를 통해서 동료들을 만나고 알게 되는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는 예전처럼 새롭게 시인들을 알게 되는 기회가 없어졌어요. 그런 모임에 아예 가본 적이 없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등단하고 몇 년이 지났는데 시인을 만나본 게 처음이라고 저에게 말한 젊은 시인도 있었어요. 저는 신인일 때 비슷한 또래의 젊은 시인, 작가들과 많이 교류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또래 시인들이 만나고 어울리면서 함께 재미있는 일을 기획하기도 하고 출간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하죠. 시를 쓰는 것 말고 책을 출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때라서 동료들에게 듣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지금도 저는 가장 되고 싶은 게 있다면 ‘젊은 시인’이에요. 젊은 시인들은 만나서 영향을 주고받고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 부분이 가장 아쉬워요.
그리고 제가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어서 교실 내에서 겪는 일들이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저는 예술고등학교에서부터 예술대학까지 강의를 하면서 꽤 많은 학생들을 만났어요. 문단 내 성폭력 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게 제가 아는 많은 학생들이 가해자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메일을 주고받거나 실제로 만나거나. 그런데 문단 내 성폭력 운동이 있기 전에는 학생들이 저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어왔는데도 전혀 몰랐던 거예요. 저에게는 너무 아찔한 경험이라 그 이후로는 안전한 교실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수업에서도 예전에는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던 말도 많이 해요. 작품을 볼 때 고려할 부분도 많아졌어요. 저뿐 아니라 학생들도 그렇습니다. 문학수업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수업 중에 공격적인 질문들이 오가는 합평 수업도 있었는데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저부터도 달라졌기 때문에 아마도 많은 분들이 교실에서 어려움을 겪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입장들이 다 이해도 되고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안전한 교실과 문학적 에너지를 나눌 동료들을 함께 얻을 수 있게 좀더 노력하고 소통하고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것이 요즘 저의 생각입니다.
소영현 : 진송 평론가는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젊은 평론가로서 어떤 변화를 겪으셨는지 여쭤보게 됩니다.
진송 : 저는 지면에 발표한 평론도 얼마 되지 않고 제도권에서 문학을 공부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요. 2016년을 전후로 한국문학이라는 장에 독자로 유입된 사람에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문학 내부, 혹은 평론가로서 발언하는 게 어색합니다. 독자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보셨는지가 궁금했어요. 왜냐하면 문학 혹은 비평에서 독자에 대해서 논의를 할 때 항상 추상적인,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저한테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상으로의 독자가 더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서 논의를 할 때도 비평을 보면서 기본적인 문학관이나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가치판단도 페미니즘 비평가와 그렇지 않은 비평가들 사이에 공유되는 게 거의 똑같은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나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또 비평의 구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독자들이 어떤 점에서 이 작품에 좋음을 느끼는지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다고 해야 될까요. 내적인 것에 대한 받아들임이 분명 독자들에게도 있었을 텐데, 이 알 수 없는 대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가다보니까 구체적인 내용, 반응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독자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보셨는지, 어떻게 접해보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이와 함께 이번 사건을 보고 거꾸로 2016년 즈음의 독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점이 있습니다. 피해자분들의 입장문에서 재현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드러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거든요. (김세희 작가는 피해 관련 모든 사실을 부인했고, 김봉곤 작가는 인정했기 때문에 사건을 중심으로 보자면 분리해서 다뤄야겠지만) 독자 문제를 중심으로 봤을 때, 김세희 작가 피해자분이 입장문에서 결국에 문제 삼은 것은 단편소설 「대답을 듣고 싶어」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도구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고, 김봉곤 작가 피해자분도 인용이 반인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내 아픔을 후지게 갖다 쓴 게 문제이고 맥락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김봉곤 작가에게 달았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걸 봤을 때 이게 2016년 즈음을 기점으로 삼아서 여성혐오적인 작품에 대해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재현 방식에 대해서 문제 삼았던 독자들의 상과 그렇게 무관한 흐름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해야 될까요. 이 사람들이 피해자이기 이전에 재현 방식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은 독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 ‘이야기의 주인이 나다’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흐름과도 연결지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승섭 선생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관련한 사건도 이런 흐름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결국은 새로운 독자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은 사건으로 보이기도 했다고 해야 할까요.
