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y
4회 유기 식물
식물 기르기에 빠져 있는 나는 요즘 어린 시절 우리집에 있던 식물들을 자주 떠올린다. 현재의 행복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은 왜 늘 과거의 간섭 속에 있을까 싶은 생각과 함께. 성장을 함께했던 식물들은 이제 모두 없고 20년 넘게 버텼던 산세베리아 화분마저 몇 년 전 그렇게 되고 말았는데. 실은 주로 하는 것이 그 산세베리아 화분에 대한 생각이다.
대중적인 공기정화식물로 웬만한 사무실이나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세베리아는 초등학생 시절의 내 사진에도 등장한다. 그날 산세베리아가 오랜만에 꽃을 피웠고 아빠는 늦잠을 자고 있는 날 깨워 발코니로 데리고 나왔다. 더 자고 싶었지만 아빠 말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주 희소하게도 아름다운 광경이 우리집에 벌어졌고 아빠는 막내를 앞세워 그것을 기념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의 그 즐거운 출사에 완전히 호응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는 머리를 다시 묶거나 적어도 잠옷을 갈아입는 편이 어떤가 물어왔지만 나는 싫다고 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어쩌면 그렇게 앉아버린 일부터가 그 시절 어떤 미감에 대한 균열이 아니었을까.
사진에서 산세베리아의 꽃은 정면을 향해 있고 그뒤에서 어린 내가 엉망이 된 머리와 잠옷 차림으로 앉아서 그래도 웃고 있다. 나는 유년 사진 보는 일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데 이유 중 하나가 내 표정이 대체로 어둡기 때문이다. 그 시절 사진이란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각을 잡고 찍어야 하는 대체로 ‘기념을 위한 것’이었다. 필름 카메라의 시대였고 실제 이미지를 확인하는 데 드는 비용은 디지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비쌌으며 번거로웠으니까. 사진 촬영 현장에는 언제나 누군가들의─특히 어른들의─지시와 통제가 있었다. 내 사진 속 표정이 굳거나 인상을 쓰거나 지루해하고 있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산세베리아 사진에서 나는 활짝 웃었고 나는 그것이 아빠 말을 듣지 않고 내 멋대로 하고 나와 카메라 앞에 섰기 때문이리라고 짐작한다. 산세베리아도 나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산세베리아가 개화한 그날의 내 기분만큼만 차려 입고 발코니로 나섰다. 잠을 떨치고 나오긴 했지만 어른들처럼 뭐 그리 큰 부산은 떨지 않는 방식으로, 하지만 막상 카메라 셔터가 내려갈 때는 그 꽃송이만큼이나 입을 크게 벌려 하하- 웃으면서.
그렇게 우리 가족과 함께하던 산세베리아가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겨진 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버지가 회사를 접은 뒤 부모님은 가게를 열어야 했고 거기에는 그 큰 산세베리아 화분을 둘 곳이 없었다. 부모님은 가게에 달린 방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화분은 언니와 나 둘 중 하나가 맡아야 했다. 언니는 단호하게 거부했고 나도 내키지는 않았다. 비로소 내 공간을 갖게 되었는데 나 혼자서는 들기는커녕 밀기도 어려운 화분을 가져가야 한다니. 산세베리아는 다분히 부모님 취향인 난초 무늬의 크고 무거운 대형 도자기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검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긴 잎들은 지나치게 오래되고 농익어 두껍고 뭔가 단단히 질긴 느낌이었다.
나는 크다, 무겁다, 관리할 능력이 없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며 어떻게든 맡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언니네 집에는 어린 조카들이 있어 내가 보기에도 위험했고 부모는 그런 화분의 처리까지 하나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이사 간 집으로 화분을 가져왔다. 그리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
정성스레 돌보는 이가 없는 화분은 자연스레 시들어갔다. 수십 년을 꼿꼿하게 서 있던 잎들이 점차 사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줄로 묶어주었지만 그렇게 해서 통풍이 어려워지자 잎들은 더 상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 인생에도 수많은 굴곡들이 생겨났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하나하나 열거하면 그 행위로 인해 내 마음이 다시 다칠 만큼의 숱한 실패들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키우고 그 다음에는 책을 내고 싶다는 꿈을 키우고, 잡지사에 작품을 투고했다가 반려되는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어느 날 보니 산세베리아는 더는 버텨내지 못하고 완전히 시들어 있었다.
