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14회 ‘선량한 피해자’는 가능한가
영화 〈기억의 전쟁〉 주인공 딘 껌을 처음 만났을 때
“하미 해변에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딘 껌(Ðinh Cam).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하미 마을 출신이래요. 보라 감독이 만나보면 좋을 것 같아요.”
2016년, 영화 〈기억의 전쟁〉 베트남 촬영 현지 통역사의 말이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다. 한국어-베트남어 통역사와 마을 아주머니의 순차통역을 통해 인사했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면 통역사가 베트남어로 통역하고 아주머니가 보디랭귀지로 옮겼다. 그는 얼굴 표정과 손으로 말했다. 아주머니가 이해하는 한에서 베트남어로 옮겨졌고 통역사가 한국어로 통역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사라지거나 잘못 전달되었다. 그걸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언어가 홈사인(Home Sign, 주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비공식적 기호)이었기 때문이다. 홈사인은 수어(수화언어)라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서로간의 약속이다.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수준의 기호들은 바디랭귀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수어사용자들은 홈사인을 비수어사용자들에 비해 빠르게 이해하고 습득한다. 수어 역시 그 과정을 통해 형성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국 수어가 모어인 나 역시 그랬다. 그가 얼굴 표정과 손을 움직여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의 농인 부모를 보는 듯했다. 나는 입을 움직여 한국어로 말하는 대신 손과 표정을 움직여 대답했다. 중간에서 통역을 하던 팀장님과 아주머니가 당황해했지만 직접 소통하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파일 하나를 들고 나왔다. 한국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이게 뭐지, 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성들의 단체 사진이었다. 이게 뭐냐고 어깨를 올리며 양손을 뒤집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가리킨 후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허공에 대고 낮게 두 번 가리켰다. 낮은 키, ‘어리다’라는 의미였다. 베트남전쟁 당시에 태어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그는 베트남 공식 수어가 아닌, 홈사인으로 말했다.
“나 어렸을 때 한국군인들 구두 닦다. 나중에 이 사람들 비행기 타고 오다. 돈 많이 줬다.”
껌은 한국인은 정말 돈이 많다며 특히 이 사람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고 꺽, 하고 소리를 내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입고 있는 KOREA 티셔츠와 모자, 재킷도 모두 참전군인들이 주고 간 것이라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한국 포털 사이트 블로그 인쇄물이 있었다. 하미 해변에 있었던 한국 부대 지도였다. 한국군 깃발이 달려 있었던 초석 사진도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집 앞을 가리켰다.
“여기.”
마당에 그 초석이 있었다.
껌은 참전군인들이 전쟁 당시 주둔했던 곳을 찾아오는 전적지 투어를 하러 온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집 앞에 있는 초석은 주둔지 입구에 있었던 걸 옮겨온 것인데 비닐을 덮어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참전군인들이 하미 해변에 가면 부대 앞에서 구두를 닦는 일을 했던 귀머거리가 있다고, 그를 찾으면 전적지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주고받는 듯 했다. 전쟁 당시 껌은 한국군의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었고 시시때때로 들리지 않는 불쌍한 아이라며 동냥을 받았다. 전쟁 이후에는 청춘을 바쳤던 베트남으로 기념 여행을 오는 참전군인의 가이드를 자청하며 수고비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려운 단어보다는 최대한 단순하고 시각적인 표현을 골라 몸으로 말했다. 한국 수어를 기반으로 한 홈사인이자 보디랭귀지였다. 노트에 ‘1968’과 ‘HAMY’라는 단어를 썼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펴고 순서대로 앞을 향하게 놓은 후 발사했다. ‘총을 쏘다’라는 단어였다. 목을 긋고 죽은 시늉을 했다. 아저씨가 잠시 머뭇거렸다. 다시 한번 노트에 적힌 ‘1968’ 단어를 가리켰다. 다음으로 ‘HAMY’라는 단어에 손을 옮겼다. 하미 마을 쪽을 향해 팔을 뻗고 웃음기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눈 아래 댔다. “봤다”라는 단어였다.
저기서 봤어. 방공호 들어가서. 엄마랑. 5시간 동안 방공호에서 봤어.
도망갔어. 총 쏘고 무서워서 보고 무서워서 도망갔어, 방공호에서. 내가 어렸을 때. 소. 소. 저기. 소 6마리. 총 쏴서 소가 다 죽었어. 배 총 맞아서 죽다. 한국군 나빠. 미군은 총 안 쐈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구두 닦는 일. 신발 닦는 일 했어. 미군이 돈 많이 줬어. 최고야. 한국군은 담배, 마약 절대 안 했지. 근데 미군은 마약 많이 했어. 한국군은 여자를 안았어. 이렇게 생긴 애들 안고 뽀뽀하고. 정말 심했어. 구두 닦을 때, 쟤 같은 애들. (촬영 감독을 가리킨다) 다 봤어. 돈 이만큼 주고 예쁜 애들을 안고 섹스했어. 여기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라이따이한) 많아. 한국군은 자기들끼리 비행기 타고 갔어. 결혼 안 하고 갔어.