소영현 :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요. 문학 논의로 좁혀볼 수만도 없는 문제로서, 이야기의 주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며 재현을 문제 삼는 독자가 등장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우리 :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문단 내부의 구성원들에게도 상처를 남겼지만 독자들에게도 너무나 큰 상처였던 것 같아요.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을 통해 가해 사실이 밝혀지면서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최근까지도 재판이 계속 이어졌잖아요. 그런 과정을 보면서 문학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이 어쩌면 가해자들에게 권력을 주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독자들도 상처를 받았고, 이후에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빨리 내가 목소리를 보태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된다는 사명감도 생겼다고 생각해요. 문제제기나 공론화가 있을 때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SNS에서 수많은 의견들이 쏟아지는데 독자들이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독자들은 문학장 내에서 자정이 될 거라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몇 년 동안 해결이 안 되고 있고 표절이라든지 문학상 운영의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들도 문단 안에서, 문학장 안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죠. 그렇다면 독자가 직접 나서야 된다는, 불신의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자정될 거라는 기대가 전혀 없다,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 개개인과 작품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있겠지만 한국문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 집단에 대한 어떤 윤리적?도덕적 신뢰 이런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가해자가 있어서 나에게 가해를 했을 때 단죄가 되고 빨리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을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지켜봐온, 2015년 이후에 한국문학에서 벌어진 일들을 봤을 때 어떤 것도 깔끔하게 마무리되거나 청산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용준 : 이야기의 주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며 재현을 문제 삼는 독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주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문제를 깊게 자신의 입장에서 다루어준 것이 고맙고 좋았다는 독자도 있습니다. 소설 독자는 논문이나 뉴스 독자와 달리 글을 정보와 의견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닌 이입하고 경험하고 공감과 동감의 감각적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저 역시 그런 독자이고요. 그것이 잘 되었을 경우에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건과 이야기의 인물에게조차 공감하고 동감하고 마침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이 독자에게 인문학적 인식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의 변화까지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신중해야 합니다. 목적이 과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기에 불특정 다수의 독자의 반응까지는 예상 및 제어할 수 없더라도 창작하는 동안 발생하는 많은 지점들을 섬세하게 체크해야 합니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그 픽션의 재료와 근거는 현실과 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야기의 소재와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이 작가의 삶과 그 주변에 닿아 있다면 작가는 소설에 대한 고민 이전에 그것을 쓸 수 있고 써도 되는지 사적인 관계의 장 안에서 먼저 고민하고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소설을 한 편 쓴 적이 있었는데요. 어머니께서 재활용상자에 들어 있는 초고를 보시게 되었어요. 아마 아들이 무슨 글을 쓰는지 궁금하셨겠죠. 그런데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소설 속엔 아들과 어머니가 나왔는데 소설의 이야기와 인물을 동일시하신 거예요. 소설의 줄거리와 묘사 방식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 어머니는 상처를 받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들이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저는 그것이 일기가 아닌 픽션이라고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셨고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공간들과 오브제 미쟝센이 실제 저와 어머니의 디테일과 흡사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마음보다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저는 어머니의 마음 하나만을 고려해 그 소설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 삶에서 제 경험 속에서 소설을 발견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깁니다. 소설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노력합니다. 더 열심히 가공하고 몇 번이고 체크하면서요. 저는 이런 논의가 픽션이라는 기본 속성 자체를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소설의 텍스트는 독자의 삶과 내면 감정과 감각의 장 안쪽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느끼는 독후감의 핵심은 이야기와 작가 그리고 인물과 맺는 은밀한 사적인 교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이 지양되고 작가가 근심 끝에 창작과 작의 그 자체를 포기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네요.
