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12회 [연결 9] 싸이월드도 돌아온다는데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꾸벅. 처음으로 글 올리는 4기 일꾼입니다 : ) 바...바....반갑습니다.(반가워해주시길..뻘쭘) 정리 내용 보시고 혹 빠졌거나, 부족하거나, 왜곡되었거나 하는 부분이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_2010년 4월 13일 17시 20분. ‘시민학교’ 게시판에 남긴 댓글.
‘6.9 작가선언’을 계기로 모인 문화예술인들은 2009년 5월 28일 ‘○○문학 모임’이라는 온라인 카페를 개설했습니다. 제가 그 카페에 가입한 날은 2010년 4월 7일로, 용산참사와 작가선언 이후 1년여가 되어 가던 시점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저는 4대강 사업 반대 투쟁을 위한 회의를 조직하고, 알림하고, 회의 결과를 보고하고, 의견을 수렴하고,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4기 일꾼’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일꾼을 하며 무척 즐거웠습니다. 신났습니다. 등단 이후 어떤 문학잡지에서도 청탁받지 못해 이렇게 잊히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던 저는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일하며, ‘시민’이 아니라 ‘작가’로 보이는 이들과 만나고, 인사 나누고, 대화하며 ‘작가로서의 삶’을 꾸리고 있다고 안도했습니다. 곧 청탁이 몰릴 거라는 ‘동료’의 말에 힘을 얻었고, 투쟁의 현장에서 ‘말’이나 ‘글’로 연대하는 일 역시 ‘작가의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은 이후로도 내내 저를 ‘문학’에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문화예술인들 속에 포함되며 ‘소속감’ 같은 걸 가졌습니다. 그 소속감이 우정이란 다정한 말로 바뀌기 시작한 건, 그러니까……
“그리하여 봄밤, 열심히 축하하고 기꺼이 축하받는 ‘쌍축’ 호프 모임 한번 사부작사부작 열어보려고 합니다. 많은 분 오셔서, 함께 북적북적 흥청망청 하하호호 하면 좋겠습니다.” _2010년 5월 12일 10시 4분. ‘공지사항’ 게시판에 남긴 모임 안내 글 중에서.
‘체험, 출간의 현장’에서 호프잔을 여러 번 들어올리면서였습니다.
투쟁과 투쟁을 위한 긴 논의를 거듭하면서도 회의를 빙자한 ‘술벙개’를 날리고, ‘소소한 하루’라는 게시판에 일상 담소를 올리던 회원들은 삼삼오오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고, 종종 투쟁이 아니라 친목을 위해서도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모임을 통해 친히 어울리던 이들 몇몇과 ‘1월 11일 동인’을 결성했습니다.
시 쓰고, 소설 쓰고, 평론하고, 노래하고, 디자인하고, 영화 찍는 이들이 모였던―재미있는 건 동인 전체가 다 모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해체 선언’도 없이 동인이 사라졌다는 것.―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2010년 겨울, 투기 건설 자본의 폭력에 멍든 홍대 칼국숫집 ‘두리반’에서 ‘불킨 낭독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문학 모임 회원인 진은영 시인이 “문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철거의) 공간을 문학으로 같이 채워봐요.”라며 건넨 ‘물렁물렁한’ 연대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연대라는 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해주던 말, 문학이라는 말을 딱딱하게 만들지 않던 말, 작가라는 말에 눌리지 않아도 되겠다 싶게 해주던 그 말을 저는 좋아했습니다. 안심됐습니다. 힘주지 않아도 되어서.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말을 좋아합니다.
여하간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19시 30분. 철거용역들에게 집기도 뺏기고, 전기도 끊긴 ‘불 꺼진’ 두리반에서 첫번째 불킨 낭독회가 진행됐습니다. 진은영, 심보선, 이영광, 최창근 등 ○○문학 모임 회원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두리반 농성 321일째, 단전 113일째가 되던 날이었습니다. “홍대 앞 작은 섬, 두리반을 아시나요?”라는 물음이 적힌 낭독회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초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시가 있고 음악이 흐를 때, 우리들 마음속에 일제히 켜지는 한 줌의 불빛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조용조용 낭독회를 하려 합니다.”