나는 초석 사진을 가리켰다.
한국군이 오면 사진 찍고 싶어 해. 그럼 나는 사진 안 된다고. 돈 달라고. 사진 찍으려면 돈 내라고. 여기 돌 사진 찍으려면 돈. 여기, 맞아, 우리 집 앞 여기야.
그는 영화 주인공으로서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시각을 기반으로 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어 시청각매체인 영화에 매우 어울렸다. 그러나 공식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살 관련 기사랄지 연구 자료의 증인으로는 채택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베트남 수어통역사를 대동해도 그의 언어를 정확하게 통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학살로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학살을 목격했다고 몸으로 말하는 그의 표정과 손짓은 그 어떤 것보다 명징하고 강렬했다. 전쟁을 비(非)남성의 시선으로 다르게 바라보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할 때 그는 그 콘셉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그는 참전군인들이 전적지 투어를 할 때 가이드를 하고 대가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를 주인공 중 하나로 삼는다면 다른 주인공, 직접적으로 학살 피해를 당한 이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인데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도 학살의 피해자다.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구두 닦는 일을 하고 동정표를 받으며 전쟁을 살아냈다. 학살을 겪었고 죽기 살기로 도망 나와 기억하고 때로는 기억하지 않으며 생을 살아냈다. 그런데 다른 이들처럼 가족 구성원을 잃지 않았다고 해서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전쟁 이후 참전군인들을 돕는 일로 돈을 번다고 해서, 그가 ‘선량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를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고통과 상실, 아픔의 경중은 잴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나는, 이 학살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꼭 그래야 하는가. 그런 생각과 선택을 하는 나는 윤리적으로 옳은가.
그러나 이것 하나는 명확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선택한다면 영화의 기획 의도를 보다 더 잘 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수어가 모어인, 농인 부모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자 감독인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딘 껌은 영화 〈기억의 전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6년, 영화 〈기억의 전쟁〉 베트남 촬영 현지 통역사의 말이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다. 한국어-베트남어 통역사와 마을 아주머니의 순차통역을 통해 인사했다. 내가 한국어로 말하면 통역사가 베트남어로 통역하고 아주머니가 보디랭귀지로 옮겼다. 그는 얼굴 표정과 손으로 말했다. 아주머니가 이해하는 한에서 베트남어로 옮겨졌고 통역사가 한국어로 통역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사라지거나 잘못 전달되었다. 그걸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언어가 홈사인(Home Sign, 주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비공식적 기호)이었기 때문이다. 홈사인은 수어(수화언어)라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서로간의 약속이다.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수준의 기호들은 바디랭귀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수어사용자들은 홈사인을 비수어사용자들에 비해 빠르게 이해하고 습득한다. 수어 역시 그 과정을 통해 형성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국 수어가 모어인 나 역시 그랬다. 그가 얼굴 표정과 손을 움직여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의 농인 부모를 보는 듯했다. 나는 입을 움직여 한국어로 말하는 대신 손과 표정을 움직여 대답했다. 중간에서 통역을 하던 팀장님과 아주머니가 당황해했지만 직접 소통하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파일 하나를 들고 나왔다. 한국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이게 뭐지, 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성들의 단체 사진이었다. 이게 뭐냐고 어깨를 올리며 양손을 뒤집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가리킨 후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허공에 대고 낮게 두 번 가리켰다. 낮은 키, ‘어리다’라는 의미였다. 베트남전쟁 당시에 태어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그는 베트남 공식 수어가 아닌, 홈사인으로 말했다.
“나 어렸을 때 한국군인들 구두 닦다. 나중에 이 사람들 비행기 타고 오다. 돈 많이 줬다.”
껌은 한국인은 정말 돈이 많다며 특히 이 사람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고 꺽, 하고 소리를 내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입고 있는 KOREA 티셔츠와 모자, 재킷도 모두 참전군인들이 주고 간 것이라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한국 포털 사이트 블로그 인쇄물이 있었다. 하미 해변에 있었던 한국 부대 지도였다. 한국군 깃발이 달려 있었던 초석 사진도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집 앞을 가리켰다.
“여기.”
마당에 그 초석이 있었다.