2. 점검: 엉킨 실타래를 풀며
소영현 : 김봉곤 작가나 김세희 작가 관련 사태가 야기한 문제들로 논의를 조금 더 진전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독자 문제도 여러 측면에서 얘기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여러 사태들에서 해법이 될 때 독자가 알리바이처럼 쓰이는 사례가 없지 않은 것 같아요. 독자는 알 수 없는 모호한 존재인 건데 앞서 언급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독자들이 원해서 책을 폐기할 수밖에 없다든가 이런 방식으로 활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 독자가 이런 힘을 갖게 됐냐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로 한국에서의 재현에 대한 감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잖아요. 현실의 논리와 문학의 논리가 어느 순간 갭이 너무 심해져서 그것 사이의 갭의 가시화라고 해야 될까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갭의 구현물이 『82년생 김지영』이 아닐까 싶은데요. 현실은 척박한데 여성의 삶에 대해서 더이상 진전된 문학이 나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논리 속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것과, 현실의 논리 속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현실과 문학의 거리를 예전처럼 분리해서 보는 게 아니라 결합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현실이 문학 속으로 깊숙이 개입해 들어오면서 독자의 힘도 세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강성은 : 저는 출판사나 작가가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검토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사안의 심각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제가 크다면 일단 판매를 멈추고 문제 제기자와 대화를 통해서 혹은 중재자를 통해 시간을 두고 입장 차이를 좁혀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빠른 입장문보다는. 법적인 문제까지는 안 갔으면 좋겠는데 법적인 문제로 너무 빨리 넘어간 거 같아서 SNS를 통해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좀 안타까웠어요.
조우리 : 지금은 어느 때보다 ‘독자’의 존재가 뚜렷한 시기가 아닐까요. 독자들이 작가와 출판시장에 요구하는 바가 명백하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품을 원하는지, 어떤 작품은 원하지 않는지가 독자들의 선택에 의해 드러나고 있죠. 그런데 이런 독자들과 출판시장과의 관계가 부정적일 때에는 어떻게 상황을 타계해야 하는지 경험한 적이 없어요. 앞서 이야기 나눴던 것처럼 작가와 작품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우리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합의된 절차나 방법이 있는지, 문학뿐만이 아니라 어떤 예술도 지금까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논의하지 않았고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쪽도 제기 받은 쪽도 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출판사나 유통사에서도 고민이 많을 거예요. 이런 상황 속에서 만약 작가가 무결하다면 그를 주장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법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왜 문학의 문제를 법으로 해결해야 하느냐’라고 한다면, 그럼 법이 아니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한 작가에게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 문제를 작가와 독자가 합의하에 완벽히 마무리 짓는 방법이 있을까요? 작가는 한 개인이고, 독자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인데, 대중을 전부 만족시킬 수 있는 명확한 해명이라는 게 가능한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이거든요. 그리고 작가는 신상을 드러내고 평판에 영향을 받는 직업인데, 문제제기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위와 상관없이 복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잖아요. 이때 훼손된 작가와 독자와의 신뢰는 절대 이전과 같이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법으로 사실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싶어요.
진송 : 강성은 시인께서 일단 멈춰야 된다고 생각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일단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충분히 얘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 출판사와 작가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생각과 같이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그리고 조우리 작가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은데요. 제가 느꼈던 불만은 문학과 예술을 법으로 해결해도 되나 이런 측면이었다기보다 법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라는 측면, 그러니까 법에 대한 불신이 컸던 것에 가깝습니다. 낙태죄 폐지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동성혼 합법화도 되지 않은 나라에서 아웃팅을 과연 법이 문제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법이 얼마나 효용이 있는 건지에 대한, 그런 의문이 먼저 들었어요.
강성은 : 출판사와 당사자들이 충분히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판단할 때까지는 아주 중대한 사안에 있어서는 일시품절 상태로 두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너무 나이브한 생각 같기도 하네요.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문단_내_성폭력 운동 때도 유사한 고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단_내_성폭력 운동 때 가해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분들 중에 실제로 책이 절판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법적으로 처벌받은 사람과 아직도 법적 소송을 이어가고 있는 한 사람이죠. 물론 같은 수위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수가 피해자임을 알리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뭔가 합의된 장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출판사가 이러이러한 입장이고 작가는 이러이러한 입장이고 문제제기자는 이러이러한 입장이라는 것이 상세하게 정리되면 좋겠어요. 보고서 비슷한 것이라도 나오면 제일 좋겠지만. 독자로서는 각기 다른 입장의 당사자들에게 휩쓸리거나 휩쓸릴까 불안하고 법적 조치에 대한 신뢰도 없으니까요. 저는 출판사에서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소영현 : 누가 어디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기구나 이런 것도 없는 형편이고요.