그걸 발견한 날 나는 어쩐지 상한 것이 산세베리아만은 아니리라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늦었지만 나는 막 돋아난 어린 산세베리아 잎들을 작은 화분으로 옮겼고 죽은 잎들은 뽑아서 모두 치웠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버린 도자기 화분은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엄마는 어디에 두라고 이걸 주니, 했지만 더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엄마도 산세베리아가 그렇게 된 게 속상했을 테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엄마는 빈 화분을 마당에 놓고 지냈는데 어느 날 가보니 거기에 오이와 고추 같은 모종을 심어놓고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 역시 그렇게 해서 자기 유년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 발코니에는 그렇게 해서 되살려보려고 한 산세베리아의 어린잎들은 없다. 그런 반전과 안전한 결말은 없고 그때 그 산세베리아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가 보낸 날들에 번져 있는 슬픔이나 불행의 흔적들은, 그 손상들은 사실 없던 일이 되거나 교정되지는 않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지독하게 산세베리아에 대해 생각했고 그렇게 반복한 끝에 어느 날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쉬움이라는 단어로 딱 간명하게 설명되는 감정이었다. 수십 년을 자라고 환한 꽃까지 피웠던, 지금 내게 있다면 아주 자랑스럽게 포기를 나눠 심었을 식물을 잃어버린 데 대한 서운함.
그럴 때 산세베리아는 유년의 상처를 상징하거나 그 시절의 어떤 무심한 유기를 대속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산세베리아였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에야 나를 채우던 그 많은 상념들이 그치면서 나는 이제 막 가드닝에 취미를 붙인 초보 집사답게 그 생생했던 한 식물에 대해서만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는 의식도, 감각도 없지만 바로 그러한 연유로 한번도 자기 자신의 삶을 유기하지 않았던 그 산세베리아라는 실체에 대해 말이다.
대중적인 공기정화식물로 웬만한 사무실이나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세베리아는 초등학생 시절의 내 사진에도 등장한다. 그날 산세베리아가 오랜만에 꽃을 피웠고 아빠는 늦잠을 자고 있는 날 깨워 발코니로 데리고 나왔다. 더 자고 싶었지만 아빠 말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주 희소하게도 아름다운 광경이 우리집에 벌어졌고 아빠는 막내를 앞세워 그것을 기념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의 그 즐거운 출사에 완전히 호응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는 머리를 다시 묶거나 적어도 잠옷을 갈아입는 편이 어떤가 물어왔지만 나는 싫다고 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어쩌면 그렇게 앉아버린 일부터가 그 시절 어떤 미감에 대한 균열이 아니었을까.
사진에서 산세베리아의 꽃은 정면을 향해 있고 그뒤에서 어린 내가 엉망이 된 머리와 잠옷 차림으로 앉아서 그래도 웃고 있다. 나는 유년 사진 보는 일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데 이유 중 하나가 내 표정이 대체로 어둡기 때문이다. 그 시절 사진이란 가장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각을 잡고 찍어야 하는 대체로 ‘기념을 위한 것’이었다. 필름 카메라의 시대였고 실제 이미지를 확인하는 데 드는 비용은 디지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비쌌으며 번거로웠으니까. 사진 촬영 현장에는 언제나 누군가들의─특히 어른들의─지시와 통제가 있었다. 내 사진 속 표정이 굳거나 인상을 쓰거나 지루해하고 있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산세베리아 사진에서 나는 활짝 웃었고 나는 그것이 아빠 말을 듣지 않고 내 멋대로 하고 나와 카메라 앞에 섰기 때문이리라고 짐작한다. 산세베리아도 나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산세베리아가 개화한 그날의 내 기분만큼만 차려 입고 발코니로 나섰다. 잠을 떨치고 나오긴 했지만 어른들처럼 뭐 그리 큰 부산은 떨지 않는 방식으로, 하지만 막상 카메라 셔터가 내려갈 때는 그 꽃송이만큼이나 입을 크게 벌려 하하- 웃으면서.
