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시작한다. 방은 어김없이 어제보다 작게 보인다. 오늘도 물건을 샀기 때문이다. 동네 책방이 내일부터 약 3개월간 재정비의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오후에 땀을 빨빨 흘려가며 다리를 건넜다. 동네에는 하천이 흐르고 하천 위의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서점에 닿을 수 있다. 자주 들르지는 못했지만, 1킬로미터 거리에 동네 책방이 있어서 참 든든하고 좋았다. 동네 친구를 만나듯 불쑥 고개를 내밀고 서가에 놓인 책들을 일별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책방도 방이라서 그럴까, 들어설 때마다 아늑하고 편안하다. 보이지 않아도 책방은 늘 두 팔 벌리고 있을 것만 같다.
   방에서 나와 방으로 간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도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히는 계절, 마스크에 가로막힌 입김이 훈김으로 되돌아온다. 땡볕 아래에서 도돌이표를 찍는 심정으로 걸었다.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여기에 당도할 것이다. 책을 쓰고 만드는 것도, 전기를 발명한 것도, 환경을 오염시키고 누군가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도 인간이다. 욕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코로나19를 다시 맞이한다 하더라도 마음가짐은 여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채일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무더기이고 하지 못한 일은 산더미일 것이다. 마스크를 낀 채 온 힘 다해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방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책 냄새다. 새 책들이 입고될 때마다 책방의 냄새도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개의 경계처럼 모호해서 그저 ‘책 냄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종이는 두께도 다르고 질감도 다르고 심지어 냄새도 다르다. 다른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책방이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내게 맞는 것을 찾기 위해 나는 동네 책방을 찾곤 한다. 온라인 서점에 없는 책들도 많지만, 다른 것들이 너무 많아서 웹상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기 일쑤인 내게 동네 책방은 친절하기만 하다. 온라인 서점이 화려한 뷔페라면 동네 책방은 그날그날 반찬이 달라지는 가정식 백반 같다.
   방에서 멈춘다. 정확히 말하면 책방의 한곳에 제법 오래 서 있었다. 책방에서는 매달 ‘이달의 작가’ 진열대를 마련해놓는데, 잘 아는 작가보다는 잘 안다고 착각했거나 잘 모르는 작가가 더 많다. 무료로 배포되는 책방 소식지도 월간이다. 한 달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방문해야 하는 셈이다. 이달의 작가는 루시아 벌린이다. 어김없이 잘 모르는 작가다. 『내 인생은 열린 책』(웅진지식하우스, 2020)을 꺼내 책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를 읽는다. “루시아 벌린은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했다.”로 시작해서 “말년에는 평생을 괴롭히던 척추 옆굽음증으로 허파에 천공이 생겨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으며, 2004년 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로 끝난다. 누군가의 인생이 열여섯 줄로 정리될 동안, 방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방에서 새로운 책을 발견하고 집어 든다. 박서련의 장편소설 『더 셜리 클럽』(민음사, 2020)이다. 뒷부분에 있는 작가의 말을 서서 조금 읽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집을 짓고 요리를 하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만든다.”로 시작되는 작가의 말은 “그렇게, 셜리는 셜리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함께 기억될 것입니다.”로 끝난다. 사랑에서 시작해서 기억으로 끝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대부분의 일이면서 그 어떤 것과도 매치되지 않는 일이다. 보편성을 추구한다고 믿는 것도 나고, 자신이 겪는 상황이 특수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다. ‘각자의 이름’은 그렇게 돋을새김될 것이다.
   방에서 나와 또다시 방으로 간다. 양손에 든 책이 든든하다. 책은 냄새뿐만 아니라 무게도 제각각이다. 돌아오는 1킬로미터의 걸음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앞으로의 3개월이 책방의 휴업이라기보다는 방학이었으면 좋겠다. 방학이 끝날 때면 예전과는 달리 설렐 것이다. 책방에서는 그 누구도 숙제를 내주지 않으니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네 책방은 내게 낙원과도 같다. 그래서인지 조언을 가장한 충고와 무언의 압박이 거듭되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향하게 되는 곳이다. 과거는 희미하고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동네 책방에 있을 때면 나는 현재를 사는 것 같다.
   방에서 내 방으로 온 책들 중 가장 먼저 손에 쥔 책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쓴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 2016)이다. 같은 작가가 쓴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과 고민하다 고른 책이다. 책을 펼치면서 내 방을 둘러본다. 이 방에서 여행할 수 있을까? 날마다 더 작아지는 방에서. 몸집이 더 커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엄두가 안 난다. 집이 거주지 같다면 방은 아지트 같다. 아지트는 쾌적함을 포기한 대신, 그 자리에 은밀함을 채운다.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을 함께 듣는 것도 좋지만, 리시버를 깊숙이 꽂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혼자 듣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때, 집중은 분산되면서 수렴된다. 어느 하나가 자연스럽게 환경(ambience)이 되는 것이다.
   방에서 집중한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18세기에 태어난 작가다. 토리노에 머물던 혈기 넘치던 시절, 어떤 장교와 결투를 벌였고 그로 인해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받았다고 한다. 군인이었던 이가 뜻밖의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 자신의 방에서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기록을 목적으로 하거나 제출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글은 일기와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하루하루를 견디는 가내수공업에 가까워 보인다.
   방에서 그는 “무엇보다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점을 이 여행의 미덕으로 꼽고 싶다”고 말한다. 방 안의 사물들, 그로부터 시작되는 자유 연상이 글의 물꼬를 터준다. 스스로와 굳게 맺은 약속이지만, 매일 쓰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연금 12일째의 글에는 “그때 그 언덕”이라는 어구와 어구 앞뒤 무수한 말줄임표만 있다. 혼자만 아는 언덕이지만, 말로든 글로든 표현해버리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을까. 묘사하기 직전에 입을 다물고 손을 멈추는 사람의 눈빛이 방 안에 있다. 방에서 빛난다.
   방에서 움직인다. 방에서 하품을 하고 방에서 기지개를 켠다. 방을 샅샅이 훑어도 쓸 만한 것이 없다. 문득 이 방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아마도 나일 것이다. 사물은 낡고 사람은 늙는다. 이 글을 쓰면서 ‘방안퉁수’라는 말이 전라남도 방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속담은 “방 안 풍수(風水)”라고 써야 옳다고 한다. 방에서 배운다. 방에서 시작했다가 방에서 끝난다.


오은

어렸을 때에는 내 방을 갖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 좋아하는 물건들을 엄선해 곁에 두겠다는 다짐도 했다. 삼십여 년이 흘러 드디어 내 방을 갖게 되었는데, 엄선 대신 축적을 하고 있다. 방이 좁아질수록 바깥에 나가 산책하고 싶은 욕망이 커진다.

2020/09/29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