강성은 : 출판사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기도 해서 이 자리에 출판사 직원도 한 분 정도 왔으면 했어요.
조우리 : SNS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화력이 떨어지면 일단락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관심이 다른 새로운 사건으로 옮겨가다보니 한 사건의 발단부터 마무리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활발하게 의견이 나오는 시점에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이라고 해도요. 대중이 알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대중이 반드시 다 알아야 하는가 싶은 지점들도 있어요. 작품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이 꼭 대중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사안인가, 어디까지 대중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소영현 : 최근 두 사건들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출판 관련자, 법 관련 분들을 모셔놓고 말씀 나눠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자리가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쓰는’ 사람으로서 고민해야 될 문제가 분명히 있는 거 같아요. 김세희 작가 관련해서도 어느 정도 문제가 일단락된 이후에야 뭔가를 논의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특정한 작가 개인의 문제로 한정할 수 없는, 문학적으로 ‘재현된 대상’의 ‘아웃팅’ 관련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지점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재현과 아웃팅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송 : 저는 이 사건이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김세희 작가 사건이 끝이 아니지 않을까요. 사후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어떻게 방지해야 할지 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 다른 분이 고발을 하시면서 내 얘길 쓴 것이고 그렇기에 문제가 된다고 하면 또다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만이 반복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3.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SNS 공론장에서 법정까지
소영현 : ‘쓰는’ 사람으로서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해도, 작가 개인의 작가 윤리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문제제기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모든 문제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미디어 환경 변화 애기를 빼놓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독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에 끼친 영향이 어마어마하고요. 이외의 여타 조건 변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강성은 : 독자가 목소리를 가지게 됐다는 게 가장 큰 변화 같아요. 김봉곤 작가와 김세희 작가 경우처럼 자전적인 소설 안에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등장시켜서 논란이 된 일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인데 SNS 등을 통해 독자들의 목소리가 생겨나면서 이 일이 가볍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커질 수 있는 힘이 된 거라고 생각해요.
조우리 : 제가 SNS에서 본 말 중에 인상 깊었던 건 그거였어요. ‘작가가 독자를 기만해서 공범으로 만들었다.’ 독자들은 작품을 소비하면서 스스로가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페미니즘 리부트, ‘#문단_내_성폭력’ 운동, 표절 사건 등에 본인이 연루되었다는 감각, 내가 무결한 독자가 아니라는 감각에 대해서 독자들이 두려워한다고 저는 느꼈어요. 빨리 입장을 밝히고 내가 공범이 아님을, 내 결백함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잘못됐다’라고 말함으로써 발 빠르게 피해자의 편에 서고 싶어하는 것은 #문단_내_성폭력 운동에서의 경험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보다 나은 쪽, 옳은 쪽으로 의견을 내서 힘을 보태야 한다는 감각 때문에 초조함을 느끼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SNS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게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SNS에서는 사용자 모두가 자신만의 타임라인으로 의견을 펼치기 때문에 논의가 순차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산발적으로 흩어지고, 이 때문에 어떤 합의라고 할 만한 것에 이르기가 어렵죠. 그리고 문제제기와 해명 과정에 드러난 주장들이 사실의 전부가 아닌데도 대중은 드러난 내용들로 각자의 해석에 따라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판단을 내려서 단죄하려고 해요. 여러 고려할 점들 때문에 당사자들이 공론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인데도 그런 점은 간과되고요.