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
7회 특별한 친구들아
우리는 모두 제 인생의 주인공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삶의 조연이다. 그런 누군가의 서사 속으로 문득 초대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특별한 존재로 거듭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세계는 풍성해진다. 고백하자면, 작품을 읽을 때 아무리 주인공이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더라도 주변인물이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앞서 말했듯, 홀로 특별한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특별한 주변인물들이 부재한다면 주인공의 서사와 세계는 빈약해지기 십상이다. 가끔씩은 주인공보다 그런 ‘특별한 친구’들의 안부를 수소문하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괴짜, 오수미의 경우
『우주로 가는 계단』(전수경, 창비, 2019)의 주인공인 열세 살 지수는 과학에 심취해 있다. 이를테면 이웃인 701호 오수미 할머니에게서 어떤 끌림을 느끼자 곧바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떠올릴 정도. 할머니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첫 만남에서 할머니는 지수가 들고 있던 월간 『과학 세계』를 알아보고 표지 모델인 스티븐 호킹을 보며 이렇게 묻는다. “스티븐 좋아하니?” 마치 친구를 부르듯 자연스럽게. 나중에는 초등학생 지수에게 케임브리지 연구소 논문을 권한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자연히 둘의 대화는 아주 괴짜처럼 들린다. 함께 개기월식을 보다가 할머니는 “2025년 9월 7일 월식도 같이 볼래?”라고 묻고, 지수는 그해에 자기는 호킹이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과에 갈 예정이라 안 된다고 답한다. 그러자 약속이 조금 수정된다. “2025년 9월 7일 월식은 케임브리지에서!” 참 괴짜들이다. 그래서 보는 내내 사랑스럽다. 동화를 조금만 읽어도 우리는 오수미가 전문 과학자임을 알 수 있다. 허나 그는 지수에게 단순히 과학 지식을 가르치려는 인물이 아닌, 훗날 월식을 함께 보기를 약속하는 친구로서 곁에 자리한다. 시공간과 우주를 초월하여 맺어진 괴짜들의 우정이 정겹다.
우울할 때면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읽는 지수에게서, 문득 마틸다(Roald Dahl, Matilda, Puffin Books, 1988)가 겹친다. 네 살부터 찰스 디킨스, 샬롯 브론테, 제인 오스틴 등을 섭렵한 마틸다 또한 하는 말마다 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괴짜처럼 들린다. 어른들은 그런 마틸다에 놀라워하거나 반대로 억압한다. 하지만 지수는 그곳에서 홀로 괴짜로 머물지 않는다. 오수미라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랠리를 주고받듯, 서로의 말을 받아 안을 수 있는 그런 친구. 두 괴짜의 수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그들을 2025년까지 떨어뜨려야 하다니, 이건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다.
반려, 암스갈의 경우
몽골을 무대로 한 정성희의 『늑대와 소녀』(출판놀이, 2017)는 책을 열어보기도 전에 우리에게 익숙한 한 가지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이를테면 애니메이션 <알라딘>(Aladdin, 1992) 속 자스민과 호랑이 라자의 모습. 책의 표지에는 소녀 옆에 그의 키만 한 하얀 늑대가 늠름히 앉아 있다. 늑대 암스갈과 호랑이 라자는 모두 커다랗고 위협적인 존재이지만 소녀 헤를렝과 자스민에게만큼은 온순한 친구다. 일종의 반려동물인 셈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나의 로망이기도 했다. 그들처럼 커다란 동물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을 달래려는 일환으로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 애청자가 되어버린 그때 그 시절.
표제는 “늑대와 소녀”이지만 실상 주인공은 헤를렝의 오빠 타미르다.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마을로 돌아온 타미르는, 탐욕이 어떤 경로를 통해 마을 공동체 속으로 틈입하는지, 또한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삶의 방식을 무너뜨리고 훼손하는지를 생생히 목격한다. 그로 인해 타미르와 암스갈은 목숨을 건 여정을 떠나야 했다. 그 모습은 흡사 한 편의 버디무비를 연상케 한다. 인간과 동물의 여정임에도,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진짜 ‘버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길들이고 기르는 것이 아닌, 동일한 상실을 공유하고 기억하는 두 인물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려가 무엇인지 얼핏 본 것만 같다.
믿음, 피트의 경우
최영희의 SF동화 『알렙이 알렙에게』(해와나무, 2017) 속 주인공 알렙은 테라 행성의 ‘마마돔’에서 나고 자란 소녀다. 언젠가 돔 외부의 세계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 알렙은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실은 마마돔이라는 제한적인 세계 속에서 선별적으로 구축된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깨달음은 알렙 혼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이는 삼엄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알렙에게 진실을 알리려 한 조력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피트는 “알렙이 알렙에게” 향하는 길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 그 중심에는 알렙에 대한 믿음이 있다. 본래 의심이 많은 피트지만 알렙을 향한 믿음만큼은 늘 굳건하다. 심지어 알렙이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때에도 말이다.
종종 우리는 믿음이 사실 이후에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에 관한 사실을 몇 조각 움켜쥐고서야 그를 ‘믿음직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즉, 믿음으로부터 믿음직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이가 있기에 비로소 우리가 ‘태어난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기억해야 한다. 알렙이 알렙에게 이르는 모험이 완수된 데에는 그 길목마다 피트를 비롯한 친구들의 단단한 믿음이 자리했기 때문이었음을 말이다.
강수환
당신과 2025년 9월 7일의 월식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2019/07/30
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