불킨 낭독회 웹자보. ⓒ박시하
‘천사들의 도시’ ‘집’ ‘태양’ ‘밥’ ‘노래’ ‘친구’라는 주제로 수개월 간 계속된 불킨 낭독회는 2011년 6월 22일 ‘드디어 불킨 낭독회’라는 이름으로 두리반의 투쟁 승리를 축하하며 끝이 났습니다. 농성 531일만이었습니다. 용산참사와 4대강 사업 반대 투쟁의 실효가 미온한 때에 두리반의 승리는 기쁨을 안겨주었고, 1월 11일 동인, 진은영, 심보선, 두리반의 유채림 소설가, 두리반에서 함께 연대했던 문화예술인들은 제2의 용산이자 두리반으로 불리던, 또다른 강제 철거 투쟁 현장인 명동 3구역 ‘카페 마리’에 결합해 ‘말이낭독회지’를 이어갔습니다. 2011년 7월 29일이었습니다(7월 28일에는 3차 희망버스를 지지하는 예술인 모임이 주최한 ‘김진숙과 함께하는 3차 희망버스를 위한 전 전야제’가 카페 마리에서 열렸습니다).
말이낭독회지에서는 매달 한 명의 작가를 선정, 그 작가의 글 혹은 그 작가와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창작물을 문예인과 시민들이 같이 읽었습니다. 첫 작가는 유희경 시인이었고, 첫 책은 시인의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였습니다. 두리반 농성에도 연대했던 무키무키만만수가 첫 노래 공연을 해주었습니다. 말이낭독회지는 8월 26일 이제니 시인의 『아마도, 아프리카』와 함께 마무리되었습니다. 9월 7일, 명동 3구역 협상이 타결되어서였습니다.
말이낭독회지 웹자보. ⓒ박시하
이후 2011년 11월 11일 홍대 ‘살롱 드 팩토리’에서 낭독 플래시몹 ‘진숙씨네 토마토’를 진행했습니다. 한진중공업의 부당한 강제 정리 해고를 막으러 85호 크레인 위에서 방울토마토를 키우며 버티던 김진숙과 연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12년에는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결합했고, 재능교육 농성장(길 위)에서 벌인 낭독 프로젝트 ‘구체적으로 살고 싶어’로 길 위의 연대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광화문 광장에서 첫 ‘304낭독회’를 열었습니다. 304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와 시민들이 매달 한 번씩 만들어가는 낭독회로, 2014년 9월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304낭독회 포스터 등의 자료는 인스타그램 계정(@304recital)을 통해 확인 가능합니다.
304낭독회 웹자보. ⓒ박시하
용산 남일당과 레아호프에서, 홍대 두리반에서, 명동 마리에서, 부산 영도에서, 제주 강정에서, 안산에서, 광화문에서 연결되고 우정을 쌓은 이들과 이른바 ‘점거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을 이어간 곳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던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이었습니다. 2016년 1월부터 매달 한 번씩 그곳에서 이어진 투쟁에는 ‘현장 잡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현장에서 창간되고 낭독이 끝남과 동시에 완간되는 방식으로, 참여 작가들은 되도록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기록물을 들고 와 읽었습니다. 테이크아웃드로잉의 현장 잡지는 ‘월간 전단지’(1월)를 시작으로 ‘월간 병’(2월), ‘월간 신입생’(3월), ‘월간 쪽지’(4월)까지 발간됐고, 그뒤로 신촌 ‘공씨책방’을 거쳐 2017년 12월, ‘본가궁중족발’에서 계속되었습니다.