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처럼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논의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서로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 내걸린 대자보를 향해 지나가는 행인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물론 그런 방식이 필요한 공익의 문제도 있죠. #문단_내_성폭력 운동과 같은 것이요.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에 항상 도움이 되는 방식인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성은 : 미디어 환경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누구든지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채널, SNS 등을 가지고 있고 해야 할 말이 있고 억울한 일이 있을 때는 국민청원도 할 수 있죠. 그런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문학 환경 안에서도 크게 작동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자의 역할은 달라질 것 같아요. 과거의 독자는 멀리 있어서 잘 안 보이는 존재였는데 지금은 너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예전에 독자를 상상하면 책을 통해서만 만나고 현실에서는 안 보였거든요. 지금은 독자가 책을 읽는 것만 아니라 구매하고 알라딘이나 100자평도 쓰고 중고서점에 파는 행위까지 상상이 되는 거죠. 문학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저는 여전히 과거의 독자와 만나는 게 좋고 저 역시 그런 낡은 독자이지만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독자가 온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미정 : 선생님들 말씀에 대체로 동의하고요, 생각이 복잡해지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비슷한 사례들, 개인적으로 일본에서의 문학 환경에 관심이 있어서 살펴보는 편인데요. 과거 미시마 유키오나 유미리 같은 작가가 비슷한 문제들로 인해 어떻게 법정으로 가게 되고 어떤 판결이 나고 그것과 직간접적으로 일본에서의 문학이나 소설의 관념이나 방법에 어떤 영향이 가고 그런 것이 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근대의 소설, 문학 등의 구조를 공유하고 있으니 유비적으로 자꾸 생각하게도 되고요. 작년(2020년)에 한참 SNS가 뜨거울 때 마침 일본의 한 표상연구자(히비 요시타카)가 『프라이버시 소설의 탄생―모델 소설의 트러블사』라는 책을 냈는데요.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이 “타자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리얼리즘 소설은 작자 자신만 등장하는 궁극의 ‘사소설’만 남은 것 같다. 그것이 모델소설 120년 역사의 종말의 풍경이다.”라는 식의 내용이었어서, 사실 우리가 겪는 어떤 트러블들이 문학 혹은 예술을 둘러싼 근대적 관념을 재점검하고 적극적으로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 선생님들도 창작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거나, 개인의 윤리 혹은 개인 창작 문제로 더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말씀들에 동의합니다. 법과 미디어 등의 조건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틀도 그것에 굉장히 크게 제약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미 문학 자율성 개념 같은 것이 곤경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도 여겨지고요. 다른 많은 것도 그러하지만, 문학을 둘러싼 상황은 유례없이 이중 구속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는 분열적인 상황인 거죠.
가령, 법이나 미디어는 나를 나 개인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을 점점 강화하고 있죠. 문학과 예술이 아무리 ‘우리’의 ‘연결됨’을 이야기하더라도 실제 현실에서의 법만 하더라도 저작권법, 소유권의 문제는 조밀해지고 있죠. 또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을 하면 미디어 속에서는 진짜 개체로서의 나인지 아니면 내 생각과 감정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나의 것이라고 잘라 말하고 확신할 수 있을지…… 원론적으로 생각 하면 실제로 나라는 존재 자체 늘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관계 속에서의 나이죠. 이러한 어떤 복잡한 지형 같은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 피해와 가해, 개인 대 개인의 문제의 시비를 가린다는 방식만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많이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 더이상 나뉘지 않는 존재’(individual)라는 근대적 존재론의 단위, 나의 단위를 질문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유를 시작해야 얽힌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입니다. 개인, 개체의 사고는 곧 ‘차이’로서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고, 나만의 고유한 무엇, 너만의 고유한 무엇이라는 식으로 구획하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서구에서는 350년, 한국에서는 100년 가까이 자연화한 감각이죠. 그런데 과연 ‘나’는 오로지 ‘개인’으로만 존재하나, ‘차이’를 통해서만 나를 주장해야 하나. 이런 고민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쓰는 이의 태도, 읽는 이의 태도 다 같이 달라지는 지점이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진 이론적 지점들 통해서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충분히 말하기에는 다듬어야 할 것들이 있으므로 이 정도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조우리 : 저는 SNS상에서 의견이 다를 때 인신공격으로 가게 된다는 점때문에 법의 언어까지 고려하게 되었는데요. 