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14회 [연결 11] 한 사람
기획의 말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짧은 머리에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두번째 보았을 때도, 세번째 보았을 때도 같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큰 키에 구부정한 어깨, 무심한 표정의 그는 과사무실 조교였다. 1학년 신입생에게 조교란 대체로 어려운 존재여서 괜스레 눈치를 보곤 했다. 늘 바쁘고 고단해 보였기에 간결하게 정리된 질문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대학원에 들어가 전공을 택하고 교수님께서 마련하신 모임에 갔는데, 그가 있었다. 1년의 반은 남성용 가죽점퍼를 입고 다니는 무표정한 조교 언니는 나와 같은 전공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시를 쓰고 있었다.
1년을 다니고 도망치듯 대학원을 나온 뒤 방황 끝에 북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구러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그는 첫 시집을 냈다. 그러고 얼마 후 나는 언니의 첫 시집을 낸 그 출판사 미술팀에 입사했다.
2009년 6월 9일에 있었던 ‘6.9 작가선언’은 내 사랑하는 선배이자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 그의 동료 시인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책을 낸 소설가, 평론가들의 일이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책을 디자인하고 이따금 작가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지지하는 마음으로 곁에서 응원할 뿐 어디까지나 나는 외부자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나 역시 학교자율화, 초등학교 일제고사 부활 등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에 분노하고, 국가와 국민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보고 추진한 의료 민영화나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때때로 촛불 시위에 참석했다. 그것이 당시 시민들의 공통감각이었다. (이 문장을 쓰며 갑자기 무력감이 밀려든다. 그때는 적어도 언론이 살아는 있었구나.) 어린 자식을 둔 부모들. 나처럼 자식이 잘 먹고 잘 놀고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는 엄마아빠들이 광장으로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문제’였다. 사람이 자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하기에, 그때의 시민들 대다수가 나를 넘어 남의 문제로까지 나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말 사주고 대학 들어간 정유라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도 비슷한 맥락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저 내 문제에 관한 분노였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용산참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에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 이가 바로 나의 선배, 진은영 시인이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문인들과 달리, 매스컴으로 접한 용산참사 소식에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에 가까웠다. 슬픔은 절망에서 온다던가. 가슴속에 의분이 일거나 정의감에 불탔다면 절망으로 슬퍼하기보다는 더 크게 분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가만히 있었다.
6.9 작가선언에 참여한 젊은 문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토론하고, 무더운 여름내내 용산참사 현장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릴레이 시위에 나섰다. 생업인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가을에도 순번을 짜며 정기적으로 시위를 이어갔다. 참사 당사자들과 함께 머물며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알리기 위한 활동들을 했다. 그때부터 언니는 여러 투쟁 현장에서 굳건히 목소리를 냈고 기꺼이 첫번째 돌을 던졌다. 그런 언니가 나를 불렀다.
인생에서 덮어놓고 믿어지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축복이다. 내게는 진은영 시인이 그런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하는 아름다운 일을 거들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작가선언6.9’가 엮은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기록한 책의 디자인1)을 맡아 미약하나마 손을 보탰다. 그것이 계기었을까. 곧 다른 한 사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트위터에 들어가면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어언 7년 전이지만, 프로필 사진으로 반년에 한 번은 안부를 확인한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을 소환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지만, 그가 전화를 걸어 인사를 건네고 함께 ‘동인’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던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동인’이라니. 그 단어는 내게 즉각 ‘김동인’ ‘박목월’ ‘청록파’와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어, 나 시인 아닌데.’ 다행히 그가 제안한 동인에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 외에 영화감독과 뮤지션도 있었다. (범상치 않은 가사를 쓰는 뮤지션이었던 걸로 보아 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을 모으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1월 11일’이 태어났다.
두꺼운 옷을 입는 계절에 나무의자가 놓인 좁은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였던 기억이 난다. 자기소개를 하고, 각자 모임에서 바라는 바를 얘기했다. 시인은 시를 쓰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고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그러기만 하진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던가. 시인이 노래 부르고 가수가 디자인하고 디자이너가 시를 쓸 수도 있는 동인. 그런 재밌는 상상이 가능하다는 게 좋았다.
