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이면의 장면들
성연주
허기가 진 리리카는 급히 라면 하나를 끓여 먹는다. 아무 고명 없이 스프를 푼 물과 면, 있으나 마나 한 건계란 조각으로 채워진 식사는 포만 대신 식욕만 더 자극한다. 냉장고를 열면 무엇도 없다. 친구들은 끼니를 어떻게 해결할지 상상한다. 자신도 모르는 세계를 멋대로 상상하는 일은 죄고, 대가는 쓰다. 돌아온 리리카는 모든 리리카 중에서 가장 너덜하다. (청예, 「너무 많은 리리카의 연애」)
위 소설의 주인공 리리카는 친구들과 마음에도 없는 겉핥기식 대화를 하고 돌아와 너덜한 리리카가 됩니다. 그런 리리카가 급히 끓여 먹은 라면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건 왜일까요? 웹진 《비유》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며 제게 가장 크게 다가온 문학의 매력은, 문학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면(裏面)의 장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개의 얼굴에 나를 숨기고 헤매다 너덜한 채 돌아온 제게도 문학은 제 마음의 이면을 거울처럼 비춰주며 안식과 피난의 공간이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급하게 허기를 채운 라면과 함께 말이죠.
황보나의 소설 「드라이빙」에는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바다를 보고 싶지 않지만 함께 차를 타고 바다를 향한 두 사람은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돌아오고, 이들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이면에서 쌓은 추억은 서로에게 기다림의 조각으로 남겨집니다. 이지은의 비평 「( )혁명과 가족 로망스」는 응원봉 혁명과 같은 정치적 사건을 통과한 가족 서사를 분석하며,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침식되는 서사가 가진 이면의 장면에 주목합니다. 신소영의 동화 「나뭇잎 심장」을 읽으면서는 울새와 나뭇잎이 준 응원에 저까지 힘이 나는 기분이었는데요, 이기호의 소설 「젊은 유령은 어떻게 말하는가」에 나온 소설가와 젊은 유령의 기묘한 동행도 다른 방식의 공존이자 응원일 수 있겠습니다.
이번 80호 사회/커뮤니케이션과 연계/확장란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 개념과 현상 너머를 비추는 글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상윤의 「관리되는 몸, 웰니스라는 이름의 자기 착취」는 어느새 웰빙을 대체해버린 웰니스 개념이 명상, 러닝, 디톡스 등 수많은 자기 계발의 도구들을 통해 자기 착취를 재현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세련되고 번지르르한 웰니스라는 이름 아래 과연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듣고 있는 것일까요? 장은영의 「공허와 공유 사이, 우린 어디쯤에 있을까」는 ‘문학의 공공성’이라는 닳고 닳은, 하지만 아직도 모호한 개념 너머를 비춥니다. 텍스트힙 현상과 대중의 주체성을 공공성과 연결하는 이 글은 새로운 방식으로 공공성을 사유합니다. ‘쓰레기’를 주제로 한 ‘비평교환’의 백동엽과 전재우의 글도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 팽창 아래에서 우리가 함께 주목해야 할 AI 슬롭과 성수동의 팝업 쓰레기를 언급하며 균형 잡힌 관점을 제공합니다.
‘해상도 높은 장면’에서는 김영주와 위지영 작가가 텍스트 게임에 관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서로 평행하는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사라진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영주의 텍스트와 세 명의 다른 플레이어가 등장하는 위지영의 텍스트는 음원 파일을 통해 각자 다른 세계와 연결됩니다. 텍스트와 음원을 함께 들어보며 두 작가가 펼치는 게임의 아이디어를 따라가보세요.
이제 편집위원의 임기를 마치며, 저의 마지막 에디토리얼을 통해 웹진 《비유》의 뒷면에 대해서도 짧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처음 《비유》를 만나고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웹진의 뒷면이 많아, 항상 아쉽고 조바심이 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유》의 드러나지 않는 매력을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며 기획의 말을 덧붙이고 고친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여러분들은 그 이면을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하셨을까요? 물론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겠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비유》가 보여주는 ‘너머의 장면들’에 주목하셨길 소망합니다.
위 소설의 주인공 리리카는 친구들과 마음에도 없는 겉핥기식 대화를 하고 돌아와 너덜한 리리카가 됩니다. 그런 리리카가 급히 끓여 먹은 라면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건 왜일까요? 웹진 《비유》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며 제게 가장 크게 다가온 문학의 매력은, 문학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면(裏面)의 장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십 개의 얼굴에 나를 숨기고 헤매다 너덜한 채 돌아온 제게도 문학은 제 마음의 이면을 거울처럼 비춰주며 안식과 피난의 공간이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급하게 허기를 채운 라면과 함께 말이죠.
황보나의 소설 「드라이빙」에는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바다를 보고 싶지 않지만 함께 차를 타고 바다를 향한 두 사람은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돌아오고, 이들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이면에서 쌓은 추억은 서로에게 기다림의 조각으로 남겨집니다. 이지은의 비평 「( )혁명과 가족 로망스」는 응원봉 혁명과 같은 정치적 사건을 통과한 가족 서사를 분석하며,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침식되는 서사가 가진 이면의 장면에 주목합니다. 신소영의 동화 「나뭇잎 심장」을 읽으면서는 울새와 나뭇잎이 준 응원에 저까지 힘이 나는 기분이었는데요, 이기호의 소설 「젊은 유령은 어떻게 말하는가」에 나온 소설가와 젊은 유령의 기묘한 동행도 다른 방식의 공존이자 응원일 수 있겠습니다.
이번 80호 사회/커뮤니케이션과 연계/확장란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 개념과 현상 너머를 비추는 글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상윤의 「관리되는 몸, 웰니스라는 이름의 자기 착취」는 어느새 웰빙을 대체해버린 웰니스 개념이 명상, 러닝, 디톡스 등 수많은 자기 계발의 도구들을 통해 자기 착취를 재현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세련되고 번지르르한 웰니스라는 이름 아래 과연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듣고 있는 것일까요? 장은영의 「공허와 공유 사이, 우린 어디쯤에 있을까」는 ‘문학의 공공성’이라는 닳고 닳은, 하지만 아직도 모호한 개념 너머를 비춥니다. 텍스트힙 현상과 대중의 주체성을 공공성과 연결하는 이 글은 새로운 방식으로 공공성을 사유합니다. ‘쓰레기’를 주제로 한 ‘비평교환’의 백동엽과 전재우의 글도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 팽창 아래에서 우리가 함께 주목해야 할 AI 슬롭과 성수동의 팝업 쓰레기를 언급하며 균형 잡힌 관점을 제공합니다.
‘해상도 높은 장면’에서는 김영주와 위지영 작가가 텍스트 게임에 관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서로 평행하는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사라진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영주의 텍스트와 세 명의 다른 플레이어가 등장하는 위지영의 텍스트는 음원 파일을 통해 각자 다른 세계와 연결됩니다. 텍스트와 음원을 함께 들어보며 두 작가가 펼치는 게임의 아이디어를 따라가보세요.
이제 편집위원의 임기를 마치며, 저의 마지막 에디토리얼을 통해 웹진 《비유》의 뒷면에 대해서도 짧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처음 《비유》를 만나고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웹진의 뒷면이 많아, 항상 아쉽고 조바심이 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유》의 드러나지 않는 매력을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며 기획의 말을 덧붙이고 고친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여러분들은 그 이면을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하셨을까요? 물론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겠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비유》가 보여주는 ‘너머의 장면들’에 주목하셨길 소망합니다.