지금의 SNS 공론장에서는 의견과 감정이 섞여 있어서 서로의 감정을 공격하는 방식의 대화를 하고 있다보니까 감정이 배제된 법의 언어에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이 좀 생기거든요. 예를 들어서 SNS에서 피해 사실을 공론화했을 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나와서 얘기를 하고 그것을 둘러싼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그 진위에 대한 것은 어떻게 논의가 되거나 진행이 되는지를 알아보기가 어렵고 서로의 주장에 대한 공격들만 계속 이어지는 방식으로 뻗어나가게 되니까. 피로가 단시간에 쌓이고 빨리 며칠 안에 출판사든 작가든 입장문을 발표해라, 빨리 이 문제를 봉합해서 이 모든 논쟁을 끝내라, 이런 압박 속에서 무언가를 충분히 검토하거나 서로의 주장을 맞춰보거나 이럴 기회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사자들 간에 이야기를 해보거나 시시비비를 가려볼 수 있는 장으로서의 법의 언어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SNS에서의 모든 논의는 시간이 흐르면 ‘가장 끝까지 이야기한 사람’의 의견만 남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심지어는 당사자 간의 합의와도 상관없이요. 보통은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떠나고 최후에는 비난의 언어밖에는 남지 않게 되더라고요. 지금 상황에서 지금 법의 언어가 예술이나 문학에서 일어난 문제를 명백하게 밝혀줄 것인가는 기대가 적은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SNS 공론장에서 주는 피로감이나 이런 것과는 별개의 어떤 완결성을 주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소영현 :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얘기 같은데 들여다보면 꽤 다른 의견들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환경 변화가 문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문학적 재현이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고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요.
정용준 : 과거의 독자와 지금의 독자는 다릅니다. 독자는 읽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예전에는 작가는 독자를 모르고 독자는 작가를 몰랐습니다. 작가가 독자를 선택할 수도 없었고 독자는 작가의 글에 개입할 수도 없었죠. 작가, 작품. 독자. 이 셋은 텍스트로 연결되었지만 컨텍스트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작가와 작품 독자 이 셋은 한 문단 속에 존재하며 상호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SNS를 통해 작가는 독자의 피드백을 바로 받을 수 있고 독자 역시 작가가 지금 무엇을 쓰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썼는지 심지어 감정과 마음까지 서로 알게 되었죠. 이런 현상은 분석하고 논의할 수는 있지만 바꿀 수도 바꿀 필요도 없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혹 이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그 역시 비판을 할 수 있지만 바꾸거나 돌이킬 수는 없는 전진이고 흐름입니다. 독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어떤 글을 출간하고 어떤 글이 좋고 가치가 있는지 제작의 단계와 비평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읽는 존재뿐만 아니라 읽고 싶은 텍스트를 결정하고 텍스트의 가치와 의미까지 논할 수 있는 종합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창작, 제작, 비평, 편집의 메커니즘은 바뀔 것이고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그것의 효과와 영향은 어떤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며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려면 유연함과 즉흥성 그리고 미디어 환경에 능해야 할 텐데 그것에 자신이 없고 감각이 둔한 작가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쪽인 것 같아요.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지게 될 텐데 걱정이 됩니다.
4. 여기 우리 모여, 문학의 이름으로
김미정 : 저는 문학 내부, 문학장이라고 하는 표현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 생각을 좀 하는 편인데요. 그것이 문학이라는 관념을 둘러싼 다양한 역할과 이해관계를 역동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문학 안과 밖이라는 식의 구분을 공고히 하는 작용도 크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 이후 문학장 비판의 언어가 오히려 문학장을 공고히 하는 측면도 있지 않나 싶고요. 문학 안에서 기존에 통용되던 논리들이 거의 유명무실한 게 대부분인데 자꾸 그런 환영을 소환해서 뭔가를 해야 된다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공회전한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문학을 하는 자리에 저를 두면서도 기존 문학 관념으로부터의 확장성을 꾀하는 편이라서일지…… 어떤 책임소지의 문제를 두고 단일한 대상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위 문학 안팎으로 연루된 복잡하고 세밀한 조건을 함께 보고 싶은데 자꾸 명료한 윤곽과 속도가 요구되는 것 같아요.
