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퀴어문학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네, 한국에도 퀴어문학이 있습니다.”라고 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하지만 이제 그 소개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활동을 늘려나가고 있는 단체. 적다면 적은 인원이지만, 매 회의마다 일을 분담하여 조금은 느슨해도 꾸준히 일을 진행하는 단체. 아무튼 그렇게 발족 5년차에 접어든, 무지개책갈피라는 단체에 활동가로 합류하게 되고 나서 종종 퀴어문학 소개글(?)을 쓸 기회가 찾아왔다. 그때마다 설렘 반, 부담 반을 담아 웃으면서 마감 직전에 밤을 샜던 것 같다.
   무지개책갈피는 문학웹진 《비유》 ‘하다(!)’ 코너에 2018년 ‘읽는 퀴어: 우리는 어디서든’과 2019년 ‘무지개책갈피―퀴어문학의 경계, 그 너머’를 연재한 바 있다. 전자에서는 전국에서 퀴어문학 세미나를 했고, 후자에서는 퀴어문학 포럼을 열어 퀴어문학의 확장을 도모했다. 이번에는 《비유》 ‘쓰다(…)’ 코너에 발표된 작품을 ‘퀴어’라는 키워드로 엮어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따라서 원고를 쓰기에 앞서, 《비유》에 게재된 작품 중 놓쳤던 작품을 전부 읽어봐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꼬박꼬박 읽을걸.
   사실 퀴어문학이라는 범주를 만드는 것이 긍정적인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고민은 단체 내부에서도 자주 논의되었다. 퀴어문학을 정의하기가 어렵고 조심스러워질수록 무지개책갈피의 DB 작업의 맹점이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무지개책갈피 퀴어문학 리스트에 있길래 읽었는데, 포비아가 쓴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같은 후기가 종종 생기는 것이었다. 굳이 퀴어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퀴어 독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이 있는 반면, 퀴어 독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만 어쨌든 확실하게 퀴어를 등장시키는 작품이 있다. 그래서 무지개책갈피는 단순 DB 작업뿐만 아니라 리뷰, 리딩챌린지, 팟캐스트 등의 형태로 보다 읽을 만한 퀴어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일종의 변명이었다. 고해하자면, 나는 《비유》에 있는 작품을 모두 꼼꼼하게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 까닭과 함께 퀴어문학이라는 범주가 더 넓어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글에서 소개하지 않았더라도 퀴어문학이라고 불릴 작품이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비유》에서 ‘퀴어함’을 찾아보도록 하자.


   퀴어문학 1번 유형 : 명실상부형

   최제훈의 「여기는 게이바가 아닙니다」1)
   박상영의 「태어나긴 했지만」2)

   제일 먼저 느꼈던 건, 《비유》의 해시태그와 작가 소개 형식이 소소하게 퀴어하다는 점이었다. 일전에 ‘하다(!)’ 코너에 게재되었던 한 대담에서, “작가 소개란에 등단한 지면이나 직업 등의 소속밖에 적을 수 없었던 경험”이 비판적으로 서술된 적 있었다. 그러한 틀을 깨고 자신을 스스로 명명하는 일은 퀴어 정체성과 맞닿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퀴어’ 라거나 ‘#퀴어문학’ ‘#성소수자’ 같은 해시태그를 쓴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창작자였어도 스스로 굳이 그런 식의 해시태그를 집어넣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제목 또한 특별히 다를 것 없었다. 이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잘 있는 작품을 퀴어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떼어내서 소개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사실은 이렇게 단순하게 이해하면 안 되는 주제가 아니었는지 끊임없이 회의하면서도 제일 처음으로 소개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최제훈의 「여기는 게이바가 아닙니다」는 제목 그대로 게이바가 아닌 게이바에서 일하게 된 신입 바텐더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생활 밀착형(?) 퀴어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게이바가 아니었는데 게이바가 되어버려서 결국 독실한 크리스천인 건물주와 기타 이유로 인해 문을 닫게 되는 ‘누벨 아테네’ 이야기. 이렇게 짤막한 소개만 읽어도 벌써 재밌지 않은가.
   박상영의 「태어나긴 했지만」은 앞서 소개한 작품과 달리 마음을 무겁게 만든 소설이었다. 누군가의 아픈 삶의 단면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또한 상당히 명료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서, 퀴어문학 레이더에 쉽게 포착되었다. 작품 소개 해시태그에 ‘동성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에만 초점을 맞춘 독서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런 독서가 뭐지? 그게 가능한 건가?) 하지만 작가가 작품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직접 골랐는데, 그중에 동성애가 있다면 퀴어문학으로 소개해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싶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땐 그냥 널 바꾸는 게 편할 걸.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냐.(「태어나긴 했지만」 부분)


   세상이 바뀌지 않아서, 그런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인물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개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여기서 개인적인 믿음 하나를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통해 타자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면, 사회에 만연한 혐오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나로 하여금 문학을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러한 활동을 지속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있었다, 라는 의미

   한정현의 「소녀 연예인 이보나」3)
   남궁지혜의 「버터조개란 사실」4)