껌은 참전군인들이 전쟁 당시 주둔했던 곳을 찾아오는 전적지 투어를 하러 온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집 앞에 있는 초석은 주둔지 입구에 있었던 걸 옮겨온 것인데 비닐을 덮어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참전군인들이 하미 해변에 가면 부대 앞에서 구두를 닦는 일을 했던 귀머거리가 있다고, 그를 찾으면 전적지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주고받는 듯 했다. 전쟁 당시 껌은 한국군의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었고 시시때때로 들리지 않는 불쌍한 아이라며 동냥을 받았다. 전쟁 이후에는 청춘을 바쳤던 베트남으로 기념 여행을 오는 참전군인의 가이드를 자청하며 수고비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려운 단어보다는 최대한 단순하고 시각적인 표현을 골라 몸으로 말했다. 한국 수어를 기반으로 한 홈사인이자 보디랭귀지였다. 노트에 ‘1968’과 ‘HAMY’라는 단어를 썼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펴고 순서대로 앞을 향하게 놓은 후 발사했다. ‘총을 쏘다’라는 단어였다. 목을 긋고 죽은 시늉을 했다. 아저씨가 잠시 머뭇거렸다. 다시 한번 노트에 적힌 ‘1968’ 단어를 가리켰다. 다음으로 ‘HAMY’라는 단어에 손을 옮겼다. 하미 마을 쪽을 향해 팔을 뻗고 웃음기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눈 아래 댔다. “봤다”라는 단어였다.
저기서 봤어. 방공호 들어가서. 엄마랑. 5시간 동안 방공호에서 봤어.
도망갔어. 총 쏘고 무서워서 보고 무서워서 도망갔어, 방공호에서. 내가 어렸을 때. 소. 소. 저기. 소 6마리. 총 쏴서 소가 다 죽었어. 배 총 맞아서 죽다. 한국군 나빠. 미군은 총 안 쐈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구두 닦는 일. 신발 닦는 일 했어. 미군이 돈 많이 줬어. 최고야. 한국군은 담배, 마약 절대 안 했지. 근데 미군은 마약 많이 했어. 한국군은 여자를 안았어. 이렇게 생긴 애들 안고 뽀뽀하고. 정말 심했어. 구두 닦을 때, 쟤 같은 애들. (촬영 감독을 가리킨다) 다 봤어. 돈 이만큼 주고 예쁜 애들을 안고 섹스했어. 여기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라이따이한) 많아. 한국군은 자기들끼리 비행기 타고 갔어. 결혼 안 하고 갔어.
나는 초석 사진을 가리켰다.
한국군이 오면 사진 찍고 싶어 해. 그럼 나는 사진 안 된다고. 돈 달라고. 사진 찍으려면 돈 내라고. 여기 돌 사진 찍으려면 돈. 여기, 맞아, 우리 집 앞 여기야.
그는 영화 주인공으로서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시각을 기반으로 한 언어 체계를 갖고 있어 시청각매체인 영화에 매우 어울렸다. 그러나 공식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살 관련 기사랄지 연구 자료의 증인으로는 채택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베트남 수어통역사를 대동해도 그의 언어를 정확하게 통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학살로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학살을 목격했다고 몸으로 말하는 그의 표정과 손짓은 그 어떤 것보다 명징하고 강렬했다. 전쟁을 비(非)남성의 시선으로 다르게 바라보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할 때 그는 그 콘셉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그는 참전군인들이 전적지 투어를 할 때 가이드를 하고 대가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를 주인공 중 하나로 삼는다면 다른 주인공, 직접적으로 학살 피해를 당한 이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인데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도 학살의 피해자다.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구두 닦는 일을 하고 동정표를 받으며 전쟁을 살아냈다. 학살을 겪었고 죽기 살기로 도망 나와 기억하고 때로는 기억하지 않으며 생을 살아냈다. 그런데 다른 이들처럼 가족 구성원을 잃지 않았다고 해서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전쟁 이후 참전군인들을 돕는 일로 돈을 번다고 해서, 그가 ‘선량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를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고통과 상실, 아픔의 경중은 잴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나는, 이 학살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꼭 그래야 하는가. 그런 생각과 선택을 하는 나는 윤리적으로 옳은가.
그러나 이것 하나는 명확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선택한다면 영화의 기획 의도를 보다 더 잘 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수어가 모어인, 농인 부모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자 감독인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딘 껌은 영화 〈기억의 전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길보라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사람,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중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에서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 등을 통해 자기만의 학습을 이어나갔다. ‘홈스쿨러’ ‘탈학교 청소년’ 같은 말이 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자신과 같은 청소년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해 ‘로드스쿨러’라는 말을 제안했고, 그 과정을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첫 영화 〈로드스쿨러〉에 담았다. 농인 부모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은 장편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의 기억을 담은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들었다. 지은 책으로 『길은 학교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가 있다.
2020/08/25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