서로 알아가기 위해, 다음 모임부터는 각자 좋아하는 문장을 가지고 와서 낭독하기로 했다. 이름을 뭘로 할까 하다 ‘불켠낭독회’가 문법에 맞지만 ‘불킨낭독회’가 ‘얼굴을 붉힌’으로도 읽히니 좋겠다고 뜻을 모았다. 우리끼리 재미나게 놀아보자고 만든 낭독회인데, 이 소식을 들은 진은영 시인(심보선 시인과 함께 당시 작가선언6.9의 주축이었다)이 이왕이면 ‘두리반 농성장’에서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두리반’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강제철거 당할 위기에 처한 칼국수집이었다. 홍대역에 공항철도가 들어서면서 대형 건설사가 주변 땅을 매입해 영세 자영업자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고 있었고 이를 거부하던 두리반은 200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기습적으로 강제퇴거를 당했다. 주인 내외는 외벽과 내부 인테리어가 뜯겨나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불킨낭독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많은 문인들과 특히 인디밴드 음악인들이 전기마저 끊긴 그곳에 모여 연습하고 잠도 자며 지킨 덕분에 두리반은 간신히 철거 포크레인을 피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사람이 머무는 것만이 두리반을 구하는 길이라니 우리도 이왕이면 하는 마음으로 낭독회 장소를 두리반으로 정했다. 그러다 일반 시민들을 낭독회에 초대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1월11일 동인 외에도 여러 작가들에게 낭독을 부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불킨낭독회는 1회부터 시민과 함께하는 낭독회가 되었다. 해를 넘기도록 낭독회는 이어졌고, 많은 시민들이 두리반의 어둠 안에서 함께 시를 나눴다. 이듬해 여름, 두리반은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긴긴 투쟁에서 승리했다.
1월 11일 동인이 시작한 불킨낭독회가 아니었어도 어떤 식으로든 두리반을 지킬 방법을 작가선언6.9는 마련했을 것이다. 당시 작가선언6.9에 참여했던 문인들은 시로, 쪽글로, 행사로 곳곳에서 투쟁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같지 않았을 것이다. 1월 11일이 부르지 않았다면, 선배 언니가 이리 와서 니 몫을 하라 호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 없었을 거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포스터를 만들고, 콜트콜택 투쟁에서 노래를 부르고, 추운 겨울 야외에서 낭독하는 시인들을 위해 시금치국을 끓이는, 타인의 삶과 내 삶을 엮는 연대의 몸짓을 바깥으로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를 먹이고 입혀 학교에 보내고, 출근하고 장 보고 씻기고 재우고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생활이 전부인 채 살아갔을 것이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정책 반대 시위에서 시민들과 ‘공동(公同)으로 한 자리에 있었지만, 여전히 ‘내 가족, 내 자식 문제’ 안에 있었다. 하지만 ‘두리반’에서, ‘작가선언6.9’과 ‘1월11일’과 함께한 현장에서 손에 손을 맞잡은 동안 나는 잠시 내 바깥으로 나와 다른 이와 연결된 공동체(共同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인들이 감각한 공동체와 내가 느낀 공동체가 꼭 같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저마다 외연도 다르고 감응의 이유도 달랐을지 모른다. 그래도 어느 쪽에서든 같은 분량만큼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을까.
몇 번의 불킨낭독회 사회를 보며, 그날의 낭독자를 ‘시인 OOO님’ ‘소설가OOO님’이라 소개하지 않고 ‘성북구 돈암동에 사는 OOO씨’ ‘종로구 사직동에서 오신 OOO씨’라 소개했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연대’를 표방한 작가선언6.9의 태도에도 닿아 있고, 1월 11일 동인의 정체성을 살려 문학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이 작가와 독자 구분 없이 서로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가 그 자체로 우월한 지위를 갖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추어올리는 순간, 예술이 도구화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우러르고 따를 수 있는 시인을 희구한다. 이 시인은 나와 동등한가? 시인은 독자와 동등해도 될까? (이제 이런 시인의 시대는 가버린 걸까?)
여기, 앞서 걸으며 나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 말 걸고 붙잡아 일으켜 아름다운 쪽으로 데리고 가준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시인이고, 덕분에 나는 공동체의 맛을 아는 종족의 일원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내게 손 내밀어준, 이미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 시인이여.
이종혼합의 동인을 기획하고 실천한 (304낭독회를 통해 문학을 매개로 한 느슨한 공동체를 여전히 실천하고 있는) 박시하, 김현 두 시인, 함께 했던 이진희 시인, 조해진, 윤이형 소설가, 때때로 함께한 하재연, 최창근, 성기완, 심보선 시인 모두 그립습니다.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첫번째 사람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짧은 머리에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두번째 보았을 때도, 세번째 보았을 때도 같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큰 키에 구부정한 어깨, 무심한 표정의 그는 과사무실 조교였다. 1학년 신입생에게 조교란 대체로 어려운 존재여서 괜스레 눈치를 보곤 했다. 늘 바쁘고 고단해 보였기에 간결하게 정리된 질문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대학원에 들어가 전공을 택하고 교수님께서 마련하신 모임에 갔는데, 그가 있었다. 1년의 반은 남성용 가죽점퍼를 입고 다니는 무표정한 조교 언니는 나와 같은 전공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시를 쓰고 있었다.