그렇게 우리 가족과 함께하던 산세베리아가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겨진 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버지가 회사를 접은 뒤 부모님은 가게를 열어야 했고 거기에는 그 큰 산세베리아 화분을 둘 곳이 없었다. 부모님은 가게에 달린 방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화분은 언니와 나 둘 중 하나가 맡아야 했다. 언니는 단호하게 거부했고 나도 내키지는 않았다. 비로소 내 공간을 갖게 되었는데 나 혼자서는 들기는커녕 밀기도 어려운 화분을 가져가야 한다니. 산세베리아는 다분히 부모님 취향인 난초 무늬의 크고 무거운 대형 도자기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검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긴 잎들은 지나치게 오래되고 농익어 두껍고 뭔가 단단히 질긴 느낌이었다.
나는 크다, 무겁다, 관리할 능력이 없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며 어떻게든 맡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언니네 집에는 어린 조카들이 있어 내가 보기에도 위험했고 부모는 그런 화분의 처리까지 하나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이사 간 집으로 화분을 가져왔다. 그리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
정성스레 돌보는 이가 없는 화분은 자연스레 시들어갔다. 수십 년을 꼿꼿하게 서 있던 잎들이 점차 사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줄로 묶어주었지만 그렇게 해서 통풍이 어려워지자 잎들은 더 상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 인생에도 수많은 굴곡들이 생겨났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하나하나 열거하면 그 행위로 인해 내 마음이 다시 다칠 만큼의 숱한 실패들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키우고 그 다음에는 책을 내고 싶다는 꿈을 키우고, 잡지사에 작품을 투고했다가 반려되는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어느 날 보니 산세베리아는 더는 버텨내지 못하고 완전히 시들어 있었다.
그걸 발견한 날 나는 어쩐지 상한 것이 산세베리아만은 아니리라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늦었지만 나는 막 돋아난 어린 산세베리아 잎들을 작은 화분으로 옮겼고 죽은 잎들은 뽑아서 모두 치웠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버린 도자기 화분은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엄마는 어디에 두라고 이걸 주니, 했지만 더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엄마도 산세베리아가 그렇게 된 게 속상했을 테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엄마는 빈 화분을 마당에 놓고 지냈는데 어느 날 가보니 거기에 오이와 고추 같은 모종을 심어놓고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 역시 그렇게 해서 자기 유년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 발코니에는 그렇게 해서 되살려보려고 한 산세베리아의 어린잎들은 없다. 그런 반전과 안전한 결말은 없고 그때 그 산세베리아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가 보낸 날들에 번져 있는 슬픔이나 불행의 흔적들은, 그 손상들은 사실 없던 일이 되거나 교정되지는 않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지독하게 산세베리아에 대해 생각했고 그렇게 반복한 끝에 어느 날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아쉬움이라는 단어로 딱 간명하게 설명되는 감정이었다. 수십 년을 자라고 환한 꽃까지 피웠던, 지금 내게 있다면 아주 자랑스럽게 포기를 나눠 심었을 식물을 잃어버린 데 대한 서운함.
그럴 때 산세베리아는 유년의 상처를 상징하거나 그 시절의 어떤 무심한 유기를 대속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산세베리아였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에야 나를 채우던 그 많은 상념들이 그치면서 나는 이제 막 가드닝에 취미를 붙인 초보 집사답게 그 생생했던 한 식물에 대해서만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는 의식도, 감각도 없지만 바로 그러한 연유로 한번도 자기 자신의 삶을 유기하지 않았던 그 산세베리아라는 실체에 대해 말이다.
김금희
기억과 감정, 마음의 이동과 맞섬 같은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소설집 세 권과 장편소설 두 권 등을 썼다.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