2010년 도시재생사업 이후 급격한 상업화로 투기 자본이 들이닥친 서촌에 위치했던 궁중족발. 보증금 3000만원, 월세 300만원을 내던 임차상인에게 건물주는 ‘보증금 1억원, 월세 1200만원’을 통보했습니다. 두리반 때처럼, 마리 때처럼, 궁중족발이 쫓겨나면 모두가 쫓겨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습니다. 12월 ‘쌈장과 마늘’을 시작으로 ‘개돼지’(1월), ‘롱패딩’(2월), ‘건물주’(3월), ‘맛동산’(4월), ‘빵과 장미’(5월)에 이르기까지 5개월 동안 다섯 차례 현장 잡지를 발행했고, 6월 ‘빨간맛’은 발행되지 못했습니다. 건물주가 중장비를 동원해 강제집행을 진행했고, 그로 인해 궁중족발 사장 부부와 활동가들이 내쫓겨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중족발을 위한 현장 잡지 6월호는 새롭게 터를 잡고 장사를 해오던 ‘두리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2018년 6월 28일이었고, 그때의 이름은 ‘다시, 두리반에서’였습니다. 궁중족발에서는 물론이고 강제로 내몰리는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힘을 써온 권창섭, 김보민, 정현석, 최창근 님을 비롯해 배수연, 석지연, 신철규, 이서하, 이설빈, 이소연, 임승유, 임승훈 작가 등이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날 그곳에서 「리얼한 연기를 위해 불을 피웠다」라는 시를 발표하며 두리반에서 시작해 다시 두리반으로 이어진 연대에 관한 소회를 간단히 덧붙였습니다. 지금은 이런 말도 적고 싶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줄곧 좋은 사람들과 느슨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그 공동체 감각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잇고 싶은 말도 생각납니다. “2016년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에 연대했던 많은 이들 역시 그 공동체의 일원들입니다.”
작가선언과 동시에 줄곧, ‘사람의 말’을 이어가는 와중에 수도 없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문학 모임은 ‘세월호 참사’를 규탄하기 위한 광화문 낭독회 준비를 마지막으로 잠시, 길게 잠잠해졌습니다. 이 침잠은 어쩌면 단순히 ‘온라인 카페’가 낡은 플랫폼이 되어 버려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선언과 연결된 경험을 글로 적고자 오랜만에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 오래 머물렀습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접속이라도 한 듯 많이 웃었고, 창피했고, 오글거렸고, 뜨거웠습니다. 보고 싶은 이들이 수두룩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저는 어떤 회한도 없이 그 공동체가, 경험이 작가로서의 제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되새겼습니다. 제가 “우리 함께 문학적이지 않은 곳에서 문학적일까요?” 하며 미래의 작가, 독자에게 다정히 말 걸 수 있는 건 순전히 그 유동하는 우정의 경험 때문이라고요. 저는 지금도 여전히 ‘새 일꾼’과 손잡고 싶을 때면 꼭 이렇게 물렁물렁한 말로 대화를 시작하곤 합니다.
“제가 좋은 동료들 소개해줄게요.”
거기, 그곳에, 여전히, 있는.
첨언.
○○문학 모임 회원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카페지기입니다. 잘들 지내시나요? 오랜 시간 접속하지 않아 간단한 인증의 절차를 거쳐야 함이 귀찮으시겠지만, 싸이월드도 돌아오는 때에, 카페에 들러 ‘소소한 하루’ 게시판에 안부 인사도 남겨주시고, 여러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지금 보아도 소중한 글들을 읽으며 현재진행 중인 추억에 젖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가령, 이런 글귀는 글쓴이와 다소 어울리지 않아 심금을 울립니다.
“맨날, 일 얘기만 하다보니 미안해, 저도 막간을 이용해 글 하나만 보탭니다. 바람이 참 좋습니다.”(송경동)
김현
오늘 점심에는 유현아, 이용임 시인과 ‘을지면옥’에서 냉면을 먹고 청계천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사주에 불의 기운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서 따뜻하고 밝은 가정을 꾸려가려 애쓴다고 했더니, 용임 누나가 내가 보는 현이는 밝아서, 밝게 해주는 사람인데, 하고 말해주어서 밝게 웃다가, 흐르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현아 누나의 어두운 옆모습을 살포시 보았다. 이런 기운으로 위의 글을 썼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에게 이런 연결고리를 던져드리고 싶다. 속초 영랑호에 조성될 예정이라는 ‘데크형 탐방로’는 정말로 생태 탐방로일까요?
2021/05/25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