1년을 다니고 도망치듯 대학원을 나온 뒤 방황 끝에 북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구러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그는 첫 시집을 냈다. 그러고 얼마 후 나는 언니의 첫 시집을 낸 그 출판사 미술팀에 입사했다.
2009년 6월 9일에 있었던 ‘6.9 작가선언’은 내 사랑하는 선배이자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 그의 동료 시인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책을 낸 소설가, 평론가들의 일이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책을 디자인하고 이따금 작가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지지하는 마음으로 곁에서 응원할 뿐 어디까지나 나는 외부자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나 역시 학교자율화, 초등학교 일제고사 부활 등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에 분노하고, 국가와 국민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보고 추진한 의료 민영화나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때때로 촛불 시위에 참석했다. 그것이 당시 시민들의 공통감각이었다. (이 문장을 쓰며 갑자기 무력감이 밀려든다. 그때는 적어도 언론이 살아는 있었구나.) 어린 자식을 둔 부모들. 나처럼 자식이 잘 먹고 잘 놀고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는 엄마아빠들이 광장으로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문제’였다. 사람이 자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하기에, 그때의 시민들 대다수가 나를 넘어 남의 문제로까지 나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말 사주고 대학 들어간 정유라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도 비슷한 맥락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저 내 문제에 관한 분노였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용산참사의 진실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에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 이가 바로 나의 선배, 진은영 시인이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문인들과 달리, 매스컴으로 접한 용산참사 소식에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에 가까웠다. 슬픔은 절망에서 온다던가. 가슴속에 의분이 일거나 정의감에 불탔다면 절망으로 슬퍼하기보다는 더 크게 분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가만히 있었다.
6.9 작가선언에 참여한 젊은 문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 토론하고, 무더운 여름내내 용산참사 현장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릴레이 시위에 나섰다. 생업인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가을에도 순번을 짜며 정기적으로 시위를 이어갔다. 참사 당사자들과 함께 머물며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알리기 위한 활동들을 했다. 그때부터 언니는 여러 투쟁 현장에서 굳건히 목소리를 냈고 기꺼이 첫번째 돌을 던졌다. 그런 언니가 나를 불렀다.
인생에서 덮어놓고 믿어지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축복이다. 내게는 진은영 시인이 그런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하는 아름다운 일을 거들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작가선언6.9’가 엮은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기록한 책의 디자인1)을 맡아 미약하나마 손을 보탰다. 그것이 계기었을까. 곧 다른 한 사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두번째 사람
트위터에 들어가면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어언 7년 전이지만, 프로필 사진으로 반년에 한 번은 안부를 확인한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을 소환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지만, 그가 전화를 걸어 인사를 건네고 함께 ‘동인’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던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동인’이라니. 그 단어는 내게 즉각 ‘김동인’ ‘박목월’ ‘청록파’와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어, 나 시인 아닌데.’ 다행히 그가 제안한 동인에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 외에 영화감독과 뮤지션도 있었다. (범상치 않은 가사를 쓰는 뮤지션이었던 걸로 보아 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을 모으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1월 11일’이 태어났다.
두꺼운 옷을 입는 계절에 나무의자가 놓인 좁은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였던 기억이 난다. 자기소개를 하고, 각자 모임에서 바라는 바를 얘기했다. 시인은 시를 쓰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고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그러기만 하진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던가. 시인이 노래 부르고 가수가 디자인하고 디자이너가 시를 쓸 수도 있는 동인. 그런 재밌는 상상이 가능하다는 게 좋았다.
