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한 지 10년도 더 된 고등학교 후배가 불쑥 SNS를 통해 말을 걸어왔다. 같이 중창단을 했었으니 선배로서 후배를 아끼는 마음 같은 건, 지극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후배의 보고 싶다는 말에 나도 응수를 하긴 했는데 당장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라고 만다. 지금 캐나다에 있다는 거다. 농담처럼 이민을 갔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했다. 오랜만에 문자메시지로 긴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의 주된 내용은 당연하게도 숱한 질문들이었다. 오랜만에 마주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주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불쑥 혹은 와락으로 이어지는 질문들로 그동안의 간극을 메꿔나가기. 서로의 역사에 좋은 쪽으로 움직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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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과 나는 ‘가위바위보’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 ‘가위바위보’라는 건 꽤 허당인 구석이 있는 거거든. “당신이 요리할래? 설거지 할래?” 하고 물으면 난 당신 먼저 정하라고 했었어. 당신도 그랬지. 나보고 먼저 정하라고. 그냥 같이 있는 시간인 거야. 누가 뭘 하는 건 상관이 없어. 그런데 뭘 물어봐. 안 먹어도 되고, 먹어도 되는 시간인 거면 그냥 우리 잠시만 부둥켜안고 있어보자. 둘 중 한 사람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그때 정해도 되는 거지. “뭘 먹지?”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희한하게도 먹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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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좋아하나요? What Do You like?
   이 말은 여행중에 서양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이에요. 나와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일종의 신호입니다. 그럴 땐 ‘내가 뭘 좋아하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머뭇거리기가 쉬워요. 사실 우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는지도 몰라요. 아예 나 자신에게 일말의 그 어떤 의미를 두지 않고 사는지도 몰라요.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겠다는 사람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열어주지 않는 아주 딱한 사람쯤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뭘 좋아하는지 생각하세요. 집으로 가는 길에 한 정거장 전쯤에 내려서 막 생긴 가게의 안을 들여다보는 일, 잔뜩 설탕이 묻어 있는 쿠키를 먹지 않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하는 일, 남의 옷에 묻은 실밥이나 검불을 떼어주는 일, 극장 앞에서 우르르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입가에 묻어난 표정을 관찰하는 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가장 맘에 안 드는 부위를 자꾸 들여다보는 일, 연락한 지 오래된 어느 사람에게서 받은 언제 것인지 모를 마지막 문자 메시지를 자주 들여다보는 일. 그렇게나 좋아하는 것으로 살아가게 돼 있잖아요.
   “그래, 당신은 뭘 좋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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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실에서의 시간을 막 채워갈 때. 질문하는 시간을 가질 때. 나는 서 있고 나를 바라보고 앉은 학생들의 질문을 기다릴 때.
   “질문은 자신이 지금을 살고 있는 지금이 어떤가를 잘 설명해줍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답변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물을 수 있을 때 여러분의 내면은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이동하게 돼 있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손들고 질문하지 않는 청춘들.
   세상에는 (수많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질문을 하는 사람.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 단지 하거나, 하지 않을 뿐인데 이렇게 극명하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질문하는 사람은 한 번의 질문으로 질문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며, 질문의 내용을 점점 확장시킬 수 있을 거라는 그 두 가지 사실은 질문을 만들어낸 사람 내면에 엄청난 불씨를 잉태하게 한다.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사이, 탁자 위에 놓인 내 물건을 챙기는 사이였다. 누군가 손을 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모른 체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너무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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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올린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악기이다. 연주자가 초보일수록 더 그렇다. 왜,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때 명연주자가 연주하는 것과 어마추어가 연주할 때 내는 소리는 다르지 않던가. 수많은 연습을 통하여 듣기 좋은 소리를 찾는 것, 익은 소리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현악기의 정체다. 음만 정확히 맞아도 안 되며 단지 좋은 소리만 잘 내서도 안 되는. 그래서 어려서 바이올린을 할수록 아이의 뇌가 일찍 열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위층에 사는 아이가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시간이면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어설픈 소리이면서 계속해서 바이올린 켜는 아이에게 질문을 해대는 소리이기도 하다. 물론 신음소리에 가깝다. “이 소리가 맞아?” 아이는 듣지 못하고 활을 긋는다. “정말 이 소리여야 하는 거니?” 바이올린은 끊임없이 아이에게 묻지만 아이는 아직 대답할 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지나면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바이올린에게 대답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이올린의 물음에 주인이 대답을 하는 방식. 선명한 선들을 쌓아가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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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하루 몇 번 고독과 만난다. 요즘 시기에는 더 그러하다. 나는 고독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를 몇 번이고 생각한다. 원래 고독과 친하지는 않았다. 침묵을 데려왔다. 침묵을 위한 먹이를 샀다. 침묵을 자주 충전해야 했으며 가끔은 침묵을 소독거즈로 닦아두어야 했다. 사실 오래 알았다, 고독을. 점점 더 사용횟수를 늘리고 있다는 것을 최근 들어 다시 알았다. 그러다 고독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에. 물론 고독이 인터넷을 통해 검색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아무도 알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은 집채만 한 고독이 작동되지 않는 날에는 내가 솔직하지 못하여서 더 솔직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고독의 입구에서 서성인다. 차마 어떤 의미가 될까봐 나는 고독을 덜 만나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화분에 고독의 근육을 심기로 한다. 고독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감지하지 않는 것도 이 시대에 할 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이병률

시를 쓰고 산문을 적고 사진을 찍는다. 최근에는 동네책방에서 산 많은 책들의 껍질을 벗겨낸 후에 칼로 잘라 먹는다. 자극을 찾는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고 자주 생각한다.

2021/01/26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