진송 : 갈등이 있고 그것을 내부적으로 조정하다가도 못 견디겠으면 사람들이 다 SNS로 뛰쳐나가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됩니다. 조정중인데 다 못 참고 입장문이 네다섯 개씩 왔다갔다하고……
조우리 : 문학장 안에서 잘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죠. 얼른 다른 방향으로 알려서 내가 생각하는 옳은 방향에 힘을 실어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문제제기들이 문학장, 예를 들면 지면에서의 논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작가에게 문제가 제기되고, 독자들도 그 문제의식에 동의를 했는데 평단에서 ‘우리가 분석해봤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라고 한다고 해서 작가의 무엇이 회복되는가, 무엇이 복원되는가 묻고 싶어요. 작가의 입장에서는 독자와의 관계가 훼손된 것인데, 한 번 훼손된 것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잖아요. 어떤 문제가 발생한 뒤에 작가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고 복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과 논의가 그간 전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합의가 되는 문제인가는 부차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겠지만요.
김미정 : 사회적 합의 말씀이 나와서 잠시 반농담이지만,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런 드라마틱한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할까 생각이 들어요.
소영현 : 사회적인 합의가 불가능한 게 사실이고 문학계 안에서 해결 불가능한 문제인 게 분명하고, 더구나 문학 안팎의 구분 자체가 그다지 유용하지 않기도 하고요. 그런데 또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는 해결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순간 사회의 해법밖에 남지 않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얘기할 수 있는 한 얘기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거꾸로 들어요. 해법을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심지어 해법에 대해서 거의 말할 수 있는 게 없더라도, 무엇이 논의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얘기를 집중해야 한다 이런 얘기는 필요한 게 아닌가.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우리 : 사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그저 문학장 안에서 어떻게 해보자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면서도 고민이 많았어요.
김미정 : SNS 등에서의 소통 방식이 일상의 리얼리티를 이루고 있기에 지금 이 자리가 전통적 공론장이지만 상대적으로 무력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소영현 : 관점과 정치적 입장으로 편가르기가 심해진 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 팬데믹 상황 때문이기도 하죠. 이전에는 저기 SNS세계가 있고 여기 현실이 있는 것처럼 어떤 구분이 가능했다면, 코로나 이후로 어느 순간, 현실적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은 건 SNS세계밖에 없어진 상황에 처하게 되었잖아요.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뭔가를 느끼거나 공유하거나 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더 심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김미정 : 그런 듯도 합니다. 특히 문학 전공하는 학생들과 자주 만나면서 느끼지만 스스로에 대한 외부 시선으로부터의 열패감(가령 적폐, 시대착오)도 상당한데, 그런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실제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프레이밍된 이미지 같은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진송 : 문학이 적폐라고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그 적폐조차 따라오지 못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문학 안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해 다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퀴어에 대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데, 문예지 밖으로 나가면 그런 거 아예 통하지조차 않는 곳이 너무 많아서 이걸 적폐라고 하기에는 좀…… 현실이 안 받쳐준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문학권력의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학계 내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논쟁들을 볼 때 현실과 치열하게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이런 논쟁이 현실과 괴리된 채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용준 : 저는 이 좌담에 참석한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싶은지,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힘들어요. 하지만 근 몇 년 동안 자신의 작의를 지나치게 고민하고 쓰고 싶은 마음과 표현의 문제에 과중하게 시달리고 있어요. 물론 미래의 창작자들이 무책임한 작의와 자의적 판단과 미학에만 몰두한 표현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각성하고 조심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고 답도 방법도 없는 미궁 속을 빙빙 도는 고민이라면 그래서 질문과 물음에 갇혀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쓰는 것을 조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 의심하고 경계하고 심지어 그 자체로 옳지 않다고 자책하고 자학하는 의식이 만약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고민해볼 문제입니다. 