   무당, 여성 국극이라는 소재는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이다. 예전에 일민미술관에서 진행되었던 공동체 아카이브 전시에서 정은영 작가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본 적 있다. 젠더 규범을 벗어나 정체성을 가로지른다는 점이 퀴어하다 생각되었고, 단순하게는 멋지게 분장한 여성 배우에게 반하는 ‘소녀 팬’의 존재가 떠올라서 좋았다. 한정현의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근대 역사라는 배경과 트랜스젠더 서사가 만나 큰 매력을 지닌 소설이다. 그 매력은 사람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일종의 감동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나면, 긴 여운에 사로잡힐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지워진 존재들을 다시 호명하는 것. 이름을 부르는 것. 그리고 기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이 작품을 소개한다.
   다음으로 소개할 작품은 남궁지혜의 「버터조개란 사실」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소설은 참 난감한 상황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한 먹방 유튜버의 영상에 우연히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퀴어로서는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잠시 후’ 온다는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고, 주인공은 점점 지치고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으로 도로를 본다. “누군가는 나를 목격했다지만, 나는 그곳에 없고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누군가가 목격해주지 않아 또 없는 나날들.”이라는 작가 소개 속 문장도 어딘가 와닿는 구석이 있다. 픽셀 속 진실, 목격담. 그래서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SF에서 퀴어함을 찾다

   백승연의 「프론식 사랑법」5)
   김초엽의 「로라」6)

   “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는 내가 불쌍하대!”(「프론식 사랑법」 부분)


   이종산의 『커스터머』(문학동네, 2017)를 읽고 SF와 퀴어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했던 경험이 있다. 최근에는 팟캐스트 〈무책임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어슐러 르귄의 몇 작품을 퀴어하게 읽기도 했다. 진입 장벽이 느껴져 쉽사리 손이 안 가던 장르였는데, 막상 읽다보니 SF라는 세계는 굉장히 넓은 가능성을 가진 곳이었다. SF로 보여줄 수 있는 퀴어적 알레고리는 무궁무진하다. 백승연의 「프론식 사랑법」에서는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을 치료하고자 ‘프론’이라는 인공 생물체를 만든다. 이 ‘프론’이라는 존재는 사전에 설정된 한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하게끔 만들어진다. 여기서 ‘사랑을 하지 않는 병’으로 인해 사회적 고통을 겪는 ‘해영’을 보면, 에이로맨틱과 같은 정체성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어떤 사회적 합의나 규정에 어긋나는 “돌연변이”와도 같은 사람은 모두 퀴어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김초엽의 「로라」는 디스포리아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는 소설이다. 소설은 자신의 팔이 셋이라고 지속적으로 느껴 인공 팔을 달게 된 ‘로라’를 바라보는 연인 ‘진’의 이야기로 서술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트랜스젠더 서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이해할 수 없음’ ‘이해받을 수 없음’으로 생긴 두터운 벽과 사회의 혐오적인 시선 등, A를 말하면서 B를 보여주는 방식을 아름답게 구현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트랜스젠더 혐오로 점철된 사회에서 이러한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읽기를 바랐다.


   퀴어문학이란? 해석하기 나름!

   김혜진의 「속사정」7)
   정유정의 「레인보우스쿨」8)
   박은선의 「내가 사는 피부」9)

   마지막으로, 다른 성별 지칭어 없이 ‘너’와 ‘나’로 이루어진 김혜진의 「속사정」이라는 소설과 함께, 소설 이외의 장르에서 찾은 퀴어문학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속사정」은 이별을 미루는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두 사람만의 애틋한 기억을 붙들게 되는 감정을 묘사했는데, 두 사람의 성별과는 관계없이 독자는 마음껏 그 사랑을 상상하고, 경험해볼 수 있다. 정유정의 「레인보우스쿨」은 전학생 ‘보라’가 분홍색, 파란색으로 구분된 체육복을 거부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젠더 규범과 성 평등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동화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전반적으로 시라는 장르에 관해 언급을 거의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문학에서는 시만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영역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다만 그 열려 있는 해석 가능성은 곧 모호함으로도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무지개책갈피 퀴어문학 DB에도 시는 비교적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박은선의 「내가 사는 피부」는 젠더 정체성에 관해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한다. 일단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앞으로는 더 많은 시를 더 예리한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나열하며 눈을 반짝이는 경험과는 사뭇 다른 감정을 지닌 채 이 글을 썼다. 사랑한다는 말은 일정한 무게를 지녀야 한다는 점이 나를 부담스럽게도, 설레게도 만든다. 그래서 매번 용기를 내서 말해본다. 나는 역시 문학을 사랑하고 있고, 퀴어문학을 사랑한다. 다른 독자들에게도 그런 사랑의 기회가 찾아갔으면 좋겠다.


다홍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활동가. 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백만 개의 취미 중 첫번째는 문학으로 인류애 충전하기.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읽고 씁니다. @Dahong_Q

2020/02/25
27호

1
《비유》 2019년 5월호(쓰다 17호) 최제훈의 「여기는 게이바가 아닙니다」 바로 가기
2
《비유》 2018년 4월호(쓰다 4호) 박상영의 「태어나긴 했지만」 바로 가기
3
《비유》 2019년 9월호(쓰다 21호) 한정현의 「소녀 연예인 이보나」 바로 가기
4
《비유》 2019년 10월호(쓰다 22호) 남궁지혜의 「버터조개란 사실」 바로 가기
5
《비유》 2018년 6월호(쓰다 6호) 백승연의 「프론식 사랑법」 바로 가기
6
《비유》 2019년 11월호(쓰다 23호) 김초엽의 「로라」 바로 가기
7
《비유》 2018년 12월호(쓰다 12호) 김혜진의 「속사정」 바로 가기
8
《비유》 2019년 2월호(쓰다 14호) 정유정의 「레인보우스쿨」 바로 가기
9
《비유》 2019년 10월호(쓰다 22호) 박은선의 「내가 사는 피부」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