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책과 시간이 준비됐다면 이것저것 더 곁들여본다. 따뜻한 차와 간식, 완벽한 조명, 노트와 연필을 마련하고 마지막으로 책과 함께 들을 음악만 고르면 되는데…… 늘 이게 문제다. 적절한 음악을 찾기가 어렵다. 음악은 너무 짧거나 길고 가끔은 아주 수다스럽다. 게다가 바깥 소리나 음악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은 책도 많다. 만남은 쉽게 성사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음악을 함께 내놓는 책들이 있다. 음악의 한복판에서 쓰인 것 같은 책, 읽기만 해도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은 책, 읽다가 잠깐 샛길로 빠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책 등등.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어떤 이들은 글 안에 음악과 소리의 자리를 마련해둔다. 그럴 때 나는 합의된 음악을 따라 들으며 읽다가도, 종종 차고 넘치는 애정으로 살짝 엇나간 페어링을 시도해보곤 한다.


   천희란의 『자동 피아노』(창비, 2019)



   집요하게 죽음을 이야기하는 천희란의 『자동 피아노』에는 스물 한 곡의 피아노 음악이 등장한다. 건반악기의 황금기와 자동 피아노의 몰락기를 지나 동시대까지 넓게 아우르는 이 리스트에는 스카를라티, 슈베르트, 버르토크, 우스트볼스카야, 라벨, 쇼팽, 릴리 불랑제, 박창수의 음악이 있었고, 이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결코 분리되지 않은 채 한데 뒤엉켜 있었다. 각 장의 부제처럼 쓰인 이 음악들을 나는 글의 첫 문단처럼 읽고 들었다. 해설을 쓰기 위해 몇 번이고 『자동 피아노』를 읽는 동안 나 역시 피아노 음악 속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워지곤 했다. 이곳엔 음악과 말이 가득했지만 사람 입을 통해서 나오는 소리를 상상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잃고 피아노에 갇힌 누군가가 건반으로 어떤 부호를 송출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내가 목소리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싶어질 때쯤 잠시 멈추어 노랫말이 없는 노래 ‘구음(口音)’을 들었다. 『자동 피아노』에서의 목소리 없는 말과 구음에서의 말 없는 목소리를 나란히 놓아보았다. 브람스로 시작해 메시앙으로 끝맺는 『자동 피아노』의 플레이리스트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만, 잠시 피아노 밖에서 환기할 수 있는 위상 반전 플레이리스트를 괜히 만들어본다면 나의 첫 곡은 아무래도 만정의 구음이 될 것 같다.

만정 김소희의 구음(口音)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김유진 옮김, 프란츠, 2017)



이 유서 깊은 예술은 거울에 반사된 눈부신 반짝거림, 근원을 잃은 에코의 속삭임이 되었다. 복제물들. 마법의 악기도, 주물(呪物)도, 사원도, 동굴도, 섬도 아닌 것들.


   『음악 혐오』는 키냐르가 음악을 왜 사랑했고, 음악을 왜 혐오했는지를 다룬다. 고대의 뿔피리부터 쿠프랭과 하이든, 베이징의 소음까지 가뿐히 오가는 이 글에는 오만가지 소리와 음악이 흩뿌려져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대과거의 일처럼 읽힌다. 책에서 음악은 꼭 지난 세계에서 살아 숨쉬던 신비의 물질처럼 느껴졌다. 모든 음악은 다 끝났거나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 듯했다. 음악회장의 활기나 기쁨의 환호성 같은 것은 어쩐지 다른 세상 소리 같았다. 음악에 대한 키냐르의 사랑과 혐오를 뒤따라 읽다가 내가 이렇게 소란한 세상 속에서 음악을 듣고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조금은 머쓱했다.
   키냐르에게 공감하며 침묵 속에 있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가 지목하는 음악을 잠시나마 되살려 그 죽음 같은 침묵을 잠시 치우고 싶었다. 텍스트에 새겨진 수도사들의 성가, 샤르팡티에, 쿠프랭, 슈베르트, 클라라 하스킬의 연주를 따라 들었다. 그리고 그 옛날들을 회고하는 음악을 덧붙였다. 아주 작은 볼륨으로 〈쿠프랭의 무덤〉 〈부속품〉을 들으며 비문 같은 말들을 조용히 읽었다. 이 회고하는 음악이 나를 비로소 지금으로 데려다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리스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Le Tombeau de Couperin)

제라르 페송의 〈부속품〉(Nebenstück)


   배수아 외 10인의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미디어버스, 2020)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에서 문필가들은 부산 혹은 어떤 곳에 대한 이야기와 시를 썼다. 시각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은 이를 읽고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만들었다. 전시장에서의 경험을 음악화한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을 컨셉으로 내건 2020년 부산비엔날레에서의 일이었다. 기획진은 이야기와 시가 ‘도시의 픽션’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했다.
   바닷물이 출렁이며 시작하는 위지영의 콜라주 〈Wild Seed: New Bay Area Sound〉는 사람들이 밀물 썰물처럼 오가는 항구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소설가이자 뮤지션인 그의 사운드는 늘 어떤 장소에서 시작됐다. 사람들만 조용히 사라진 연회장, 여행지로 향하는 플랫폼, 그리고 전달되지 않을 사랑 편지를 보내온 세계 곳곳의 도시들. 그리고 〈Wild Seed: New Bay Area Sound〉는 부산에서 새롭게 쓰인 이야기 중 하나인 이상우의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중 한 문장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여객선 라디오에선 가벼운 재즈가 자주 흘러나왔는데 베이 에리어 사운드라고 어느 곳이든 항구도시에서는 언제나 퓨전재즈를 위시로 한 음악 채널이 있어왔다고 승객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이 콜라주는 소설가 이상우의 글과 시각예술가 송민정의 〈야생종〉 사이를 잇는 가상의 가교였다고는 하지만…… 그 위치는 조금 묘했다. 부산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던 이 사운드는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에서 작은 틈을 발견해 샛길로 빠져나간 것에 가까웠다. 도시의 픽션을 만들어낼 이야기와 아주 작은 한 점에서 교차하는 사운드 픽션.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에도 언급되지 않은 그 믹스를 들으며 도록을 읽었다. 거기엔 그런 크고 작은 교차점들이 산재했다. 하여간 부산에는 가지 못했지만, 이야기가 다른 장면으로 이어지고 소리로 이어지고 다시 이야기로 옮겨가는 그 점들이 잠시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좌표를 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위지영의 〈Wild Seed: New Bay Area Sound〉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을 썼다.

2020/12/29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