아직 해결할 문제들 미진한 부분들 많지만 많은 일들을 겪고 지나오면서 새로운 인식이 생겼고 피해와 가해를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맞는 용어의 선택과 태도도 문학의 자리 속에 어느 정도 자리 잡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불합리와 비윤리를 감지하는 감각도 높아졌고 반응 속도와 표현력도 빠르고 강해졌다고 생각해요. 그 결과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불공정한 계약의 문제, 출간하는 책과 잡지, 공모전 및 등단의 문제, 심사위원의 자격 및 구성의 문제까지 변화는 폭넓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완벽주의자들이 갖는 딜레마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깥에서 바라볼 때에는 충분히 객관적으로 애쓰고 있는데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고 여기는 엄격함 때문에 자꾸만 자기를 내리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해요. 문화 예술계 안에서만 단순 비교했을 때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다른 예술에 비해 문학의 장은 지속적이고 폭 넓게 이런 문제를 끝까지 다루고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위기가 장기화되면 우리는 문학이라는 정체성을 부끄러워하고 민망해하는 저조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자아비판과 내가 속한 세계를 끝없이 냉소하고 회의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감과 애정을 회복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이런 논의도 어떤 합의와 해법 혹은 해결을 향해 모으고 통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많이 이야기하면서 정보를 넓히고 주요한 사안을 알리고 여러 시각, 몰랐던 입장, 사정, 과정 등등을 나누는 것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아요. 그것을 하나로 모으려고 애를 쓰면 이상한 목적이 생기게 되고 사안과 논의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가 있습니다. 문학 안에서의 해결이나 합의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요. 안에서 서로 합의 가능한 문학적 기준과 판단을 만들면 좋겠지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듯 그것은 모아지기는커녕 넓혀지기만 할 뿐입니다. 저는 문학의 문제도 어떤 법과 기준을 정해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때 끝없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이 나지 않는 것을 해결이 날 때까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법을 마련해서 그 논리와 기준으로 모종의 판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아요.
소영현 : 정용준 작가께서 우리가 해온 것에 대해서 자신감과 애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점에 동의해요. 그럼에도 문학계 내에서 적체된 문제라고 해야 될까 그런 것들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로 가시화된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가시화된 문학계에서의 문제들에 대해서 환경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검토해보는 (오늘 이 좌담과 같은) 자리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고요. 다른 한편으로 법 문제의 경우에도, 법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지금 현 상황에서 선생님들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처럼 법의 논리가 도입되는 순간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도 자체가 확정되어버리는데, 사실 그것들은 담론 투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고, 계속 변화하는 거잖아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 것도 문제이고요. 더 중요한 건 원래 사회 문제 속에서의 피해와 가해처럼 선명해 보이는 게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고 얘기를 해왔던 게 문학인데, 그것 때문에 벌어진 문제를 거꾸로 법의 논리로 물어보는 방식에 위험성이 없지 않기도 하고요. 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지금 현 상황에 대한 논의도 좀더 깊이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합의를 향해 논의를 모으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확장된 논의들의 축적 없이는 (작가) 개인들에게만 지워져버리는 여러 책임들에 대한 느슨한 의미에서의 해결책도 마련하기 어렵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 화에 계속)
*본 좌담은 2021년 8월 20일 금요일 오후 2시 연희문학창작촌(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에서 진행했습니다.
사회자 및 패널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성은, 김미정, 소영현, 정용준, 조우리, 진송
강성은 : 죽기 전에 쌓인 책들을 다 읽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고 오늘도 책을 사는 사람.
김미정 : 여러 모로 심기일전 중이다. 최근 《뉴래디컬리뷰》라는 잡지를 꾸리며 다양한 분야의 분들과 비평적 사유와 실천에 대해 고민 중이다.
소영현 : 비평을 한다. 비평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날들이다.
정용준 : 소설을 쓴다. 읽기와 쓰기를 계속 좋아하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과 노력을 하며 산다.
조우리 : 다음은 이전과 달라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소설을 쓴다.
진송 : 연결되고 싶다. 연결하고 싶다.
2021/10/14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