서로 알아가기 위해, 다음 모임부터는 각자 좋아하는 문장을 가지고 와서 낭독하기로 했다. 이름을 뭘로 할까 하다 ‘불켠낭독회’가 문법에 맞지만 ‘불킨낭독회’가 ‘얼굴을 붉힌’으로도 읽히니 좋겠다고 뜻을 모았다. 우리끼리 재미나게 놀아보자고 만든 낭독회인데, 이 소식을 들은 진은영 시인(심보선 시인과 함께 당시 작가선언6.9의 주축이었다)이 이왕이면 ‘두리반 농성장’에서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두리반’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강제철거 당할 위기에 처한 칼국수집이었다. 홍대역에 공항철도가 들어서면서 대형 건설사가 주변 땅을 매입해 영세 자영업자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고 있었고 이를 거부하던 두리반은 200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기습적으로 강제퇴거를 당했다. 주인 내외는 외벽과 내부 인테리어가 뜯겨나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불킨낭독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많은 문인들과 특히 인디밴드 음악인들이 전기마저 끊긴 그곳에 모여 연습하고 잠도 자며 지킨 덕분에 두리반은 간신히 철거 포크레인을 피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사람이 머무는 것만이 두리반을 구하는 길이라니 우리도 이왕이면 하는 마음으로 낭독회 장소를 두리반으로 정했다. 그러다 일반 시민들을 낭독회에 초대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1월11일 동인 외에도 여러 작가들에게 낭독을 부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불킨낭독회는 1회부터 시민과 함께하는 낭독회가 되었다. 해를 넘기도록 낭독회는 이어졌고, 많은 시민들이 두리반의 어둠 안에서 함께 시를 나눴다. 이듬해 여름, 두리반은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으며 긴긴 투쟁에서 승리했다.
1월 11일 동인이 시작한 불킨낭독회가 아니었어도 어떤 식으로든 두리반을 지킬 방법을 작가선언6.9는 마련했을 것이다. 당시 작가선언6.9에 참여했던 문인들은 시로, 쪽글로, 행사로 곳곳에서 투쟁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같지 않았을 것이다. 1월 11일이 부르지 않았다면, 선배 언니가 이리 와서 니 몫을 하라 호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 없었을 거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포스터를 만들고, 콜트콜택 투쟁에서 노래를 부르고, 추운 겨울 야외에서 낭독하는 시인들을 위해 시금치국을 끓이는, 타인의 삶과 내 삶을 엮는 연대의 몸짓을 바깥으로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를 먹이고 입혀 학교에 보내고, 출근하고 장 보고 씻기고 재우고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생활이 전부인 채 살아갔을 것이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정책 반대 시위에서 시민들과 ‘공동(公同)으로 한 자리에 있었지만, 여전히 ‘내 가족, 내 자식 문제’ 안에 있었다. 하지만 ‘두리반’에서, ‘작가선언6.9’과 ‘1월11일’과 함께한 현장에서 손에 손을 맞잡은 동안 나는 잠시 내 바깥으로 나와 다른 이와 연결된 공동체(共同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인들이 감각한 공동체와 내가 느낀 공동체가 꼭 같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저마다 외연도 다르고 감응의 이유도 달랐을지 모른다. 그래도 어느 쪽에서든 같은 분량만큼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을까.
세번째 사람
몇 번의 불킨낭독회 사회를 보며, 그날의 낭독자를 ‘시인 OOO님’ ‘소설가OOO님’이라 소개하지 않고 ‘성북구 돈암동에 사는 OOO씨’ ‘종로구 사직동에서 오신 OOO씨’라 소개했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연대’를 표방한 작가선언6.9의 태도에도 닿아 있고, 1월 11일 동인의 정체성을 살려 문학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이 작가와 독자 구분 없이 서로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가 그 자체로 우월한 지위를 갖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추어올리는 순간, 예술이 도구화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우러르고 따를 수 있는 시인을 희구한다. 이 시인은 나와 동등한가? 시인은 독자와 동등해도 될까? (이제 이런 시인의 시대는 가버린 걸까?)
여기, 앞서 걸으며 나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 말 걸고 붙잡아 일으켜 아름다운 쪽으로 데리고 가준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시인이고, 덕분에 나는 공동체의 맛을 아는 종족의 일원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내게 손 내밀어준, 이미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 시인이여.
이종혼합의 동인을 기획하고 실천한 (304낭독회를 통해 문학을 매개로 한 느슨한 공동체를 여전히 실천하고 있는) 박시하, 김현 두 시인, 함께 했던 이진희 시인, 조해진, 윤이형 소설가, 때때로 함께한 하재연, 최창근, 성기완, 심보선 시인 모두 그립습니다.
정은경
프리랜서 북디자이너입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문학과지성사 디자인팀에 근무한 덕분에 한국문학 가까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시인의 첫 시집을 좋아합니다. 특히 청탁받지 않고 쓴 시를 좋아합니다. 수년간 활동은 없으나 아직 해체 소식 없는 1월11일 동인입니다. 곳곳에서 활약하는 동인들이 자랑스럽습니다.
2021/09/28
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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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작가선언 이후 자발적인 연대를 이어온 문인들은 ‘작가선언 6.9’라는 이름으로 2009년 12월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를 출간했다. 본지에서는 작가들의 선언과 집단 이름 모두 ‘6.9 작가선언’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